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에메] Pledge.

Deep. by 싱글침대
3
0
0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계절이 지나고, 멸망의 소식 따윈 전해지지 않은 제 1세계. 어느새 노르브란트에도 겨울이 찾아왔는지 레이크랜드의 보랏빛으로 수 놓아진 전경에 희끗한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이 곳엔 첫 눈이라도 내린 모양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퍼져 사라졌고, 간간히 울려퍼지던 마물들의 울음소리는 동절기를 맞아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해가 떠있는 시간은 짧아져 벌써 레이크랜드의 앞 바다엔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노을이 비치기 시작했다. 지난 해의 겨울은 어땠는가. 짧은 휴식 끝에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해 전장에서 겨울을 보냈던 걸 어렴풋이 떠올린다. 기억력이 꽤 좋은 편임에도 모든 전투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전투에서 겨우 눈을 붙이고 어딜 가도 화약 냄새가 났던 사실만 뚜렷하게 각인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깊은 상념에 빠질 때 즈음, 셀린은 스스로 잡념을 떨치려 큰 숨을 내뱉었다. 망각되어 빈 공간이 되어버린 지난 일을 떠올려봤자 좋을 일은 없다는 걸 오랜 모험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껴왔다. 과거를 기억하되, 집어삼켜지는 일이 되어선 안된다. 이제 영웅은 과거에 묶여 사는 것이 아닌 미래로 걸어나가는 존재가 되었으니. 퀴퀴하게 쌓인 생각을 허공으로 날리고나니 그제서야 관문에서 해변까지 하염없이 걸어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게 아닌 바로 발 밑에서 들려왔기에. 해저의 아늑한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전이라 젖는 건 상관 없었지만, 셀린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레이크랜드와 템페스트는 곧 이어져있다는 걸. 당시엔 비스마르크의 힘을 빌렸지만 지금은, 혼자이지 않은가. 무모한 선택지를 고르자마자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셀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답지 못한 충동적이고 말도 안되는 행동이었다.

물 속에서 숨을 쉬는 능력은 이럴 때에 유용했다. 폐에 가득 들이차는 감각이 여전히 몇 년간 이질적으로 다가와 그 느낌 덕에 차리지 못할 정신도 들게 하니. 차디찬 바닷물은 피부를 얼리고 호흡에 섞여 체온을 빼앗아갔다. 이대로라면 익사가 아닌 동사를 먼저 할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실드라의 등에 올라탔다. 아무리 셀린이라고 해도 그 먼 거리를 헤엄쳐서 갈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한 올의 빛이 들지 않는 해저는 언제 보아도 적막하고 때론 두려움마저 들게 했다. 짙은 감색의, 끝이 보이지 않는 발 아래의 깊은 수렁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다. 빠르게 물살을 가르는 덕에 눈을 제대로 뜨는 일도 쉽지 않았고,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런 번거로움이 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음에도 텔레포트 마법이라는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은 건 왜일까. 온 몸이 젖을 필요 없이 오직 발목만 물에 잠긴 채로 돌아가면 됐을 일이었다. 그랬더라면 생각 없이 걷다가 발을 빠뜨렸다고 사실대로 얘기해도 괜찮았을 테다. 무슨 생각을 했으면 그런 것도 인지하지 못했느냐고 핀잔이나 듣고 끝났을지도 모른다. 온통 물에 잠긴 지금은? 어떤 생각으로 그리 행했는지 셀린 자신도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생각을 비우고 싶어서?

어느 구간을 지나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메트셀크가 애꿎은 바닷물을 전부 빼내어 깊은 해저임에도 숨을 쉴 수 있었던 온도족의 보금자리였다. 보지 않고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수없이 드나들던 길. 자신을 깊은 절망 속에 가두고 에메트셀크가 꾸린 무덤에서 함께 죽어나가기를 소망하던 그 날에, 마치 제 집처럼 수없이 걸었다. 그 시간은 혼자일 때도, 도시의 주인인 에메트셀크와 함께하기도 했다. 마치 처음 보는 풍경인 것처럼 천천히 속도를 줄여 모두를 눈에 담았다. 다시는 여길 방문하지 않을 작정인 것마냥.

