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6. 빅터와 레몬파운드 (3)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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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빅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치료해준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 같은데, 아직 그 치료인력이 오지 않을 정도로 짧은 순간 만에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구속복은 입고 있었다. 그 상태 그대로 바닥에 던져져 있었던 모양이라 피가 잘 흐르지 않는 데다가, 갈비뼈의 부상이 심상치 않았다. 빅터는 폐가 날카로운 것에 찔리는 감각에 고통스럽게 숨을 쉬어야 했다. 너무, 너무 아팠다. 난생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흐엉,”

 

그래서 눈물이 흘렀다. 아파서 할딱대는 숨으로, 빅터는 바닥에 고개를 박은 채 힘겨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신음소리와 섞인 울음은 그리도 처연했으나, 아무도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더 서러운 것을 아는가.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심지어 그보다 더 좁은 감옥에 갇혀 홀로 쓸쓸히 버려진 채로 아픈 것이 얼마나 서러운지, 빅터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호흡에 가슴이 더 아파오는 것에도 불구하고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되레 아픔에 서러움이 가시고 나서도 울음이 멈추지 않아 곤란할 때까지, 빅터는 바닥을 굴러다녔다.

 

철컥,

그리고, 문이 열렸다.

 

“!”

 

사실 누가 들어와도 좋을 것 같았다. 치료해줄 사람이 와 준다면야 좋겠지만 역시 나이프가 와 주는 것이 제일 좋았고, 그 둘이 아니어도 일단 혼자가 아닐 수 있다면 조금 덜 무서울 것 같아 좋았다. 그리고…

 

“빅터, 나 왔어.”

 

그는 백모래였다.

 

빅터는 반가움에, 그리고 서러움에 툭, 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그의 얼굴을 본 지가 몇 년은 된 것만 같았다. 8살짜리에게 ‘몇 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을 뜻하는지 백모래는 모를 것이다. 그러니 고작 10분 만에 다시 보는 듯한 얼굴로 평이하게 말하는 거겠지.

 

“찾던 불어펜 여기 가져왔는데, 어때? 여기에도 애 아빠가 있었나 보더라고.”

“흐…어엉,”

“좋아하던 거 가져왔는데, 그래도 울어?!”

“몰라, 아파, 아파아아….”

“-아, 다쳤구나? 그럼 얼른 가자. 밖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일단 만나서 힐러를-”

 

백모래는 태연하게 불어팬 상자를 바닥에 내려두더니, 창살을 낑낑거리며 열었다. 그리곤 들어와 빅터의 구속복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다. 마치 작은 아이를 다루는 몸짓으로. 빅터는 그제야 킁, 하고 울음을 그쳤다.

 

“찾았네요.”

“찾았다.”

“-?!”

 

하지만 그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에 발을 들였다. 백모래는 빠르게 칼을 들었고, 곧 날카로운 것끼리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음이 방을 울렸다.

 

“?”

 

빅터는 디용, 한 얼굴로 그 둘을 바라보며 바닥에 구르고 있던 몸을 겨우 일으켰다. 여전히 숨을 쉬기가 불편하긴 했으나, 그 정도 움직임은 할 수 있었다. 1그람도 되지 않는 경계심을 겨우 끌어모은 빅터가 먼저 물었다.

 

“…누구야?”

“맞네요, 저희 쪽만 아는 거였군요.”

“바보야? 당연하지. 얜 청실이야.”

“이쪽은 홍실이에요.”

 

그러니까 백모래와 칼을 나누고 있는 데다가, 성격이 좀 더 드세고 말을 놓는 쪽이 홍실. 좀 더 차분한데다 말을 높이는 쪽이 청실이라는 소린가. 그 외에는 다른 점이 하나도 없어 보일 정도로 똑같은 쌍둥이… 아, 이제 보니 눈의 공막이 이름에 맞는 색이었다. 홍실은 적색, 청실은 청색. -눈을 잘 뜨지 않아서 문제지만.

빅터는 그 짧은 순간 비친 호의에 긴장을 풀고 경계를 내렸다. 백모래는 전혀 그러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으나 칼을 겨눈 손을 내리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때, 청실이 싸우고 있는 둘 사이로 슬쩍 다가와 웬 구슬을 내밀었다.

