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련(片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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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련(片戀)
남쪽과 달리 북위의 삼월은 춥고 건조해 사냥에 적합치 않았다. 잘못 숲을 휘저었다가 괜한 산불이 일 것을 염려해 수렵회가 열리는 시기가 되면 숲지기들은 언제나 매 기슭과 계곡을 살피며 산세를 다듬었고, 덜 녹은 땅이 꺼지는 일 없도록 몇 번이고 땅디딤을 거듭했다. 예조와 공조의 협력이 가장 돈독히 이루어지는 시기 역시 이 때였다.
그 모든 수고는 본디 남조의 풍습이었던 것을 시기의 변경 없이 그대로 들여온 탓으로부터 비롯하였는데, 그럼에도 곽릉의 언덕을 내달리는 준마들의 발굽 소리가 건재하면 자양강 하류 사람들은 그로써 치세의 평탄함을 짐작했고 언 계곡이 녹고 꽃이 필 즈음에는 비로소 옥좌의 위광이 온 땅의 질곡에 면면히 스몄기에 수렵회의 전통은 고집스레 계속되었다. 성총은 시냇물과도 같아서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었다.
전통의 지속에는 어림군의 장을 맡고 있는 위장군 현오의 단호함 역시 한 몫을 더했다. 천자의 즉위와 동시에 어림군의 수장이 된 그는 어질지만 우유부단했던 전임자와 다르게 엄정하고도 치밀한 운영으로 원망과 경외를 동시에 샀다. 칼끝은 엄정하되 잘못 겨누어서는 안되고 조책은 어물거리는 법 없어야 하며 상벌은 공정해야만 한다는 그의 철칙은 뭇 나태한 탐관들을 두렵게 했고, 그럼으로써 옥좌의 위엄을 드높였기 때문이다.
수렵회의 강행 역시 그의 이러한 소신으로부터 비롯하였다. 실제로 강남의 토호들은 수렵회에 정탐하는 솔정을 보내 북위의 기세를 짐작하곤 했으니 그의 단호함에 근거 없었던 바 아니다. 몇 차례 병장기를 부딪혀 피를 보는 것 보다는 허세 몇 번 떨어주고 공포를 사는 편이 나았다.
그러니 절벽 끄트머리의 덜 녹은 땅이 물러 천자와 위장군이 탄 말이 발을 헛디디고, 그대로 두 사람이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 치게 된 것은 결코 현오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예측했던 바 역시 아니었고.
“소장의 불충을 벌하십시오.”
천만 다행으로 수심 깊은 물구덩이 위로 떨어진 탓에 두 사람 모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금호만큼은 떨어지는 과정에서 발목을 접지른 모양인지 거동이 성치 않았다. 그에 비해 약간의 타박상만 제하면 거의 멀쩡한 제 모습이 민망하게까지 느껴져, 현오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서라, 됐대도. 네 탓이 아니지 않니.”
“소장의 책임입니다.”
“그렇단들 예서 잘잘못을 따진다고 없던 활로가 생길 것 같지는 않구나.”
“......”
“그렇지?”
손을 내젓던 금호가 설프게 눈매를 휘어 웃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한 그의 위장군이 그제서야 미진한 모양새로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달리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인상에 깊었으나 그것이 되려 안심되었다. 저를 걱정할 여유가 있을 정도면 스스로는 숨긴 곳 없이 다치지 않았다는 뜻일테니까. 금호는 부목을 덧댄 발목을 만지작거리며 동굴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 아닌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다.
금호는 굴의 초입에서 떨어져내리는 빗방울을 눈에 담으며 천자가 수렵회에서 낙상 사고를 겪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후일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숨어든 솔정들의 입과 귀를 막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고, 구원을 부르지 않는대도 이 모양새를 하고서 본진으로 돌아간다면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위엄을 보이고자 했건만 한심한 구경거리가 되겠군. 생각하며 금호는 한숨처럼 웃었다.
