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6. 빅터와 레몬파운드 (2)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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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새벽에 때아닌 폭발이 일어나고, 그에 한 대의 차가 거의 뒤집히듯이 하며 거칠게 도로를 가로지른다. 그만큼 큰 폭발이라 그 주변의 모두가 잠에서 깨고 신고를 하느라 난리였다. 아직 제대로 냅킨이 설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은 포트에게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곳곳에서 난동을 피우는 깡패며 각종 폭주족, 그리고 시위 단체를 가장한 불법 조직들이 도시를 부수며 아비규환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비번이던 히어로까지 죄다 불려왔다. 각자 자리로 집합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현장을 수습하고 있자니 건물에 불이 꺼질 새가 없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옆구리에 사람을 끼고 있는 누군가가 들어왔다. 입에는 확성기를 끼고 있었다.

 

“록산느-! 라드를 내놔!”

“빅, 빅터야? 진짜로? 왜?”

“몰라서 그래? 낮에 쟤 동료들을 잡아왔잖아! 구하러 온 거겠지!”

“단신으로?”

“지금 우리 개털인 거 안 보여? 사무직들만 남았잖아!”

 

그것은 빅터. 그걸 전혀 예상치 못했던 메두사와 가리는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뿜었다. 뒷좌석의 세월은 오오, 감탄사를 내며 새로운 과자 봉지를 까고 있었다. 입에 아이스크림을 문 레이디는 엑, 하는 얼굴로 말했다.

 

“빅터 왜 나대?”

“고운 말 좀 써, 이년아….”

“세월이 먼저 써야 하지 않을까~?”

 

어느새 긴박하던 상황에 잔뜩 떨고 있던 긴장은 풀린 지 오래. 메두사는 어쩌면 이게 빅터의 진짜 재능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빅터는 옆에 끼고 온 회색 머리의 남자를 주먹으로 위협하며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내놓지 않으면… 이 남자를 때리겠다!”

“풉,”

“주, 죽이겠다도 아니고, 때리겠다…. 미쳤습니까 저 꼬맹이?”

“…저거 마일로 아냐?”

 

레이디의 중얼거림에, 메두사는 빅터의 옆구리에 껴 있는 남자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회색 머리에, 졸려 보이는 눈, 거기다 잘은 보이지 않지만 7대3 머리…. 빅터의 설명이 정확하다면 맞는 것 같았다. 빅터와 친하다는 사람이 왜 저기 있는 거지. 메두사는 빅터가 아는 사람조차 인질로 잡을 수 있는 훌륭한 빌런으로 자라난 건지를 조금 진지하게 고민했다.

 

“쯧, 저거 무전기 때문에 저런 거네요.”

“응?”

“어차피 캐리엇이 들고 있는 무전기로 추적되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우리 껀 부쉈는데, 빅터는 계속 추적되고 있었을 테니까….”

 

여기까지 오는 데 조력도, 치료도 저 남자가 한 것 같고. 차라리 협박당해서 함께 있었던 걸로 하자고 타협한 것 같습니다. 일부러 인질이 된 거죠, 저 남자가.

 

“죽어도 빅터가 생각한 거라고는 안 하는구나?”

“메두사 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그렇지만.”

 

가리의 정확한 추리가 맞아 들어가고, 상황은 과열되고 있었다. 사무직들은 빅터의 눈을 피해 히어로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빅터는 계속해서 협박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

 

“두 놈들이 탈출했습니다! 자… 잠시 뒤를 돌았을 뿐인데,”

“야, 라드는 환영을 쓸 수 있어! 빈 벽을 투영하고 있는 걸 수도 있으니 당장 확인해 봐!”

 

성급한 보고를 위해 올라온 히어로를 보자, 빅터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리곤 당장에 그 히어로가 올라온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다. 곧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귀를 긁는 불쾌한 끼익- 소리가 들려왔다. 빅터가 감옥을 지키고 있던 히어로를 때려눕히고 창살을 넓히는 소리였다. 포트 건물 앞에 서 있던 메두사는 가리에게 지시했다.

 

“이제 곧 나오겠네. 그 둘이 나오는 곳으로 대기하자.”

“넵. 음, CCTV 봐서는 막힐 것 같은데…. 두 사람 앞에 히어로가 있습니다. 왜, 환영이 통하지 않는 눈먼 놈 말입니다.”

“하… 귀찮아졌네. 그나마 록산느가 같이 있어서 다행이야. -가리, 운전할 수 있댔지?”

“안전 운전이지만요.”

