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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히카/히카에메] 고요의 바다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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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작성

※ 5.0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날조 설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빛의 전사가 죽습니다.

※ 해당 글에서 빛의 전사는 설정된 종족, 이름 등이 없습니다. 편의상 인칭대명사는 '그'를 사용합니다. 

※ 민감한 소재(시체 훼손)를 사용하였습니다.

소재 제공해준 퇴공 님, 말랑 님 감사합니다. 


< 고요의 바다 >

원인을 알 수 없는 재해는 묵연히 세계를 뒤덮었다. 세상이 멸망을 향해 간다. 하루에도 수십의 목숨이 스러지고, 흐르는 강이 붉어졌다. 시체며 유품을 태우는 연기로 하늘은 제 색을 잃고 잿빛으로 물들었다. 푸른 하늘은 아주 먼 과거의 기억으로 남았고,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빛의 전사, 어린아이들조차 그의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 하나의 개인이 쌓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업적을 쌓은 이도, 이번만큼은 무너지는 세계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괜히 영웅이라 불리는 것은 아니어서, 그는 혼란한 중에도 사람을 구했다. 올바르지 않은 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던 영웅 또한 사람이었다. 불가피한 사고, 위험한 곳이었던 만큼 구조가 늦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겨우 생환했을 때는 이미 뒤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서도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웃는 꼴이. 그의 손에 한 번 꺾인 에메트셀크는 그 멍청한 낯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며, 잘게 떨리는 영웅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쇠망하는 어느 날 이름 높은 영웅이 죽었다. 세상이 한없는 올곧음을 시기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례식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소탈했고, 그의 마지막을 찾는 이들 중 누구 하나 눈가가 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어느 순간부터 그와 함께했던 남자, 에메트셀크는 마지막에 찾아와 가장 오랫동안 그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누구도 속내를 쉬이 알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에메트셀크는 작은 흙더미를 응시했다.

때마침 잿빛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메트셀크는 고개를 들어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를 닮은 싱그러운 푸른빛 우산을 흙더미 위에 잘 얹었다. 그는 늘 갑작스러운 비에 옷이 젖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조금씩 굵어지는 빗방울에 화려한 옷이 젖어 들었다.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일, 에메트셀크는 옷이 젖어 묵직해지고서도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영웅의 빈자리는 상상 이상으로 크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자주 그의 업적을 되새겼고, 희망을 담아 부풀려진 영웅담은 곳곳에서 회자하였다. 세상은 점점 더 메마르고, 갈라진 대지는 잡초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살고 싶은 이들은 아주 작은 희망에도 목을 매듯 의지했다. 갖은 미신이 힘을 얻기 좋은 시대였다.

강한 이의 신체를 소유하고 있으면 위험이 피해간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낭설은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유명인의 무덤이 파헤쳐졌다. 그 시대에 가장 강했던 사람, 누구보다도 올곧게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의 마지막 휴식처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손톱이며 머리카락으로 시작해서, 손가락 마디, 발가락,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터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빈 관이 이곳이 한때나마 무덤이었음을 증명했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울 뿐이고, 절박함은 살아 있는 이의 목을 조른다. 그게 전부였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의존할 곳을 찾아 해매였고, 그것마저 놓은 이들은 살아남기를 포기했다. 무력함 속에서 사람들은 종말을 직감했다. 이제 이 세상은 끝이구나.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재해가 인간의 씨를 말리려 드는구나. 음울한 분위기는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 벗을 수 없는 속박처럼.

에메트셀크가 다시 영웅의 무덤을 찾았다. 파헤쳐진 채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어떻게 보아도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작은 터. 그 앞에 선 장신의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입 밖으로 내는 말은 없다. 그는 옷자락이 끌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굽혀 앉는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흙더미 위를 스쳤다.

영웅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세간에 흘렀다. 에메트셀크는 불완전한 생명체가 종말을 앞두고 기어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눈앞에 비어 있던 무덤이 떠오른다. 죽은 뒤에도 미련하게 사람을 돕고 싶어 할 게 뻔하지. 실은 애초에 죽은 적 없는 것은 아닌가. 문득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그는 허, 소리 내어 탄식했다.

조각난 정보를 끌어모았다. 변함없이 강대한 그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조각조각 잘려 각지에 퍼진 영웅의 신체. 육체가 대체 무엇이라고. 에메트셀크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뇌까렸으나 파편의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 기나긴 삶 중 몇 되지 않게 이해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으며, 지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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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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