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에메] 겨울
밤이 깊어지는 시간, 에메트셀크는 셀린이 돌아오지 않은 방 안에 홀로 시간을 죽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시간 즈음이면 돌아오던 이가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에메트셀크는 답지 않게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럴 법도 했다. 연장된 임무로 인해 거처로 돌아오지 못하는 날엔 잠시 틈을 내어 언질을 해주곤 했으니. 처음에는 그런 날이라고 여겼다. 말을 전해줄 잠시의 시간도 나지 않는 것이라고,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바쁜 것이냐며 작은 책망을 얹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은 싹을 트고 종국엔 꽃을 피워낸다. 심한 부상을 입어 미처 연락할 방도가 없는 것인지, 또 이상한 일에 휘말려 손 쓰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지, 최악의 상황으로 그의 영웅이 제게서 도망쳐버린 것은 아닐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뒤엎어 두통이 몰려올 때 즈음이 되었을 때엔 자정에 가까워져 가는 시간이었다. 에메트셀크는 곧바로 생각을 멈추고 셀린을 찾는 길을 나섰다.
평소 셀린은 자주 가본 장소, 좋아하는 장소를 노트에 그려넣는 습관이 있었다. 호기심에 그 노트를 구경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분명 이 곳 대의사당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도시, 레이크랜드의 래크산 성 벽, 콜루시아 섬 절벽 폭포, 이슈가르드 등이 있었다. 추려보니 온갖 높은 곳이란 높은 곳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자 작은 실소를 터뜨린 것도 같다. …그래, 영웅이 어디에 숨어버리든 에메트셀크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보이는 눈을 타고났으므로. 또한 '그'를 두 번이나 눈 앞에서 잃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혼잣말을 곱씹으며 차근차근 기억에 남는 구간을 돌아보았다. 노트에 그려진 풍경을 담기 위해 영웅께선 어느 자리에 서있었는가 따위를 고려하면서.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셀린의 흔적이 남지 않은 구간이 없었다. 온통 생각을 지배 당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건 불안에서 비롯한 것일까? 아니면 응당 그래왔던 일이었을까. 무엇이든 이제 에메트셀크에게 남은 건 셀린 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래야 하는 남은 삶의 전부.
아무리 에메트셀크라도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예전의 몸 상태였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부족한 에테르를 모아 숨만 붙여 놓은 상태였으니. 눈 밭에 남은 발자욱을 더듬어가는 것처럼 찬란한 에테르의 흔적을 겨우 뒤쫓아갈 뿐이었다. 문득 에메트셀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도, 어쩌면. 셀린의 곁에 있는 동안에는 남은 시간을 이렇게 잔향만을 갈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시간은 점점 흘러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은 깊은 새벽이었다. 새벽을 타고 흐르는 공기는 차갑게 지나갔고, 하늘은 수 없는 별이 비추는. 평소였다면 더 할 나위 없을 풍경이었다. 딱 하나, 셀린이 없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에메트셀크는 마지막으로 커르다스 서부고지에 다다랐다. 온통 눈 뿐인 곳이라서 가장 좋아한다고 했던. 들려오는 소리라곤 거센 바람과 이따금 들려오는 들짐승의 울음, 드문드문 서있는 보초들의 절그럭거리는 갑옷 마찰음 따위가 전부였다. 이런 삭막하기 그지 없는 장소를 좋아하는 영웅이라. 그녀에겐 썩 어울리는 곳이라 생각한다. 신중하게 에테르의 흔적을 더듬어 검은 이형의 문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면서.
셀린은 절벽에서 떨어진 눈을 가볍게 툭툭 털어냈다. 일부로 찾아오지 않는 이상 발견할 수 없는 동쪽 끝의 절벽 아래. 도망치듯 와버린 셀린의 몇 없는 도피처였다. 모든 게 죽은 듯이 고요하고, 눈을 감으면 나 자신만 느껴지는 아주 이상적인 장소. 에메트셀크를 만난 뒤엔 올 일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으면 허구의 도시에 세워진 드높은 건물 꼭대기에 올라 한참을 앉아있다 내려가면 될 일이었다. 또한 에메트셀크 자체가 안식처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도망치지 않고 그럴 참이었다. 하지만 도시에 발을 디딘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물 밀듯이 쏟아졌다. 사라지고 싶다. 아주 충동적이었다. 이유는. 글쎄. 알았다면 이 곳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셀린은 수직으로 깎인 절벽에 등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연인이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에메트셀크는 셀린이 있는 곳으로 문을 열 수 있었다. 아무리 힘이 약해졌다 하더라도 그는 세계를 주무르던 아씨엔이었다. 두 개의 세계를 전부 볼 순 없어도 한정된 공간을 보는 데엔 이골이 났다는 의미였다. 눈을 밟는 소리가 느릿한 걸음걸이에 맞춰 조용히 울렸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셀린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내게 할 말은 없나?"
