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콜 중독자의 변명

천경조 by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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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코올과 기억

저조도의 조명과 재즈 음악.

모든 것이 오차 없이 정돈된 바 카운터 뒤에 바텐더가 서 있다. 천경조가 주문을 하자, 바텐더는 진열장에 가지런히 정렬된 유리잔 중 하나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는 첫 손님에게 서빙할 잔의 디자인과 유리의 두께를 면밀하게 따져봤을 것이다. 바텐더는 머리칼을 단정히 빗어넘긴 데다가 몸에 딱 맞아 떨어지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팔꿈치까지 걷어 올라간 소매가 흐트러짐을 강조했다면, 짙은 검정색 베스트와 허리를 단단히 고정한 가죽 벨트가 절제됨을 부여했다.

한 마디로 군더더기 없는 차림새였다.

움직임 면에서도 망설임이나 낭비가 없었다. 몇백 번 혹은 몇천 번을 반복하고 달리 해보면서 가장 효율적인 동작을 터득했을 것이다. 소위 말해 그는 고급 바에 어울리는 숙련된 품격이 있었다.


이제 그는 냉동고에서 큼지막한 아이스 블록을 꺼냈다. 온더락 글라스 잔 크기에 맞게 사면을 커팅한 뒤, 잘 벼린 나이프를 들고서 형태를 다듬기 시작한다. 직방체로 매끄럽게 깎아낸 투명한 얼음은 프리즘처럼 빛을 산란했다. 얼음을 조심스럽게 들어 잔에 떨어뜨리면 유리와 부딪히면서 쨍한 소리가 울린다. 어떤 지체됨도 없이 스틱을 모서리의 틈에 밀어 넣고 빠르게 휘저어서 잔을 차갑게 만든다.

아마레토와 발베니 더블우드 12년을 차례대로 비율에 맞게 잔에 붓는다. 바 스푼으로 리큐어와 위스키를 잘 섞으면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황금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오크통에서 숙성된 알코올 베이스에 꿀과 바닐라, 아몬드를 머금은 향이다.

갓파더입니다.

얇은 잔 안에서 얼음이 녹으면서 달그락하고 청아한 소리를 냈다.

무심함도 지나친 친절도 아닌

몸에 밴 능숙한 배려.

바로 이런 것이 천경조가 좋아하는 것이다.


처음 바에 나를 데려간 사람은 대학 선배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갓 스물 된 애송이였던 나는 오직 취할 목적으로 먹는 소주와 시끄럽고 부대끼는 술자리에만 익숙했던 터라 제대로 된 바에 들어가자 압도된 기억이 있다. 마호가니로 만든 바 카운터는 중후했고 와인 숙성고에 들어온 듯 내부 마감재가 모두 목재였다. 좌석마다 환기 장치가 있다는 지하의 바가 조금도 낯설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 선배는 능숙한 자세로 앉더니 담뱃불을 붙였다.


나는 솔직히 메뉴판을 넘기면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지만은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이 근사하다는 사실 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알기도 전에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선배는 올드패션드를 좋아했다. 말이 별로 없다가도 벌꿀색 리큐르 몇 모금이면 문학 얘기를 하던 사람. 그러다가 감정이 고조되면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삼키는. 알코올과 담뱃잎과 재 냄새가 났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과 연애를 했고 여러 밤을 이 바에 같이 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바 테이블 앞에 혼자 앉아서 꽤 능숙한 톤으로 주문한다.

2. 환기, 중독

“제가 눈치가 좀 빨라요. 상대가 뭘 좋아할지, 어떻게 해야 편안해하는지 파악이 금방 된다고 할까요.”

그래서 관계의 시작은 항상 순탄했다. 호감을 사기 위한 방법은 간결하다. 하나,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 둘, 원하는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준다. 아, 물론 두 번째는 어지간한 눈치와 안목이 있지 않고서야 시도하기 어렵겠지만.

내 연애는 일정한 주기 그래프를 이루는데, 늘 어떤 시기를 통과하지 못하고 종결됐다. 그러니까 일정 시기를 지나면 이 연애라는 것도 일종의 역할극 아닌가… 그러면 내가 이걸 통해서 얻는 건 뭔가… 내가 이 관계를 통해서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까지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먼저 나를 떠나갔다.