 

“일단 이걸 받아요. 몸이 회복될 거예요. 음… 손이 불편하다면 입에 물려줄까요?”

“아-”

 

카강-

“-삼키면 안 된다? 약 아니니까.”

“빅터, 알지?”

 

알지 알지.

빅터는 몸이 회복된다는 말에 낼름 입을 벌렸다. 참으로 무방비한 태도였으니, 백모래는 그 와중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칼을 겨누던 한 사람이 사라지자, 홍실 역시 소매를 정리했다. 더 이상은 싸울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하여 일단은 소강상태. 그 조용한 상황에서 청실은 채 다 풀지 못한 구속복을 다 끌러 주고는 빅터를 바닥에 눕혔다. 꽉 죄였던 몸이 풀리자 좀 살 것 같았던 빅터는 긴 한숨을 쉬었다. 단숨에 바닥에 바로 누워 있자니 이곳이 나이프 아지트의 거실 바닥 같았다. 그만큼 긴장이 풀렸다는 뜻이다. 낯선 사람 앞에서 참 잘하는 짓이다 싶었지만….

 

“이제 뼈가 잘 붙을 거예요. 자, ‘힐’해 봐요. ‘힐’.”

“퉤, 힐!”

 

곧, 힘이 조금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배의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이제 모든 게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빅터는 이제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

“그래, 그 붉은 인간이 쓰던 거 맞다니까.”

“그런 홍실도 기능은 반쯤 찍지 않았나요?”

“맞았으니 됐지.”

 

입에서 막 나온 끈적한, 희고 작은 구슬을 신기하게 바라본 빅터는 그것을 옷자락으로 벅벅 닦았다. 일단은 남의 것을 침 범벅인 상태로 돌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수상한 사람이어도, 일단은 도와줬으니까….

 

“이거, 돌려줄게요.”

 

덤으로 공손한 존댓말도 해주기로 하면서. 빅터는 구슬을 내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안 되지, 빅터.”

“으, 존대 쓰지마.”

 

그에 홍실은 질색했고, 백모래는 단호하게 구슬을 빅터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에 빅터는 머쓱하게 손을 내리며 눈치를 보았다. 백모래의 기색이 아무래도 언짢아 보였으니까. 아무래도 낯선 이가 침입해서는 멋대로 구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빅터, 이게 독이었으면 넌 죽었을 거야. 조심해야지. -내가 있으니까 괜찮았겠지만!”

“네에….”

 

선생님 모드로 돌아온 백모래는 웬일로 빅터에게 잔소리를 남겼고, 빅터는 존댓말로 태세를 바꿨다. 나이프의 아지트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광경을, 청실과 홍실은 그저 말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에 백모래는 물었다.

 

“저기, 왜 우릴 도와준 거야?”

 

하지만 대답은 순순히 돌아오지 않았다. 청실은 시계를 보았고, 홍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것이다.

 

“시간이 없어요.”

“여기서 하나하나 말하다간 캐리엇이 들이닥칠걸?”

“출구는 아나요? 그리로 가면서 말해줄게요.”

 

빅터는 백모래와 청실 사이를 번갈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빅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으나, 현재 이 상황의 결정권자는 백모래였다. 그의 대답에 따라 이곳은 싸움판이 될 수도, 단순 구금자의 도망 현장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빅터가 원하는 것은 후자. 빅터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때리고는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백모래의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좋아. 대신 출구가 아니면 각오해야 해?”

“그럴 일 없으니까 됐네. 얼른 나와.”

 

그렇게 네 사람은 출발했다. 한 사람만 남아있던 방 안에서 네 명이 나가는 광경이란. 빅터는 미묘하게 웃으며 왜인지 나이프의 식구가 늘어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네 사람이 도망치는 길은 일사천리였다. 네 사람이 방을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중무장한 사람들이 다가와 총을 겨누거나 무기를 들었으나, 백모래나 홍실의 칼질 한 번, 청실과 빅터의 주먹 한 방에 다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애초에 캐리엇이 규격 외였다. 그 이하로는 그들을 상대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죽은 사람 반, 산 사람 반을 남겨놓고 도망치는 그들의 뒤를, 빅터는 자꾸만 돌아보려는 것을 참아냈다. 그저 눈가리개가 달린 경주마처럼 앞만을 향했다.