"…….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영웅님 있는 곳 하나 모를까."
셀린은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찾기 위해 온갖 힘을 들였다는 걸.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찾아낼 아주 간단한 일임에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부터 이를 증명했다.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거짓말을 내뱉는 모습은 어제 보았던 모습 그대로여서. 마주하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금 절벽에 머리를 기댄다.
"얼굴은 전부 얼어붙어서는. 잘도 이런 곳에 몇 시간이나 있었군 그래."
"타박할 줄 알았는데."
"내가 뭐하러."
에메트셀크는 어느새 곁에 다가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은 덕에 답답함을 커녕 조금의 해방감을 느낀 것도 같다. 문득 생각 끝자락에 보고 싶다고 떠올린 사람이 막상 나타나니 털어놓을 말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말 없이 허공만을 바라봤다. 이따금 떨어지는 눈송이에 시선을 둬보기도 하고, 발 끝에 채이는 돌 따위를 치워도 봤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인 걸 안다. 그저 어떤 말부터 꺼내야할지 몰라서 그랬다. 시작부터 사라지고 싶단 충동이 들었단 말을 꺼냈다간 옆에 있는 그녀의 연인이 이를 기정 사실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무겁게 잠긴 셀린의 입이 결심한듯 천천히 떨어졌다.
"왜 여기로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매번 꼭대기를 고집하시더니 드물게 바닥을 선택한 건 궁금하긴 해."
"높은 곳은 지나치게 잘 보이잖아. 여긴……전부 꽉 막혀있고. 갇혀 잠긴 기분이라서. 그래서 왔어."
셀린은 잠시 말을 고르느라 눈동자를 굴렸다. 첫 운을 떼었으니 이제 끝맺음까지 가야하지 않겠는가. 절벽을 내지르듯 달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짧은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마저 말을 이었다. 본인조차 스스로 정리하지 못한 속내를 그저 천천히 풀어낼 생각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지금 말하지 못하면 평생의 기회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대로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싶었어. 오해하지마. 지금은 아니니까."
자초지종을 설명하듯 꺼낸 셀린의 말은 요약하자면 그랬다. 갑자기 크게 느껴진 부채감에 짓눌려 거기서 벗어나오기 위해 도시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 본인 말로는 괜찮아지면 돌아올 생각이었다는데. 글쎄……. 여태껏 보아온 영웅의 모습으로 짐작해보면 추스리긴 커녕 혼자 파고 들어가 나오지 않을 걸 알고 있다. 그럴때마다 꺼내주어야하는 사람이라니. 아니. 사실은 그가 굳센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수 없는 상실을 겪고서 하는 일이 고작 틀어박히는 일이 고작이지 않나. 그에 비해 에메트셀크 본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어떻게 행동했는가. 과거를 잊지 못해 전부를 무로 돌리고 이 세계는 본질부터 잘못되었다 판단하여 모두를 없앨 계획을 세웠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 받아들이는 법을 알지 못해서. '너'가 없는 세계를 견디지 못해서. 그에 비하면 셀린의 행동은 온순한 방법이었다. 슬픔의 크기에 비하면 소극적이기도 하고.
"얘기하니 조금 나아졌어. 들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우리 영웅님께선 좀 털어놓을 필요가 있어."
"너가 아니면 이런 얘기 못해."
"그러니 내가 온 거 아니겠나. 네 모든 고민은 내가 듣고 싶으니까."
"지독하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화가 끝을 보이자 깊은 절벽 아래에도 차츰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발치를 푸르게 비추던 얼음들이 빛을 받아 차츰 따듯한 색을 가질 무렵, 에메트셀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툭툭 털고 셀린에게 손을 뻗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선명하게 그의 얼굴을 덮는다. 밝은 빛으로 인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셀린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깊게 응시하는 시선을 느낌만으로 어렴풋이 알 뿐이다. 상관없었다. 표정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때 거기서 꺼내주는 것이 아닌 함께 있어줄 사람. 그게 당신이리라. 뻗어진 손을 잡고 일어나자 금방 눈 앞에 검은 이형의 통로가 만들어진다.
"오늘도 나갈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건 생각을 해야할 문제같은데."
"영웅님 덕에 두 세계를 발로 뛴 노고 정도는 알아주겠어?"
"아까는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더니 이제 와서?"
둘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들의 도시에서 나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추위에 붉게 물든 뺨이며 귀가 그 반대인 온기로 인해 발갛게 물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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