“라드 태우면 되니까, 그때까지만 부탁해.”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평범한 정장을 입고 벙거지 모자로 얼굴을 감춘 메두사는 시민들 틈에 파묻혔다. 마침 히어로 조직 포트의 문 앞에는 대피한 사람들이며 신고를 위해 자다 말고 달려온 시민들이 참 많았다.

 

“세월도 운전할 수 있는데.”

“난 싫어.”

 

레이디도 참 세월을 좋아해.

뒤에서 그런 말소리가 들리자, 메두사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또각또각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은 시민들의 틈에, 한 번은 빅터에게 주목하고 있는 카운터 직원들의 뒤로, 또 한 번은 히어로들을 돌파하며 앞서나간 그 끝에는 한 히어로와 대치하고 있는 록산느와 라드가 보였다. 메두사는 그 손을 단번에 붙잡았다. 가벼운 섬유는 그만큼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메두사 누님~ 빨리 왔네요!”

“빅터가 힘내줘서 말이지.”

“…고마워요.”

“! 동료인가.”

 

메두사는 보통 라드와는 따로 움직이는 편이다. 운전대를 잡는 게 그 역할인 라드는 신체 능력이 특출나지 않은데, 특기와 특유의 민첩함으로 겨우 몸을 숨기는 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로 별동대로 활동하는 메두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이들이 상대하고 있는 강아지 히어로에 대해서는 라드의 불평불만으로 들은 바가 있는데, 애초에 눈이 보이지 않고 남은 감각으로만 주변을 탐지하는 데다가, 특기가 파장이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이지 않는 파장이 출발했다 돌아오는 시간으로 주변의 장애물을 파악하는, 일종의 탄성파 탐사를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거다.

 

-하지만 다중 특기자로, 반사의 특기가 있는 록산느나 애초에 모습을 숨길 생각이 없는 메두사라면 얘기가 조금 많이 다르다.

 

“잘난 특기가 있어도~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면 얘기가 다르지?”

 

샤악,

메두사의 목을 타고 오른 맹독의 뱀이 끝내 깊은 굴에서 벗어나듯 입을 열고 나온다. 바깥 공기를 마시며 입맛을 다시는 건 메두사의 명령 때문일까, 아니면 뱀의 의지일까? 어쨌든 지금 당장, 콘크리트에 준하는 강도의 섬유에 붙잡혀 있는 히어로 하나를 저세상으로 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등 상관없는 문제다.

 

“으윽….”

“그럼 저흰 먼저 가보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메두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마 메두사가 오는 길에 봐뒀던 후문으로 가고 있을 터였다. 그럼 바로 가리와 합류할 수 있겠지. 백모래와 오르카를 구하러 갈 인원의 준비가 착착 되어가고 있었다.

 

“당장 그만둬!”

 

그때 갑자기 섬유가 단숨에 녹아내리는가 싶더니, 메두사의 뱀 역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저 뒤쪽 코너에서 등장한 히어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강력한 특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쳇, 메두사는 짧게 혀를 차며 히어로를 물어버리려던 것을 빠르게 포기했다.

메두사가 조종하고 있던 섬유를 녹인 것을 봤을 때 강산성 내지는 그에 준하는 특기. 그렇다면 메두사는 일단 특기 하나를 잃고 순수 신체 능력으로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특기를 사용하는 조건이 뭔지를 알아내야 하는데….

 

“넌 못 도망가!”

 

생각이 너무 길었다. 메두사는 특기의 발동 조건이 따로 없는 것 같다는 희망 없는 결론을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주변에 얇은 산성액의 막이 메두사를 감싸고 있었다. 감옥의 일종이랄까. 아무리 강화된 메두사라 해도 이걸 그냥 빠져나갔다간 심한 부상을 입을 거란 감이 시끄럽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메두사는 일단 두 손을 올렸다.

 

진짜 처음 보는 얼굴인데, 슈퍼 신입이네. 죽여야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좋아, 잘했어 포지. 그럼 이대로 체포를… 어떻게 하지?”

“제가 산성액을 거두면,”

“그럼 도망가잖아.”

“그럼, 일단 이대로 감옥으로 데려갑시다.”

 

메두사가 한참이나 생각하는 사이에, 히어로들의 바보 같은 대화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웃긴 건 빌런이나 히어로나 똑같다는 생각에 메두사가 킥킥 웃자, 넌 뭐가 좋아서 웃냐는 듯한 시선이 돌아왔다.

 

“아니 뭐, 웃겨서~ 우리 아지트에서도 그렇게 바보짓 하는 애가 있거든?”

“뭐? 지금 바보라고 했어?”

