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
致死量의 대가
씨근덕거리는 숨이 잇새로 샜다. 숨을 내쉴수록 천근처럼 무거워지는 몸이 경종을 울린다. 남자를 내려다보는 팔에 일순간 힘이 풀리는 것을 당신은 눈치라도 챘을까, 그러나 오기로 버터내었다.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다. 근성으로 무엇이든 씹고 삼켜온 인간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인생은 안 적이 없다. 눈 앞의 남자는 그런 인생만을 살아왔겠지만, 궁지에 내몰리고 죽기 직전의 상대에게 제 약점을 죄 떠벌리는 것이, 레시의 주마등 속 한 인물과 아주 일치한다. 아, 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
켁, 폼 잡고 애써 멱을 붙잡았던 손이 작은 기침소리와 함께 쉬이 풀렸다. 한 손으로 배를 움키고, 헛구역질에 가까운 호흡을 뱉으며 입 사이로 두부 같은 핏덩이가 떨어져 당신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소매로 입가를 닦지도 않은 채로 여자가 농조로 말한다.
미안, 침만 뱉을랬는데 다른 것도 뱉어서 어쩌나. 기분 더러운 것도 산 자나 느낄 수 있는 거니 감사하세요.
그리곤 목 너머로 느껴지는 토기도 삼켜내는 것이다. 주먹을 꽉 쥔다. 손톱이 살 안을 파고들 만큼의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심장은 여전히 미약하게 맥동한다. 소리가 약해질 수록 삶이 가까이 있다. 남자의 고해가 아주 먼 소리처럼 들린다. 으레 남자의 말은 늘 흘려들었으나 이번 만큼은 정말로 어쩔 수 없다, 주워듣고 싶어도 이 천치의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듣기 거북할 정도로 축 처지기나 하니까.
첫 만남부터 숫기가 없었던 남자는 어디든 제 3자가 되고 싶어 하는 듯 싶었다.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남의 비위나 맞추기를 원하는 놈. 비위를 맞추기에는 숫기도 없고 인간을 보는 시선 자체는 냉소적이다. 얻어터져도 아무 말 않고 반격 하나 않는다. 재수는 없지만 특출난 군상은 아니다. 짓밟기 좋다면 짓밟기 좋은 녀석이다. 상하관계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애써 된 사회화로는 ‘위의 명령은 절대적’ 이라는 규칙만큼은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나 단 한 번의 예외로 남자가 아닌 자신이 변했다. 남자의 나사빠진 행동으로 제가 죽을 뻔 했을 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댈 수 있다는 옛말을 몸소 증명하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그렇다면 남자가 살고 싶게 해야 했다.
남자는 좋아하는 것은 없지만 싫어하는 것은 명백하다. 남의 손 닿지 않게 천으로 온 몸을 꽁꽁 싸맨 것을 보라. 남들의 죽음은 방관하면서 나태에 절여져 제 삶의 안온함을 모르는 저 무지함을 보라.. 온 몸이 터질 정도의 치열한 삶을 살아온 억하감정일까. 레시는 사수 역할에 충실했다. 기어오를 수 있을 때 까지 짓밟고, 삶에 명확한 ‘목표’를 두게 한다. 어줍잖은 온도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불나방은 단 한번의 불을 위해 사활을 건다. 죽고 싶다면 죽이고 싶게 만들면 된다. 남자의 목표는 자신을 죽이는 것. 그러니 자신이 사지 멀쩡한 채 살아있는 것이야말로 남자를 향한 최선의 복수고 남자의 삶을 비웃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 자신이 살아낸 방법처럼.
남자의 고해가 점차 끝나간다. 거의 감길 뻔한 눈이, 이마에 닿는 서늘한 총구의 감각에 다시금 떠졌다. 아, 총을 쥘 때의 기본도 안 되어있는 놈.. 목표를 눈 앞에 갖다줘도. 이래서야 총이 미끄러져 터지기나 할 것을. 결국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의 작태로는. 여자는 혀를 찬다.
유언은 내가 해야 하는데 왜 아니카 씨가 하죠? 아.. 일단 정정. 당신은 포기할게 없어요. 아니카 씨, 속 없잖아. 있는게 없는 사람이 포기할게 있던가요? 맞고 틀리고.. 당신은 그걸 결정할 자격이 없어요, 애초 삶에 정답이라는 건 없으니까. 아, 그렇다고 해서 당신 인생이 별 보기 좋다는 말은 아니고..
천천히 여자는 고개를 숙인다. 입술이 닿을 만큼 거의 가까워진다.
늘 네가 발치에나, 깨물 것 없나 간 보려 살아온 것 알아. 좋아, 제법 열 받았어. 이 정도 칭찬이라면 꽤 포상인가요? 그런데 내가 한 번 싫어하기로 정한 건 정말 죽을 때 까지 싫어하고 보거든요. 비타민의 원한이라니, 당신도 참.. 이것까지 업적으로 쳐요. 그런데 나머지 하나는 제대로 망쳐둘까 싶거든요.
피 묻은 손으로 벌벌 떨고 있는 당신 손 강제로 꽉 붙잡는다. 여자의 마지막 숨결이 조금 가까워졌을까, 고개 숙인 여자의 입술이 당신에게 닿은 것 같다. ..아, 마지막으로 여자가 웃는다. 아마 당신이 가장 싫어할 표정. 유언? 지척에서 속삭이는 마지막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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