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5. 빅터와 초코칩쿠키 (4)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3
0
0


 

빅터는 마일로를 찾아가기로 한 아침부터 열심히 쿠키를 구웠다.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재물용이니까 아아주 많이. 덕분에 요즘 들어 빅터를 살살 건드리던 사소한 고민들은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다만 수업을 듣지 않은 빅터에 대한 오르카의 잔소리가 유난히 귀를 두드리고 있을 뿐이다.

 

“빅터, 그러니까 숙제는 꼭 해야-”

“그럼 다녀와서 할게!”

 

-결국, 빅터는 레이디를, 오르카조차 남겨두고 집을 나섰다. 오늘치의 수업과 숙제를 빼먹은 것은 다음날인 주말에 몰아서 하는 것으로 미뤄버린 채.

 

“으음,”

 

좀 이르긴 하지만, 뭐.

그들의 약속 시간은 대게 4시쯤, 늦은 오후였다. 오전에는 백모래의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서는 숙제를 하거나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마일로는 함부로 나올 수 없는 직장인이었고.

하지만 지금 빅터가 나돌아 다니는 시간은 3시. 마일로가 있을 리가 없는 시간이었다. 빅터는 예전에 으레 그랬듯이, 연구소의 정원으로 침입해 마일로의 연구실이 있는 창가에서 그를 구경할까 생각했으나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 떠올라 시무룩해졌다. 이대로는 마일로를 위해서 구운 쿠키를 제가 까먹으며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마일로 형?”

 

그는 어쩐지 본래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나와 있었다.

 

“…! 깜짝이야! 뭐야, 안 다쳤네.”

 

그것도 걱정했다는 얼굴로, 다행이라는 얼굴로 눈에 띄게 안도하며. 빅터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물었다.

 

“나 기다렸어? 걱정했어?”

“그럼 안 하겠냐. 그동안 거의 매일 같이 출근 도장 찍던 애가 갑자기 안 나오는데. 연락할 수단도 없고.”

“…! 기다려! 내가 록산느한테 새 한 마리 붙여 달라고 할게! 아님 무전기 받을래?”

“아니, 그냥 평범하게 핸드폰 번호는 안 되는 거야?”

“그건 안 돼. 우리 집에 전화기 없어.”

 

거긴 대체 뭐 하는 집안이야.

마일로가 잔뜩 질린 얼굴로 뭐라고 하든 말든, 빅터는 희희낙락 웃으며 그에게 초코쿠키가 가득 들어찬 봉투를 안겨주었다. 한 바가지는 되어 보이는 쿠키의 양에 기함하는 것은 마일로의 몫이었다. 빅터는 그새 먼지가 꽤 들어찬 돗자리 위를 손으로 석석 쓸었다. 바삭하게 마른 낙엽이며 흙들이 쓸려나갔다.

 

마일로는 그 위에 덜렁 드러누운 빅터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왜 안 나왔는지 이유나 좀 듣자. 날 일주일이나 바람맞혔잖아.”

“아- 음, 그건-”

 

벅벅,

빅터는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음, 히어로 조직 포트에게서 쫓기고 있는데 요상한 내용을 들었다. 그 내용을 누가 알려줬는지 알아야 해서 포트를 털었다. 그 사이에 이래저래 기분이 별로라서 놀러 가지도 않고 가만히 TV나 보고 있었단 걸 어떻게 말하겠는가.

결정적으로 마일로는 빅터가, 나이프가 뭐 하는 조직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빅터 역시 빌런의 정체를 알아버린 일반인의 최후- 의 클리셰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끙, 하는 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그냥, 기분이 안 좋았어.”

“네가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어?”

“그거 무슨 의미야?”

 

빅터는 부우, 볼을 부풀리며 단번에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의미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나쁘다며 눈길을 보내는 것에 마일로는 손을 힘을 주어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답했다.

 

“그래, 들어나 보자. 뭐 때분에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응?”

“말해보라고. 너- 지금도 별로 평소 같지는 않거든.”

“내가?”

 

빅터는 그제야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지며 나이프에서의 반응을 그렸다.

평소보다 빅터를 유심히 바라보던 메두사의 눈빛, 오르카의 걱정, 세월의 한숨 같은 것들이 모여 빅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빅터만 모르고 있었다. 나이프는 빅터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쩐지 수업을 쉽게 빼준다 싶었는데….