“넌 그냥 항상 발만 담그고 있어. 갈팡질팡하면서 이것저것 재고만 있고. 같이 잠겨서 웃고, 울고, 진흙탕 싸움도 좀 하면서, 엉망이 되더라도 있는 대로 보여주면서 그렇게 관계를 맺으려고, 연애를 하는 거잖아. 우리는. 그렇게 진솔하지 못하겠다면

경조야, 나는 더이상은 못 하겠어.”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다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물가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떠날 거면서. 그랬다간 혼자서 익사하라고. 관계에는 어느 정도 보험이 필요하다.

카페 출입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린 뒤에도 내 맞은편 좌석에는 네롤리, 파츌리, 베르가못, 시더우드의 향이 남아 있었다. 향이 사람보다 먼저 들어오고, 떠나고 난 뒤에도 좀 더 남아있는다. 이별을 수용할 때 나는 웃고 있었다. 비겁하게 웃기 싫은데.

향이 사라지고 나서 불현듯 드는 생각

아.

그러면 농담을 들으면 찡그려서 웃던 눈을 다시는 못 보겠구나.

지난겨울 데이트 후

헤어지기 싫어서 개찰구 앞에서 껴안았을 때와 같은

그 따뜻함도 느낄 수가 없겠구나…

아 정말 다시는, 말이지.

그건 아쉽네.

생각보다 내가 많이 좋아했다는 걸, 예상보다 서로의 삶에 너무 많이 관여했다는 걸 깨닫자 위장이 헛헛해졌다.

술을 많이 마실수록 견딜만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혼자서 술을 마신다. 너무 청승 떠는 것 같아서 소주는 싫고, 위스키. 그게 더 폼이 나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좋아했지. 선이라는 게 뭘까.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선은 뭐고, 사이가 각별해지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선이라는 건 또 뭔가. 모르겠다 나는…. 혈중알콜농도 수치만 위반해 볼 뿐.

사실을 고하자면, 술을 있는 대로 진탕 마셨는데 하나도 취하지가 않았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까 조금 괜찮은 느낌이 드는 게 취한 것도 같고, 그렇다기에는… 정신이 더없이 명료하다. 아닌가, 씨팔 그런 판단을 하기에는 나는 지금 맛 가버렸다. 머리를 마비시키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데 여태 인생을 허비해 온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게 뭐지. 정말… 뭐지?

이제는 고독한 집구석에 돌아가야 한다.

내가 차라리 내가 좀 아니었으면 좋겠는 날이었다.

후각 - 다른 감각보다 기억과 더 강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특정 냄새를 맡으면 과거의 특정 순간과 장소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음. 감정과 기억에 깊게 관여한다. 후각은 뇌의 기억과 감정을 처리하는 부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3. 연결과 상실

"사이비종교단체 소행? 직원 워크샵 중 집단 실종… 행방불명 5명, 중상자 17명

- 중소기업 N사 재직자 20명이 단체 실종되었던 충격적인 사건이 화제

우리에게 있었던 일이 요약된 방식이다.

그날 자동차를 타고 그곳을 나오면서 이제 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엇이?

클라이맥스

이후가 남아있었다.

삶은 4분짜리 음악도, 러닝타임 2시간의 영화도 아니니까.

기적적으로 생환했지만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도 아니고

살아야 하는 삶이 남아있기만 하다.

목이 졸려 꼼짝없이 죽는다고 느꼈을 때는

관계 맺어온 방식을 분명히 후회했던 것 같은데.

만약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조금은 솔직해져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들어갈 때 나올 때 심리가 다르다더니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네.

그리고 내 양손은 아작이 났다. 의사 말로는 하루 이틀만 더 방치됐더라면 괴사했을지 모른다고 했다. 초콜릿은 왜 바른 건지. 하여간 절단은 면했지만 보기 흉한 흉터는 평생 달고 살아야 할 징표 같다.

“와, 손기술로 먹고사는 직업이었으면 갑갑했겠는데요.”

가정법을 통해 현재의 불행을 최악보다 괜찮은 것으로 치환했다. 당연하지만 일은 그만두었고, 구부러지지도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손의 재활에 당분간 집중했다. 그로 인한 생활의 균열은 내가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고작 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요구되는 일련의 모든 동작을 의식하고 힘의 균형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힘이 부족하거나 넘치면 엎지르거나 깨뜨리게 된다. 이전에는 무심코 했던 일들을 이제는 온 집중을 다해서 해야 한다.