아모로트에 도착한 이후에도 에테라이트를 사용하긴 커녕 다시 걷는 길을 골랐다. 현 인류에겐 맞지 않는 드높고도 광활한 도시. 과거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기도 했으며, 이 길을 걷던 에메트셀크 또한 머리에 그려보기도 했다. 지금처럼 같은 얼굴로 이 거리를 걸었을까, 도시의 환영들처럼 그도 다른 이들과 열띤 토론을 했을까, 자신과 같은 영혼을 지녔다던 아젬과 거닐었을까. 이 생각들이 전부 쓸모없는 부스러기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 밑에 잠겨있는 2년 중 절반인 1년 동안 과거에 머물러있지 않고 나아가는 법을 연습해야했고, 이미 확정되어 바꿀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집착을 떨쳐야했다. 더이상 한 자리에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추억을 회상하며 길을 걷다보니 셀린은 어느새 둘의 보금자리인 대의사당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방문객을 환영하듯 개폐 마법이 걸린 무거운 문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고 셀린은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의 안쪽은 아직도 축축함이 느껴졌지만 겉은 언제 그랬냐는듯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마른 모양새였다. 허나 걸친 옷은 두꺼운 편에 속했기에 겉으로 보기에도 젖어있는 행색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앞뒤 재지 않고 저지른 일이지만 막상 가장 어려운 난관 앞에 다다르니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평소의 에메트셀크라면 도시에 들어온 순간부터 알아차렸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 템페스트에 가까워지던 대해 속에서 이미 알았을 것이다. 무모한 짓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고있음에도 제 발로 들어오기를 기다려주는 이를 칭찬해야할지 원망해야할지 혼란스러워졌다. 대의사당의 입구에서부터 우측 첫 번째 방. 셀린은 그 방의 문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도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해가 지기 전에 온다더니 늦으셨군. 아무리 기다리는 일을 잘한다지만 기약 없이 남겨지는 건 딱 질색인데."

"그럴 일이 있었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떨어지는 물기는 좀 닦고."

에메트셀크는 셀린을 향해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튕겨 물기가 아직 남아있는 머리 위로 수건을 떨어뜨렸다. 무심하게 떨어지는 수건 한 장은 셀린의 머리를 전부 덮어 시야마저 가렸다. 느린 손으로 끌어내리자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미처 마르지 않은 옷과 머리칼을 수건으로 눌러가며 입을 열었다.

"레이크랜드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실드라를 타고 바다를 가르고 왔어."

"내가 친히 물을 빼둔 곳에 도착해서도 걸어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 다른 변명이라도 해보지 그래."

"변명을, 하고 싶은데. 나도 왜 그랬는지 정확하게 모르겠어."

"그 미련함은 언제쯤 버릴 건가?"

다른 구질구질한 구석은 전부 고쳐놨거늘.

에메트셀크는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셀린의 앞에 섰다. 영 시원찮게 물기를 닦는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니면 변명도 못하는 그 모습이 거슬렸는지 들고 있던 수건을 빼앗아 대신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말투와 걸음걸이는 어떤 때보다도 차가웠으나 반대로 손길은 그렇지 못했다. 힘주어 잡으면 깨질 것처럼, 잘못되면 흠집이라도 생길까 두려운듯한 움직임이었다. 잠시 눈동자를 올려 시선을 맞추려고 했으나 곧바로 바닥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차디찬 목소리와 달리 그의 표정이 다르다면 더욱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려서. 그렇게 한참이나 제대로 방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어색한 공기 속에서 젖은 머리를 말려주는 손길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더 손을 내밀면 잡아줄 수 있어?"

"사전적 의미를 뜻한다면 언제든지. 다른 속셈이라도 있으시다면, 친히 생각해보고."

"여길 버리고 나와 함께 가자는 말을 해도?"

에메트셀크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수건 위를 지나치는 손길을 제외하곤. 어떠한 재촉 없이 가만히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푹 젖어있던 머리칼은 어느새 물기는 사라지고 보송함만 남았다. 이렇게 오래 고민할 필요 없이 첫 대답은 당연하게도 거절일 거라 생각했다. 스러져가는 이 도시가 자신의 마지막 보금자리라 칭한 적이 있었기에. 그래서 어떠한 말로도 설득되지 않는 강경한 상태라면 셀린 자신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예정이었다. 이토록 긴 시간 동안 대답을 미루는 걸 보아하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평생을 해저에 잠길 것처럼 굴던 영웅님이었는데 많이 바뀌긴 했군. 조만간 그런 얘기를 하리라 예상은 했는데……. 형식적이지만 이유는 들어보도록 하지. 네가 준비해온 건 들어봐야하지 않겠어?"

"나를 내걸고 협상할 생각이었어. 네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내 여생도 여기서 마무리하겠다고 반쯤 협박을 하려고 했지."

"예상한 것보다 더 무모한 걸 준비하셨을 줄이야. 내가 만약 영웅님보다 여길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변수를 지니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럴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너 답지 않아."

"네 덕에 많은 게 바뀌었거든."

셀린은 이제서야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옅은 웃음을 자아냈다. 레이크랜드에서부터 답답하게 막고 있던 건 이 때문이었나. 1세계를 모험하던 셀린은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스스로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 자유를 통제했다. 자신을 마치 죄인처럼 대했고 그 방식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허나, 요양을 핑계로 2년을 해저에 틀어박힌 시간 동안 셀린은 자신의 손으로 족쇄를 풀어내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고 에메트셀크가 마련한 발판을 밟고 올라 지독한 무덤에서 벗어나기 위해 드높게 도약했다. 모험의 의의를 깨닫고, 지난 일들은 결코 죄 따위가 아니었으며, 혼자 무거운 짐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걸 날아오르기 시작하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손을 잡아줄래?"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