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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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형부 조옥에서 백의와 난발 차림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소위경은 이맛가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고 불현듯 눈을 떴다. 고개를 올려보니 간밤 새 내린 폭우로 인해 조옥의 허술한 토담이 갈라져 물이 새는 모양이었다. 그는 혀를 차면서 물이 떨어지는 자리에 놋쇠 그릇을 받쳐놓고 자리를 옮겨 앉았다. 장 전랑이 공부시랑으로 진급하면서 부직을 여직 뽑지 못해 고생이라더니 이런 곳에서까지 일손 부족한 티가 드러나는구나 싶었다. 딱한 사정 모르는 바 아니니 기어코 눈살 찌푸릴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으나 소위경도 사람인지라 다소의 억하심정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게 왜 장안의 고양이 손마저 급급한 때에 애먼 사람까지 옥고를 치르게 만드나.’

옮겨 앉은 자리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소위경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기척에 어느 어둠에선가 쥐 떼들이 부산스레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기왕 일어난 김에 뻐근한 어깨도 한번 돌리고, 저릿한 다리도 접었다 펴면서 그는 제 신병을 먼저 확보한 것이 금의위가 아닌 형부임에 감사했다.

금의위 조옥의 소문은 들어 아는 것보다 보고 아는 바가 더욱 살벌했다. 금의위장 양재겸이 성정 고지식한 인사여서 죄인이 누구든 어떤 죄목으로 잡혀 들어왔든 간에 모두를 똑같이 대한 탓이었다. 천자는 그 공명정대함을 높이 사 그를 중직에 기용했으나 융통성이 없어도 심히 없는 탓에 금의위에서 옥고를 치른 인사들은 그 직위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콩조밥에 넌더리를 내며 뼛골에 바람이 들어서 나왔다.

물론 양재겸이 특별히 악독해 죄인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옥에 들어온 이상 모두 평등한 죄인이며 죄질의 판별은 자신이 아니라 심리를 맡은 관의 소관이라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 시의를 읽는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읽을 마음 자체가 없는 전형적인 청백리였다.

분명 그러한 정직함과 마땅함, 그리고 올곧음은 형과 법을 다루는 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긴 했으나 양재겸의 고지식함은 그 정도가 심했다. 누명을 쓴 고관대작이나 대역죄를 저지른 역당의 무리나 차별 없이 혹독함에 내몰았으니 어떤 정치적 사유로 말미암아 잠시 옥살이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던 다양한 인사들의 원성을 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좌우복야의 협박조차 먹히지 않는 꿋꿋함을 뭐 어쩌겠는가. 천자의 칼이 목전에 들이밀어진대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인물이었으니 다들 그를 회유하거나 꺾어볼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두고 그저 금의위와 얽힐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금의위의 손속에 정통한 바, 병부상서의 부정을 고발하는 익명의 탄핵 상소가 천자의 목전에 오르고 병부의 인사들이 굴비처럼 엮여 차례차례 수감될 때에 형부좌랑 허정은 일찌감치 소위경을 낚아채 끌고 갔다. 허정과 소위경은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터울도 없이 나란히 과거에 급제해 지금까지도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는 지우였으므로 구명을 돕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집포가 한창인 살얼음판의 와중에도 두 사람은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오래 사귄 교우끼리는 눈만 봐도 그 속뜻을 안다지 않았나.

‘덕분에 살았다.’

‘나중에 술 사라.’

물론 허정이 사적인 온정을 국법 위에 놓는 비위를 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소위경도 이 탄핵 자체가 일종의 정치적인 겁박이자 공갈이라는 사실을 정히 알았기에 가능한 편법이었다.

북정(北征)의 의제를 두고 병부와 천자가 대립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철마다 변경이 소란스럽자 천자는 넷째 황자의 화혼으로 갈등을 봉합하고자 했고 병부상서는 진숙왕의 철기를 보내 진압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무렴, 사황자의 친모인 원비가 그의 막내 여동생이었고 진숙왕은 그의 오랜 벗이었으니 상서의 속셈이야 안 봐도 뻔했다.