고작 낙상 사고 정도로 생각이 과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북위는 모질고 거친 땅이다. 몇 번의 실책이 거듭되면 그것은 곧 황업의 판가름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사소한 흠이 물꼬가 되어 물어뜯기고 끌어내려지는 지존들을 금호는 자라는 동안 몇 번이고 봐왔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곁에는 위장군 현오가 없고, 제 곁에는 있다는 점일까.
시선을 돌린 곳에서 때맞추어 불꽃이 피어올랐다. 밖으로는 비 내리고 안으로는 눅눅한 와중에도 현오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마른 장작을 모아 건실한 모닥불을 피워냈다.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로 위장군은 한겨울에도 제비꽃을 꺾어올 수 있을 것이라며 우스갯말 하던 것이 떠올랐다. 빗댄 표현에 불과했으나 그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금호는 현오가 마른 자리를 골라 내어주는 것을 사양 않고 받아들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불길이 순조롭게 몸집을 불렸다. 이윽고 금호가 자리를 잡고 앉자 대뜸 현오가 손을 내밀었다.
“폐하. 겉옷을 벗어주십시오.”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스스로도 지나치게 갑작스럽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곡해될 여지가 있다고 여겼는지 작은 헛기침과 함께 현오가 부연했다.
“젖은 옷을 입고 계시면 풍한에 듭니다.”
“그래, 알겠다.”
금호가 그제서야 약한 웃음 소리와 함께 푹 젖은 겉옷을 벗어 내밀었고, 현오는 공손한 태도로 황포를 받아들어 불결에 펼쳐 말렸다. 한동안 모닥불 타는 소리와 옷자락 사각대는 소리만이 빈 동굴에 울렸다.
불현듯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바람에 금호는 속으로 찬찬히 말을 골랐다. 그러는 동안 불빛에 비친 현오의 옆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묵직해져서 헛기침을 삼켜야만 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네가 기꺼워 할까. 어떤 서두가 네 주의를 끌까. 네가 나를 보고 웃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옥좌에 오른 지존이 아니라 일개 필부처럼 느껴졌다. 우습게도. 눈 앞의 이 남자는 한 번도 그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을 것인데.
찬 바닥을 짚은 손끝이 맞닿았다. 스미는 열이 당황스러웠던 바람에 금호는 급히 고르던 말들 중 하나를 두서없이 내놓았다.
“어쩐지 익숙해보이는구나.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제가 말입니까?”
현오의 낯은 다소 어리둥절해 보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이 대관절 어디에 있겠나. 약간의 낭패감이 쓴물처럼 올라왔으나, 이미 꺼낸 화제를 무르는 것도 겸연쩍어 금호는 일단 우겨보기로 했다.
“네가 너무 침착하니까 말이야. 꼭 예전에도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인 양.”
말을 뱉자마자 또 다시 실패인 것을 알았다. 그럴 리가 있겠나. 철 들 무렵부터 제 동관으로 임명되어 무과에 급제한 후 왕사가 되고 첫 관직에 제수될 때 까지 위장군 현오의 입신가도는 평탄무사 그 자체였다. 단신으로 험지에 보내진 적도 없었고, 변경의 격전지에 배속된 적도 없었으니 절벽에서 떨어져 계곡 아래 동굴에 고립된다던가 하는 불상사를 겪었을 리 없었으리라고, 금호는 은연 중에 넘겨짚었다.
변명을 하자면, 그것은 금호가 현오가 위장군으로서 주로 감당해야 했던 것이 황궁 내부의 물독과 은침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존의 곁에 머문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때로는 전선에서 십만을 막아내는 것보다 궐담을 넘어 침습하는 죽음을 막는 것이 더 어려웠고, 외세의 용장을 맞아 싸우는 것보다 언관들의 세 치 혀를 감당하는 것이 더욱 까다로웠다. 그러므로 금호는 언제나 현오에게 미진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 곁에 붙들어두고자 하는 것이 당치않은 욕심은 아닐지 늘 염려하면서, 그럼에도 결코 놓거나 보내주지는 못하면서.
