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매병과 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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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매병과 아교

간밤에 내린 싸리비로 숲은 흠뻑 젖어있었다. 된서리를 얻어맞아 볼품없이 뭉개진 낙엽길을 밟고 진천은 경사를 올랐다. 걸음을 딛는 내내 차고 습한 숨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계곡이 멀지 않아 사방에 물안개가 낀 탓이었다. 등에 진 땔감 짐에 덮어둔 방수포가 제대로 여며졌을지 염려하면서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어느새 눈에 익은 오솔길과 그 끝에 비스듬히 기운 처마와 낡은 사립문이 보였다.

진천은 보폭을 넓혔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진천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싸리비로 젖은 마당, 반틈 열린 사립문 사이에 핏자국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마치 죄인의 목을 조르는 교서 아래 찍힌 인과 같이.

어떤 비 냄새는 피 냄새의 비릿함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전장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뼛속까지 스며든 비린내로 인해 끼니조차 제대로 넘길 수 없었던 나날들은 이제 세월 저편에 남겨두고 온 해묵은 과거이겠으나 으레 냄새는 기억을 부르는 법이라, 창칼 부딪히던 나날의 서늘함이 진천의 등줄기를 훑는 듯 지나쳐갔다.

기억은 기억의 손을 맞잡고 왔다. 손끝에 피와 불이 번지던 순간의 날카로운 통각이 뒤따랐고, 이윽고 불안이 바람 부는 들녘처럼 일렁였다. 마침 된바람이 숲을 뒤흔들어 잎새 부딪히는 소리가…….

금세 마음이 조급해진 진천은 주위를 살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스스로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도 못한 채 앞만 바라보는 낯이 형형했다.

넓지 않은 뜰인지라 세 걸음 만에 쪽마루에 무릎이 닿았으나 서두른 것이 무색하게도 대청은 비어있었다. 인적도 들리지 않아 적막했다. 다만 댓돌에 남겨둔 핏자국만 눈에 선연했다. 그것만이 예 있었던 이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싶어 불안한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문고리에 손을 뻗어 걸머쥐고 힘을 주어 당기는 그 짧은 새에 진천은 지난 몇 달간이 모두 구색 좋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기사 그간의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퍅하기는 했다. 어린 새의 깃털 같은 나날들이었다. 매일이 설탕을 얇게 굳혀 지은 공예품처럼 사치스럽고 과분했다. 적지 않은 경우에 행복은 불안을 동반하곤 했다. 소리 없이 웃는 낯도, 잠든 숨도, 오르내리는 어깨와 맞닿은 손금도. 한 숨 크게 쉬면 날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양지바른 마당에 순한 봄볕 내리쬐는 동안에도 늘 이름 모를 맹수처럼 숨죽여 도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공들여 외면코자 했다. 이듬해 여름에 필 꽃과 맺힐 열매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도 가슴 속 어딘가가 부러진 창날로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고, 영원을 약속하거나 내내 곁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하면서도 눈꺼풀 뒤편에서 불티가 이는 듯한 홧홧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구태여 끄집어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은, 진천에게는 제 안에서 찰강이는 쇳소리와 잉걸불 말고도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서령은 이우는 달처럼 언제나 병들어 있었다. 날이 갈수록 가파르게 떨어지는 경사. 행여 숨 들썩이는 찰나에 마른 어깨가 사윌까 염려하면서, 박약한 정신이 세찬 비에 볼품없이 고개를 떨구는 풀꽃처럼 다치고 시들 것을 괘념하면서, 진천은 일념과 일생을 다해 순간을 사랑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괜찮아지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면서. 허락되지 않을 내일의 눈을 가리고, 운명이 찾아올 오솔길을 낙엽으로 숨기면서, 얄팍한 기만으로 허울 좋은 평온을 가장하면서.

그러나 만약에, 고개를 돌리고 도망쳐 피난한 끝에 다다른 곳이 이곳이라면. 이 문 너머에 있는 것이 막다른 절벽 끝 낭떠러지라면.

슬픔과 두려움은 때로 구분되지 않았다. 오래지 않은 과거에 드물지 않게 그러했듯이. 진천은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마치 유보된 형의 선고를 확인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가 분합문을 완전히 열어젖히려는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아.”