“그만. 메두사는 원래 저런 놈이니까 도발에 당해주지 마.”

“이익…!”

 

순식간에 도발에 당하는 히어로, 그에 얄미운 미소를 남기는 메두사, 말리는 다른 사람들… 아수라장이었다. 메두사는 이러다 히어로가 이성을 잃고 감옥을 풀어주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더욱 도발하고 있었다.

 

그때,

 

“메두사!”

“빅터?”

 

메두사는 빅터가 아까의 남자를 들고 후다닥 뛰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메두사만 보지는 않았다. 그를 연행하고 있는 히어로들 모두가 목격했으니. 순식간에 긴장감이 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빅터는 메두사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저돌적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자, 잠깐 빅터 안돼!”

“뭐?”

“그건 내 감옥이야. 아무리 너라도 닿는 순간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릴걸?”

 

다행히, 빅터가 정면으로 감옥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덜렁,

“뭐, 뭐? 꺄악!”

 

그 히어로를 한 손으로 덜렁 들고선 프로펠러처럼 돌려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 히어로가 체구가 작아도, 다른 히어로들이 달려들고 있는데 피자 판 돌리듯 빙빙 돌리며 위아래로 흔드는 건 메두사가 보기에도 경이로울 정도였다. 결국, 이렇게 물리적으로 이성을 잃은 히어로는….

 

“메두사! 가자!”

 

속을 게워내며 감옥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메두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빅터와 나란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빅터,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택시 타고!”

“…그래, 그랬겠네. 어쨌든 혼자서 잘했어.”

“히히, 응!”

 

상황설명은 빅터에게 듣느니 아직도 옆구리에 달랑 끼어 있는 마일로에게 묻는 편이 빠르겠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메두사는 그래도 다시 한번 무전기의 여부를 묻기 위해 입을 열었, 어?

 

“꺄악!”

“누나, 먼저 가!”

 

공중에 날려지는 감각은, 아주 빌어먹게도 익숙했다. 처음 막 던지기 시작한 백모래나 그걸 배운 빅터나, 메두사를 대신 옮겨준답시고 저 멀리 날려버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 없이 막 그럴 애는 아닌데, 싶어 착지하고도 제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메두사는-

 

“윽, 으으….”

 

인질을 떨어트리고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빅터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아무도 얼어있지 않은 얼음기둥이 있는 것으로 봐서, 원래는 메두사가 저기 묶여 있었을 예정인 듯싶었다. 빙결 계의 히어로가 특기의 반동으로 쿨럭거리며 피를 쏟고 있었다. 메두사는 그제야 빅터가 자신을 던지고 대신 잡혔다는 상황을 깨달았다.

 

바보야, 이런 상황이며 차라리 네가 먼저 탈출했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빅터가 그 말을 듣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얼른, 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순수한 애정을 확인받고 있기 때문이겠지.

 


빅터는 어느새 새파란 얼굴로 잠들어 있는 마일로를 꼭 끌어안고서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처음 들어와 보는 감옥은 TV나 소설에서 봤던 이미지와 꼭 맞게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라 안심하고 앉아있기도 어색했다. 게다가 감옥 앞에 경비로 히어로가 세 명이나 서 있어서 더욱 멋쩍었다. 결국 할 것이 없어 심심했던 빅터는 불안증에 걸린 사람처럼 일어서거나 앉거나, 주변을 둘러보거나를 반복해야 했다.

어딘가 말이라도 걸고 싶지만, 마일로에게 말을 걸어서 좋을 것이 없을뿐더러 이미 자고 있다. 그렇다고 경비를 서고 있는 히어로에게 말을 걸어봤자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진 않다. 결국 눈치를 보던 빅터는 마일로에게 고이 무릎베개를 해준 채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덜컥 소리와 함께 방의 문이 열렸다. 물론 감옥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빅터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시선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간부님이 빅터를 받아 간다고?”

“이제와서, 왜?”

“그건 알려줄 수 없답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잖아.”

 

웅성웅성, 무슨 얘기를 저렇게 하는 걸까?

깊은 새벽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시 꾸벅거리던 빅터는 무어라 저들끼리 얘기를 나누는 히어로들을 빤히 쳐다봤지만, 이미 진지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는지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빅터는…

 

‘졸려….’

 

꿈도 없는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꽉 잡고 있는데?”

“간부님이 같이…랬으니까 그냥-”

“…그럼…간다?”

 

그렇게 1초도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될 순간 뒤,

 

촤악-

“-헉, 어푸!”

