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엔란 by 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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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전에 이엔은 눈을 떠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종료를 누를 때까지 란은 꼼짝도 않고 이엔을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고 있다. 형님, 일어나세요.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는 소리에 그는 낮게 칭얼거리는 소리를 낸다. 5분만 더... 그렇게 중얼거리면 이엔의 손이 란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란은 그 손길에 잠이 깨기는 커녕 더 잠들 것만 같았다.

"저만 일어날까요?"

"아냐... 내가 아침 해줄거야..."

그는 잠을 떨쳐내려는 듯 베개에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그 결과 머리는 상당한 까치집이 되었지만 그닥 신경쓰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이엔은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보며 환하게 웃어버린다. 형님... 귀여워요... 평소와 같은 주접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란은 마주 웃으며 그런 이엔의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식칼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도마를 두드렸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핫샌드위치로, 햄과 치즈에 야채도 잔뜩 넣어서 따뜻하게 구운 것이었다. 연하게 내린 커피를 잔에 채우면, 씻고 옷을 갈아입은 건지 이엔이 말끔한 모습으로 부엌에 들어온다. 란은 매고 있던 앞치마를 풀어 의자에 걸쳐두며 다가온 이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에게서는 좋은 향이 나서, 란은 그 상태로 잠시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형님도 참..."

"이엔한테서 좋은 향 나..."

잠시 꼭 붙어있다가, 길어질 것 같자 이엔이 슬쩍 란을 밀어내었다. 란은 무력하게 밀려나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나름 길게 붙어있었기 때문에 무력하게 밀려난 것 치곤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아침을 먹는 내내 란은 이엔의 시중을 들어주는데, 그게 좋으면서도 부끄러워 이엔은 살짝 뺨을 붉히고 만다.

"형님도 드셔야죠."

"응... 커피도 마셔, 이엔... 오늘 특히 잘 내려진 것 같아..."

그 말 그대로 커피는 유달리 향이 좋았다.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의기양양해보이는 란이 귀여웠기 때문에 이엔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간단한 실내복 차림으로, 이엔은 출근하는 차림으로 함께 차에 올라탔다. 이엔의 자리는 언제나 란의 옆자리, 조수석이었다. 이엔이 올라타고 나면, 란은 그에게로 몸을 기울여 직접 안전벨트를 매어주었다. 운전하는 동안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날 저녁 메뉴라던가, 이엔의 회사에서의 일이라던가, 별 내용 없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다 보면 금방 회사 앞에 도착해버리고 만다. 란은 종종 이엔의 회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을 해버린다.

"잘 다녀와... 오늘도 힘내고..."

"네..."

쪽, 하는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자 이엔도 마주 입을 맞춰왔다. 그동안 헤어질 때마다 다녀와 뽀뽀를 해달라고 조른 덕에 이제는 익숙해진 절차였다. 그러고도 란은 한참이나 이엔의 허리에 팔을 감고 부비작거리거나 다시 입을 맞추며 치근덕거리기 일쑤였다. 아직 시간이 어느정도 남았기 때문에 이엔은 굳이 밀어내거나 하진 않았다.

"...보내기 싫다..."

"출근하는 것 뿐인데..."

"8시간이나 못 보잖아... 너무 보고싶을거야..."

"...저도요, 형님..."

결국 출근시간이 아주 조금 남을때까지 차 안에서 한참이나 더 부비작거린 뒤에야 출근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릴 즈음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있었기 때문에,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가라앉히려고 노력해야 했다.

이엔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면, 란은 서재 책상에 앉아서 작업을 시작했다.  다음달이 마감인 단편이었는데, 아직 여유롭긴 해도 미리미리 작업해두는게 여러모로 편할 터였다. 커피를 연하게 한 잔 내려서, 컴퓨터 옆에 두곤 빈 창을 열어두었다. 펼쳐 둔 노트에는 이미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이걸 어떻게 조합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니까. 란은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집중을 시작했다.

한참 원고를 쓰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란은 무심코 시계를 보았다가, 점심을 놓칠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다닥 원고 파일을 마무리 했다. 옛날 같았으면 시간을 봤든가 말든가 원고를 지속하고, 견디다 못할 때서야 빵이나 컵라면으로 때우고 말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랬다간 이엔이 속상해할 테니까.

점심을 만들 겸 냉장고 안을 확인해보니 아직 남아있는 식재료들이 보였다. 계란도 있고, 야채도 남았고... 남은 식재료들을 살펴보고 슬슬 오래되어 상태가 변하기 직전인 당근을 꺼내들었다. 계란이랑, 아침에 쓰고 남은 햄이랑... 적당히 꺼내든 재료들로 만든 것은 오므라이스였다. 비록 혼자 있기는 하지만 케첩으로 하트모양을 만들곤 냠 입에 넣는데, 그때 든 생각은 역시 이엔이 있었으면 더 맛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아침과 점심의 설거지를 해치웠다. 설거지를 해치운 김에 청소기를 꺼내 집 전체를 청소하고, 물걸레로 뽀득뽀득하게 닦기까지 했다. 그러고나서 빨래 바구니를 보니 빨랫감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세탁기도 돌렸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청소기를 돌렸으면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겠지만-실제로 이엔은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 아직 란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진 않았다. 꼭 이런 생각은 세탁기가 돌아간 다음에야 떠오르고 만다. 란은 스스로를 자책하는 대신 소파에 웅크려 누웠다.