 

기분이 좋지 않은 거야 짐작 가는 게 있다. 빅터도 바보가 아니니까. 다만 그것을 말로 구체화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빅터의 전부를 말할 수 없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마일로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감정의 덩어리에서 고작 몇 개의 가루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말했다.

 

“다 말할 순 없어. 그럼 마일로 형 죽을지도 몰라.”

“뭐? 무슨 범죄 얘기라도 돼?”

“…”

 

마일로는 빅터가 눈을 도록도록 굴리고만 있는 것에서 이미 답을 알아낸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한숨을 쉬곤 머리를 버석버석 문지르는 것이다.

 

“그럼 대강 말해 줘. 특정 안 되게, 아니, 특정이란 말을 모르나? 아, 누군지 모르게.”

“음….”

 

그렇게 궁금한가?

빅터는 마일로의 영 걱정스럽단 얼굴을 보며 어쩐지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 그렇게 해볼까~하는 허술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입에 달린 지퍼를 풀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간단했다.

 

“마일로 형은 만약에 친한 사람이 내 친구를 죽였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거 진짜야?!”

 

‘만약에’.

눈 가리고 아웅이다. ‘만약’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그게 빅터의 일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빅터가 알기에 누군지 모르게 하고 말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에 무척이나 놀란 듯한 마일로는 괜히 들었나, 싶은 얼굴로 한숨을 쉬거나 몸을 일으켰다 다시 앉거나를 반복하다 당연하고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신고해야지. 그리고 절연하지 않을까.”

“근데 신고 못 해. 형도 범죄자거든. 엄, 폭력배? 양아치?”

“이게 무슨 밸런스 게임도 아니고….”

 

이제 빅터는 엎드려 누워 흥미진진하게 마일로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일로는 진지한 얼굴로 턱까지 짚고서 눈을 감고 있었다. 누가 보면 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래도 신고해야지. 같이 경찰서 가자.”

“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빅터는 그 대답을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 보았다. 백모래를 제압하고 포트 앞에 데려가는 빅터. 하지만 그걸 가족들이 가만두고 볼 리가 없다. 이미 몸을 의탁한 식구들은 ‘나이프’가 아니면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의 집합이었다.

몸만 튼튼한, 게다가 오르카와 빅터라는 약점이 달린 여자인 메두사. 나이가 끝없이 어려지는 병의 세월과 그 껌딱지인 레이디. 계속 도망가지 않으면 잡혀갈 처지의 가리. 이전처럼 웃는 장식품 신세로 전락해야 할 록산느. 그나마 독립할 만한 사람은 라드인가.

 

그렇다면 큰 확률로 백모래는 구출되고 빅터는 버려지거나, 호되게 혼나게 될 것이다. 그 이상은 상상하기 싫다. 버려지는 것도 최악이다. 빅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이 없으면 뿔뿔이 흩어져야 하거든.”

“…그 사람, 아버지라거나 그런 거야?”

“에, 그럼 누나가 화낼 텐데.”

 

빅터는 메두사가 ‘이 화상이랑 나를 지금 엮는다고-?!’ 하며 화를 낼 것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아니지만 대충 비슷하다고 답하며. 하지만 그렇게 답하고 보니 덧붙일 말이 많았다. 그래서 얼떨떨해진 마일로의 얼굴 위로 속사포처럼 쏟아내었다.

 

“-사실 벗어나려고 했는데, 안 된대. 불가능하고, 그래봤자 더 힘들어진대.”

“그래서 다 클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점점 더 감당할 수 없게 죄가 쌓여 가. 이젠 모두가, 결국, 나도… 변해가는 것 같아서 무서워.”

 

어느새 빌런의 정체를 알아버린 일반인의 최후- 의 클리셰 같은 건 잊어버렸다. 빅터는 그제야 제 내면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어떤 불안의 정체를 직면한 것이다. 동공이 꽉 죄어들고, 숨이 가빠지는 기분에 빅터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안 좋았다. 이런 건, 실로 오랜만의-

 

“-터, 빅터! 정신 차려! 내가 미안해, 미안하니까-”

“…형.”

 

서러움이었다.

마일로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챙긴 빅터는 다시 울망한 눈으로 마일로를 바라보았다. 길 잃은 아이의 눈이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아이의 눈이기도 했다. 그것을 본 마일로는 뭔가를 후회하는 눈이었다. 동시에 너무 놀라 도리어 침착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말하는 것이다.

 

“네 하고 싶은 대로 해.”

“에.”

“그건 이미 네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히어로라도 나와서 정리해주면 모를까.”