 

차가운 얼음물의 감각이 옷 속까지 스며들어와 뼈까지 불태우는 것 같았다. 그 낯선 감각에 빅터는 몸서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푸어푸, 그 자리에서 얼굴을 손으로 몇 번이나 닦았는지 모른다. 그 와중에 마일로를 챙길 정신은 남아있어, 제 뒤에서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잘 자고 있는 마일로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빅터는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드나 보지?”

 

멈칫,

빅터는 낯익고도 무서운 목소리에 몸을 굳혔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조우했던 목소리였다. 히어로 캐리엇, 순식간에 TV에서나 봤던 대기업 총수 같은 이미지가 빅터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뉴스 속에나 등장하던 히어로는 그야말로 ‘히어로’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요즈음에는 히어로로서의 활약보다 사회 경제란에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빅터는 모른다. 뉴스 같은 건 보지 않으니까. 다만… 뉴스 헤드라인에 뜨던 영상을 3초 정도는 봤다고 할 수 있겠다.

 

“형, 형아랑 보스는….”

“역시 어정쩡한 놈이군. 그게 지금의 상황에 알맞은 질문인가? 스스로 생각해보지, 그래.”

“설마 죽인 건-”

“오답. 실험이 지능을 올려주지는 않나 봐. 이건 보완해야겠어.”

 

빅터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자신을 철저히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자신을 실험용 샘플 정도로 보고 있다는 사실 역시. 하지만 빅터는 스스로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캐리엇은 빅터가 여태까지 본 사람 가운데 백모래 다음, 두 번째로 공포스러운 사람이었다. 손이 벌벌 떨리고 입이 바짝 말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말도 못 하나? 생각보다 쓸모없는 제품이야….”

“나, 난 물건 같은 게 아니야.”

“아니, 물건이다.”

 

기껏 용기를 내어 반박한 말에는 차가운 부정의 답이 돌아온다. 그것만으로도 잔뜩 풀이 죽은 빅터는, 캐리엇의 계단을 보스 위로 올려, 태어나서 본 중에 제일 무서운 사람의 자리에 두었다. …적어도 백모래는 그에게 다정했으니까.

 

“네 기록을 봤다. 여태 단 한 번도 살인하지 않는 빌런이라는 게 특이사항으로 있더군?”

“…”

“어정쩡해, 아주. 주제도 모르고 네가 뭐라도 다른 사람인 것마냥 행동하는군, 그래?”

“!”

 

이제는 제게 이름표라도 달아주려는 것처럼, 캐리엇은 차갑게 빅터의 목을 잡아들었다. 알려진 바 있는 특유의 괴력은 마치 깃털을 들 듯 빅터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에 반해 목이 잡힌 빅터는 난생처음 겪는 고통스러운 감각에, 연신 캑캑거리며 몸을 비틀어야 했다. 목에 홧홧한 낙인이 박히는 감각이었다. 캐리엇의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말이 칼로 새겨지는 듯한, 그런 감각-

 

그런 상황에서도, 빅터는 말했다.

 

“어정쩡하지, 않아…! 나는-”

“그래, 지능이 정말로 어린애 수준인 것 같으니 설명해주지.”

 

철퍼덕, 콜록, 콜록!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진 젖은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빅터는 겨우 엎드려 목을 붙잡았다. 상대에게 비는 듯한, 혹은 굴종하는 듯한 낮은 몸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빅터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입을 위로 찢어 올리고 있었다.

빅터는 다시 마일로를 살폈다. 눈꺼풀이 들썩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차라리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아, 빅터는 그가 들키지 않도록 그 얼굴을 가리며 자세를 바꿨다. 그 머리 위로 여자치고는 상당히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넌 빌런이다. 사회의 쓰레기.”

“…!”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빅터는 자신이 명확한 빌런이라고도, 쓰레기라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엔 빌런일지라도 그 자신은 무언가 다르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일로와도 약속했으니까. 언젠가 이 자리에서 벗어나 죗값을 치루고 평범하고 선하게 살아보리라고.

 

“넌 네 편을 제대로 정하지 못했어. 그러니 지금의 너에겐 더욱 가치가 없다는 거다.”

“난 쓰레기가 아냐. 나,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음, 노력하는데,”

“‘착한 빌런’? 푸하하- 그거야말로 더욱더 어정쩡한 쓰레기일 뿐이지.”

 

아니, 그러니까 쓰레기는 심하지 않은가. 빅터는 자신이 잘못하기는 했지만, 구제 불능의 빌런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야, 백모래의 명령하에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의사라기보단 현재의 가족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에 불과했고, 그마저 랩터와 말한 언젠가에 죗값을 치룰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죽인 적 없어. 아무도.

