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속에 잠들어
5322자
사토 속에 잠들어
만 년의 꿈을.
숴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망루에서 요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각(高閣)이라는 별칭이 붙은 그 초소는 옥문의 사풍이 잠잠한 날이면 몇백 리 건너의 능선과 협곡까지도 내다보이는 준지였으나 그날은 유독 황사가 심해 중앙 출입소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해자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막에 충분히 담금질 되지 못한 어린 병사들이 재채기하는 소리를 배경 삼아, 숴는 망루에서 팔짱을 끼고 도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삼 년만의 옥문은 여전했다.
봄바람 불지 않는 곳이라는 이칭을 가진 사막 끝단의 요새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 없이 맹렬하면서도 묵중한 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시학에 관심 있는 몇몇 호사가들은 옥문이 비록 라이타니엔의 섬세함이나 용문의 화려함 따위에 견줄만한 자질은 없으나 요새로서의 장중함이 있다고 평가하곤 하지만 숴는 언제나 그들의 평가가 반절만 맞는 이야기라고 홀로 생각하곤 했다. 모든 검에는 칼등과 칼몸이 따로 있기 마련이고, 칼머리 없는 검을 검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므로.
숴가 그들의 면전에서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까닭은 그 또한 아직 나머지 반절에 꼭 들어맞는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숴는 이 도시를 내려다볼 때 종종 자신의 안에서 움트는 무언가를 느끼곤 했다. 그것은 마치 새봄의 마른 땅을 뚫고 새싹이 자라나는 듯한 감각과 비슷했다. 하지만 떡잎과 줄기가 땅을 뒤집고 올라와 자라나기 전까지는 이듬해 필 꽃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사막을 걸어보기 전에는 그곳에 샘이 있을지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처럼. 다만 꽃은 언젠가 시들고, 샘은 언젠가 메마를 것이라는 사실만큼을 겪어 알 뿐이다.
곧 바람 방향이 바뀌어 출입소에 걸린 홍기가 요란하게 젖혀지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숴는 돌아보지 않고 상대를 짐작했다. 약간 끌리는 듯한 발소리. 상대를 맞추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종사님, 여기 계셨습니까?”
“백부장.”
호명이 먼저였고, 돌아보는 것이 나중이었다.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느라 호흡이 약간 흐트러진 백부장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가 망루 난간에 나란히 서기를 기다렸다가 숴가 물었다.
“나를 찾았나?”
“예부의 등양후께서 종사님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셔서요.”
“무슨 일이기에?”
“그게.”
백부장이 답지 않게 망설였다. 아무래도 간결한 설명을 듣기는 어려울 모양이라고 짐작한 숴는 웃고선, 백부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무슨 일이든 백 번 묻느니 한 번 보는 것이 나은 법이니 가 보면 응당 알게 되겠지.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사안인가 보군. 안내하게.”
“송구합니다.”
백부장이 고개를 숙이고선 되찾은 절도를 실어 앞장서 걸었다. 숴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망루 너머로, 까마득한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백부장이 안내한 곳은 사막의 한복판이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일개 분대가 진을 치고 숴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사와 백부장이 충분히 가까워지자 병사들이 일제히 공수로 예를 갖췄다.
“종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선두에 선 고참이 반걸음 물러서 빙 둘러싸고 있던 것을 가리켰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둥근 구체였다. 숴의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백부장이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의 재앙으로 지반이 뒤집힌 일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래도 땅속에 깊숙이 묻혀있던 것이 그 바람에 지상으로 드러난 듯합니다. 재앙이 다녀간 곳에서 구조 활동을 벌이던 춘건의 구조대원과 흠천감의 젊은 캐스터가 가장 먼저 발견하고 출입 초소에 알려왔다는군요.”
백부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숴는 구체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마치 알처럼 보이기도 했고, 고치처럼 보이기도 했고, 씨앗처럼 보이기도 했다. 숴는 세 가지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면서 손금 사이에 맴도는 기이한 감각을 가누었다. 망루에서 옥문을 바라볼 적과 유사한 감각이 노련한 종사의 굳은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숴는 아직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은.
‘알과 고치와 씨앗의 공통점은 내부에서 무언가 태어난다는 것이지.’
숴가 백부장에게 눈짓했다.
“열어보지.”
“이걸 말입니까?”
“문제 될 것이 있나?”
“하지만 어떻게…….”
그 말에 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것에 손을 댔다. 알 수 없는 것을 다루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병사들과 백부장이 종사를 경외 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백 년 동안 옥문을 지켜왔고, 또 앞으로 기백 년 동안 옥문을 지킬 신화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숴가 옥문에서 피어날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여기에 접합부가 있군.”
숴가 가볍게 어느 한 곳을 두드리자 백부장이 신속히 병사들을 지휘했다. 곧 병사들이 지렛대를 가져온다, 흠천감에 연락을 넣는다,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해 방제를 한다,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반 시진 가량 계속된 후에야 그것이 열렸고,
곧 매우(霾雨)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1년 후.
숴는 옥문의 나팔전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나팔전이란 옥문의 가장 번화한 시장 거리 중 하나로, 다른 이동 도시와 도킹할 적에 요새 밖에서 온 장사꾼들과 손님들이 가장 먼저 접어들게 되는 곳인 오룡장을 빙 두른 형태로 형성되어 있었다. ‘차라리 나팔전에서 피리를 불어라’, 혹은 ‘나팔전의 불이 꺼지는 것보다 재앙을 피하는 것이 쉽다’ 등의 속담들은 옥문 사람들에게 나팔전이 어떤 곳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근 일 년 사이에 숴에게 나팔전은 다소 색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나팔전을 지나야만 도착할 수 있는 외진 전각에 주기적으로 걸음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옥문의 잠자는 아가씨'가 있었다.
