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이 비었으니

5247자

명일방주 총웨 드림

 

술잔이 비었으니

 

채워야 마땅하지.

 

춘절을 앞둔 옥문은 평소와는 다르게 수선스럽고 활기가 넘쳤다. 거리마다 악운을 막고 길운을 불러들인다는 홍등이 내걸렸고, 대문마다 붉은 대련과 횡비가 나붙었다. 골목과 골목 사이를 장식하는 금귤나무와 거꾸로 매달린 복(福)자패 따위 역시 제법 색색으로 화려했으니 평소의 옥문에 비하면 호화찬란이라고 해도 좋았다. 물론 상촉이나 혹은 용문 같은 번화도시 출신들의 성에는 영 차지 않는 수준일지도 모르겠으나 옥문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에는 충분한 축전이었다.

하지만 다른 도시의 춘절이 얼마나 번듯한 것이든 간에 비교군이 전무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다. 모두가 ‘옥문의 잠자는 아가씨', 혹은 줄여서 수(睡) 아가씨라고들 부르는, 출신 모르고 이름 모르는 옥문의 새 객인 그에게는.

팔 개월 전 옥문의 존경받는 종사가 그를 객으로 환대하고 옥문에 머무르는 것을 허가한 이후로 조정은 몇 번이고 그의 존재가 옥문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숴를 잘 알고 마음 깊이 따르는 이들은 숴의 보증을 신뢰했으나 모두의 마음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숴는 열 차례에 걸쳐 등청해 사람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 과정은 결코 손쉽거나 짧지 않았다. 그것은 숴가 옥문을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낸 전선의 거성이라는 사실과는 별개의 것으로, 요새를 지키는 사람들이 대개 엄중한 규율주의자들이며 보수적인 염려를 습관 삼아 살아왔다는 사실을 감안하자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참을성 있게 노력한 끝에 숴는 마침내 조정 관료들로 하여금 수 아가씨를 도시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릴 재앙이라기보다 세상 물정에 서툴러 모든 것에 쉽게 감탄하고 놀라는 소저로 인식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열 번 중의 마지막 한 번이 찾아왔을 때, 수 아가씨도 숴를 따라 등청길에 올랐다. 사세대의 요청이었다. 젊은 지촉인은 그녀를 직접 만나 그가 객이나 벗 아닌 다른 것인지, 혹은 그렇게 될 만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숴는 지촉인의 요청이 정당한 것임에 동의했다.

등청 전에 숴는 자신의 보증 아래 있는 그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과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 그리고 되도록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해 일러주었는데, 수 아가씨가 그것들을 전부 이해했는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 숴를 곤란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한 것처럼 보였으므로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었다.

지촉인과 수 아가씨의 대면이 끝날 때까지 숴는 사세대 본청 앞에서 자신의 보증인을 기다렸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 수 아가씨가 본청의 정문으로 걸어 나왔고, 비로소 그는 혐의 없는 자유인으로 거듭났다. 숴는 조촐한 축하를 건넸다.

해서 어느덧 수 아가씨가 춘절을 맞아 들뜬 도시를 구경하는 것을 제일의 과제로 여길 즈음에는 그를 요새와 방벽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여기는 이가 거의 없었다. 조정 사람들은 새 객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논제는 곧 신년을 맞아 찾아올 용문의 사절을 어떤 의전으로 맞을 것인지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한편 옥문 여염의 사람들은 숴를 믿는 만큼 숴의 객을 믿었다. 머지않아 수 아가씨는 별다른 보조나 동행 없이 홀로 저자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노점에서 파는 과일 절임이며 꽃 튀김 앞에서 오래 걸음을 멈추고 있자면 그에게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수 아가씨. 혼자 나오셨어요?”

“어머, 소저. 종사님께서 방금 들렀다 가셨는데, 가신 곳으로 데려다 드릴까요?”

수 아가씨는 사람들의 친절과 제안, 아는 체와 인사에 모호한 웃음으로, 혹은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는 방식으로 답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사양이나 긍정, 사의나 겸양으로 제각기 해석했다. 그는 그들의 해석 방식과 사고 과정을 하나씩 배웠고, 그것은 숴가 공들여 지도하는 말과 양식과 다르지 않은 가르침으로 수 아가씨를 ‘옥문의 이웃'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팔 개월 동안, 수 아가씨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오룡장과 나팔전에서, 서원거리와 야시장에서. 그러나 개중 유별히 기억에 남았던 것을 꼽자면 단연 ‘종사의 동생'과 만났던 일일 것이다.

 

“방금 떠오른 찬란한 태양이 온 세상을 두루 비추니, 지난 도부를 걷고 새것으로 바꾸어 붙이는구나(天門萬戶瞳瞳日 总把新桃換旧符)*. 몇 번을 보아도 좋은 광경이지.”

문 앞에 춘련을 붙이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수 아가씨 옆에 다가와 선 정체불명의 행객이 대뜸 옛 시구를 읊었다. 행객은 챙이 넓은 죽립을 비스듬하게 쓰고 재색 단령 위에 피풍의를 덧입고 있었다. 차림새만으로는 좀처럼 신분을 짐작하기 어려웠기에 수 아가씨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곧 상대의 의문을 눈치챈 행객이 웃었다.

“오라버니가 새 객을 맞았다더니 정말이었네. 링이라고 해. 시인이며 술꾼이고, 풍류를 아는 이들의 벗이요, 내기 바둑판을 즐겨 찾는 이들의 영원한 호적수지. 최근에는 흠천감의 캐스터라는 새 칭호를 얻기도 했는데, 다른 소개가 더 필요할까?”

“오라버니……?”