 

그것은 빅터의 금기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빅터는 자그마한 마음속의 위안을 얻었다. 그런데 캐리엇의 말은 그런 빅터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있었다.

 

“…역시 넌 실험체로 쓰이는 게 최선이다.”

 

가볍게 흥, 코웃음 친 캐리엇은 천천히 다가와 마일로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빅터가 다급하게 그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 내렸다. 결국 그 중간에 끼고 만 마일로는 거칠게 기침을 뱉으며 눈을 뜨는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생각해 봐. 빅터는 빌런인가?”

 

빅터는 마일로가 금방이라도 캐리엇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착각에 휩싸여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생각 외의 박력에, 캐리엇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으나 하룻강아지의 위협일 뿐이라는 듯이 비웃음을 날렸다. 마일로의 대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비, 빌런이지만, 빅터는 사정이-”

“그래! 빌런이다. 빌런은 빌런이지. 거기서 끝이야. 사정은 없어!”

 

넌 그렇게 태어난 거야.

빅터는 캐리엇의 충격적인 말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그가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일종의 종신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아니야, 그럴 수 없어. 난 언젠가 형과 레이디, 세월, 메두사… 어쨌든 가족들과 같이, 이제 이런 건 그만하자고 설득할 수 있게 잘 커서-

 

그렇게 살고 싶은데, 안 되는 걸까?

 

“살인과 그 이하. 넌 그것을 구분하지. 이미 빌런인데 말이야. 죗값이 무서워서 착한 척이라도 하는 건가?”

“커억-”

“마일로를 놔줘!”

 

그때, 마일로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빅터는 눈이 돌아가는 감각과 함께 예비로 들고 있던 나이프를 꺼내 휘둘렀다.

 

“하하!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꼬맹이! 넌 역시 수틀리면 사람 정도야 간단히 죽일 수 있는 빌런의 본성을 갖고 있는 거야, 안 그래?”

“아냐!”

“왜, 남의 목숨을 가볍게 위협하는 게- 네가 생각하는 빌런이 아닌가?”

 

타다닥, 뒤에서 마일로가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빅터는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놀랍게도 캐리엇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빅터는 모든 것을 주먹으로 해결했다. 한 번도 대화를 시도해본 적이 없었다. 소통 없는 외침. 그것이 빅터의 폭력이었다.

할 말은 있다. 빅터는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 외에는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그 외의 방법이 있다는 걸…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빌런의 본성이라면-

 

“아냐! 그렇다면 너도 빌런인 게 틀림없어!”

 

빅터는 바뀔 길 없는 빌런이다.

 

그래서 빅터는 울 듯이 그 말을 부정하며 외쳤지만, 캐리엇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난 빌런이지.”

“…?”

 

그에 돌아온 것은 간단한 인정. 빅터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빅터에게 빌런이라는 말은 그리도 커다란 상처를 주는 말인데, 그에겐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아니, 조금은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과연, 이어지는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난 빌런이야. 그것도 완벽한! -그거 아나? 세기의 대배우이자 히어로라는 영정도 날 알지 못해. 그래, 그 배우 따위가 날 알기엔 난 너무 크지.”

“어떻게, 히어로가 빌런을-”

“그러니까 완벽하다는 거다! 난 강하고, 빈틈없으며, 철저한 악당이야. 후환은 철저히 부술 수 있을 정도로!”

 

아마 네 친구도 지금쯤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겠지.

 

강건한 말에 이어지는 짧은 선고는 너무나 잔혹해서, 빅터는 입술을 짓씹으며 뒤로 물러났다. 유난히 옆구리가 쑤셔왔다.

 

“그에 반해 넌 어정쩡한 악당이야. 처세를 잘못했어.”

“착한 척하지 마. 본성을 따라가.”

“빌런은 더욱 완벽히, 철저히 빌런이 되어야 하는 법. 너처럼 어정쩡하게 착한 양 구는 녀석은 잡아먹힐 뿐이다.”

“…이 완벽한 나에게 말이야.”

 

아아, 살면서 이렇게 두려운 감각이 있을까.

빅터는 자신이 뜯어 먹히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이미 그 둘은 지하 아닌 심해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속의 포식자는 명확히- 캐리엇이었다. 그 붉은 눈은 흰자위가 넓었으며, 동공이 작았다. 그 이는 뾰족했으며, 겹겹이 있었고… 아, 그는 빅터가 상상할 수 있는 공포스러움의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곧 저를 잡아먹을 거라는 선언. -그것이 자신을 실험체로 써먹을 거라는 예고임을 알면서도, 빅터는 피식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난 잡아먹히지 않아.”