 

그동안 들었던 청실과 홍실에 대한 설명은 간단했다.

 

“우리는 한 규수의 반짇고리에 들어있던 실의 영물이에요.”

“그런데 실패를 빼앗겨서 실험체로 착취당하고 있었어.”

“우리를 이곳에 데려온 사람은 히어로 캐리엇. 아마 그가 그걸 갖고 있겠죠.”

“너희도 이미 캐리엇에게 찍힌 것 같은데.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힘을 합치자고 하려고 왔지.”

 

아하, 바로 옆에서 백모래가 작게 깨달음의 소리를 내는 것을 들은 빅터는 이미 그들을 반쯤은 식구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따지자면 가족까지는 아니고, 곧 동료가 될 사람일까. 백모래가 이렇게 흥미를 보이는 사람인데 어련하겠는가.

게다가 그 둘은 특기가 있었다. 접촉한 사람의 청각과 시각을 일정 시간 빼앗을 수 있는 모양인데, 캐리엇이 가져갔다는 실도 그들의 신체 일부이므로 무한대로 실의 함정을 설치하는 것으로 그에 닿은 사람을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백모래는 그 특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물론 빅터도 그랬다.

 

“그 실이 없으면 특기를 쓰기가 굉장히 까다로워지겠는걸?”

 

다만, 그게 문제였다. 결국 그들의 실이 없으면 일일이 몸으로 접촉해야 한다는 것. 순식간에 활용하기 까다롭기 짝이 없는 특기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아까 싸우는 장면으로 봐서는 싸움도 못 하는 것 같은데….

 

근접전을 못 하는데 접촉 조건의 특기라니. 상성이 최악이다.

 

결국 빅터는 청실과 홍실이 실을 되찾기 전까지는 식객 신세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손에 피를 묻히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러니까,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소리다.

 

“그 실이란 거, 이거?”

“?!”

“뭐야, 어디서 났어?!”

“그냥 빅터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찾았는데~”

 

빅터는 입을 쩍 벌렸다. 백모래의 손안에는 붉은 실과 푸른 실이 감긴 실패가 고이 들려 있었다. 용도도 모를 텐데 잘도 주웠다. 행운의 여신이 실수로 백모래를 비추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봐야 할 정도였다. 청실과 홍실은 그렇게 찾던 게 저기 있는 게 놀라웠는지 눈까지 크게 뜬 채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어느 정도는 경계하는 기색이기도 했다. 그 실을 빌미로 뭔가를 요구하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건지-

 

끼익-

그 와중에도 발은 충실히 자리를 옮겨 네 사람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보니 인적 드문 산속의 물류창고 밖. 빅터는 이곳이 처음 연구소를 발견하기 전에 본 적이 있던 바로 그곳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줄게.”

 

백모래는 선뜻 청실과 홍실에게 실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채 받아들지 못하고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그에 빅터는 무턱대고 다가가 실을 두 사람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얼떨결에 제 물건을 돌려받게 된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보 같은 표정.

빅터는 조금은 웃음을 삼켰다. 그때, 백모래가 제안했다.

 

“대신 조건은 그대로, 내 사랑을 도와줘.”

“사랑? 설마 그게 조직의 목적이야?”

“그거면 되나요?”

“응. 우릴 아는 것 같은데- 날 방해하는 게 꽤 많거든.”

 

역시 새로운 식구다. 빅터는 벌써부터 새로운 집에 그들을 수용할 방이 있을지를 고민했다. 원년 멤버 4명에 교단에서 데려온 2명, 새로 스카웃한 인원 3명에다 청실과 홍실까지 벌써 11명이라는 대인원이니 일반 가정집으로는 어림도 없을 머릿수다.

지금도 커다란 산장에서 9명이서 복작복작하게 사는 와중, 불편함이 적지 않게 느껴졌는데 더 많아지면….

 

더 큰 집, 아니면 더 많은 집이 필요한가? 빅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아요.”

“야, 마음대로,”

“대신 떠날 때는 저희 마음이에요.”

“괜찮아. 그걸로도 꽤 도움이 될 것 같거든.”