“아,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빼먹었군. 옥문관의 종사, 다른 사람들이 숴라고 부르는 그 사람의 여동생이라는 뜻이야. 사람들이 이르는 식으로 말하자면 말이야.”

링의 말씨는 꼭 거침없이 긋는 필획을 닮아있었다. 수 아가씨는 사세대 전각에서 보았던 족자에 쓰여 있던 수(守) 자를 떠올린다. 물 흐르는 듯이 부드럽고 나긋나긋하지만 결코 유약하지는 않은, 오래전 이름 모를 시인, 혹은 바둑꾼이 술자리에서 휘갈긴 것을 전전대의 태사가 비싼 값에 사들였다던 그 글씨를. 숴가 그 족자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미미하게 웃음 짓던 것도.

수 아가씨가 들은 말을 곱씹는 사이에 링이 다시 물었다.

“나는 소저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이름은 없어. 사람들은 나를 ‘옥문의 잠자는 아가씨’라고 일컫거나, 혹은 수 아가씨라고 부르기도 해.”

“이름이 없어?”

“혹은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고.”

“그렇단 말이지.”

링이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것을 본 수 아가씨는 어째서인지 부연의 필요를 느꼈다.

“숴, 그러니까 종사님은…… 내가 스스로 기억해내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해.”

수 아가씨의 부연에 링은 한번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수 아가씨는 옥문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의 표정과 표현을 익혀왔으나 링의 동작이나 표정은 뭇사람들의 것과는 달랐으므로 좀처럼 종잡기가 어려웠다. 수 아가씨가 여전히 의문스럽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링은 바람을 가늠하다가 죽립을 고쳐 쓰며 미소 지었다.

“자, 그러면 돌아갈까, 소저? 곧 소낙비가 내릴 거야.”

 

한편 전각의 객청에서 어둔 하늘을 바라보던 숴는 기다리던 이가 뜻밖의 인물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의아한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숴가 어째서 두 사람이 함께 오는 것이냐고 묻기도 전에 링이 청청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오라버니. 강동에서 검을 맞댄 것이 마지막이니까 이제 오 년쯤 되었나?”

“사 년이지. 네가 정말 올 줄은 몰랐는데.”

“춘절이잖아. 새해는 가족과 함께 맞이해야지. 나머지 형제들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야.”

여전히 청산유수 같은 말씨라고 생각하면서, 숴는 웃는 낯으로 손을 펼쳤다.

“세간의 전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니까. 앉아라. 주안상을 부탁할 테니. 회포는 앉은 자리에서 마저 풀자꾸나. 그리고…….”

숴의 시선이 수 아가씨에게로 향했다.

“따라오겠나? 그다지 재미있는 자리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수 아가씨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갈래.”

 

 

*

 

 

튀긴 떡과 삶아서 다진 새우 전병, 절인 채소볶음과 설면두사 따위가 차려진 상에 곧 노백간이 올랐다. 첫 잔이 돌고, 두 번째 잔이 돌고, 세 번째 잔이 돌았을 때쯤 링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교자를 반으로 가르면서 말했다.

“오라버니만 괜찮다면 내가 이 아가씨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데 말이야.”

“이름?”

“아까 저자에서 들어오면서 아직 마땅하게 부르는 이름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오라버니는 본인이 스스로 떠올리기를 바라서 그렇게 둔 것 같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계속 ‘수 아가씨'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링의 제안에 숴는 가타부타 이르기 전에 먼저 수 아가씨를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겠냐는 듯이. 이번에도 수 아가씨는 크게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고 싶어.”

숴는 ‘괜찮다', 혹은 ‘좋다'가 아닌 ‘들어보고 싶다'는 대답에 약간 고개를 기울였으나 수 아가씨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이름을 짓고 그것을 다루는 과정 그 자체에 흥미가 있었다.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가 자신을 칭하는 이름을 하나씩, 때로는 둘 이상 가지고 살아가고, 타인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 그리고 자신이 타인을 부르는 호칭을 퍽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친애와 우정, 때로는 핀잔과 불만을 담아 서로를 부르는 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지칭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 같았다. 수 아가씨는 사람들이 곧 태어날 아이에게 무슨 이름을 붙여주면 좋을지 즐거이 고민하며 논쟁하는 모습을 보았고, 친밀한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줄여 부르며 관계의 특별함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름은 이름일 뿐 아니라 관계의 확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어떤 이름이 붙을 것인지. 수 아가씨는 그것이 궁금했다.

수 아가씨의 표정을 보던 링은 잠시 고민하다가 간장 종지에 손을 찍어 탁자 위에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으며 희미한 샛별을 한스러이 여기고,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가네(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 乃瞻衡宇載欣載奔)**.”

그리고선 다시 손을 들어 두 글자(晨宇)만 남기고 전부 지워버렸다. 지켜보던 숴가 감탄하듯 웃으며 물었다.

“천위. 좋은 이름이군. 어떤가?”

수 아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탁자 위에 남은 글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싫은 기색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링이 편안히 웃었다.

“옥문에 온 것을 환영해, 천위. 그대가 이곳을 집이라고 여기면 옥문은 마땅히 처마와 그늘을 내어줄 거야.”

“그러는 너도 오늘 도착한 객인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오라버니. 그보다 자, 술잔이 비었잖아? 그러니 채워야 마땅하지.”

경쾌한 어조에 천위가 웃었다. 이윽고 소나기 내리는 처마 아래에서 잔 세 개가 맞부딪혔고, 이따금 웃음소리가 흘렀다. 밤이 청청하게 무르익을 때까지 계속된 술자리는 새로 지어진 이름처럼 맑은 새벽이 올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그야말로 춘절 전야에 어울리는 해후였다.

* 왕안석 <원일(元日)>

** 도연명 <귀거래사(歸去來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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