“하지만….”

“알아. 일이 그렇게 됐으면 이미 잡히고도 남았겠지. 그냥, 내가 하려는 말은….”

 

변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만, 그대로 지키라고.

빅터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돗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어린이용을 두어 개 사서 대충 붙여 돌로 고정해놓은 돗자리에는 귀여운 곰돌이와 여우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따지자면 잰 여우보다는 단순한 곰 쪽이 어울릴지도 모르는 빅터는 어쩐지 그걸로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들었다.

 

“그걸로 되는 거야?”

“끄응, 넌 그래도 착한 애니까. -아, 잘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냥 그게 네 탓만은 아니라고 하는 거야.”

“…”

“네 정신 연령에 맞춰서 생각해봤어. -고작 10살도 안 된 애를 상상해보니까 너를 혼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은 거야. 잘못한 건 어른 쪽이지.”

 

빅터는 대뜸 다가와 자신을 품에 안는 마일로에게 끌려갔다. 머리부터 폭, 하고 마일로의 패딩 속에 코가 파묻혀 있을 즈음엔 이게 아주 낯선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세상에, 빅터를 기꺼이 끌어당겨 안아주는 어른은 빅터의 짧은 생에 있어 처음이었던 것이다!

물론 포옹이 없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보통은 빅터가 먼저 답삭답삭 안기다 보니 빅터가 안기기보다는 안아주는 형식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폭 안겨드는 것은 처음일 수밖에. 빅터가 그러기 쉬운 체격도 아니고 말이다. 지금도 바닥에 앉은 빅터와 나무둥치에 앉은 마일로 정도의 높이 차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니까 넌 누가 구해줄 때까지 그대로 있을 생각만 해라. 아, 물론 해결되면 벌 받아야지.”

“…무서운데.”

“내가 면회라도 가줄 테니까.”

“나 두부도 먹어?”

“…나, 참.”

 

어느새 빅터의 불안은 서서히 가라앉고, 둘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 이런 게 평범인 걸까.

빅터는 새삼 신기함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정상적인 상식인과의 대화는 그것만으로도 치유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이프의 안에서 편히 몸을 기댈 때의 안정감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이것은 사상이 비슷한 사람 특유의 위로였다. 빅터는 어쩐지 마일로를 아주, 아주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그 사람이 자꾸 걱정되는 건 어쩌지.”

“뭐, 그 죽인 사람이? 잡혀가면 가족들이 흩어지게 된다는 그 중요한 사람이?”

“응.”

“스톡홀름 증후군인가….”

 

참으로 오랜만에, 개운한 마무리였다.

 


 

“포트에 잘 왔어, 다나.”

“네가 알바한다는 곳이 여기일 줄은 몰랐네.”

“그렇게 내 말을 귓등으로 듣더니…. 하아, 히어로라고 할 건 없고… 그냥 사무직이지.”

 

‘아직은’ 평범한 여고생, 다나는 고등학교 교복차림으로 동급생인 듄의 안내를 받으며 포트 건물을 걸었다. 나름 신식으로 깔끔해 보이는 건물은 아직 공사 중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됐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도 공사를 하고 있을 정돈가? 다나는 의문을 참지 않았다.

 

“아직도 공사 중인 건물에서 일하는 건가?”

“아, 아니, 이건… 나이프 녀석들이 쳐들어온 날에.”

“나이프?”

 

식기 이름?

다나는 해결되지 않은 의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듄은 서장님을 만나면 자세한 정보를 알게 될 거라며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며칠 전 다나를 스카웃했던 사람 역시 영 의문이 풀리지 않는 태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뭔가 뒤가 구린 게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설명은 뒤로 제쳐두고, 다나는 성질을 죽여가며 듄의 뒤를 따랐다. 자연스럽게 주변의 상황이 빤히 보였다.

 

참 열악하다, 고 느껴지는 곳.

 

어떤 사람은 팔에, 또 어떤 사람은 다리에 깁스를, 또 어떤 사직서를 들고 있는 사람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게다가 인력이 부족한지 사건 현장에 나가는 히어로들은 거의 회전문마냥 로비를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

아무리 히어로라지만 조금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일단 다나라면 부상을 입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지만, 저 정도의 부상을 입을 위험수위라면 다른 히어로들에겐 큰 부담일 게 뻔했다. 그러고 보니 스카웃할 때 위험 수당과 사망 시 보상금이 짭짤하다고 했었던가.

