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Social ND Club

천경조, 윤윤수, 최성빈

천경조 by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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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업부. 같은 ‘주임’ 직급을 달고 있지만 경력은 9년 차이, 나이 차는 자그마치 10살. 천경조와 윤윤수는 정오가 되자 빈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단둘이 점심을 자주 들게 된 것은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 친밀함의 척도가 아니었다. 윤윤수는 스몰토크를 허용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천경조도 공연히 파고드는 사람은 아니라 둘의 식사는 삼십 분 내외로 끝나곤 했다.

“아니, 이 집 순두부찌개가 원래 얼큰해서 좋았는데… 맛이 바뀌었나 봐요.”

“그것도 뭐… 순 조미료 맛이죠. 큼, 네.”

식당을 나오던 둘은 맞은편 카페에서 회계팀 최성빈 과장이 긴 팔을 휘휘 흔드는 것을 본다. 음? 하고 경조가 먼저 주변을 둘러봤고. 아무리 봐도 성빈이 보는 방향에는 경조와 윤수 둘 뿐이라 착각도 아니었다. 둘은 의문을 띄운 채 그에게 다가갔다. 경조로서는 크게 반가운 것도 꺼려지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뜻밖의 상대였는데. 윤수에게는, 지금이야 잘 돌아가고 있지만 초반 영업 구조 만들 때 회계팀에서 하도 빡빡하게 어깃장을 걸어서 약간은 해묵은 감정이 있다고 그랬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둘은 최 과장이 건넨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받아들었다.

“두 분, 회계팀으로 오실 생각 없으세요?”

비밀스러운 제안처럼 조심스럽고 낮게 읊조리는 소리였다. 윤수는 반사적으로 경조의 눈치를 봤다. 그때 천경조의 머리에서는 생각들이 빠르게 맞물렸다. 왜 우리를 콕 집어서 제안하지? 누구 런쳤나? 회계 가면 이직 쉽나? 칼퇴 하나? 설마 충성심 테스트? 에이 회사가 예능도 아니고. 그런데 최 과장 평판이 어땠더라….

“가볍게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천경조는 제법 신중한 투로 즉답했다.

윤윤수도 연차답게 빠른 상황 판단을 했다. 회계라면, 적성에 잘 맞을 거 같긴 한데. 회계부에 누가 있었지…. 그런데 하필 왜 같이 물어볼까. 경력 때문에 그러나, 천경조 천상 문과로 알고 있는데.

“예예, 자리 한번 잡죠. 저는 남은 게 시간이다 보니….”

윤윤수도 금방 거들었다. 영업부 주임 둘의 의견이 극적으로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30분 뒤,

[최성빈 과장님, 영업부 천경조입니다~😊

아까 구두로 말씀하신 사안 말인데요.
금일 정시 퇴근 하시면 같이 이동하시는 건 어떠세요? 자차 없으시다고 들었는데 태워드리겠습니다.]

사내 메신저 팝업이 뜨자, 모니터에 비스듬하게 기대놓은 스마트폰을 향하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최성빈은 속된 말로 ‘좆됐다.’고 생각했다.
타패 시간을 초과하여 성빈의 마작패가 강제로 선택되고, 근엄한 눈가의 그늘이 한층 깊어졌다.

남과장… 영업팀 가같은 분위기라면서요.

2.

여섯 시 반. 최성빈과 윤윤수, 천경조는 오피스 지대에서 벗어난 한 고깃집에 들어섰다. 근육질의 커다란 남자, 비만 체형의 남자, 훤칠한 남자 셋이 원탁을 둘러 앉아있자니 어쩐지 갑갑함이 몰려왔다. 경조가 빠르게 테이블을 세팅했다. 윤수는 가방에서 위생 물수건을 꺼내더니 물컵 주둥이를 닦기 시작했다. 성빈이 단숨에 물 한 컵을 비우더니 이실직고했다.

“저 사실, 농담이었습니다.”

“예… 예? 무슨 말씀, 농담이라는 게…”

“회계팀 올 생각이 없냐는 게 농담이었어요.”

“음…? 에이, 최 과장님. 알 거 다 아는 주임급 두 명한테 그런 농담을. 말투도 엄청 진중하셨잖아요.”

“이런 말씀 좀 그렇지만, 두 분 모두 너무 흔쾌히 대답하셔서 정정할 타이밍을 못 잡았습니다. 이렇게 된 김에 타 부서 간 친교의 자리라도 마련했다고 생각했고요.”

“ …진짜 앞으로는 농담 같은 건, 안 하시는 게.”

윤수의 뼈 있는 말에 최 과장이 살짝 무안한 낯빛으로 헛기침을 하자, 윤수는 모르는 척 손수건으로 엉거주춤 손등을 닦았다.

“게다가 전부터 남 과장이 영업팀은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자랑을 해서…”

“예? 아, 흠… 영업팀이 단합이 잘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요. 사실 제가 이제 3년 차인 데다가 직무적인 전환이 좀 필요한 시점이라, 여기 윤 주임님은 원래, 원래… 숫자 보는 쪽이 익숙하다고 하셔서 그쵸?”

“아. 예, 예…”

아주 그냥, 주임급 둘 다 영업부 뜰 생각이 만만이라고 다 불어라 불어. 윤수가 속내를 삼키며 주변을 둘러본다. 시끄럽고 사람 많고 공기가 기름기로 눅진하다.

“영업부는 조금 떠들썩한 장소를 선호하지 않으십니까?”

“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참을 인이 다 닳아서 슬슬 독기가 올라오는 선임의 대답에 경조는 마른세수했고. 연달아 실언한 윤수는 허공을 보며 입술을 꽉 물었다.