 

하지만 그것은 결심이었다. 잡아먹히지도, 실험체로 이용당하지도, 이대로 가만있지도 않겠다는 선언. 그리고 빅터는-

 

날았다.

 

퍽!

빅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곳은 캐리엇의 배후. ‘그’ 캐리엇조차 빅터의 속도를 따라가지는 못했으나, 본능적인 감각으로 뒤를 돌아 그의 목으로 향하던 빅터의 다리를 잡아 가볍게 내던졌다.

하지만 빅터는 유연하게 공중에서 균형을 잡을 줄 알았고, 벽에 추상예술처럼 박히는 일 없이 제 자리에 착지한 뒤 다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고작 주먹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특기는 괴력. 아무리 강화된 빅터여도 그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그것을, 빅터는 목이 졸렸을 때 똑똑히 느꼈다.

 

“그래, 네가 꽤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

 

캐리엇이 천천히 걸어왔다. 빅터는 제 기원인 흑표범이 꽤나 강한 맹수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나, 캐리엇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본능적인 긴장감에서 나오는 감각이지만, 생물학적 지식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했다. 심해라는 환경 안에서 그, 캐리엇은-

 

“하지만 내 앞에선 하나의 먹잇감일 뿐이다.”

 

-제 영역에서 한없이 강한 포식자, 하나의 백상아리다.

 

쾅!

캐리엇의 간단한 발 구름에 순식간에 바닥이 깨져 들어간다. 어딘지 몰라도 건물의 깊은 지하인지, 바닥이 무너져 내려 두 사람 다 굴러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빅터가 황급하게 그 자리를 피했을 뿐. 물론 그에 멈추지 않고 다시 배후를 노렸으나,

 

“똑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아, 애송이.”

“형은 어딨어? 보스는?!”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을 구르듯 피한 빅터는 이어서 날아오는 캐리엇의 발차기를 피해 가볍게 옆으로 덤블링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이프를 휘두르자, 캐리엇의 발목에서 그의 정장과 같은 색의 피가 새어 나온다. 강화되지 않은 덕에 방어력은 빅터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똑똑히 기억한 빅터는 미처 제 명치를 치고 올라오는 무릎을 눈치채지 못했다.

 

“-커억!”

“살아있다. -다만, 풀어주는 일은 없다. 둘 다 실험을 위한 재료가 되겠지.”

 

잘못했다간 충격에 혀가 잘릴 뻔했다.

빅터는 그대로 무릎을 꿇을 뻔했으나, 비틀거리며 뒤로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폐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최악이다. 고통으로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처음이라서 빅터는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발목에 상흔을 입은 캐리엇은 움직임이 자유로워, 바로 빅터에게 주먹을 지르기 위해 달려올 수 있을 정도였다.

 

“이미 네 의사는 상관없어.”

 

짧은 기합과 함께 들어온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빅터는 그의 옆구리로 나이프를 찔러 넣으려 했으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방심은 아까의 것으로 족하다는 듯이, 더욱 움직임이 빨라진 것이다.

 

빅터는 강하다. 하지만 캐리엇은 더 강하다. 빅터는 맷집이 좋다. 하지만 캐리엇의 괴력에 비할 바는 아니다. 빅터는 빠르다. 캐리엇은 그것을 따라잡지 않아도 될 만큼의 연륜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싸움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턱,

턱 아래에서 올라온 주먹을 고개를 틀어 피한 빅터는 캐리엇의 볼을 향해 주먹을 날렸으나 도리어 잡히는 잡혀 팔이 꺾였다.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원래와는 다른 방향으로 꺾인 탓에 빅터는 그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공중회전을 시도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쾅!

“허억!”

 

캐리엇이 그렇게 공중에 떠오른 빅터를, 주먹으로 후려친 것이다. 빅터는 그것을 피하기엔 폐의 고통이 상당했고, 공중에서의 움직임은 원래 부자유했다.

 

결국…

 

“귀한 실험체의 신분이니, 치료는 해주지. 구속복을 입어야겠지만 말이야.”

‘아… 안 되, 는데.’

 

빅터는, 눈을 감았다.

 

 


 

탁, 탁탁-

그 시각, 캐리엇에게서 가까스로 도망친 마일로는 태어나서 제일 다이나믹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자신의 팔자를 욕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의 복도를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회색의 체크 남방이 뒤로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는 그 속도는, 심지어 마일로 인생 최대의 속도였다.

 

챙그랑,

남방 주머니에 꽂혀 있던 펜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 자리에 멈춘 마일로는 작게 중얼거렸다.