흔들리는 사라처럼 엷고 덧없는 목소리였다. 진천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올렸다. 궁에서 패용하고 다니던 것보다 도신이 짧고 날밑이 볼품없는 환도가 손에 걸렸다.

“게서 뭐 하느냐. 도둑이라도 들었니?”

한 번 더 들려온 목소리는 먼젓번 것보다 확연하고 또렷했다. 그제서야 환청이 아님을 확신한 진천은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고선 안도 서린 낯으로 몸을 돌렸다.

“누님. 나와 있지 마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한순간 허리춤을 향했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대를 향해 조심스레 내밀어졌다. 이윽고 닿으면 꺾일 듯한 꽃 머리를 닮은 손목에 투박한 손마디가 감겼다. 서령은 별말 없이 순순히 진천에게 손목을 맡겼다. 미 약하게 이끄는 힘에 서령이 들고 있던 홍산화 다발로부터 꽃잎이 두어 점 흩날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양을 보고 나서야 진천은 제가 피라고 여긴 것이 꽃잎 조각임을 알았다. 한번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 착각했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과민함을 비웃기에는…….

“낯만 대고 보면 네가 더 아파 보이는구나. 괜찮으니?”

서령이 잡히지 않은 쪽 손을 올려 진천의 이마를 덮었다. 크지 않은 섬수인지라 진천의 눈썹까지 덮이지도 않았으나 손에 담긴 찬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진천은 제 이마가 홧홧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괜찮습니다. 조금 놀라서…….”

진천의 시선이 발치에 떨어진 꽃잎에 붙박인 것을 눈치챈 서령이 열풋이 웃었다.

“왜, 내가 풍한에 들어 각혈이라도 했을까 봐.”

“공연한 걱정도 아니지 않습니까.”

“걱정 말아라. 내 오늘은 양태가 좋단다. 삼새능선까지 나들이를 나갈 수도 있겠어. 날이 좋으면 능선 머리에서 기주가 내려다보이는 것 알고 있니? 기주에서 말을 타고 엿새 더 가면 왕도라고 네가 알려준 적 있지 않아.”

서령이 재잘대며 잡힌 손을 되려 이끌었다. 그제서야 잘강이던 불안이 가라앉는 듯싶었다. 진천은 서령이 이끄는 대로 뜰을 거닐었다. 세 걸음 만에 가로지를 수 있었던 뜰도 서령과 함께 걸으니 연무장처럼 너르게 느껴졌다.

“지금쯤 왕도에 가면 골목마다 유자탕 냄새가 나겠지? 얼마 안 있으면 새해 벽두니 풍연이 한창 팔려나갈 시기겠어. 왜, 예전에 연살 깎는 노인에게 연점을 봐달라고 했다가 호되게 꾸지람 들은 적이 있지 않아. 기억나니?”

“어찌 잊겠습니까. 제가 누님 팔자에 고생살을 끼워 넣었다면서 혼을 내셨지요. 처음 뵙는 어르신께 그리 혼쭐이 난 것은 처음입니다.”

“나는 하나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셨습니까.”

“그럼.”

마당을 한 바퀴, 두 바퀴 돌고, 세 바퀴째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서령은 이제 남녘에서 지내는 신년제의 풍습과 청백풍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느 마을에서는 매해 정초면 가까운 물가에서 귀천노소가 모두 모여 소원을 적은 청백풍등을 날린다면서. 붉은 풍등은 이 땅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나 청백풍등을 날리는 것은 남제의 어느 현에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풍경이라면서. 진천은 그를 느리게 따라 걸으면서 고개를 주억이거나 묻는 말에 대답했다.

“옳아, 이제 기억나는구나. 남제 여성현의 서항못이었다. 왕도로 신행을 올 적에 잠시 쉬어갔던 곳이었는데, 가마 창 사이로 보이던 풍경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래서…….”