“저, 아무래도 영업이라 하면 뜨겁고, 열혈이고. 그런 이미지가 있는데… 저희가 사실 내향형입니다. 특히 여기 계신 윤주임님은 극 I 시거든요.”

“아……. 그렇군요.”

어쩐지 한 풀 꺾인 표정으로 성빈이 고개를 숙이자 분위기가 급속도로 침전된다. (사실 성빈은 테이블 아래로 펫캠을 보고 있었다.) 경조는 고기를 빠르게 뒤집었다. 어쨌거나 천경조는 이 자리에서 막내고, 그러니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이고, 보아하니 이중에서 가장 사교적이고 눈치가 빠른 사람은 자신이고, 죽어가는 분위기를 소생시키기 위해 총대를 메기로 했다.

“오늘 기왕 이렇게 된 거…… 2차로는 제가 아는 가게로 모시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이렇게 끝내기에는 아무래도. 끝맛이 좀 석연잖으니까.

3.

두 상급자가 요지부동으로 응한다면 설득과 회유마저 각오했는데 의외로 둘은 천경조를 순순히 따라와 줬다. 2차 장소는 경조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였다. 결벽증이 있는 윤 주임이 안심할 수 있어야 하고, 최 과장은 잘 꾸민 사람이니까 휘황찬란한 곳이라면 만족하지 않을까 해서. 사실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질러본 것이기도 했지만, 경조에게는. 불문율처럼 꽤 친밀한 대상만 데려오는 가게였고. 오늘은 예외적으로, 위급 상황이니 멋들어진 공간이 주는 동력에 기대보려고 했다.

마호가니 바 테이블이 있고, 재즈가 흐르고.

흑요석처럼 빛나는 피아노가 있는 곳.

푹신한 암체어에 앉은 세 사람이 마주 보았고, 저조도의 핀 조명 빛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 칙칙한 일 얘기 말고 다른 얘기는 어떤가요?

-솔직히 회사 사람들과 밖에 나와서 일 얘기 말고는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 예에… 이하동문입니다.

-넵… 선배님들 같은 입장이신 거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보통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으면 두 분 어떻게 하세요?

(침묵)

-스읍, 알겠습니다…. 저는 이런 데 자주 와요. 주에 적어도 두 번은 오니까 알콜중독 고위험군일지도.

……주문이나 받을게요. 윤 주임님은 술 약하시니까 무알콜로 하고, 과장님은요?

-저도 운동을 해서 알코올은 좀.

천경조가 눈치껏 추천한 음료가 차례로 서빙된다. 여기서 맥이 더 풀렸다가는 정말로 회사 생활이 이전보다 껄끄러워질 수 있음을 직감한 경조가 운을 뗀다. 경조가 장소를 알게 된 배경과 이곳 바텐더의 기량이 얼마나 출중한지를 설명할 때였다. 담백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성빈의 얼굴에 일순 의아한 기색이 스쳤고, 그것은 이내 난감함으로 변질됐다. 심드렁하게 듣는 체하지만, 좌불안석이었던 윤수는 역시 포착하지 못했고. 경조 또한 이상함을 인지하기까지 평소보다 더 걸렸다.

그러나 성빈에게는 이 둘에게 결코 털어놓을 수 없는 사실이 이제 막 생겨났는데. 성빈이 8년 동안 사귀었다가 결별한 어린 연하의, 남자 애인이 저 입구를 통해 이 공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성빈이 경조에게 속삭였다.

“조금만 눈에 안 띄게 있을 수 없을까요?”

“네? 아… 볼륨을 낮출게요.”

성빈의 은밀한 요청에 경조는 의문 하나 표하지 않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윤수는 좀 전부터 말문을 닫아버린 터라, 셋은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미처 통제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더 있었다.

“에이씨….”

빈 유리잔이 데구르르 구르더니 중력에 굴복해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 순간 바에 있던 모두의 이목이 쏠린 것은 물론이고. 천경조는 최성빈이 괜히 운동했단 것이 아님을, 그러니까 그가 얼마나 민첩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피어오르는 알코올의 향. 한꺼번에 많은 정보들이 쏟아졌다. 분명 무알콜이어야 했을 윤수의 음료가 다른 테이블과 바뀐 것이고.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윤윤수의 신경 줄이 툭 끊어져 버린 것이다. 어느새 일어난 윤윤수가 몸을 부들부들 비틀면서 그간 눌러 담은 욕설을 토해내는 동안. 최성빈은 아까부터 화면을 확인하기 위해 내려다보던 테이블 아래로 아예 몸을 숨겼다. 빠른 데다가 유연했다.

소위 말해 ‘좆됐다.’

직원이 유리 파편을 치우기 위해 청소도구를 들고 다가오고,

윤윤수의 얼굴은 제일 빡셌던 영업 술자리보다 시뻘겋고.

‘경조 씨… 계산하세요.’ 성빈이 중얼거리며 테이블 아래서 카드를 내밀었다.

경조는 ‘먼저 나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나오셔도 됩니다’ 라고 화답했다.

천경조의 착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회생활 선배라는 자들과 잘 풀어보고도 싶었는데. 노력이 잘못된 건지.

아사리판이 열린 것을…. 천경조는 택시를 불러서 윤윤수를 실었다. 그 과정에서 땀범벅에 기진맥진이 됐다. 뒤이어 얼굴을 가리고 나온 최성빈에게는 구십 도로 허리를 숙였다. 성빈은 약간 넋이 나간 것 같았는데, 평소랑 비슷한 느낌이기는 했다.

그리고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온 경조.

취기는 없고 눅눅한 피곤함만 느껴진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자 판판한 플라스틱 귀퉁이와 거즈 면의 감촉이 느껴진다.

아…. 카드 안 돌려줬네. 손수건은 언제 넣었지.

내일, 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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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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