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에메] The Dying Gash
"마지막은 네게 맡기마. 꼭 살아서 돌아와, 셀린.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고 얘기했잖아. 내가 죽을 곳은 내가 정한다고."
걱정하지마.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빛의 전사는 세계를 위한 마지막 싸움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종말을 노래하는 새. 아이테리스를 제외한 모든 별의 멸망을 흡수한 죽음의 정수. 야만신과 대적할 때도, 그 뒤를 조종하던 아씨엔과 부딪혔을 때도, 하물며 고대의 신을 쓰러뜨렸을 때보다도 더욱 짙은 지옥의 냄새가 났다. 몇 번이나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싸웠고 그 과정에서 생명의 불이 꺼지는 위험이 찾아와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는 이유 모를 자신이 있었기에.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지원을 올수 없는 하늘의 끝, 울티마 툴레에 있다. 유해조차 태어난 별로 보내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실패했다는 사실조차 전해지지 못하고 종말을 바라는 존재에게 집어삼켜져 예정된 멸망의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됐다. 고독한 길을 걸어온 영웅은 이제서야,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지금에서야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수많은 희생에 발목 잡혀 죄악감 하나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그녀 스스로가 정한 삶의 목표가 생겼다. 이제와서 그걸 놓칠 순 없었다. 살아서 돌아가야만 했다.
메테이온은 온 별을 여행하며 경험한 종말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유한한 자원 속에서 허덕이는 생명을, 지나친 발전으로 인해 동족을 죽이는 생명을, 모든 감정을 억제해 도리어 죽음을 간청하는 불멸의 생명을. 푸른 새의 안내를 받아 이미 사라진 별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울렁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이 기분은 오래전, 에메트셀크가 구현한 환상 속 아모로트를 지날 때도 그러했다. 위협 속에서 일사분란하게 도망가는 사람들, 곳곳에선 공들인 문명이 쓰러지고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불길이 피어오르며 짙은 피 냄새가 코를 떠나질 않았다.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한참 과거의 일임을 알고 있다. 여기서 영웅의 일행이 행동을 바꾼다 한들, 종말을 피해 도망가는 이를 구한다고 한들, 확정된 죽음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환상의 주체인 죽음의 새에게 닿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남기를 선택했다.
마지막, 금빛으로 물들어 행복이 있다면 이런 색일 거라 생각한 별도 끝내 생명을 잃고 마침내 짙은 죽음을 몰고 온 존재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어차피 모든 별에 종말이 찾아올 거라면, 행복과 삶의 이유를 채 말하기도 전에 꺼질 생명이라면 직접 멸망을 선사하겠다는 울음의 가까운 말과 함께. 영웅의 동료들은 궤변이라 주장하며 당장이라도 전투를 이어갈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영웅은, 셀린은 이번만큼은 그들과 함께하기를 거부했다. 숱한 야만신 토벌에 혼자 남겨졌을 때처럼, 그녀는 혼자 남기를 선택했다. 무모하게 에이션트 텔레포트를 타고 죽음의 문턱에 두 번이나 가까이 한 이에게, 누구보다 신뢰했을 동료들을 배신하는 역을 맡은 고지식한 이에게, 어린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상실과 무력감을 느낀 이에게, 이미 영웅의 죽음을 목도하고 차원을 넘은 이에게. 영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없어도 된다고 여긴 이들 모두에게 주는 영웅의 복수에 가까웠다. 라그나로크로 보내지는 동료들에게 영웅은 완벽하게 전해지지도 못할 말을 뱉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하늘의 끝, 한계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에 상처 투성이로 쓰러진 영웅은 그동안의 일을 생각해냈다. 지금의 동료들을 만난 처음을, 새로운 도시에 발을 들여 느낄 수 있었던 가슴 벅찬 감정을, 하이델린에게 처음 사명을 부여받았던 중압감을, 아군이라 생각했던 사람의 배신과 가장 신뢰한 사람의 희생을. 그녀의 동료들은 전부 영웅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길을 터주는 역할과도 같았으며 길을 잃으면 이정표가 되어주었고 때론 불빛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단지 닦인 길을 걸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이 없어도 올바른 정답을 향해 갈 것이라 확정지었다. 비록 자신이 없으니 걷는 속도는 느리겠지만 천천히, 오래 걸리는 한이 있어도, 잠시 길을 잃어 같은 자리를 도는 한이 있어도 결국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그리고 영웅은 어느 고독한 마도사를 떠올렸다. 과거를 잊지 못해 한때 자신을 죽이려 계략을 짠 남자를. 언제나 무덤과도 같은 깊은 해저에 둥지를 틀고 자신만을 기다리는 그 자를. 당연하게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깨버렸으니 다시 만나면 뭐라고 말을 전해야할까. 별의 바다로 돌아가면 잊은 기억 전부가 돌아온다고 했으니 아젬의 기억도 함께 돌아오는 걸까. 그렇다면 용서를 구할 일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왜인지 그래야할 것만 같았다. 영웅은 생명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실소를 터뜨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마음만 먹으면 전부 알 수 있다는 마도사의 말이 머리를 스치며 거슬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모습은 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과 할 수만 있다면 마지막 숨을 거둬주는 건 그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영웅은 마지막 힘을 짜내 들리지도 않을 휘파람을 -휘파람은 커녕 숨소리에 가까웠다.- 불었다. 문득, 휘파람이라도 불어보라는 통하지도 않을 말이 떠올라서.
