[이영싫] 빅 피터팬

6. 빅터와 레몬파운드 (1)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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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가 넘어간 한겨울.

 

“나도 킥보드 타고 싶어어-!”

“빅터, 가져도 네가 더 빠를 거야….”

 

…빅터가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는, 평소의 텐션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마일로의 위로를 받은 뒤 빠르게 회복한 빅터는 평소대로 생기발랄하게 나이프 아지트를 휘젓고 다녔으며, 심지어는 TV를 보다가 불어펜과 킥보드 광고를 보고는 순식간에 꽂혀버린 것이다.

 

“그럼 불어펜 사줘!”

“야 8살, 너 그림 못 그리잖아.”

“…세월, 너무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홈쇼핑 광고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인 명의로 입금을 한 뒤 본인 주소로 배송을 받는 종류의 그것 말이다. 메두사와 백모래에게 본인 명의란 게 없는 건 둘째 치고, 남의 돈으로 사는 처지였다. 게다가 본인의 주소 역시 알려줄 수 없는 악의 조직이 살 수 있는 홈쇼핑 물품이란, 없었던 것이다!

 

“뭐가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잠 좀 자게 조용히 하십쇼, 빅터.”

“지금 한낮이거든, 가리!”

“전 지금이 잘 시간입니다!”

 

빅터는 빅터 나름대로 속상했다. 다른 건 잘 사주면서 왜 저건 안 되냔 말이야! 별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데! 사실 킥보드는 포기했다. 오르카의 ‘네가 더 빨라’라는 말에 반쯤 납득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어펜은 달랐다. 빅터는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해도 그리고 싶었다.

 

“그냥 침 튀기는 거 아니야? 바보 빅터, 그거 더러워.”

“…!”

 

콰강,

더럽다는 소리에 충격받은 빅터는 떼쓰던 자세 그대로 굳고 말았다. 바보 같다는 말은 레이디에게서 많이 들어보긴 했어도 더럽단 소리는 처음이었다. 빅터는 반쯤 억울해져서 번쩍 얼굴을 들고 레이디에게 달려들었다.

 

“꺅, 뭐야 빅터!”

“나 안 더러워!”

 

팔랑팔랑,

빅터가 레이디를 머리 위로 치켜들자 치맛자락이 사방으로 날렸다. 레이디는 이미 잔뜩 우습다는 얼굴로 애써 입을 틀어막았지만 빅터는 아예 모르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잔뜩 겁을 주겠다며 레이디를 마구 위아래로 흔든 것이다. 결국 레이디는 꺄르륵 소리를 내며 웃고야 말았다.

 

겁주려고 한 건데, 겁이 안나…?

결국, 빅터는 다시 레이디를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 엎어졌다. 커다란 몸이 거실에 엎어져 있자 그 공간의 거의 반쯤은 찬 듯한 느낌에, 레이디는 그것을 콕콕 찔러보았다.

 

“시체인가?”

“안 죽었어!”

 

결국 빅터와 레이디 간의, 아니, 빅터만의 2차전이 시작될 때쯤이었다.

 

“빅터는 또 왜? 무슨 일이야?”

“아, 보스.”

“꼬맹이가 불어펜 갖고 싶대요.”

“불어펜? 그게 뭔지 몰라도… 사주면 안 돼?”

“저거 홈쇼핑이라구요. 주소도 못 부르는데 어떻게 사요?”

“아.”

 

백모래가 그제야 제 방에서, 아니 고양이 방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워낙에 마이페이스인 백모래라 굳이 바깥 사정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데, 빅터가 소란을 어지간히 피운 모양이었다. 방에서 설렁설렁 걸어 나온 백모래는 여전히 엎어져서 도리도리 고개를 돌리고 있는 빅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줄게.”

“! 진짜?”

“그래. 가게 가면 팔겠지 뭐. 시내 내려갈까?”

“그래놓고… 또 쫓기게요, 보스…?”

“그럴지도 모르니까 록산느도 같이 가면 되겠다. 그치?”

“…”

 

와아!

빅터는 순식간에 회복해서 거실을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게 누군가의 산장이 아니라 아파트였다면 층간소음으로 민원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빅터는 그런 거 몰랐다. 마냥 애처럼 굴며 미래의 자신에게 찾아올 불어펜으로 앞으로 그릴 것을 상상했다.

 

칼을 가지고 종이를 자르는 거야. 오르카 형아 모습이면 되겠다. 메두사 누나도 할까? 모양을 본따 자른 종이를 위에 놓고 잉크를 뿌려 색칠하면 나도 예쁘게 그릴 수 있어! 난 칼은 잘 쓰니까! …특별히 레이디 누나도 그려주지 뭐. 내 어릴 때 그림이랑 바꾸자고 해봐야지….

 

“뭐, 이런 말 하려고 나온 건 아니고.”

“아니었어?”

“이제 슬슬 연구소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

 

메두사가 알겠다는 듯이 침음을 흘렸다. 가리는 올 게 왔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정보는 다 가리가 캐왔을 테니 타이밍도 대강 짐작했겠지. 빅터는 오랫동안 잠잠했던 나이프가 다시 소란스러워질(소란은 이미 빅터가 다 피웠지만) 것을 예상하며 오르카를 무릎 위에 앉혔다.