 

과연, 청실은 백모래의 제안을 수락했다. 홍실은 조금 불만스러운 모양이지만, 말을 철회할 정도는 아닌듯했다. 이제 완전히 식구가 된 것이다! 빅터는 환영의 의미로 그들에게 한 번씩 포옹을 선사했다. 영 얼떨떨해 보이는 표정이 바보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빅터는 이제 슬슬 타이밍이 되었다 싶어 손을 들었다. 아까부터 들었던 의문을 물어볼 차례인 것이다.

 

‘밖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보스, 다들 어디 있어? 밖에서 기다린다면서.”

 

그래, 백모래는 방금 분명 빅터를 달래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하지만 넷이서 나온 입구는 어떤가. 텅 비어있는 공터가 아닌가? 빅터는 그게 의문이었다.

 

게다가, 가끔 바보짓을 하는 백모래의 특성상 아예 모를 가능성도 없잖아 있-

 

“음, 그러고 있을 거라는 예상이었는데… 없네?”

 

었다.

 

“그럼 형아는?”

“사실, 오르카도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어디 갔을까?”

“보! 스!”

 

결국, 빅터가 날아올라 백모래를 덮쳤다. 다짜고짜 무거운 무게에 짓눌린 백모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으나 가만히 응징을 받아주었다. 그 모습에 청실과 홍실은 중얼거렸다.

 

“…내가 맞는 선택을 한 걸까요.”

“지금이라도 무르던가.”

“그래도 은혜는 갚아야….”

“보스가 낙오돼서 잡힐 위기에 처한 조직에?”

“…”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는 소리가 공터를 울리고서야, 빅터는 백모래를 놓아주었다. 탁탁, 먼지를 털며 일어난 백모래는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으나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주변에서 딱히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는 뜻이다. 결국 빅터는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그때,

 

보송보송.

“응?”

 

빅터의 손 곁에 뭔가 보송보송한 것이 느껴졌다. 그에 바로 옆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빅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자그마한 토끼가 있었다.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마주친 것이 3초.

 

“…보스!”

 

빅터는 바로 백모래를 불렀다. 아무리 산에 들에 뛰어노는 빅터여도 동물들이 자의로 다가올 리가 없다. 결국 이 토끼는 누군가가 보내온 것이라는 소린데, 빅터가 알기에 동물과 이 정도로 소통할 수 있는 특기자는 ‘그’ 한 명 뿐이었던 것이다!

 

“록산느야! 토끼를 따라가자!”

“그래? 가자!”

“믿어도 되는 거 맞겠지?”

“확실히 동물이 이 정도로 경계심이 없는 건 이상하니까요.”

 

빅터의 강력한 주장에 남은 세 사람은 끌려갔고, 결과적으로 모두는 빠르게 토끼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토끼가 빠르기는 했으나 두 강화된 인간이 영물 둘을 하나씩 끌어안고 뛰어가니 쫓아가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빅터는 모두의 무사를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에 특히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 그곳에는-

 

“빅터! 괜찮아?”

“…형아.”

 

빅터의 가족이 있었다.

 

자신이 보낸 토끼를 회수하며 무어라 말을 하는 록산느, 낮에 봤던 그 큰 트럭에 올라탈 것을 재촉하는 라드, 그 뒤에서 과자를 씹는 가리, 나름 걱정했다는 얼굴로 오르카와 함께 빅터를 끌어안아 오는 레이디, 배가 고플 테니 일단 뭐라도 먹으라며 빵을 챙겨주는 세월.

 

그리고 메두사는, 빅터가 확인할 수 없는 얼굴로 다가와 애써 웃으며 빅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거기서 왜 대신 잡혀간 거야, 빅터.”

“그야, 얼음 아프고 차갑고….”

“바보 빅터, 왜 어른 말 안 들어?”

“레이디 누나도 그렇게 잘 듣진 않잖아!”

“둘 다 피장파장이야.”

“세월! 누구 편이야?”

 

순식간에 소란해진 공터. 빅터는 청실과 홍실의 소개조차 잊고 레이디와 투닥거렸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싸우고 있었단 걸 생각하면 위화감이 들 정도의 장면전환이었다. 결국 빅터는 라드의 재촉을 세 번쯤은 더 받고 나서야 트럭에 올라탔다.