 

“젠장, 젠장….”

 

어쩌다 빅터한테 엮여서, 어쩌다 걔한테 코가 꿰여서, 왜 한순간 흔들리는 바람에 걔를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온통 후회만이 가득했다. 오늘 하루의 모험을 소화하기에 마일로는 지나치게 소시민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오늘 알게 된 진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설마 ‘그’ 히어로 캐리엇이 이딴 비밀 연구소를 지은 당사자이며, 그런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저 같은 민간인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위협할 인물일 줄은.

 

목이 졸릴 때의 그 숨 막히던 공포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빨이 딱딱 부딪혔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하고 있을 빅터가 이 와중에도 너무나 불쌍했다. -그래, 동정. 그 가당치 않은 동정심이 마일로를 이 위기에 몰아넣은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기다! 잡아!”

 

그 와중에 저를 찾아 쫓아오는 장정들에, 마일로는 다시 뛰쳐나갔다. 마일로가 캐리엇에게서 도망치자마자 쫓아온 이들은, 어떤 명령을 받은 모양이었다. 손에 들린 권총이며 파이프, 나이프를 보면 그냥 잡으라는 명령은 당연히 아닌 것 같고 말이다.

게다가 이미 이곳저곳에 피가 묻어 있는 것과, 바닥에 늘어져 있는 연구원들의 시체를 보면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저들에게 잡혔을 때 마일로의 결말도!

 

달칵,

그래서 마일로는 어떤 복도에 들어섰다. 낑낑거리며 바리케이드를 세운 뒤 뒤를 보자…

 

“…?”

 

시험관의 조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벽면이 잔뜩 빛나고 있었다. 그 투명한 조명의 색에, 마일로는 자연히 고개를 돌렸다.

 

“!!!”

 

…그것은, 하얀 시체들의 관이었다.

박제 특유의 특징들이 없었더라면, 마일로는 그들이 실제 실험체들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완벽히 무균 상태에서 보관되고 있는 시체들이었다. 마일로는 절로 구토가 올라오는 감각에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상해.’

 

마일로는 그의 실험을 위해 몇 가지 샘플을 받아온다. 그것은 짧은 머리카락일 때도 있고, 털일 때도 있고, 피부 조직일 때도 있다. 그 샘플 중, 혈액은 빅터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제일 처리 방법이 쉬운데 말이다. 어쨌든 그래서 각각 처리 방법이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시약으로 귀결되는데-

 

빅터의 혈액에는 어떤 성분이 없었다. 다른 모든 샘플에는 있는 어떤 성분이 말이다.

 

‘다른 샘플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가공했는데 몇 가지 성분이…’

 

당연히 그것을 조사해봤다. 어떤 종류인지, 보통 어디에 쓰이는지, 체내에 있는 것이 정상인지 싹 다.

마일로는 현실로 돌아와, 다시 천천히 팻말을 읽어보았다. 마치 전시라도 해놓듯 관 하나하나에는 그 혼혈의 종이 적혀 있었다. 그조차도 비인간적이었지만, 기어이 토기를 참으며 읽어보자….

 

강아지 혼혈, 고양이 혼혈, 곰 혼혈, 판다 혼혈, 돌고래 혼혈, 펭귄 혼혈, …토끼 혼혈.

 

그 수많은 혼혈 모두가 마일로가 다뤄본 샘플이었다.

 

“욱…!”

 

빅터의 혈액에서는 검출되지 않은, 바로 그 성분은 박제용 시약에서도 사용되는 종류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마일로가 다뤄본 모든 샘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박제의 상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는 살아있는 이의 양해를 구한 것이 아니라, 죽은 이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다.

 

“헉, 허억, 웁,”

 

억지로 토를 참느라 침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속의 울렁거림은 멈추지 않았고, 끝끝내 마일로는 그로부터 등을 돌리고 말았다. 비위가 약한 마일로에겐 그만큼 참혹한 광경이라, 뒤늦게 찾아오는 죄책감이며 후회가 둥둥 떠올랐다. 그중 제일 가까운 것은 그것이다.

 

‘비, 빌런이지만, 빅터는 사정이-’

 

누가 죄인이란 말인가, 누가 무고한 이란 말인가.

 

-떳떳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조차 이미 죄를 지었는데.

 

고작 시체 가지고? 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소중한 흔적이었을 게 분명해서. 몰랐다? 그런 말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 진작에 의혹을 갖지 못한 마일로의 죄인 것 같아서. -자의로 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빅터라고 달랐을까?

 

스스로의 역겨움에 정신 줄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됐다. 아니,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말했어야 했다.