노수각이라고 불리는 그 낡은 전각은 본디 사세대의 관리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보였다'고 말하는 까닭은 일 년 전 황사비가 몰아치던 날 조정의 육부가 열띤 공론을 벌여 ‘그것'의 처우를 결정하기 전까지는 사세대의 그 누구도 노수각의 본래 쓰임이나 관리 담당자를 알지 못했던 까닭이다. 깐깐하고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예부의 노관리가 케케묵은 문건을 뒤지고 뒤져 노수각이 본디 평시에는 찾을 일이 많지 않으나 언젠가 중히 쓰임 직한 무기 따위를 보관하는 곳이며, 본디 그곳을 관리하는 직책이랄 것이 있었으나 담당하던 관리가 이십 년 전 노환으로 퇴임한 이후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아 여태껏 공석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그 모든 것은 ‘그것'을 어디에 안치하고, 누구의 손속에 두느냐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사세대는 탐탁지 않아 했다. 젊은 지촉인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언제나 변수로 가득 찬 일이고 여기서 더 변덕스러운 일을 떠맡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막에서 발견된 ‘잠자는 아가씨'를 숙정원의 감찰사들에게 감시하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가 무슨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대리사에 감금해둘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쟁론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논란을 한참 지켜보던 숴가 ‘내가 맡겠다'고 나서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일제히 숴를 바라보았다. 숴는 그들의 다채로운 표정에 웃음으로 답했다. 이이제이라고도 하지. 스스로를 오랑캐에 비유하는 종사를 곁에 선 백부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숴는 개의치 않았고, 번복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렇게 숴의 책임이 되었다.
‘그것'이라고는 하나, 숴가 보기에 그는 거의 사람이라고 해도 좋았다. 물론 보통 사람은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으면서 신체에 어떤 이상이나 변화도 없을 수 없겠으나 기이할 정도의 항상성을 예외로 하고 본다면 적어도 육신의 구성에 있어서는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찌르면 피를 흘릴 것이요, 물속에서는 호흡을 갈구하겠지.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무수한 민생들이 스스로를 구분하여 부르는 이름들 중 어느 것에 대어야 적절할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숴는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기이한 그리움을 느꼈다. 만난 적도, 접한 적도 없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으로부터 그리움을 느끼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종사님!”
입구를 지키던 초병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숴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깨어났습니다!”
노수각 안은 평소와 다르게 소란스럽고 어수선했다. 숴는 큰 걸음으로 중정을 지나쳐 전각의 상층으로 올라갔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종사에게 예를 표했다. 숴는 가볍게 손을 내젓고선 내실로 들어섰다.
내실의 입구부터 빙 두른 모양으로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숴는 가볍게 호흡을 고르고, 그 가운데에 앉은 ‘옥문의 잠자는 아가씨’를 마주했다. 별칭이 무색하게, 그는 마치 처음부터 한 번도 잠든 적 없었던 것처럼 그곳에 앉아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숴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향수, 또는 정체 모를 기시감이 소리 없이 물결치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움직이는 사금파리 위에 선 듯한 기분과 함께, 숴는 묻는다.
“자네는 누구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뜨인 눈이 느리고 가볍게 한번 삼박였을 뿐. 주위에 소리 없는 동요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숴는 질문을 바꾸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건가?”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대신 고개가 얄풋이 기울었고, 그 모습을 보던 숴가 이번에는 조금 더 범위를 좁혀 물었다.
“혹은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마주한 시선이 수면처럼 투명하고 적막했다. 그로부터 숴는 그제서야 어떤 직감을 느끼고 오래 닫힌 서랍으로부터 해묵은 언어의 먼지를 털어낸다.
“이러면, 알아듣겠나?”
이 땅에 산천이 푸르렀을 적의 이야기다. 도시의 굴곡이 아직 편평하고 사람의 지혜가 어둔 습지와 사곡에 닿지 않았을 시절에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울림과 곡직을 가진 언어를 썼다. 전치사와 부사가 보다 난해하고 아름다운 운율을 지니던 시기를 숴는 기억한다.
그리고 기백의 세월을 건너와, 마침내 그가 웃었다.
“안녕.”
다시 한번 주위에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숴는 다소 기이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고대어라서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
“만남을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다르지.”
“자네가 정의하는 만남에 따르면?”
그가 배시시 웃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모르겠어.”
무지는 천진했다. 그러나 불쾌하거나 헛헛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숲을 흔드는 바람에 화를 낼 수 없는 것처럼, 간밤 사이 쌓인 눈을 원망할 수 없는 것처럼, 길을 가로막은 개울물을 탓할 수 없는 것처럼, 그에게는 면책의 특권이 있었다. 마치 이름 모를 나라에서 온 사절과 같이.
그럼에도 숴는 ‘그’를 사람으로서 환대한다.
“옥문의 손님으로 자네를 환영하겠네. 편히 머물기를.”
예스러운 인사말을 건네고 돌아서면서, 숴는 생각했다. 옥문에 대한 세평은 역시 반절 짜리라고.
‘사막에도 꽃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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