그러나 의외롭게도 넘겨짚은 그 말에 현오가 뭔가를 망설이듯이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이윽고 그가 뭔가를 포기하듯이 입을 열었다.
“제가 아직 한낱 도위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무턱대고 던져본 말에 의외로 묵직한 서두가 되돌아오자 놀란 것은 되려 금호 쪽이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고? 금호는 놀라면서도 이야기가 끊길세라 입을 다물고 경청하고 있음을 눈빛으로만 전했다. 한 틈을 쉬고 현오가 마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제가 스물 언저리에 삼주자사 휘하의 양진군에 잠시 몸 담았음을 기억하실겁니다. 고작 반 년 가량이었습니다만.”
그러고보니 그런 적이 있었다. 어쩐지 기억이 희미해 이유를 되짚어보니 당시 저는 태자의 신분으로 태후의 심기를 거슬러 형식적으로나마 종정시에 들어가 있느라고 바깥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현오가 황성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으나 지나가는 이야기로 그뿐이었고, 임시로 배속이 옮겨진 것 뿐이니 걱정할 바 아니라고, 그보다는 전하 스스로의 안위를 먼저 돌보시라는 측근 태감의 재촉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났다.
“당시 삼주에는 기근으로 인한 화적떼가 들끓어 제가 속한 양진군에서도 수십이 차출되어 야전에서 진을 치고 소탕 작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도중 전날 내린 폭우로 땅이 물러 길이 끊어진 것을 모르고 밤길을 달리다가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 쳤지요. 다섯이 떨어졌는데, 살아남은 것은 셋 뿐이었습니다.”
“……큰일이었겠구나. 너는 괜찮았니?”
“천운으로 사지 보전했습니다만, 다른 것보다 화적떼에게 들키지 않고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 지난했습니다. 야간의 산중에서 앞뒤를 분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천간을 읽는 법을 미리 배워두지 않았더라면 그날 중으로 내려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왜 구조대를 기다리지 않고?”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폐하께서…….”
담담하게 흘러나온 어두와 달리 현오의 말이 점점 더 느려졌다. 그리고 맺힐 즈음에 되어서는 미묘하게 기울어진 듯한 어조가 되어서, 금호는 눈을 깜빡였다. 한 차례 바람이 불고, 미진하게 맺힌 물방울이 떨어질 즈음이 되어서야 현오가 말을 이었다.
“기다리고 계실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뜻밖의 대답에 금호는 잠시 숨을 들이키는 것을 잊었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만 적요한 가운데 야속하게 울려퍼졌다. 문득 현오가 헤맸다던 그 밤중의 산길을 더듬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분명 칠흑같은 야음을 헤치고 활로를 뚫는 것보다 한 뼘 앞에 앉아 있는 상대의 마음길을 헤아리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까마득히 높은 권좌에 앉아서 천하의 주인으로 떠받들린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놓인 시선조차 잡아채지 못하는데.
눈길이 맞닿고, 손끝에 몰린 열이 찬찬히 식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금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현오야, 나는.”
그 때 바깥에서 호각 소리가 울렸다. 떠들썩한 소리에 방금까지 애닳았던 공기가 금세 꺼지듯이 가라앉았다. 숨 죽은 목화솜처럼, 철 지나 기운 작약송이처럼. 금호가 손을 내밀고서 열없이 웃었다.
“돌아가자.”
“예, 폐하.”
현오가 내민 손을 붙잡아 금호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금호가 완전히 바로 선 후에도 그 손이 놓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하여 손마디가 얽히고 손금이 맞닿을 제 비로소 알게 되는 마음이 있었으리라는 것.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아도 비스듬히 기울어 마침내 맞물리는,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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