 

돌아갈까?

 

“아, 여기야. 들어가봐, 다나.”

“아, 응.”

 

그런 생각은 듄이 단호하게 끊었다. 관찰의 시간은 이제 끝이고, 다나는 서장실 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서장실이라기엔 밋밋하고 평범한 문이었다. 다나는 그것을 쿨하게 무시하고 서장의 허락을 받자마자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 다나 군! 잘 왔네.”

“…”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자신이 아직 30대라 주장하던- 그리고 나름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다나를 스카웃한 노안의 남자, 그리고 딱 봐도 ‘여기 서장이오-’하는 포스를 풍기고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마티오, 너보다 나은 것 같은데. 쟤가 냅킨 서장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아니, 세이지 서장님도 참….”

 

이름이 세이지와 마티오인가. 루X지와 마리X가 생각난다는 실례되는 상상을 하며, 다나는 멀뚱히 그들을 관찰했다.

 

마티오라는 남자는 그때 봤던 것과 같이 청바지에 이상한 쫄쫄이를 입고 있었는데, 쫄쫄이 곳곳에 경갑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그나마 이곳이 현대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아주 일부분만 걸치긴 했다만, 다시 생각해도 아주 시대착오적인 복장이었다.

그때 불량배를 제압하는 걸로 봐서는, 특기가 블링크인 것 같았지. 빠르고 짧은 순간이동으로 불량배들을 농락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에 반해 세이지는 매우 정상적인 옷차림이었다. 무거워 보이는 쓰리피스 정장에 두꺼운 코트, 그리고 목도리까지. 공적인 자리에 잘 어울린다고, 다나는 속으로 평했다.

 

“뭐, 됐고. 자리에 앉아라. 바로 설명해주마.”

“네.”

 

다나는 그가 말한 대로 소파에 앉아 차를 받았다.

 

지금 다나가 이곳에 앉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스카웃 때문이다. 사실 히어로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나름 제 힘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공무원 일자리인데다가 부서장 자리까지 준다고 하니 거절할 것이 없었다. 이제 막 생기는 신생 조직이라는 점이 흠인데… 뭐, 이미 존재하는 포트라는 히어로 기관의 산하로, 지원도 받는다고 했으니.

그러고 보니 그때도 설명을 듣긴 했다. 왠지 장황해서 반쯤 흘렸는데… 갑자기 등장한 범죄조직을 쫓느라 포트는 일반 업무를 할 여력이 없어졌고, 그에 냅킨이라는 조직을 따로 둬서 일반 업무를 맡긴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 받아들였던 것도 기억난다.

 

음, 이 정도면 많이 기억하는 거겠지.

그때, 서장이라던 남자가 터벅터벅 걸어와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곧바로 본론이 나왔다.

 

“난 세이지. 포트의 서장이다. 너를 스카웃한 쪽은 마티오. 냅킨의 서장이 될 예정이지. -어쨌든 오늘 너를 부르고자 한 것은, 우리가 쫓는 조직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다.”

“…냅킨은 그 외의 일반 업무를 맡는 걸로 들었는데, 그의 추적에도 개입하는 겁니까?”

 

의외로 잘 설명해놨네? 하는 시선이 잠시 마티오를 향했다. 다나는 포트에서 그의 취급이 어떤지를 잠시 확인할 수 있었다. 곧 세이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역할 분담은 확실히 할 거다. 우린 조직을 쫓고, 너희는 일반 시민을 지키는 거지.”

“아, 네.”

“하지만 유사시, 특히 네 특기의 경우 도움이 필요할 수 있으니 정보를 주는 거다. -자, 일단 확인해라.”

 

대충 납득되는 설명에 다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지는 곧 몇 장의 서류를 건네주었다. 총 네 장이었는데, 각각에 다른 사람의 사진이 붙어있는… 마치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서류 같았다. 히어로 기관쯤 되면 이런 걸 마음대로 봐도 되는 건가. 좀 잘못된 생각을 하며 다나는 서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나이프>

 

[백모래]

보육원 출신, 이후 연구원으로 일하다 실험체로 지원했으며 연구소 붕괴 당시에 탈주. 특기는 정화.

 

[메두사]

신원 미상, 백모래와는 반대로 실험체에서 연구원이 된 케이스. 마찬가지로 연구소 붕괴 당시에 탈주. 몸 속에 독사를 키우고 있다.

※추가로 확인된 사항: 특기는 섬유를 조종하는 것으로, 콘크리트와 비슷한 정도의 강도를 보인다.