서령의 말 한 마디마다, 여윈 걸음사위마다, 마음속에서 소란스레 떠들던 불안이 시나브로 침묵했다. 정말로 누님께서 오늘은 양태가 좋으시구나. 비가 그치고 해가 들기 시작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싸리눈이 녹을 정도로 따스하고, 또 바람이 거칠지도 않으니 마당 서너 바퀴 도는 것쯤이야 문제 없겠지. 진천의 마음속에 어떤 낙관이 자리 잡았을 때 즈음,

어디선가 까막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시취를 맡고 찾아온 것처럼.

“그런데 한 번은 폐하께서 청백풍등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면서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시지 않겠니? 그래서 장 상궁이…….”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진천의 낯에 미미하게 떠오르던 웃음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유리 매병도 일순의 실수로 바닥에 떨어지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마는 법인데 초봄볕처럼 가냘프던 순간의 평온이야 어떻겠는가. 날카롭게 잘린 유리 단면에 손금을 베인 듯한 통각이 선명했다.

“누님.”

그제서야 진천은 자신이 함과 장 안에 넣어서 쥐면 꺼질까 불면 날까 해왔던 것이 이미 한번 깨진 매병이었음을 알았다. 애석하게도 처음 있는 깨달음은 아니었다. 한번 깨진 유리는 이어 붙인대도 결코 예전 같을 수가 없음을 재차 되새겨 배우면서 진천은 손안에 잡히는 실낱같은 온기를 붙들었다.

“장 상궁이……. 그러니까…….”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서령의 흰 낯 위로 한 차례 불길이 달려 나갔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처마에 새겨진 봉황문, 국상을 알리는 종소리. 까무룩 잊은 세월이 손금 위로 고스란히 새겨질 때마다 서령의 낯이 창백해졌다. 진천은 모든 것을 참아 견뎠다. 괜찮을 거라는 말도, 제가 여기 있노라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 것에 다름없었다. 꼭 쥐인 손마디가 느슨해지는 일 없었으니.

이윽고 마치 폭풍우에 꽃 머리가 꺾이는 것처럼 느리고 조용하게, 품 안에서 홍산화가 쏟아져 내렸다.

“누님!”

 

 

*

 

서령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새벽달이 떴을 때였다. 흐린 시야로 주위를 둘러보자 금세 어두운 낯의 진천과 눈이 마주쳤다.

“누님.”

읊조리는 낯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정신 황망한 와중에도 어쩐지 그 표정이 우스워 소리내어 웃으려 했으나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 괜찮다, 진아. 열이 조금 올랐던 모양이야.”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키고 나면, 여즉 맞쥔 손마디에 느리게 힘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마디를 까닥여 손등을 쓰다듬는 모양새를 얼추 흉내내었으나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령이 손 움직이는 것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진천이 입을 열었다.

“저를 따라오신 것을 후회하십니까.”

물끄러미 시선을 올리면 어둑한 눈동자가 물결쳤다. 손을 뻗어 그 눈가를 쓰다듬는 대신 서령은 대답했다.

“아니.”

작지만 조약돌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내 아무리 정신 온전치 않은 병자일지언정….”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것만큼은 후회하지 않아.”

이번에는 보다 확실하게 손마디가 얽혔다. 엄지손으로 투박한 손등에 불거진 뼈마디와 핏줄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면서 서령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 나는 네가 웃어줄 때 가장 행복해.”

그 말에 진천이 우는 듯이 웃었다. 입 맞춰주겠니? 분부대로요. 덧창 통해 여윈 달빛이 반틈 잘려 내리고 숨 맞닿는 틈새로 깨진 유리 조각 같은 파편이 창백하게 반짝였다. 애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엉겨 붙는 속눈썹. 깨진 유리 매병 위에 아교를 덧바르면서, 두 사람은 발원한다.

부디 내일이 오늘보다 다정하기를. 조각난 삶 중에도 한 줄기 볕뉘 들기를. 겨울 지나 봄이 오면 꽃이 피기를. 그리하여 언젠가의 남녘 행에서 서로의 이름자가 적힌 청백풍등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를.

  

 

 

죽거나 살거나 함께 고생하자던
당신과는 굳게 언약하였지
섬섬옥수 고운 손 힘주어 잡고
우리 함께 늙어가자고.

— 擊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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