 

“이제 곧 설날 연휴라 연구원들은 다 집에 가거든. 당직은 남아있겠지만… 마주치면 다 죽이면 되겠지?”

 

멈칫, 빅터는 오르카의 볼을 주물럭거리던 손을 멈췄다. 마일로를 떠올린 것이다.

 

‘하아, 이번 주 당직이야…. 나도 휴가….’

 

빅터는 당직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집에 가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연구소에 남아 있는 걸까? 그렇다면, 연구소에 남아 있다가 마일로 형이 죽으면-

 

그건 안 되는데!

 

“록산느랑 라드는 아지트를 지켜. 혹시나 쫓아오면 아지트를 버리고 도망쳐야 할 수도 있으니까 준비하고. 레이디도 도와줘, 세월은 언제나처럼 폭탄 준비. 연구소를 터트릴 거니까. 알았지?”

“네, 보스.”

“예, 알겠습니다!”

“가리랑 메두사는 저번처럼 정보를 캐내고. 이왕이면 말소하는 게 좋아. 의미 없겠지만.”

“오케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스.”

 

빅터와 오르카는? 긴장감이 흘렀다. 이렇게 긴장해서 지시를 기다리기는 또 처음이라 낯설었다. 혹시나 이번에도 미끼라면 제일 먼저 들어가 마일로를 대피시키면 될 일이고, 백모래의 보호라면… 한 번 부탁해보자.

 

아, 록산느!

 

빅터는 록산느의 새를 떠올렸다. 인상착의를 알려주고 편지를 전달할 수 있게 록산느가 도와준다면 마일로에게 당장 대피하라는 부탁을 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빅터는 엉덩이가 근질근질해서, 빨리 백모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빅터는- 시간을 끌고. 오르카는 나랑 가자.”

 

거기 볼 게 있거든.

 

움찔, 오르카가 몸을 떨었다. 그럴만하다고 빅터는 생각했다. 오르카는 여태 백모래와 단둘이 움직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드야 도주할 때 많이 그랬고, 메두사는 거의 파트너급으로 함께 다녔다. 심지어 빅터조차도 백모래와 둘이 함께 싸울 때가 많았다….

 

괜찮을 거야, 형.

 

빅터는 오르카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최대한 긴장을 풀라는 의미였다.

 

“어쨌든 이제 이사 가는 거니까, 다들 짐 싸서 차에 싣고~ 이따 저녁에 가자!”

 

해산!

 

백모래의 선언에, 모두가 제 방으로 흩어졌다. 빅터와 오르카도 챙길 게 있기 때문에 재빠르게 방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추가된 스케치북이며 일기장, 그리고 숙제 공책도. 아, 장난감을 잊을 뻔했다. -빅터는 지난번 이사 때와 비슷하게 짐을 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생각보다 거대해진 상자를 마주하며 머쓱하게 웃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짐이 많은 것은 레이디였다. …주로 예쁜 옷과 예쁜 옷과 로맨스 소설이었지만. 그다음은 온갖 장비를 챙긴 가리, 그다음은 어쩐지 운동기구를 챙긴 라드…. 결국 차는 트럭으로 바꾸기로 했다. 모양이야 환상을 덧씌우면 되는 거니 말이다.

 

하지만 환상과 실제는 다르니, 뒤에서 작은 차인 줄 알고 치면 어떡하냐는 의문을 제시한 빅터는-

 

“우리가 작은 찬줄 알고 뒤에서 치면 어떡해?”

“하하! 쓸데없는 걸 걱정하는구나, 빅터. 대형 버스나 리무진, 고급 외제차라면 다 해결된다 이거야.”

“…!”

 

라는 대화를 하며, 쓸데없는 걱정을 버리기로 했다. 사실 지금 걱정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마일로! 나이프가 당장 연구소를 덮치기 전에 어서 나오게 해야 했다.

 

“-록산느!”

“빅터?”

“나 새 한 번만!”

“?”

 

록산느는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궁금하니 내용을 같이 보겠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굳이 확인해야 할 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연구소에서 나와! 당 장 !]

 

“머리를 이렇게 7대3으로 했고, 회색이고, 엄청 피곤해 보이고, 눈이 반쯤 감겨 있는 연구원! 아마 지금 연구소에 있을 거야!”

“이 사람이 그 마일로인가요?”

“응!”

“…그래, 알았어요.”

 

그리고 록산느는 작은 새를 불러와 작게 설명을 해주었다. 빅터가 말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한 새는 이내 포로로 날아갔고, 빅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 빅터가 이런 일하는 건 알아요?”

“움… 모를걸? 아니다, 알려나?”

“…그런데 믿을까요?”

“믿을 거야! 마일로 형은 날 믿어!”

 

록산느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지만, 빅터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동안 쌓아왔던 신뢰를 철썩 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래도, 장난이라고 알아들을 것 같은데.”

 

그래서, 록산느의 지적은 빅터에게 와닿지 못했다.

 

 


 

이른 저녁, 나이프는 연구소에 잠입했다.

 

일은 쉬웠다. 대부분의 연구원이 휴가로 연구소를 나간 바람에 경비도 그만큼 줄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리가 미리 경비 구역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걸 피하기는 더더욱 쉬웠다. 미리 나눠준 무전기가 각자의 상황을 전달했다. 메두사와 가리는 연구소장실, 백모래와 오르카는 정원, 그리고 빅터는…

 

정문.