다만 그 속셈이 어떻든 간에 이치는 교묘했고 명분도 적절했으니 아무리 천자래도 덮어놓고 묵살할 수야 없었다. 대전에서야 군신이지만 사적으로는 천자의 숙부이자 은사가 되는 진숙왕의 체면을 함부로 구길 수 없기도 했거니와 화친혼의 상대가 되는 서북의 적공주가 지나치게 어렸기 때문이었다. 천자가 보기에도 화친이 결코 완벽한 모양새는 아니었으니 병부상서의 간언이 더욱 까스럽게 들렸으리라.

‘하여간 상서 대인께서 그리 뻣뻣하게 구실 때부터 내 알아봤지.’

소위경과 허정의 스승이 두 사람에게 댓조각 같은 기개보다는 녹봉을 받아먹으며 오래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 덕에 두 사람은 피바람이 불기 전에 일찌감치 국면을 읽어냈다. 천자는 상서를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마땅히 견제할 구실을 찾지 못했고 상서는 평생 무인으로 살아 이권 다툼 따위에 관심이 없는 진숙왕의 협력을 성에 차도록 얻어내지 못했다. ‘군신지간이라는 것이 본디 그렇다. 미덕과 충심으로 적절히 꾸며둔대도 그 본질은 결국 갈등과 다툼에 있지.’ 그 스승이라는 자는 급제 후 관직에 제수되자마자 일신에 얻은 병을 까닭으로 대며 사임해 관리의 삶을 알 도리도 없었을 텐데 어찌 그리 해박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귀한 가르침 덕에 소위경은 조만간 병부에 파란이 일 것을 내심 예견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일개 좌랑인 자신이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을 흐름이었으리라. 소위경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개를 바짝 숙이고 사변이 조용히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해서 익명의 투서가 제 상사의 죄질을 낱낱이 고해 올렸을 때 그것이 천자의 모략임을 알면서도 소위경은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른대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 천자는 그저 상서의 입을 다물게 할 만한 빌미가 필요했을 뿐이다. 상서의 뻣뻣한 모가지가 수그러들면 언관들이 나서 혁직(革職)이나 감봉 정도로 일을 마무리 짓자고 주장할 테지.

그런 까닭으로 소위경의 옥중 생활이 그리 고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신세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형부좌랑 허정이 최소한의 편의는 봐주고 있다지만 살얼음판 같은 형국이 언제 기울거나 뒤집힐지 몰랐기 때문이다. 자칫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없던 죄도 생겨 나올 판이었으니 마음이 편할 수야 없었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기다리는 내자가 걱정이었다. 자신이야 어느 정도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지만 두요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일 것이다. 여느 날처럼 등청한 남편이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고 그렇게 하루 이틀이 흘렀으니 실로 피가 마르는 심정이리라. 사흘 차에 간신히 정신이 든 허정이 너희 집에는 사람을 보내 알렸으니 마음 놓으라는 배려를 전해왔으나 그렇다고 해도 걱정이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입직한 이후 줄곧 지방관으로만 있다가 경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주변에 의지할 구석도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때 갑자기 멀리서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울리는 소리나 방향을 보아하니 조옥 입구인 듯했다. 소위경은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두어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이윽고 누군가 조옥을 가로질러 오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채운국이야기ost _호궁야상곡



조옥 측문 앞에서 멱리를 쓴 차림으로 솜을 듬뿍 두어 지은 누비겉옷을 들고 기다리던 두요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비가 오려는 것 같았다. 문득 거센 비가 내리면 이따금 조옥 천장에서는 물이 새기도 한다던 이야기가 떠오르자 혹시 그간에도 소위경이 습기 밴 침상에서 잠을 청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새삼스러운 걱정이 샘솟아 두요는 저도 모르게 발을 굴렀다. 곳에 어울리지 않게 뜬금없이 화사한 아녀자가 종종걸음을 치고 있자 조옥 입구를 오가는 형리들이나 관원들이 수상한 듯이 곁눈질을 했으나 두요는 아랑곳 않았다. 오히려 눈이 마주치면 만면의 웃음으로 화답하니 사람들이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재게 놀렸을 따름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요는 제 생각에 잠겨 골똘했다. 