 

“그래서, 이 둘은 누구?”

“아, 청실이랑 홍실. 이번에 새로 영입했어!”

“안녕하세요.”

“…뭐, 당분간 잘 부탁해.”

 

-그 뒤는 어쨌든, 어른들의 일. 빅터는 트럭의 짐칸에서 새 날의 해가 떠오르는 저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이미 환영을 덧씌운 트럭은 쫓기가 불가능에 가깝고, 남겨둔 단서는 없으니 나이프는 무사할 것이다.

 

아, 마일로.

 

빅터는 그제야 우당탕탕 도망치던 마일로의 뒷모습을 생각해냈다. 나이프의 무사는 다 확인했는데 그의 무사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도, 일반인이니까 괜찮을 거야.

분명 근처에 포트가 있을거고, 그들은 히어로라는 입장이니까 함부로 마일로를 구해줬을 거라는 계산 속이었다. 빅터는 다시 마음을 놓고, 다음에 만날 수 있을지의 걱정이나 하기로 했다.

민간인과 빌런, 그것도 이제 어디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그마저도 용기내어 그를 찾아갈 수 없는. -마지막으로 그가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빅터가 결국 빌런이라는 선고. 빅터는 그런 마일로를 실망시키기 싫어서. 이미 많이 실망시킨 것 같아서. 사실 이것이 최선의 이별인 것 같아서, 결국 그를 나서서 찾기를 포기했다.

 

지금의 빅터는 빌런이니까.

 

빅터는, 이제 자신이 히어로를 꿈꿀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 상황을 제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역시도.

 

“마일로, 또 볼 수 있을까?”

“이제 이사도 가니까, 힘들걸? 인사 못했네.”

“아,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부탁하고 왔는데. 괜히 그랬나?”

“보스가 마일로 도와줬어?”

“응. 몸 건강히 탈출했는걸.”

 

뭐, 알게 뭔가. 지금은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빅터는 더 이상의 생각을 포기하고 슬슬 눈을 감았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긴 밤이 여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곧 펑- 소리와 함께 연구소가 무너지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좀 자 둬, 빅터.”

“응, 형아….”

 

그렇게 해가 떠오르던 때. 빅터는 드디어 가족들 곁에서 때늦은 깊은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오르카의 피 자욱 묻은 손을 채 보지 못한 그대로.

 


포트의 긴 새벽의 날로부터 여러 날이 흘렀다. 절대 그들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 아닌 그 사건은, 포트에게 여러 불명예를 안겨주고 떠나갔다.

간부의 정보로 기껏 잡을 수 있었던 나이프 조직원을, 또 다른 나이프 조직원의 침입으로 놓친 날. 나이프의 행동대장 빅터를 간부로 넘겼으나, 탈출하여 인질조차 겨우 구조한 날. 아지트를 털어냈지만 이미 아지트를 버릴 생각이었는지, 어떤 흔적도 제대로 잡지 못한 날….

 

간부들은 히어로 조직 포트의 능력을 의심했고, 포트 측에서는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우선순위가 갈릴 수 없었다며 해명했다. 그에 사례로 든 것은 나이프의 폭탄 테러. 예기치 못한 폭탄 테러로부터 시민을 구조하고 보호하느라 차출된 히어로가 제법 많았다는 것이다.

결국 변명의 요지는 시민의 안전과 범죄조직의 일망타진,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실수를 했다는 소리다. 전담팀의 필요성과 인력 부족을 동시에 피력하는 해명이 되겠다.

 

-그리고 그것은 좀 이른 냅킨 조직의 계기가 되었다. 무더운 8월 초의 날이었다.

 

“저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요.”

“이제 곧 하잖아. 그동안은 알바한다고 생각하고 학교 끝난 뒤에 4시간만 근무해.”

“곧….”

 

‘이게 맞나’ 싶은 눈으로 서장, 마티오를 바라본 다나는 다시 앞을 보며 서장실을 향해 걸었다. 물론 포트의 서장실이었다. 나이프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며 그들을 불러온 세이지는 그사이 부쩍 늙은 듯한 목소리였는데, 다나는 기꺼이 이해하며 조금의 불안을 느꼈다.

 

나도 곧 저러면 어쩌지?

 

…정도의.