 

[빅터, 시작.]

“응!”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연구소의 정문이 짜그라들었다.

 

쾅, 쾅!

몇 번을 더 내려친 뒤 잡아당기자 철문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완전히 끊어졌고, 순식간에 경비원들이 달려 나왔다. 각종 무장을 하고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빅터에게 완전히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어… 나이프?”

“!”

 

저들끼리 속닥이는 소리가 들리고, 한 명이 연구소 안으로 달려 나갔다. 빅터는 그것을 가만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훌쩍,

저를 향해 몰려들어 포위망을 짰던 사람들의 머리 위를 그대로 날아, 달려가던 경비원에게 드롭킥을 먹인 빅터는 마지막에 힘을 빼며 그가 무사히 기절한 것을 확인했다. 그에 얼이 빠져있던 경비원들이, 뒤늦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타당, 탕, 탕!

좌로 넘고, 우로 넘고, 위로 뛰어오르면 다시 총알을 피하기 위해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야 한다. 결국 손으로 땅을 짚고 옆 돌기로 바닥으로 돌아오자, 모든 게 귀찮아진 빅터는 경비원들에게 가까이 달려가 총을 붙잡았다. 가까이 붙는 바람에 총을 쏘기에도 힘들어진 그들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총이 꺾이고 나서야 칼을 쥐었다.

칼과 총. 이젠 장거리도 근거리도 위험한 상황. 하지만 그것은 상대 쪽도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아군을 쏠까 주춤거리는 것에, 빅터는 더없이 익숙한 동작으로 옆구리로 찔러 들어오는 칼을 피하고 그대로 팔을 잡아 꺾었다. 뿌득, 고통스러운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꺾인 팔 덕분에 그 경비원은 칼을 떨궜고, 빅터는 그대로 그를 엎어 치고 마찬가지로 기절시켰다.

 

물론 그로 끝인 것은 아니었다. 한 발에 총을 꺾고, 다시 칼을 피해 백 덤블링을 하면 이번엔 특기자가 등장한다.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손짓을 하는 그를 보고 눈치 빠르게 특기임을 직감한 빅터는 다급하게 뒤로 점프하며 몸을 돌렸지만-

 

“-윽!”

 

공중에 단단하게 묶여서, 빅터는 한 발을 허용하고 말았다. 옆구리에 박힌 총상이 홧홧하게 아팠으나…

 

그조차 빅터에겐 가벼웠다.

 

“젠장, 소용없어!”

“컥, 더 못 버팁니다…!”

 

[정문 비워줘, 빅터. 누가 이미 뒤져놨는지 생각보다 빠르게 됐네. 어떤 쥐새끼가 정보를 가져갔는지 또 찾아봐야겠지만….]

“응, 메두사 누나….”

[뭐야, 다쳤어?! 당장 힐러 불러야겠다. 가리!]

[준비해두겠습니다.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세요, 빅터.]

 

하지만 그런 빅터의 엄살에, 메두사는 가볍게 휘둘렸다. 그것만으로 빅터의 발걸음은 좀 더 가벼워졌다.

빅터는 익숙지 않은 고통에 발을 삐끗했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연구소 내부를 향해 달렸다. 나이프 멤버가 있는지 없는지도 떠올리지 않은 채, 본능적인 감각으로 사람이 적은 길을 통해 달려 나갔으나 사상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빅, 터…?”

“…마일로 형?”

“저기다! …어이 거기, 도망쳐!”

 

뜬금없이 복도에서 마주친 그 연구원은, 언제나와 같이 피곤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떠봤자 반만 떠진 눈이 여전히 졸려 보일 정도로. 하지만 빅터는 조금, 조금 많이 슬퍼졌다. 야밤의 침입자와 약해빠진 시민으로 대면하게 된 상황도,

 

‘도망가!’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도.

여기서 아는 척을 해봐야 마일로도 쫓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빅터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마일로가 멀어져갔다. 그 뒤로 적색의 인영이 잠시 머물다 모습을 감췄다. 빅터는 그 뒷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때였다.

 

[빅터, 빅터 당장 나오십쇼!]

“가리?”

[젠장, 그 간부가 여기 와있습니다! 방문 일정에 대한 정보는 없었는데….]

“!”

 

빅터는 다급한 목소리로 들러오는 충격적인 정보에 다시 발을 삐끗, 하다가 칼을 한 번 허용할 뻔했다.

 

간부면, 강하겠지? 누가 다치면 어떡하지? 차라리 내가 간부에게 가서 시간을 끄는 게 좋지 않을, 아냐, 이 많은 사람들한테 쫓기면서 가는 건 오히려 위험할 것 같은데… 어쩌지, 어쩌지. 보스랑 형은 어떤지 알고 싶은데.

불행히도 빅터는 백모래와 오르카에게선 무전을 받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가리와 메두사 쪽으로 말을 거는 것은 가능했지만, 딱 그만큼만 배웠기 때문이다. 그냥 대충 일 방향으로 지시를 전달받는 법만 흘려들은 게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빅터는 결국,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충 아무거나 눌렀다.

 

“형, 형아, 형… 보스, 괜찮아?”

[…]

“나, 내가 갈까? 나올 수 있겠어? 확인할 건 했어?”

[호오, 와 보겠다고?]