‘이상하다, 나오실 때가 됐는데.’

허정이 들어간 지 일주향은 지난 것 같았는데 아직까지도 감감무소식이다. 조바심을 내며 근처를 기웃거리던 두요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마자 귀를 쫑긋 세웠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남루한 차림의 소위경이 걸어 나왔다. 돌아보던  만면에 화색을 띠고선,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어렸을 적처럼 아명을 외쳤다.

“위경 오라버니!”

“아요?”

백의 차림의 소위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자 두요가 대신 쪼르르 뛰어와 거리를 좁혔다.

“세상에, 얼굴이 반쪽이 됐네! 춥지는 않았어요? 천장에 물은 새지 않던가요? 끼니는 잘 챙기셨고요?”

두요가 그를 붙잡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릴 때마다 사라로 짠 멱리 자락이 나풀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소위경이 얼떨떨한 낯으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그러자 허정이 뒤를 따라 나오며 거들었다.

“진무, 너는 형수님 덕에 산 줄 알아라.”

“에이, 제 덕은 무슨요. 허 좌랑께서 고충이 많으셨지요.”

허정의 능청에 두요가 응수하며 생글방글 웃었다. 소위경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두요와 허정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막역했던가? 그 기색을 알아챈 허정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얼마 전에 천추절(千秋)이지 않았겠어.”

황후의 탄신일을 경하하는 천추절은 관작받은 여염의 부인들이 궁에 발을 들여 내명부의 비빈 마마들과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다. 조당에서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경사는 경사답게 치러야 했기에 내궁에서는 기민히 눈치를 살피며 연회 준비를 서둘렀다.

두요로 말할 것 같으면 갓 부임한 좌랑의 내자로 내궁에 가기에는 택도 없는 연력이었으나 장사치의 딸 다운 수완으로 1품 국부인의 수행을 자처했다. 난생처음 가보는 궁이라고 들뜰 법도 했으나 그 대신 맵시를 가다듬으며 배시시 웃기만 하는 모습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시는 것이 분명하다며 친정 시녀가 눈을 가늘게 떴던 것이 그러니까 약 사흘 전이었다.

내궁의 연회는 전반적으로 순조로이 진행되었으나 말미에 약간의 소동이 일었다. 궁녀가 잠시 먹이를 주려 새장 문을 연 사이에 황후가 몹시 아끼는 십자매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 새는 황후의 친정에서 황후의 무사 평안을 지켜줄 길조라며 보낸 것으로, 황후는 그 새가 온 복의 근원이라 믿으며 애지중지 아껴 길렀다. 그런 새가 하필 황후의 탄신을 축하하는 천추절에 새장 밖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불길한 징조란 말인가.

해서 온 내궁이 새를 찾는다며 수선 법석일 적에 국부인의 수발을 들던 두요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두요를 대동했던 국부인은 두요가 어디서 길이라도 잃은 것은 아닌지 염려했으나, 부인의 걱정이 무색하게 두요는 십자매 발목에 제 옷 매듭을 묶은 채로 나타났다. 어떻게 찾았냐는 황후의 물음에 두요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공손히 웃었다. 황후가 크게 기뻐하며 큰 상을 내리겠노라며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일렀을 제에, 거기에 대고 두요가 과연 무슨 청을 올렸겠는가?

“그렇게 된 거죠.”

“......정말이지 너는 겁도 없구나.”

“지은 죄가 있으셔서 옥살이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황후 마마께서도 흔쾌히 천자께 청을 올려주셨을 거예요.”

“아무리 그렇대도…….”

소위경이 한숨을 쉬자, 수요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문득 오래전 글공부하던 서원의 그늘막에서 같이 돌아가고 싶다며 기다렸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에도 걸어오는 길이 위험하진 않을까, 혹여는 더위를 먹을까 염려하던 제가 우스울 정도로 영리하고 현명하게 처신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함께 돌아가요, 위경 오라버니.”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두요가 스스럼없이 손을 잡아왔다. 거칠게 튼 손에 온기가 스며들자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그 손을 고쳐 잡고서 위경이 대답했다.

“그래. 집에 가자.”

휘영청 만월 밝은 보름날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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