致死量의 이후

아카

붉은 군락 by 썸
4
0
0

주의! 유혈, 폭력, 목조름 요소가 있습니다.

넝마가 된 여자는 여느 사람처럼 픽 쓰러졌다. 복부 절반이 뜯기고도 오기로 토기를 삼켜내던 여자가 단 한발의 총성으로 주변의 참상과 동화된다. 마주 닿았던 입술이 낙인처럼 홧홧하고 뜨겁다. 불같이 살았던 여자의 마지막 숨결이자 잔화. 단 한번 튀어오른 불에 온 몸에 열상을 입은 것처럼 얼굴이 불콰해진다. 입술 소독 잘해, 개자식아. 그토록 열망하던 삶의 끝에서 남은 마지막 말이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조롱이라니, 결국은 당신은 남의 삶을 비웃으며 살아온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자신은 여기에, 지금까지 남의 삶을 비웃어온 당신에 대한 단죄를 대신 행한 것 아니겠냐고 … 그러나 남자의 손에서 총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피스톨을 쥐었을지언정 제대로 발포해본 경험조차 전무하다. 입꼬리는 올라갔으나 끝이 떨렸고 낯빛마저 어둡다. 짧은 인생동안 가져온 단 하나의 숙원이 이루어졌으나 소화불량이 온 것 마냥 가슴께가 꽉 막히고 목울대가 끊임없이 울렁였다. 여자의 마지막 발악으로 멱살을 잡고 내쳐 머리를 부닥친 후유증이 남아 있는 것인지 골이 울린다. 이마를 맞부딪힐때 피철갑을 하고도 붉은 눈을 하던 여자의 눈동자 안에 패잔병처럼 식은땀을 흘린 제 잔상을 마주보자 거울 앞에 선 것 처럼 초라해져 자신도 모르게 고해를 하던 고작 수 분 전의 기억이 아주 아득해진다. 곧 죽을 사람처럼 머리가 몽롱해지고 잠이 쏟아진다. 여기서 차라리 자신도 눈을 감으면. 애초에 여자만 죽으면 끝인 인생이었고 여자의 끝은 폭소가 터질 만큼 초라했다. (물론 자신은 폭소는 커녕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 부분은 차치하자.) 저 여자가 죽을 정도의 고전이었으니 자신이 죽어버리는 것도 별 수 없을테지. 아니카 반스는 다시 합리화한다. 저 여자 하나의 부정으로 제 인생 전체가 부정당할 수 없어. 그러니 당신은 틀렸어. 당신이 모든 걸 걸고 지켜온 인생은 … 짧게나마 남자는 자조했다. 가물가물해져가는 시야에 여자였던 넝마를 눈에 담는다. 이것이 제가 이뤄낸 마지막 업적이니까, 자신도 인생의 마지막까지는 당신을 비웃어야겠다고, 파리한 얼굴로 여자가 음침하다 했던 미소를 짓던 찰나, 흐릿한 시야 끝에서, 여자의 손가락이 움틀거린다.

-아니카.

아니카 씨.

아니카는 본인을 채근하는 듯 한 목소리에 식은땀으로 젖은 고개를 든다. 눈 앞에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2교대 팀장이, 결제 파일은 든 채로 아니꼬운 듯 검은색 서류판으로 반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본인 팀 보고에도 이렇게 집중을 못하니 원, 마저 해 봐. 가볍게 혀를 찬 채로 머리를 내려쳤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은 팀장이 팔짱을 낀채 떨던 오른 다리를 교차해 다리를 꼰다. 으레 심각한 중대사항이나 꽤 불편할 때 나오는 자세로 이 때의 팀장은 토시 하나로도 한달을 들들 볶을 지긋한 인간이었으나.. 아니카는 입술을 달싹이며 마저 보고를 이어간다.

-..총 중상자 2명, 사망자 17명으로. 거의 2교대 인원 전원이 교체당할 정도의 사건입니다. 잠복형 크리쳐인 줄 알았던 개체의 새로운 패턴으로, 잠복과 돌진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사실이 뒤늦게야 밝혀져 .. 대처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상입니다.