 

[오르카]

신원 미상. 범고래 혼혈이며 어려서부터 실험체로 존재. 역시 마찬가지로 연구소 붕괴 당시에 탈주. 특기는 없다.

 

[실험체 M-0506(빅터)]

흑표범 혼혈이며 연구소에서 태어난 실험체. 하지만 넷 중에서도 특출난 신체능력을 갖고 있으며, 특기는 없다. 요주의 인물.

 

[-모든 실험 내용은 보안을 지킬 것]

 

실험체? 그것은 마치… 어디선가 인체 실험이라도 있었던 것 같지 않은가.

다나는 제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연 기분이었다. 빌런을 잡는 히어로, 치안을 지키는 히어로로서의 임무를 상상해보긴 했지만 이것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지 못하며, 다나는 되물었다.

 

“이것은… 쫓고 있다던 범죄조직의 정보입니까?”

“그래. 자신을 나이프라 칭하고 있지. 공항 테러 사건을 기억하나? 그때의 범인 역시 나이프. OO건물 폭파 사건도 역시 나이프, D시 총격전 사건도 나이프가 꾸민 짓이다.”

 

나이프. 웃기지도 않는 이름인 것과는 다르게 그 범죄 내용은 흉악했다. 다나는 당시 휘말릴 뻔했던 반의 한 친구를 기억했기 때문에 주먹을 쥐었다. 종이가 형편없이 찌그러드는 것을 보며, 세이지는 말을 이었다.

 

“공항 테러 사건으로 처음 등장한 이 조직은, 처음엔 신원 미상이었으나… 이 실험 정보가 들어오며 신원을 특정할 수 있었지.”

“그 연구소는…”

“이 인물 외에는 전멸이다. 현장을 찾아봤을 땐 이미 다른 건물이 들어선 상황이었지.”

 

대충 납득했다. 다나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이며 몇 가지 질문을 꼽았다.

 

첫 번째 질문. 실험체 번호로 적혀 있는 부분의 빅터라는 이름은 무엇인가?

-사실 짐작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그들끼리 일일이 실험체 번호로 부르지도 않을 것이고, 본인도 그걸 꽤 싫어할 수도 있으니 새 이름 정도 마찬가지로 생길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다나는 굳이 확인해보고 싶었다.

 

두 번째 질문, 그 빅터라는 인물의 내용 중 ‘요주의 인물’이란 어떤 걸 얘기하는 것인가? 그 위험도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특이 사항이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세 번째 질문은… 제일 밑에 나와 있는 내용, [모든 실험 내용은 보안]이라는 부분이었다. 인체 실험 연구소이야 이미 알고, 실험체이나 범죄자의 신원 역시 밝혀졌는데 여기서 더 밝혀질 부분이 있다고? 실험 내용이 소실된 것도 아니고, 남아 있는데 그것을 감춘 이유는…

 

누군가 악용할 여지가 있는 건지.

 

세이지는 그 모든 것에 답해주었다.

 

“빅터의 경우는 네 추론이 맞다. 그들끼리 부르는 이름이 빅터이며, 포트에서도 마찬가지로 빅터라 칭하고 있지.”

“그렇다면, 요주의 인물이라는 부분은 어떤 의미입니까?”

“요주의 인물이란, 실험 내용과 관계 있는데….”

 

아, 보안이라는 그 실험 내용인가. 그렇다면 다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심산일지도 몰랐다. 다나는 어느정도 호기심을 접어둬야 할 각오로 대답을 기다렸다.

 

“일단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모든 전투 인원의 상위에 있는, 규격 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투 센스, 힘, 맷집, 무기를 다루는 능력, 순발력, 동체시력…. 모두가 백모래, 메두사… 뭐, 오르카는 아직 11살이니 제쳐두고. 그들을 앞서고 있다. 가히 행동대장급이라 할 만 하지.”

 

과연. 다나는 굳이 자신에게 죽어라 매달린 마티오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힘으로도 그를 압도할 수 있고 방어력 역시 최고치를 달리고 있는 다나가 카운터라 할 수 있었다. 아마 감이다만… 다나가 그를 상대하기 위해 차출될 확률이 높아보였다. 몇 달 뒤, 냅킨이 본격적으로 설립될 이후의 미래가 암담했다.

 

어쨌거나, 아직 제일 중요한 마지막 질문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실험에 대한 내용은 저에게도 보안입니까?”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