 

오싹,

소름이 끼치는 저음이 빅터를 덮쳐왔다. 헉, 헉 거리며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만 말을 전달하는 빅터와는 달리 느른하고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본능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빅터는 손을 벌벌 떨기 시작하다, 결국 빈 연구실 하나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대책 없이 책장을 쓰러뜨려 문을 막고, 책상을 세로로 세워 엎어놓고…. 멋진 바리케이드였다.

 

“누, 누구야?”

[글쎄, 뭐라고 대답하길 원하나? 너희들이 말하던 ‘간부’? 아니면 너희같은 잡빌런들을 잡을 히어로 ‘캐리엇’?]

 

쿵,

빅터는 TV에서 보았던 진한 적발의 여성 히어로를 떠올렸다. 제 머리카락처럼 붉은 정장과 넥타이를 입고 있던 그 여자는 겉으로 보기에도 위협적인 근육을 가졌고, 그 특기조차 ‘괴력’이라고 했었다. 실제로 큰 부상을 입은 채, 쓰러지는 건물을 받아내는 모습은 압도적이기까지 했더랬다.

 

“혀, 형을 어떻게 했어?”

 

그래서, 빅터는 제일 먼저 오르카를 걱정했다. 백모래는 몰라도 오르카는 그런 캐리엇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작고 여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스웠는지, 무전기 너머로 웃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태어난 지 고작 몇 년이라지만… 진심으로 형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 하하하!]

 

쾅, 투다다다-

그런 목소리를 끊고 문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빅터는 주변에 더 세울 것이 없는지를 샅샅이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랍에 간이침대까지 세워놓고 안심이 되지 않아 그 안쪽의 다른 방까지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비어 있는 방 안에는 각종 박스들만 세워져 있을 뿐이라, 텁텁한 냄새가 났다.

 

[그래, 너를 주면 살려주는 걸 생각해보도록 할까.]

[넌 꽤 쓸모 있는 돈줄이거든.]

[지금 ‘널’ 만들고 있는데, 잘 안되니 성공한 샘플이 필요하던 참이었어.]

 

훅, 하고 피어오르는 먼지에 눈이 건조해지는 바람에, 빅터는 손을 휘저으며 반쯤 캐리엇의 말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본질만은 속속들이 잘 전달되고 있었다.

 

[-그마저도 죽여 버리고. 괘씸한 것들.]

“헉,”

 

그것은 괴리감일까, 공포인 걸까, 혐오감일까.

빅터는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백모래와 자신이 우려했던, 인체실험이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백모래와 오르카가 그걸 보러 갔다가 잡혔다는 사실 역시….

 

‘역시 개체값의 문제인가….’

 

그 문장이 떠오른 것은 머리에 새겨진 본능의 기억일까. 빅터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잘 안된다’는 말속에, 그것은 ‘실패작’이라고 말하고 있는 목소리가 이 세상 무엇보다 끔찍하게만 들렸다. 또 다른 저를 만들고자 실행한 실험이 잔인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한 편으로 느껴지는 것은,

 

정말 완벽한 게 나오면, 난 ‘실패작’인 걸까? -그것은, 어쩌면 제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

 

하지만… 빅터는 결국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들은 얼마나 아팠을까? 빅터도 그때 꽤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고 오르카에게서 전해 들었다. 얼마나 오랜 기간을 실험실에서 버텼을까? 이제는 흐릿한 연구소에서의 기억도 빅터에겐 상처로 남아 있었다. 실패했다면 죽었을까? 빅터는 과거, 제 옆에 쓰러지던 실험의 ‘실패작’들을 본능적으로 떠올렸다….

 

탕!

“진입!”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놔둘 그들이 아니었다. 빅터는 마침내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상황에 자신을 더 혼란스럽게 놔둘 무전기를 더 이상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아, 무작정 아무렇게나 버튼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껐다. 결국 무전기는….

 

[네가 오지 않으면 이들을 샘플로 쓸 수밖에. 하루 정돈 기다려 주- 지지직, 직]

 

-라는 말을 남기고, 곧 꺼지고야 만 것이다. 빅터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감각을 느끼며, 창문을 깨고 밖으로 탈출했다. 2층 높이였으나 빅터에게 가릴 바는 아니었다. 재빠르게 풀숲으로 몸을 숨긴 빅터는 바로 산을 타고 올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집으로, 집으로 가야 했다.

 

집으로 가서, 누구라도 좋으니 이 모든 것을 알려야-

 

“헉, 허억,”

 

연구소를 빠져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더욱 어렵지 않았다. 마일로를 보러 올 때마다 걸어왔던 바로 그 길을 되짚어가는 것뿐인데 무어가 어렵겠는가?

 

“당장 수색해!”

“넵!”

“?!”

 

…하지만 아지트에는 이미 침입자들이 가득해 있었다. 빅터는 그대로 발을 돌려 근처의 나뭇가지 위로 몸을 숨겼다.

연구소에서 봤던 이들과 다르게 서로 자유분방한 복장. ‘히어로’라 이르는 단어들. 그들은 포트였다. 록산느와 라드는 이미 잡혀 있는 상태였는데, 그게 농담으로라도 호의적이라 말할 수 없었다. 빅터는 다시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며 제발 저를 봐주라는 듯이 록산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면 록산느는 그런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빅터, 도망가.’