다시 혀를 크게 차는 소리가 들린다. 보고를 받던 팀장의 낯빛도 썩 좋지는 않다. 에이, 팀장님. 그래도 전 살아 돌아왔잖아용. 비음 섞인 애교가 담뿍 담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려 아니카는 흠칫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환청인가? 아니면 그 여자 특유의 끈적한 목소리가 제게 달라붙은 것인가? 어느 쪽이든.. 그래, 이런 재앙을 겪고도 그 사체들 사이에서 살아있던 여자다. 아니카는 잔상 속에서 구더기처럼 움틀거렸던 여자의 손가락을 기억한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철향과 난장판 사이에서.. 사후 경련이라 할지라도, 그 여자는 레시 플레카다. 꺾일지언정 끊어지지는 않을 여자다. 사지가 나가 떨어져도 숨만 붙어 있으면, 혀로 땅을 기고 머리를 찧어서라도 살아나갈 여자.. 그러니 제가 팀장에게 할 질문은 다분히 충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모습이어도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비웃을 수 있으리라. 그것만이 확실한 제 성과였고 전부였다.

-..저, 레시 플레카는 어느 정도의 중태입니까?

머리를 쓸어넘기고 줄곧 수심에 잠겨 있던 팀장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소린가. 레시 플레카는 죽었어. 사망자 명단 제일 위에 있는데. 전도유망한 녀석이었는데 안 됐지.

-예? ..죽은 줄 알았지만 움직였던 걸 봤습니다. 중상자가 아니라고요?

-사후 경련이겠지. 이미 시신 수습은 마쳤어. 마지막 생존자인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아.. 예. 그렇군요. 레시 플레카가.. … 죽었군요.

아니카 반스는 애써 웃었다. 팀장이 한숨쉬며 덧붙인 말 때문에라도 웃어야 했다. 결국 2교대 전원이 자네 빼고 보충될 테니 기존에 레시 플레카가 맡았던 업무는 자네가 맡게 될 걸세. 그래, 결국에는 단 한번의 운으로 모든 것이 결정난다. 아니카는 그대로 보고를 마치고 빠져나와 사망자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당신이 저지하려고 했던 업적을 죽은 얼굴에 대고 확실히 지껄여주고 싶었다. 당신이 얻기 위해 발버둥친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짓밟은 발길 단 한 번에 무너져내렸다고. 발길질 하나로 전부 엎어질 도미노 같은 인생을 살아온 것이 당신이라고. 구석에 몰린 여우를 짓밟는 것은 사실 제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당신의 노력은 전부 무의미했고 당신 말마따나 ‘살아남은’ 자신이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고.. 아니카는 시체 위에 덮여 있는 흰 천을 벗겨내고 일전의 고해처럼 전부 떠벌릴 셈이었다. 그러나 흰 천 위로 보이는 여자의 윤곽을 보자마자 아니카는 여자가 죽지 않은 것을 알았다. 여자가 죽을리 없다는 강박이 공포처럼 정신 끝자락부터 좀먹기 시작한다. 실은 저 천을 들추면 여전히 여자는, 피를 뒤집어쓰고도 핏발 선 눈을 하고 자신을 볼 테고, 자신이 고해성사처럼 여자를 비웃어 봤자 여자는 그것보다 간단히 자신을 짓뭉게듯 비웃기나 할 것이다. 아니카는 흰 천을 겨우 쥔다. 여자는 복부가 터져 있는 상태로 스스로 머리를 쏴 죽었다. 일전에 총 썼던 일을 했던 여자의 조준은 명확했고 관자놀이에 명중했다. 자살은 멍청한 것이라더니 가장 증오한 자신을 위해 가장 멍청한 짓을 스스로 한 셈이다. 그래! 레시 플레카는 죽었다! 레시 플레카는 죽었다! 아니카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천천히 천을 들어올려 여자의 붉은 머리칼을 확인하면서도 손 부분을 힐끔댔다. 망자는 말이 없다. 여자의 감은 눈이 보이면, 당신이 그랬던 것 처럼 그 얼굴에 자신도 침을 뱉을 것이다.. 아니카는 천천히 천을 내렸다. 레시의 눈이.

떠져 있다.