 

어쨌든 포트에서 나이프를 잡느라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랴 이런저런 고생이 많다는 걸 뉴스에서 두들겨 맞는 모습으로 잘 보았던 다나는 어떤 말이든 무난하게 들어 넘길 생각이었다. 사실 오늘 부르는 것도 단순 인수인계니 잘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었고….

 

똑똑,

아, 마침내 서장실 문 앞에 도착했다. 오늘로부터 며칠간 얼굴을 비추면 이제 한동안은 오지 않을 곳이었다. -냅킨 건물은 따로 있으니까.

 

“들어와.”

“네엡-”

 

그런데, 서장실에 있는 사람은 서장 세이지 한 사람뿐만은 아니었다. 온통 회색의 색을 가진 누군가가 서 있었으니까.

그 남자의 피곤하고 졸려 보이는 눈매는 유독 퀭하고 다크써클이 짙어 제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머리카락이며 눈썹 색도, 눈동자 색도 회색이라 더욱 노인 같은 인상이 있었다. 주름 하나 없는 나름 말끔한 얼굴이 아니었다면 40대로도 오인할 정도였다.

 

“마침 잘 왔군. 냅킨에 들어갈 신입이자 의뢰인이다.”

“네?”

“신입인데 의뢰인 말입니까?”

 

세이지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남자의 이름을 소개했다. 마일로라고 했던가. 생긴 대로 유약하고 온순할 것 같은 이름이라며, 다나는 잠시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 그때, 옆에서 마티오가 유난스럽게 반응했다.

 

“아! 빅터의 인질!”

“…역시 그렇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

 

세이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일로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이 중에 포트의 ‘그 밤’을 뉴스로만 접했던 다나 혼자 상황을 몰라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야 했다. 그제야 마티오가 큼, 큼 헛기침을 하며 설명해 주었다.

 

“뉴스에도 나왔던 그 밤중에 있었던 폭발 사건 말이야, 그거 사실 나이프 조직원들이 당일 잡힌 그들의 조직원을 구하려고 벌인 일이었거든. 당연히 그중 빅터도 있었는데, 그의 인질이 이 사람이었어.”

“예에….”

“그것뿐이라면, 굳이 냅킨에 들어올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타당한 지적!”

 

그리고 다나의 의문은 마티오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세이지에게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세이지는 한숨을 쉬며, 어차피 설명해줄 거였다는 듯이 한 손을 저었다.

 

“줄여서 말하자면, 마일로는 나이프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하고 있다.”

“나이프요?”

 

다나는 화들짝 놀라 대답하는 마티오의 옆에 서서 마일로의 표정을 살폈다. 피곤한지 연신 눈가를 비비는 그는 어째선지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일로는 캐리엇 연구소 출신이다.”

“아.”

“?”

“아, 다나는 잘 모르지. 캐리엇 간부님이 빅터의 신병을 요청하셔서 데려갔는데, 그곳이 연구소였어. 나이프 녀석들이 빅터를 구하러 오는 바람에 다들 몰살당했지만- 어, 그럼 마일로 씨는 그 유일한 생존자인가요?”

“그래.”

 

몰살. 그 무거운 단어가 입 안을 까끌하게 굴러다녔다. 다나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단어를 견디고 이곳을 찾아온 마일로가 의외로 독종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의외로 생존력이 엄청나다던가. 힘을 숨긴 누군가라던가.

 

“그리고-”

“…나이프의 신상을 알고 있어요. 실험내용까지 전부.”

 

그런 마일로는 세이지의 말을 끝맺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은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옆에 있던 마티오가 흠칫할 정도로.

 

일반인은 나이프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간부의 입김이 들어간 일이기도 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나이프를 지명수배범으로 만들면 분명 목격자를 전부 다 죽이고 다닐 인간들이니까.

 

-라고, 다나는 들었었다. 그런데 하물며 그들의 실험체 이력까지 알고 있다?

 

“그날 밤, 나이프는 캐리엇 연구소를 습격해 실험 내용을 삭제하고 갔다. 백업까지, 모든 정보를 구석구석, 전부 말이지.”

“실험 내용이라면?”

“말 그대로 모두. 특히 나이프의 4인이 당한 실험의 내용 말이다.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정보를 지우고 불태우는 행보를 보면 마일로 역시….”

