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초상에 대해서
빌 셴하이트 드림
“아이렌, 슬슬 돌아가야지.”
파도 소리가 주변을 뒤덮고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는 오후의 해변.
빌은 젖은 모래와 마른 모래의 경계선을 걷고 있는 후배에게 차분하게 귀가 시간을 통보했다.
반쯤 넋을 놓고 난색으로 물드는 수평선을 바라보던 아이렌은 그제야 빌을 향해 돌아보더니,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벌써요?”
“무슨 소리니. 우린 그냥 사전 답사 겸 온 거야. 늦지 않게 돌아가야지.”
‘으음.’ 앓는 소리와 함께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린 아이렌은 잠깐 고민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저 두고 먼저 가세요. 어차피 오늘은 답사 외엔 특별히 계획된 일도 없었잖아요? 저는 조금 더 있다가 갈래요.”
확실히 오늘 영화연구부 활동은 다음 촬영장소인 학교 근처 해변을 둘러보는 게 다였지. 그러나 지금 하늘을 보면, 조금만 지나도 어둠이 찾아올 게 훤히 보이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어두워진 바닷가에 제 몸을 지킬 마법도 못 쓰는 여자애를 두고 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후배를 반쯤 뜬 눈으로 바라본 빌은 결국 친히 모래사장으로 발을 디뎠다.
“어떻게 널 혼자 두고 가니?”
“저는 6살짜리 애가 아닌데요.”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쯧. 가볍게 혀를 찬 그는 아이렌의 바로 옆에 섰다.
바닷바람에 살랑이는 결이 좋은 금색과 라벤더색의 머리카락에 절로 시선을 빼앗긴 아이렌은 힐끔힐끔 빌을 살피다가 멋쩍게 웃어버렸다.
“제가 걱정되어서 이러시는 거라면 그냥 가셔도 돼요. 선배는 바쁘시잖아요.”
“경치가 좋아서 좀 더 보고 갈까 하는 거니, 너야말로 신경 쓰지 말렴.”
거짓말 같은데. 하지만, 증거도 없이 수상하다 여기면 오히려 제가 한 소리 듣겠지.
빌에게는 괜한 소릴 해봐야 자신만 손해인 걸 아는 아이렌은 마음 속 의혹을 모른 척하고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화면으로 찍어도 이 아름다움이 그대로 담기진 않겠죠?”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여 일렁이는 바다. 수평선에 발을 걸친 붉은 태양. 나란히 줄을 선 구름이 마치 구겨놓은 비단처럼 보이는 하늘과 반짝이는 모래까지.
강렬한 시각적 자극을 두 눈 가득 담은 빌은 감상에 젖지 않고 냉철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건 장비와 기술 나름이지. 원래 카메라라는 건 기계 자체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찍는 사람에 따라 결과물이 꽤 다르게 나오니까.”
“하긴. 그러니 사진작가가 있고 촬영 감독이 있는 거긴 하죠. 저는 소비만 하는 사람이라 잘은 모르지만.”
제가 모르는 것에는 최대한 말을 얹지 않는다. 이 얼마나 현명한 자세인가.
빌은 자신 만큼이나 이성적인 후배의 옆모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때맞춰 자신을 바라보는 제비꽃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었다.
아이렌도 이렇게 눈이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 걸까. ‘아’하고 짧게 탄식한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쨌든, 촬영이 잘 되면 좋겠네요.”
“꼭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너도 영화연구부고, 심지어 각본가잖아?”
“총감독은 선배니까요. 저는 글을 쓴 시점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소리니? 네가 쓴 각본대로 촬영되는지 잘 봐야지.”
“그건 저보다 선배가 더 잘 봐줄 거 같은데요. 저는 글만 쓸 줄 알지, 촬영엔 조예가 없는걸요.”
이건 겸손이 아니라 직무유기 아닐까.
물론 아이렌은 제 작업물에 애착이 강한 사람이니 무책임하게 굴려고 저런 말을 한 건 아닐 거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의도가 아니라 결과이지 않은가. 빌은 학교 선배이자 예능인으로서 아이렌의 태도를 지적하려다가, 상대가 먼저 입을 여는 바람에 숨을 삼켜야 했다.
“애초에 글로 무언가를 전하는 것과 영상이나 사진, 그림으로 무언가를 전하는 건 좀 다른 영역의 문제니까요. 어느 쪽도 쉽지 않고, 결도 다르죠. 영상과 사진도 좀 다르고…….”
시선은 바다 저 너머를 보고 있지만 정작 아이렌의 눈동자에는 파도의 일렁임이 담겨있지 않았다.