 

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빅터는 눈물을 머금고 발을 돌렸다. 집과는 멀리, 연구소와는 반대로, 저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빅터는 버려진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들이 비록 빌런이래도, 빅터에게는 이미 뗄 수 없는 가족들이다. 그들이 없으면… 빅터는 그냥 무력한 8살짜리 어린애였다.

 

그래서 빅터는 생각을 거듭했다. 평소엔 어른들에게 생각을 맡겼으나, 지금은 맡길 어른이 없으니 혼자서 생각해야 했다. 오르카와 백모래가 잡혔다. 무전기로는 연락할 수 없다. 도움을 청할 어른은 없다. 친구도… 아,

 

형이 정말 내 친구라 할 수 있다면.

 

빅터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집에 가본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긴 하지만 정확하지 않아 철저히 후각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처럼 그가 카페인 음료 중독이라는 사실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빅터는 냄새를 잡아채는 데에 그렇게 집중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어려웠다는 소리다.

어느새 길은 주택가에 접어들었다. 단독주택도 있었고, 다세대 주택도 있었고, 빌라도 있는 그 가운데서 마침내 원룸촌에 진입하자,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라 길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마침 눈에 띄지 않게 검은색의 후드티를 입은 참이라 피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남는 것은 핏자국뿐인데… 산에서 막 내려가기 직전에 후드티 자락을 찢어 지혈을 마친 덕에 흔적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겁이 났다. 그 앞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피 흘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처음이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빅터를 겁낼까 봐, 그래서 자신을 외면할까 봐 가슴이 조여왔다. 그것에 한없이 소심해져서, 빅터가 도착해놓고 막상 돌아서려던 찰나,

 

철컥,

“왜 안 들어와?”

“마일로 형?”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창백한 얼굴이 그 모습을 보였다. 빅터는 어어, 거리는 사이에 마일로에게 이끌려 좁은 원룸에 들어서고 말았다. 다시 철컥, 하고 문이 닫혔을 때, 트랩에 잡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면 과장일까.

 

“밖에서 딱 너 같은 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그런데 딱 내 집 앞에서 멈춰서 움직이질 않지…. 뭘 망설이고 있었던 거야? 이리와 봐.”

 

하지만, 제법 반가운 트랩이었다.

 


 

평범한 아침의 해가 밝았다. 일개 월급쟁이이자 오늘의 당직 근무인 마일로는 그것에 무력하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연휴로 휴가를 받아 가는 날에, 고아인지라 찾아갈 연고가 없는 마일로는 홀로 연구실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홀로 연구를 진행하는 건 포기했고, 경과만 잘 살피면 된다지만 역시 이왕이면 직장에 가지 않고도 돈을 버는 걸 꿈꾸는 게 직장인 아닌가. 마일로가 정확히 그랬다. 마일로는 습관처럼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최근 혼혈 혐오 단체 ‘레이스’의 수장이 실제 혼혈인 것으로 밝혀졌었으나, 약물을 이용한 것임이 드러나….]

[혼혈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악질적인 수법으로 밝혀졌습니다.]

 

“뭐야, 내 발명품이랑 비슷하잖아?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레드오션이었나.”

 

[범죄 단체들의 행각이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참, 살기 힘든 세상이야.”

 

옷은 어차피 가운을 입을 테니 캐주얼한 복장. 가방에는 무거운 개인용 노트북이 들어있다. 마일로는 그대로 발을 옮겼다. 뉴스는 그대로 숨을 죽였다.

 

“하아, 일하기 싫다….”

 

그의 하루는 간단하다. 연구하고, 연구하고, 점심 먹고, 연구하고… 빅터가 올 시간이 되면 나가서 기다리고. 이후엔 또 저녁 늦게까지 연구하다 퇴근한다. 뭐 특별한 다른 일정이라도 생긴다면 더 살인적이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그래서 그 중 빅터와 만나는 시간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식사 시간을 제외한 유일한 휴식 시간이기도 하고, 순수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건 어쩌면 힐링이 되는 법이니까. 빅터가 유난히 착한 아이이기도 하고.

 

아, 빅터가 사실은 아이라는 말을 믿느냐고?

 

반쯤은 믿고, 반쯤은 믿지 않았다. 요즘 시대에 인체실험이 웬 말인가. 그리고 그런 곳이 사라졌다면 뉴스나 인터넷에 퍼지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빅터의 말이 헛소리라거나… 국가 단위의 프로젝트라 조용히 묻혔던 거겠지. 뭐, 다 상상이었다.

결국 어느 쪽이든… 지금의 빅터는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은, 마일로에게 순수하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편안한 상대이기 때문에 마일로로서는 적당히 묻어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냥 판단을 포기했다는 소리다. 언젠가 진실을 알 때가 되면 그때 받아먹기로 하며.

 

하지만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마일로니? 나야, 파메로. 네 선배. 다른 과지만?]

‘어, 어, 그, 선배… 무슨 일로…?’

[네가 이쪽 과 애들한테 뭘 좀 물어보면서 자꾸 쿡쿡 찔렀다며? 나한테도 연락이 오더라.]