 

그들의 목표가 될 수 있겠지.

세이지의 말이 끝나고, 마티오는 굵은 침음을 흘리며 턱을 괴었다. 다나는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치고 마일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최근까지 생명의 위협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까?”

“어, 네.”

“어느 정도죠?”

“그냥 하루에 한 번, 갑자기 총알이 날아올 정도로… 늘 히어로를 불러서 보호받았죠.”

“저기, 대체 그 며칠간 어떤 삶을 사신 건지,”

 

그리고 그 대답에 대한 마티오의 반응은 격렬했다….

다나는 마일로의 얼굴이 퀭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능력 하나 없는 일반인이 주기적으로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다면 불안감에 잠도 못 자는 게 당연하다. 그런 날을 의심이 확신이 될 때까지 계속.

 

“나이프 놈들,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어쨌든, 그래서 마일로는 이제부터 냅킨의 힐러이자 연구원으로 활동한다.”

“그,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요.”

 

그런 마일로의 상황을 헤아리기를 몇 분간. 그들은 어쨌든 이 화제를 마무리했다. 이 일을 더 질질 끌기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마일로는 사원 숙소로 향한다고 목적지를 밝히고는 느긋하게 인사하며 자리를 피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인수인계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그래서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

 

“-나이프 짓 아니라니까… 이걸 뭐라 해명하지도 못하고.”

 


 

“…그래? 놓쳤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난 쓸모없는 건 바로 버린다는 주의야.”

“그것, 만은 제발…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너흰 이미 증명의 기회를 놓쳤어.”

 

어차피 일회용이었을 어떤 조직의 수장이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방에서 걸어 나간다. 온통 흑색으로 가득한, 색을 잔뜩 빼앗긴 듯한 가죽 소파에 기대앉은 온통 적색의 여자는 마티니 잔에 올리브와 함께 담긴 블랙 마티니로 입을 축였다.

당장 한 명을 단 한 번의 폭력 없이 재기불능으로 만든 것치고는 딱히 분노 한 점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사실 일부러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쓸모없는 자를 제거하기 위한 함정이었던 것이다.

 

“제법 아쉽네…. 제법 실적이 좋았으니, 납치해오면 수석 연구원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는데.”

 

어렵게 살린 실험체의 관리인력이 필요하단 말이지.

톡, 톡,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굵직한 손가락이 시계의 초침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귓가의 희고 말간 귀걸이가 유난히 쨍한 조명 아래 반짝- 빛났다.

 

달칵-

“언니. 연구소가 망했다면서요?”

“파메로, 맡은 일은 하고 오는 거냐.”

“아아, 물론이죠. 그나저나 아깝네요. 무슨 내용인지 저도 알고 싶었는데….”

 

그때, 그의 유약한 동생, 파메로가 성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평소와는 달리 묘하게 생기 넘쳐 보이는 이 귀여운 동생은 버르장머리 없게도, 그의 하늘 같은 언니를 적대하는 성향이 있었다.

 

뭐, 그야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수준이니 캐리엇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네 알 필요 없으니 윗 상관이나 모시러 가는 게 어때?”

“안부 물으러 오는 게 뭐 어때서. 그래서 연구소 건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눈여겨본 실험이 있어. 그걸 진행할 거고- 맞는 실험체가 확보될 때까지 일단 중지다.”

 

그래, 연구소 건은 중지다. 지금은 타이밍이 맞지 않으니.

캐리엇은 발을 까딱거리며 다시 잔을 들었다. 친애하는 동생의 소식을 잡아 찌르며.

 

“그래서, 내 쪽 연구원이 물어다 준 정보는 잘 감상했나?”

“…이런, 벌써 들켰네. 뭐, 예상했지만요.”

 

하지만 꼬리가 밟힌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샐쭉하니 웃으며 올리브를 입에 물었다. 오히려 당당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꽤 예민하셨네요. 혹시 찔리셨나요?”

“그럴 리가 없지. 오히려 너치고 꽤나 대놓고 행동하더구나.”

“그야 이건 잭팟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언니가 찾는 그 실험체. 당신 손으로 들어갈 일은 없을 거예요.

 

꼭 닮은 적색의 눈꼬리가 느슨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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