상대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그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아이렌의 속내를 듣기 위해 기꺼이 대화에 어울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지 않니?”
“맞아요. 같은 풍경도 어떤 구도로 어떻게 찍냐에 따라 결과물이 다르게 나오는 게 재미있잖아요. 찍히는 건 싫지만 찍는 건 좋아요. ”
“그건 싫어한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좀 지나친 거부라 생각하는데. ”
“하지만 저는 영정사진도 안 찍고 싶은 사람인걸요.”
그건, 진짜 심각한 것 같은데. 빌은 극단적인 대응에 저도 모르게 한숨 쉬었다.
물론 ‘늙고 병든 내 모습 같은 걸 찍어두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로 영정사진을 따로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간혹 봤지만, 그들은 적어도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은 사진으로 남겨두지 않던가.
그에 비해 이 계집애는, 아무리 보기 좋은 모습이라도 제 모습이 남는 걸 거부하니 어찌나 기묘한지. 남들의 시선이 없다면 사라질 직업을 가진 그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아쉽지 않니?”
“아쉽다뇨? 어떤 게요?”
“그 시간과 세월은 담아둘 수 없지만,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두면 조금이나마 지금을 남길 수 있잖니.”
“꼭 사건 현장 증거물 촬영처럼 말이죠?”
비유를 꼭 저런 식으로 해야 하나.
그러나, 평소 아이렌이 사용하는 어휘와 가치관을 생각하면 특별히 어색한 비유이진 않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웠지. 그러니 악의를 품고 굳이 저런 식으로 말한 건 아닐 테다.
빌이 상대의 각본과 그 외 다른 자잘한 글의 문장들을 되짚어보며 누굴 위한 건지 모를 변명거리를 생각해내는 사이. 여전히 어딜 바라보는 건지 알 수 없는 아이렌은 계속해서 내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애초에 굳이 남겨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형태를 가진 모든 것들은 절대 영원하지 않은걸요. 그림을 그려두어도, 사진을 찍어도, 그 모든 것들은 언젠가 빛이 바래 사라질 거고 저를 기억하는 이들도 영생을 살지 않는데.”
“너는 다른 이들을 남기려고 하면서, 너는 남지 않겠다?”
“그거야 제 개인적인 흥미를 위해 남기는 거니까요. 저는 보기보다 훨씬 이기적이거든요. 그리고 저도 사진 찍기 싫다는 사람을 찍진 않아요.”
글쎄다.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애초에 상대 의사 같은 건 묻지 않고 셔터를 누를 거다. 애초에 아이렌은 다소 독단적인 면모가 있어서 그렇지, 이기적이라고 하기엔 심히 무른 면이 있는 아이지 않던가. 아니, 그건 무르다기 말하기보다는 섬세하다고 말하는 게 좋을까.
그는 눈앞의 파도보다도 불규칙하게 일렁이는 아이렌의 내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대화에 집중했다.
“사람은 보이는 것을 남기려고 하니까 고통스러운 걸 거예요. 하지만 보이는 건 중요하니까,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 생각해요. 오감이라는 건 사고 능력을 사용할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사람에게 생각과 감정을 느끼게 하니,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게 중요한 걸 아는 사람 치곤, 너는 보이는 것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잖니.”
“그런 거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물론 아름다운 걸 좋아하긴 하지만, 향유자인 저까지 아름다울 필요는 없죠. 선배처럼 미모 그 자체가 예술인 경우라면 모를까, 전 그런 미인도 아니잖아요?”
빌은 그 자신만만한 말투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 지었다.
마치 세상 모든 것들이 미학적 가치를 평가받는다고 하여도 자신은 절대 대상화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는 말투이지 않나. 저 혼자서 세상에 유리된 존재라는 듯 떠드는 꼴이란. 참으로 어이가 없다.
“저는요.”
앞만 바라보느라 옆에 있는 빌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아이렌은,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눈에 바로 보이는, 이 언젠가 사라질 이 몸뚱이는 어찌 되어도 좋아요. 살아남는 건 의지이지 사람이 아니니까요.”
바닷바람에 차가워지는 뺨을 훔치는 손은 노을빛을 받아 다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숯처럼 불이 붙어 타들어 간 후 스러질 것 같은 다섯 손가락에 완전히 주의를 빼앗긴 빌은 목소리를 내는 법도 잊고, 그저 귀에 들어오는 소리를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저는 얼굴로 먹고사는 직업을 가질 것도 아니니까, 사진으로 자취를 남기는 것보단 뭐라도 한 글자 더 써 남기고 싶어요. 저를 떠올릴 때 얼굴은 잊어버리게 되더라도,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의지로 살아갔는지 떠올려 줄 사람이 더 좋으니까요.”