 

빅터와 실험에 대해 마일로는, 같은 학교를 나온 데다 발이 넓은 다른 과 친구를 시작으로 은근하게 질문을 던졌더랬다. 주된 요지는 ‘C국에서 인체 실험이 있었다더라’라는 헛소문 아닌 헛소문이었는데, 호기심이 들린 동기들이 그게 진실인지를 파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충격적인 정보를 미끼로 한 전형적인 여론전이었다. 하필 그 친구는 꽤 있는 집 자식이었고, 그런 정보에 ‘정말로’ 접근할 수 있는 동기들이 진실에 접근했다.

 

‘그으, 그러려는 건 아니었는데요, 죄송합니다.’

[뭐, 아냐. 은근슬쩍 헛바람으로 사람 떠볼 줄도 아는 깜찍한 후배한테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 중엔 마일로와 마찬가지로 국가 단위 프로젝트라 묻힌 게 아니냐- 라고 추론한 사람이 있었고,

 

[뭐, 알면 너도 위험한 사실이긴 하다만. 그러니까 간단하게 답해주마.]

‘네? 위험한 거면 안 알려 주셔도-’

[사실이다.]

 

그것은 잭팟.

 

‘?’

[그러니까 더 파보지 않는 게 좋아. 끊는다?]

‘네? 선배, 잠깐만요, 네?!’

뚜우-

 

결국 ‘정말로’ 윗선에 있는 선배에게서 연락을 받은 마일로는 그 하루, 거하게 정신을 놓고 말았다. 심지어 우체통에는 웬 USB가 들어있더라. ‘그래도 호기심이 동한다면 나도 알려주렴^^’ 이라는 쪽지와 함께.

하필 충격을 줘도 이런 주제로 충격을 줘야 하는 일이었을까. 마일로는 그날 결국 아아악, 소리를 내며 머리를 헝클이고 나서야 출근할 수 있었다.

 

“하….”

 

삑, 성인입니다-

한 번 떠올리고 나니 또 한 번 충격이 밀려온다. 그것이 고작 일주일 전의 일이고, 마일로의 주머니에는 아직도 정체 모를 USB가 들어 있었다.

제 SF적인 상상이 들어맞았다는 것과, 인류애의 상실과, 빅터의 말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아니 근데 그게 사실이라고? 싶은 충격에 더해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의 열쇠까지. 마일로는 차라리 현실을 잊고만 싶었다. 그야,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점점 더 감당할 수 없게 죄가 쌓여 가. 이젠 모두가, 결국, 나도… 변해가는 것 같아서 무서워.’

 

빅터가 정말 뭣도 모르고 범죄조직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크나큰 문제점이 있지 않은가.

하기야, 몸도 큼직하고 맷집도 좋아 보이는 게 싸움까지 잘하면 그만큼 써먹기 좋은 도구가 어디 있나 싶다. 게다가 순수하고 생각이 어리기까지 하니 더욱 간단하겠지. 원하는 것도 맛있는 거나 킥보드 따위의 사소한… 어차피 본인이 더 빠르면서 말이다.

 

사실, 그래서 마일로의 최근 검색어는 다음과 같았다.

 

[신원 미상자]

[신분증명]

[청소년 보호]

 

“하아, 모르겠다….”

 

내가 뭐라고 걜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건지.

마일로는 막간을 활용해 다시 정보를 찾아보려다 결국 연구실 책상에 엎드려 눕고야 말았다. 천애 고아에 일반인인 마일로가 알아볼 수 있는 정보라고 해봐야 2차 연성에서나 나오는 창작의 설정, 그리고 장난 같은 정보, 정부의 겉핥기식 지원뿐이었다.

 

“신원 미상이고, 청소년도 아니고, 폭력 전적도 있는데…”

 

게다가 전직 실험체를, 누가 도와주냐고오오….

슝, 하고 어떤 히어로가 나타나서 다 해결해주지 않는 이상 빅터가 자연스럽게 평범한 사회로 녹아들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차라리 포기라도 하고 싶은데,

 

“…”

 

그럴 때마다 빅터의 억울하다는 듯, 서러운 얼굴이 떠올라서….

 

결국 마일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짹짹,

“응?”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짹짹짹,

“어? 으, 으아악!”

 

마일로는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저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새를 보고 거의 펄쩍 뛰다시피 하며 놀랐다. 야생의 것이 이렇게 가까이 와 앉은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에 깜짝 놀라다가도 손을 덜덜 떨며 사진을 찍고, 머리를 만져보고, 결국 그 새가 짜증스레 손을 쪼을 때에야 발에 묶인 편지를 발견했다.

 

“이거 왠지 익숙한데….”

 

아, 생각났다.

빅터와 오르카가 반겼던 바로 그 새였다. 그들 사이에서 전령으로 쓰는 것 같다고 느꼈던 그…. 마일로는 핸드폰이 없어 무전기며 새로 소통을 주고받는 그들을 보며 참 불편하게 산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저도 그걸 받게 될 줄이야. 빅터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펼친 편지.

 

[연구소에서 나와! 당 장 !]

 

커다란 a4 용지에, 그 두 줄만이 정중앙에 고이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 애 같은 글씨체가 종이를 찢어먹을 듯 깊게 새겨져 있었다. 마일로는 그것이 웃기다고 생각하며, 빅터의 의도를 고민했다.

 

연구소에서 나오라니, 퇴직하라는 말일까? 웃기는 소리다. 당장의 월급도 모자라서 적금을 들면 겨우 먹고사는데, 연구소에서 나와봤자 다른 어떤 일을 하겠는가? 재취직을 할 때까지는 적금을 깬 돈으로 컵라면이나 겨우 먹고 살아야 할 처지였다.