빅터는 빌런이 아니었다. 히어로도 아니었다. 그냥 아이였다. 아직 배울 게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나이의 어린애. 하지만 그가 배운 것은 폭력이었고, 그에 반해 생각하는 것은 선하기 짝이 없어서 고민이 많을 뿐인… 그런 아이였다. 평범하게만 자랐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을 텐데.

 

빅터는 빌런이 될 수 없는 아이였는데, 그러지 않고자 하는 아이였는데….

 

괜히 그렇게 대답했다.

 

“어- 마일로랬나?”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를 추격해온 누군가라기엔 호의적이고 느긋한 목소리였다. 그에 화들짝 놀란 마일로는 더 생각하던 것도 멈추고 거의 뛰어오르듯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보인 것은,

 

“왜 그렇게 놀라? 나야 나, 빅터 보스. 혹시 들어봤어? -난 많이 들어봤는데, 마일로.”

 

온통 새하얀 남자.

새하얗다 못해 빛이 나는 듯한 정장에 흰색의 머리,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이 처연한 오렌지빛 눈은 아련한 미인의 얼굴에 완벽하게 자리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의 말만 아니었다면 이상형이라고 했을 법한 미모였다.

그런데 빅터의 보스라니. 그렇다면 범죄조직의 보스라는 소리가 아닌가. 또 다른 목숨의 위협에, 마일로는 벌벌 떨며 말했다.

 

“드, 들어봤습니다….”

“아, 다행이다. 그럼 빅터 어디 있는지 알아? 빅터가 너랑 같이 들어가는 거 봤다던데.”

“저, 쪽, 인데요.”

 

이제 와 보니 옷자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 얼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그의 뒤에는 온통 피의 길이 이어져 있었다.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에 마일로는 또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눈앞의 남자는 칼을 들고 있었다!

 

“아, 고마워! 가는 길은 저쪽으로 나가면 될 거야. 아직 위험할 텐데 데려다줄까?”

 

내가… 빅터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저들처럼 한 구의 시체가 되었겠지?

 

차마 그 말을 거부했다가 마찬가지의 싸늘한 고깃덩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마일로는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그가 왔던 길에는 연구소와 경비인력 구분 없이 모든 인간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일로의 절친한 친구이기라도 한 마냥 씨익 웃으며 칼을 들었다.

 

“으아아-!”

 

푹,

순식간에 시체가 하나 더 생긴다. 그것에 충격받을 새도 없이, 저 끝에서 무장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 연구소의 경비 인력, 혹은 캐리엇의 부하들일 게 분명했다. 마일로는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무심코 그 남자의 뒤로 숨었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태연자약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아, 난 백모래야. 저쪽으로 달릴까?”

 

그리고 이후에는 살인, 달리고, 또 살인, 달리고의 연속. 순식간에 마일로도 피투성이가 되어야만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길고도 짧은 살육의 현장에 마일로의 신경 줄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이제 입구는 저기야. 넌 그대로 나가도 될 테니까, 잘 가~”

“저… 절 도와주시는 이유가 뭐죠?”

 

오.

의외라는 듯, 백모래는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마일로 자신도 이 질문이 꽤나 건방진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가 아닌가. 그런데 그에 의심이나 하고 있다니. 만약 그게 ‘정말로’ 순수한 선의라면 기분이 나빠져 마일로를 죽일지도-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빅터의 친구니까. 널 죽이면 빅터가 많이 슬퍼할 거거든.”

“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빅터랑 잘 지내줘.”

 

안 그러면 죽이려나? 도망치려던 발목에 족쇄가 단단히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뭐, 애초에 빅터를 버리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더 강하게 붙잡힌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마일로로서는 달갑지 않은 감각이었으나…

마일로는 거칠게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를 달려 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저 남자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나마 살았다는 안도감, 그조차 남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감각에서 느끼는 구토감. 인생에서 최고로 복잡한 감정들이 심연의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했다가는 머리가 어질해서 정말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일로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드디어 입구.

 

철컥!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의외로 작은 철문을 열자, 바깥은 온통 소란스러웠다. 눈앞이 빨간 게, 이미 히어로나 경찰들이 와 있는 걸지도 모른다. 빅터가 아직도 안에 있는데, 어쩌지? 이제 걘 잡혀가는 걸까? 하는 잡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한 가운데, 마일로는 반사적으로 사위를 돌아보았다.

 

“인질이 나왔다! 당장 구해!”

“괜찮으십니까?!”

“네, 그, 저, 여기는….”

 

아, 이곳은.

 

빅터와 마일로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정원이었다.

 

마일로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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