아니카는 그 길로 천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헛구역질하며 자신의 방으로 내달렸다. 죽었다며. 레시 플레카는 죽었다며. 수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증언된 사실이라며. 결국 회사 전원이 한통속인가? 아니면 이것 또한 레시 플레카의 간계인가? 뒷목이 뻐근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목을 틀어막는 토기에 아니카는 버릇처럼 살갗이 까질 때까지 목을 긁어낸다. 불이 죄 꺼진 살풍경한 방 한구석이 신경질적인 쇳소리로 가득 울린다. 레시 플레카는 죽었다. 레시 플레카는 죽었다.. 스스로 죽은 것은 여자가 분명한데 왜 자신이 구석으로 내몰려야 하는가? 목이 멎어 꺽꺽이는 숨이 가파르게 교차한다. 목이 졸릴 듯한 무게감에 아니카는 끝내 시야가 점멸한다.

곧 망자가 될 것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이미 살기에는 그른 자들이다. 가늘고 긴 인생을 모토로 잡아온 자신의 일평생, 끊어질 것이라면 끊어진 인생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본인의 미덕이기에 아니카 반스는 신음 한 번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다. 본인의 죽음이라면 이미 순응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남들의 삶 따위야 자신의 이해 영역이 아니다. 남의 목숨을 함부로 이고 지는 것에는 미약하게나 책임이 따른다. 지켜낼 능력이 되지 않기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 그릇에 담겨진 능력껏의 삶. 제 몸 건사하기 바쁜 현대에서 이기주의는 만연한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다수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다수가 선택한 길은 척도가 된다. 그러니 혼자 독식하기 위해 살아온 삶이라도 그것이 나쁘다고는 단정지을 수 없다. 본인은 본인 그릇에 담긴 양만 취했을 뿐이니까. 그러니 지금 피칠갑이 된 복도에 신음하며 살려달라 애원하는 자들의 삶은 운 나쁘게 그릇을 뺏긴 것이다. 아니카 반스의 삶은 그런 자들 덕에 조명받는다. 삶에 간절해지지 않아도 되려 절박한 자들 때문에 자신은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레시 플레카는, 제 좁은 그릇에 양껏 음식을 쌓아두던 멍청이다. 자신도 선인은 아니었다 자부하지만, 오히려 그런 이기주의의 극치의 말로로 ㅡ 애써 담아두었던 좁은 그릇 안에 있던 음식이 전부 엎어져 되려 자신의 그릇만 채워준 꼴이 된 것을 보라.. 아니카는 그제야 폭소했다. 복통이 느껴질 만큼 그 참상을 보고 정신이 나갈 만큼 몸을 구부려 대폭소를 한다. 처덕, 처덕, 스플래시 무비의 한 장면처럼, 피를 뒤집어쓴 시체가 몸을 질질 끌어 제 쪽으로 온다. 그 여자 만큼이나 죽음 앞에서 끈질기다고, 아니카는 은연 중에 생각했다. 시체가 손을 뻗는가 싶더니 일전처럼 자신의 몸이 기우뚱 기운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전체가 뻐근하게 울린다. 고개를 들려는 찰나 피로 물든 손이 자신의 목을 꽉 죄여온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호흡이 점차 끊어지는 망막 사이로,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장 증오했던 여자의 표정이 스친다.

아니카는 침대에서 발작하듯 몸을 일으켰다. 순간 흐르는 식은땀의 감각이 피가 흐르는 감각과 닮아 있어 아니카는 다시 세차게 몸을 흔든다. 몸에 닿는 모든 액체의 감각이 불쾌했다. 자신의 목을 옥죄었던 손길만큼이나 살갗에 스치는 천을 죄 찢어버리고 싶었다. 여즉 남아있던 손길의 감각에 아니카는 침대의 궁지에 몰린 채 다시 손으로 제 목을 쥐어본다. 꽉 틀어막힌, 살갗의 감촉 없는 온기에 아니카는 끅, 졸린 듯한 신음을 뱉는다. 목에 쥔 손에 천천히 힘을 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목에 느껴지는 무게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압력 없는 은근한 압박, 아, 마치 그 여자의ㅡ

-그렇게 쥐면 죽지도 않아요, 도와줄까요?

목을 쥔 여자가 웃는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