그럼 지금 퇴근하라는 걸까? 그것도 좀 그렇다. 지금 당직 근무 연구원들만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혼자 빠지려고 병가를 내기엔 조금… 눈치가 보인다. 게다가 오늘은 드디어 사실을 알아보기로 한 결전의 날이었다.

 

어쨌든, 이런 걸 왜 보냈느냔 말이다. 누가 오늘 연구소를 습격이라도 하는 걸까? 차라리 연구소에 어떤 범죄 조직이 잠입해서 다 깨부수고 토낀다면 그 뒤의 상황이 참 재밌기도 하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마일로는 편지를 접었다. 결정은 내렸다.

 

난 못 나가, 빅터. 아니 그러니까 설명이라도 해주라고~!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지.

 

[-대피 바랍니다. 다시 안내 말씀 드립니다. 침입자가 발생했으니 연구소 내에 남아계시는 연구원분들은 빠르게 작업물에 잠금을 걸고 대피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안내합니다-]

 

“?!”

 

오늘치까지 해서 일주일간의 작업 보고서를 제출하러 연구소장실에 갔을 때였다. 사실 연구소장은 이미 휴가를 냈고, 그 대리가 휴가 동안 연구소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일로가 보고를 하러 연구소장실에 가 있을 때쯤에는 그가 있어야 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침입자 경보가 울렸고, 이쯤에서 마일로는 다시 한번 그에게 마가 꼈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요번에 국가 단위의 인체 실험의 존재를 확인받은 것도 그렇고, 빅터의 편지를 받고 누가 침입하기라도 하나 생각했던 것도 그렇고. 생각대로 다 된다는 게 이렇게 실현될 일인가?

 

…어쨌든, 그래서 연구소장 대리는 이미 튀어 있었다. 아직 채 꺼지지 않은 컴퓨터는 꽤 따뜻했다.

 

“…”

 

마일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 감이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알리고 있었다. 그 선배가 주었던 USB가 저에게 도움을 줄 거라는 사실 역시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다들 혼란해서 수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겠지. 게다가 건드린 흔적이 남는 것 정도야 침입자의 행적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쳐도 꽤나 경솔한 판단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일로는 진실을 알게 된 충격과, 현 상황에 대한 초조함에 그렇게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마일로는 눈을 질끈 감고 연구소장실의 컴퓨터에 두 개의 USB를 꽂았다.

 

“…찾았다!”

 

그렇게 관련 파일을 찾고, 내용을 확인할 새도 없이 방을 뛰쳐나왔을 때, 천장에서 우지끈하는 소리가 낫던 것 같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침입자를 마주치기 전에 뛰어나와야 했다. 당장 연구실 컴퓨터도 아직 잠금을 걸지 못했고… 한시가 급했다.

 

“빅, 터…?”

“…마일로 형?”

 

네가 거기서 왜 나와.

마일로의 머리가 느리게 돌아갔다. 그래, 빅터가 보낸 편지에서 나온 대로 누가 연구소에 침입했다. 아마 빅터가 알 정도라면 범인은 꽤 가까운 사람이었겠지. 그런데 범인이 그 본인일 줄은 누가 알았겠어! 마일로가 차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기다! …어이 거기, 도망쳐!”

 

멍하니 서로를 돌아보던 두 사람은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마일로는 없는 체력에 헉헉거리며 달려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빅터는 더 이상 자신을 따라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무쌍을 찍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현실 할리우드 액션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그 뒤는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잔뜩 쫄아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빅터 쪽에 시선이 쏠렸는지 복도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평소처럼 버스에 오른 마일로는 아직도 불규칙하게 뛰고 있는 제 심장을 느끼며 노트북을 꽉 안았다. 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치이는 몸에 혹시나 USB가 상할까, 조심스럽게 손에 쥐기도 했다.

 

“헉, 허억….”

 

그렇게 거의 날아들 듯이 들어온 원룸 안. 마일로는 오늘 하루가 한 100년쯤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집에 무사히 돌아온 것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아직도 오늘의 남은 할 일이 있었다.

 

-디롱, 환영합니다.

 

노트북을 열고, 로그인하고, 상할까 걱정하는 것도 멈춘 채 거칠게 USB를 쑤셔 박는다. 그렇게 확인한 진실은-

 

잔인했다.

 

“이런,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수없이 많은 혼혈과 인간들로 이루어진 실험. 대부분의 목표는 ‘영원히 나라에 충성할 젊고 강한 군인’을 만들기 위해.

 

연구소장과 부소장의 운영으로 돌아가는 연구소는, 두 라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인간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과 인간의 전투에 가장 최적인 신체를 유지하는 것. 그에 백모래라는 남자는 특이 케이스로 분류되어 있었으나, 빅터와 함께 종종 마일로를 찾던 오르카는 전자에 속해 있었다. 눈이 절로 찌푸려지는 실험 내용에, 마일로는 얼굴을 굳히며 스크롤을 내렸다.

 

한참 찾아도 빅터는 보이지 않았다. 실험체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그중 대다수는 실험 중 사망으로 그 끝맺음이 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토기가 올라오려던 것을 겨우 참고 스크롤을 내려봐도 ‘빅터’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

 

여기 있다.