"꼴사납게 굴지마. 내가 너를 여기서 죽게 내버려둘 것 같나? 네가 죽고 못사는 동료들은? 왜 네가 모든 짐을 안고 가려고 해."
영웅이 그토록 다시 듣기를 바란 목소리가 들리자 눈동자만 굴려 소리의 방향으로 시선을 두었다. 새하얀 머리칼의 그가 빛을 등지고 서있어 마치 생명을 거두러 온 신의 대리인 같았다. 어둠 속에 가려진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부디 슬픔에 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영웅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게 전부였다. 말을 할 힘도, 손가락을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작 기나긴 주마등을 겪고 환각처럼 보이는 자신의 사랑하는 이를 바라볼 뿐.
"내 옆에서 마지막을 살고 싶다더니. 기어코 나를 네 옆으로 부르게 만들었어. 안 그래? 이건 약속과는 다르잖아. 네가 누울 자리는 알아서 정하겠다면서. 그래, 영웅으로 죽기엔 가장 알맞은 곳이군. 하지만 셀린 네가 죽을 자리로는 만족하나?"
덤덤하게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단 한 줌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만일 그가 다시 자신을 살리겠다 마음 먹는다면 잠잠해진 세상이 다시금 시끄러워질 게 뻔하니까. 영웅은 물음에 두 눈을 감았다. 동의의 표시였다.
"너는 옛날부터 참으로 잔인했어. 내겐 너만 있으면 됐는데 늘 나를 두고 갔지. 지금도 그래. 기다리는 나를 두고."
그는 말을 하다 멈추고 영웅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 덕분에 제대로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는데 감정 없는 목소리와 달리 온 고통이 새겨진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이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하데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힘 없이 늘어진 그녀의 손가락을 잡았다. 아무리 오래된 마도사라도 죽어가는 생명에 다시 불을 붙일 방법은 없을 터. 이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지금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고작 해봐야 영웅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전부이다.
"돌아가자. 네가 내 마지막 숨을 거둔 것처럼, 너도 내게 그럴 자격을 주어야지."
명계의 사랑을 받다 못해 명계 그 자체인 하데스는 이 말을 끝으로 셀린의 영혼을 거두어갔다. 가장 찬란했으며 세계의 모든 운명을 끌어안을 것 같던 영혼의 여정은 누구도 찾지 못할 하늘의 끝에서 마침표를 맺었다. 훗날, 새로운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이가 태어날지도 모르지만 아주 먼 미래의 얘기일 것이다. 그 사이 남겨진 영웅의 동료들이 그녀의 마지막 흔적을 찾을 것이고 결국은 끝을 맞이 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을 것이다. 별의 바다를 관측할 방법을 찾아내었으니 말이다. 그 순간까지 셀린은 소멸되지 않고 기다릴 게 분명하다.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하다고, 자신이 없어도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 말을 전해야하니까. 게다가 하데스와도 못 다한 말을 해야했다. 잊어버린 영혼 저편의 기억에 대한 것들을, 여러 영웅으로서 반복해온 삶의 이야기들을.
외롭다고 생각했던 싸움에는 언제나 지원해주는 동료들이 있었으며 혼자 맞이할 것이라 여겼던 죽음은 오랜 사랑이 머물어 지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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