단추를 잠그기가 어려워 팔다리를 꿰기 용이한 옷차림. 늘 같은 길이를 유지하던 머리카락은 이제 눈썹과 목덜미를 덮었다. 우아하거나 고상한 차림은 섬세함을 요하므로 투박한 손으로는 타협 보는 수밖에 없다. 나를 지탱하는 것들이 이렇게나 훼손되기 쉬운 것이라니.

사태 이전에는 회사에 출근한 뒤 업무의 중요도와 시급성을 따져 처리 순서를 정리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제는 일어나자마자 신체의 에너지 안배를 생각한다. 조금만 무리했다가는 손목을 따라서 팔꿈치까지 이어지는 경련이 온다. 그럴 땐 모든 것을 중단하고 자버리자, 전원을 꺼두는 것처럼. 하지만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몸에서 정신을 분리해 두는 것은.

어떤 밤엔 상처가 불에 타는 듯이 아파서 좀 울기도 한다.

겨우 잠들고 난 뒤, 열감이 휩쓸고 간 아침에는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생생한 것은 고통뿐이다.

4. 바람과 구원

이제는 지겹다…….

모든 것들에 권태를 느낀다.

못 살겠다고 느낄 때도 있다.

살아남은 주제에 죄송한 일이다.

아직도 시커면 수면 아래

유리 파편을 깔고 잠든

다섯 명에게.

나도 당신들도 서로 간에 잘 모르는데

이렇게 막연하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송구하고

미안함 외에는

잘 느끼지도 못하면서

불감의 날을 보내면서

손의 상태에 차도가 없다. 이쯤 되니 못 살겠다고 투정 부리기 위한 핑곗거리라고도 생각이 든다.

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병원에 있는 동안 절대 금연이었다 보니 금연 상태가 지속됐던 탓도 있다.) 궐련형 전자담배를 붙잡고 몇십 분 동안 꼴사나운 시도 끝에 홀더에 히츠를 넣는 것에 성공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외마디 탄성을 뱉었다. 진짜, 별…….

그리고 그 담배 한 모금이 너무 매캐하고 달아서 어이가 없었다.

그 길로 마트에 가서 위스키 한 병과 얼음팩을 사서 돌아왔다.

이렇게 마시는 건 취미가 아니다. 위아래로 트레이닝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로 집구석에서 술을 홀짝거리는 건 정말 꼴불견인데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제대로 된 유리잔도 아니고 손잡이가 달린 캠핑용 법랑 컵에 얼음을 퍼담았다.

바틀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해서 벌꿀색 액체를 잔 안으로 부었다. 그 과정에서 밖으로 흐른 것이 더 많았다.

벌써 탈력감이 몰려와서 빨대로 마셔볼까 했는데 그건 정말이지 미학에 어긋나서 그만뒀다.

의자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는 동안 얼음이 녹으면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알코올 향.

문득 막다른 곳에서 부는 바람처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동료가 했던 말이 귀에 스친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꽂히는 구원처럼.*

“당장 때려치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한데요.

지내다 보면 어떨 땐 조금 웃을 때도 있고 괜찮아질 때도 있어요.

그게 싫어요. 그만둘 결심이 약해지니까.”

무슨 맥락이었냐면, 한참 회사도 시끄럽고 악질적인 상사가 매일같이 들들 볶아대서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꼈던 때였던 것 같다. 그때 내가 대답을 어떻게 했더라.

“그만둘 마음이 물에 탄 듯 엷어지면 오히려 다행인 거 아닌가. 술에 물 탄 듯…”

왜 이 말이 갑자기 떠올랐지…….

그 때는 심드렁하게 대답한 주제에 아주 뒤늦게서야 그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조금 다르게, 필요에 의한 해석을 보태서.

나는… 그만두지 않을 촘촘한 이유들을 붙여둘 것이다. 조금 웃고 잠깐이라도 괜찮은 순간을 이어 붙이면서.

또 한 번 얼음 녹는 소리가 난다.

코가 막혀서 훌쩍거렸다.

버번 위스키의 알코올 냄새, 캐러멜과 바닐라 향이 비강에 들어온다.

손잡이에 뭉툭한 손가락을 비집어 넣고 엉망진창인 온더락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다.

또 한 번 훌쩍거림.

존나 맵네…

오늘은 전화를 걸어볼까 한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절망>,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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