 

[M-0506]

 

-이름조차 없었구나.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사진에 남겨져 있는 얼굴은 지금과 똑같은데, 그 옆에는 갓난 어린 아기의 모습이 붙여져 있었다. 연구소에서 태어난 아기, 이름조차 제대로 지어지지 않은. 틀림없는 XX년생이나 성장을 갈취당한 채 ‘최적의 전투 신체’에 고정된, 그리고 한계까지 강화된 신체….

 

그는 이 연구의 최종 목적에 제일 가까운 실험체라 할 수 있었다.

 

“너는, 대체….”

 

대체 얼마나 아팠던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거야. 너는….

 

하지만 눈물을 흘릴 새는 없었다. 그다음 내용을 최대한 빨리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일로는 다시 거칠게 USB를 뽑았다. 세상엔 이리도 더러운 인간이 있다는 것에 대한 지독한 환멸감, 혹은 헛구역질과 함께.

 

“으, 우엑-”

 

터벅, 터벅-

그때, 집 밖에서 어딘가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 근거는 없었지만…. 이미 마일로는 반쯤 확신한 채 그것에 귀를 기울였다.

 

턱,

딱 마일로의 집 앞에서 멈추는 발걸음 소리. 마일로는 이미 빅터를 맞이하기 위해 노트북을 덮고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는 달리 한참을 서성이고만 있는 빅터의 발걸음에, 마일로는 점점 답답해졌다.

 

결국,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왜 안 들어와?”

“마일로 형?”

 

마일로가 먼저 문을 열었다.

 

빅터는 어벙벙한, 나쁘게 말하면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서 마일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놓고 현관으로 들어오지도 않는 모습에, 그는 빅터의 팔을 잡아끌고 억지로 집에 들여다 놓았다. 동시에 쉴 새 없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밖에서 딱 너 같은 걸음 소리가 들려오는데, 딱 내 집 앞에서 멈춰서 움직이질 않지…. 뭘 망설이고 있었던 거야? 이리 와 봐.”

 

몸을 좀 조심하지 않고 말이야. 그러게 왜 남의 직장을 털어선. 왜 혼자 정문을 들이박아서 있는 어그로 없는 어그로 다 끄냔 말이야.

응급 상자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까지 본격적인 응급 상자를 들일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으나 이게 다 선견지명이었다. 마일로는 직접 총알을 꺼내려니 두 손이 덜덜 떨렸지만 빅터까지 불안하게 만들 수 없겠다 싶어 애써 차분하게 도구들을 꺼냈다.

마일로의 특기는 마침 힐이었다. 어느 정도는 배운 적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처치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제 능력으론 어느 정도의 힐이 가능한지 말이다.

 

“자, 옆구리 풀어봐. 총알 빼야 할 거 아냐.”

“아….”

 

그 와중에 빅터는 도구가 탱그랑, 소리를 낼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이, 처치용 도구들이 영 무서운 기색이었다. 그만한 총상을 얻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온 것치곤 고통을 무서워하는 모습이 평범한 아이같아 괴리감이 들었다.

 

나 참, 얼굴만 봐서는 뭘 째도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을 것 같이 생겨놓고는.

 

푹, 찌걱, 쯔걱, 팅-

결국 빅터는 귀를 막고 눈을 꼭 감았다. 이 처치가, 이렇게 무서운 경험은 난생처음이라는 듯 말이다. 결국 마일로는 연구소에서 봤던 빅터의 흉흉한 모습을 떠올리며 흥, 코웃음 치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총은 아무렇지도 않게 맞으면서, 이건 무서워?”

“…이건 소리가 무섭단 말이야.”

“허.”

 

파앗,

손바닥에 익숙한, 그리고 따스한 빛이 머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평소에 기력이 없는 마일로로서는 이 정도의 처치가 끝이었다. 빅터를 완벽히 치유해줄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력감이 몰려와 입맛이 썼지만, 마일로는 애써 자리에서 멀쩡히 일어나 말했다.

 

“그래서, 연구소에는 왜 온 건데?”

“그으….”

 

그리고 빅터는 마일로의 예상에 착실히 부응했다.

 

“난 몰라!”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냥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했지?”

“응!”

“아이고 두야….”

 

결국 마일로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차라리 오르카가 왔으면 좀 더 생산적인 정보를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빅터는 ‘정말로’ 정신연령이 8살배기인 어린애였다! 도와주려거든 그래도 뭐라도 알고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없으니 할 게 없다.

결국 마일로는 지금 상황이라도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하, 그럼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는데? 필요한 걸 말해봐. 지금 상황이랑.”

“어, 어, 맞아. 형이랑 보스가 잡혀있어! 실험당할지도 몰라. ‘나’ 같은 걸 또 만들 거래! 음, 그리고, 그리고- 록산느랑 라드가 포트에 잡혀갔고, 메두사 누나랑 가리는 연락이 안 돼!”

 

그러니까 지금 조직이 풍비박산 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건가. 이걸 지금 반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일로는 알 수 없었다. 당장 빅터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좋지만 오르카와 보스가 실험체로 붙잡혔다고 하고(믿기지 않는다), 무사해도 나란히 유치장 엔딩 아닌가. 마일로는 빅터의 문제를 좀 더 심혈을 기울여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러니까, 빅터의 특수한 상황을 말이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 말했다.

 

“그래서 뭘 원하는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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