그건 남겨진 이들을 외롭게 만드는 처사다.
그러나 이 점을 지적해도 아이렌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왜 외롭다고 느끼는지도, 심지어 외로움을 나쁘게 말하는 것조차도. 이 애는 이해하지 못할 거다. 아이렌은 실체만 여기 있을 뿐, 추상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니까.
“물론 모두가 그래야 한다는 건 아녜요. 이건 그냥 제 이야기일 뿐이죠. 아까도 말했지만, 글과 그림은 둘 다 예술이지만 표현 방식만 다른 거잖아요? 저는 전자를 선택한 거고, 누군가는 자신의 발자취를 사진이나 초상화로 남기는 걸로 후대에 널리 영감을 줄 수 있을 테고요.”
“마치 그레이트 세븐처럼?”
“그렇죠. 그리고 아마 선배도 가능할 거예요. 아무리 먼 미래의 사람이라도, 누구든 이 노력과 탐미로 가꾼 모습을 기록한 화상을 본다면 만나보지도 않았을 선배와 사랑에 빠질걸요?”
참으로 듣기 좋은 칭찬이다. 저 또한 그러길 바라고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제 뮤즈가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지.
어느새 빌은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는, 해구같이 깊은 후배의 마음속에 푹 빠져 있었다.
“초상(肖像)에 현혹되어 살아가는 인간도 결국 필멸하는 존재니까, 그런 이들에게 제가 가진 뭔가를 남긴다면 의지인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요. 형태가 있는 모든 건 결국 소멸하기 마련이지만 형태가 없는 건 어떤 형식으로도 이어지잖아요? 그리고 때론, 눈에 보이는 형태가 없기에 더 오래 살아남는 것들도 있고요.”
거기까지 말한 후 고개를 돌린 아이렌의 눈동자에는, 제대로 빌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확실하게 제 옆에 선 이를 응시하고 있는 그는 뺨을 문지르던 손을 뻗어 빌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누군가와 추억을 남기고 싶다면,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이렇게 대화를 하는 편이 더 좋더라고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곱씹을 때마다 지금의 풍경과 날씨를 떠올릴 테고, 혹은 이 장소에 올 때마다 제 말을 다시 기억해 낼 테니까요.”
과연. 상황을 기억해내지 못할 사진보다는 찢고 불태울 수도 없이 영혼 깊게 새겨질 기억이 낫다는 것인가.
빌은 장갑을 끼고 있기에 제대로 체온을 느낄 수도 없음에도, 괜히 아이렌의 손을 꽉 쥐어 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잊어버릴 정도의 존재라면, 그냥 잊힐래요.”
그건 어쩔 수 없이 잊히겠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잊히길 바라는 사람의 말 같았다.
하지만 빌은 이 대화와 풍경, 바람의 온도, 주황색 필터가 덧씌워진 얼굴과 쥐고 있는 손의 굴곡 하나까지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모든 감각에 집중했다.
그 열중하는 모습을 알아보기라도 한 걸까. 잠깐 말을 멈추고 그림처럼 가만히 있던 아이렌은, 진지한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라는 듯 과장되게 웃어 보였다.
“……뭐, 요즘은 생각하는 게 귀찮아서 장문은 3줄로 요약하고 영화도 리뷰 영상만 보며 대중가요도 1분 쇼츠로 듣는 시대에 글과 의지와 사상을 운운하는 건 시대착오적이겠지만요. 모든 건 시대에 따라 흥하고 쇠하는 법이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쪽이 사라져 줘야겠지요.”
익살스러운 톤으로 말하며 슬쩍 손을 뺀 아이렌은 이만 돌아가자는 듯 바다를 등진다.
그때.
“에취!”
해가 져가는 해변의 바닷바람은 추위에 약한 이가 견디기엔 너무 차가웠던 걸까. 아까까진 멀쩡한 것 같던 아이렌이 어깨를 요란하게 떨며 재채기한다.
‘후우.’ 참아온 숨을 깊게 내뱉은 빌은 교복 재킷을 벗어 아이렌의 어깨에 얹어주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자, 이거 입으렴. 추위도 많이 타면서 왜 바닷바람을 쐬고 있던 건지.”
“……설마, 이걸 예상하고 남으신 거예요?”
“글쎄?”
지금은 대답해 주지 않는 편이 좋겠지. 사소한 것이라 하여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저 머릿속에 남아있어야, 이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할 테니.
명석한 그는 상대의 생각을 그대로 이용해, 오늘의 추억을 파괴할 수 없는 불멸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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