멀리서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베란다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흘러들어왔다. 적당히 평화로운 한 때였다. 따끈따끈하기도 하고. 란은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뜬 건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는 알림음이 울릴 때였다. 란은 눈을 부비며 일어나 깨끗해진 빨랫감들을 탈탈 털어 널기 시작했다. 햇빛이 좋으니까, 다 마르고 나면 꽤 좋은 향이 날 것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이불을 빨까. 이런 생각을 하며 란은 머리는 멍하니, 몸만을 움직였다. 빨래를 다 말리고 돌아오면 적당히 쌓인 분리수거통이 보였다. 대개 란의 집안일이란 거의 이런 식이었다. 계획을 세워두고 하기보단 그때 그때 눈에 보이면 해치워버리고 만다. 종종 하던 일이 밀릴때도 있었다. 다행인 건 란이 일에 관해선 성실한 편이란 것이었다. 란은 캔이나 플라스틱이 담긴 봉투를 요령껏 두 손에 전부 쥐고 집 밖으로 나선다.

분리수거장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있으면 마찬가지로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건지 옆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란에게 인사를 건넸다. 란은 조금 어정쩡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면 란은 대체로 묵묵히 들으며 종종 네... 하는 대답을 남길 뿐이었다.

"아이구, 이것 좀 가져가서 먹어요."

아주머니가 집에 들어가서 들고 나오더니, 친근하게 말하며 손에 쥐어준 것은 귤 몇 개였다. 동그랗고 색깔이 진한게 맛있어보이는 귤이었다. 란은 멀뚱한 표정으로 그걸 보고 있다가 어설프게 웃어버렸다.

란은 어차피 나온 김에 근처 정육점에 가서 돼지고기도 조금 샀다. 저녁 반찬으로 먹을 셈이었다. 손에 귤을 몇개씩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정육점에서 담아준 비닐봉투 안에 귤을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원래 집돌이들이란 한 번 나온 김에 모든 볼일을 끝마치기 마련이므로, 또 살 게 없는지 한참 생각하다가 근처 야채가게에 들러 샐러드를 만들 야채도 조금 샀다. 그러고 나서 잠시 서서 고민해보았는데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이러고 나면 완연히 오후였다. 란은 사온 것들을 냉장고에 정리해 넣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청소기를 돌리는 동안, 낮잠을 자는 동안, 산책 겸 장을 보고 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 한켠은 작품을 위해 줄곧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판을 치는 손길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은 이엔이 곁에 있을 때 뿐이었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란은 쓰던 걸 적당히 마무리하고 저녁식사 준비를 해두었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양념을 만들거나 고기를 재워두는 둥 메인 메뉴의 밑준비를 미리 해두었다. 그리고 앞치마를 벗어서 의자에 걸쳐두면 이엔을 데리러 갈 시간이었다. 그는 차키를 손에 쥐고 집을 나섰다. 적당히 차를 회사 앞에 대어두면, 곧 이엔이 밝은 표정으로 이 쪽을 향해 뛰듯이 걸어왔다. 란은 그런 이엔을 한 번 꼭 안아주고 조수석에 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안전벨트를 매어준 다음에야 저도 운전석에 앉아 출발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다녀왔다는 의미로 이엔이 란의 뺨에 입을 맞추고, 어서오라는 의미로 이엔의 뺨에 입을 맞추고 나서 차는 출발할 수 있었다.

이엔은 오늘 회사에 있었던 일들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란은 옅게 웃으며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형님은 오늘 뭐하셨어요?"

"음... 오므라이스 먹었어..."

"점심으로요? 와, 맛있었겠다."

"하트도 그려서... 이엔이랑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더라... 그리고 청소기 돌리고.. 세탁기 돌리고..."

매일 다를 것도 없는 일상의 이야기인데, 이엔은 매번 흥미진진한 것을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였다.

"아, 옆옆집 아주머니가 귤 줬어..."

"귤이요?"

"응... 분리수거 하러 나갔다가 만나서... 이상하게 항상 잘해주시더라..."

그건... 아마 형님을 백수라고 생각해서... 이엔은 진실을 굳이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보통 프리랜서라고 생각하진 않으니,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란이 항상 후줄근한 차림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니... 백수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 증거로 옆옆집 아주머니는 종종 이엔을 만나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형도 곧 취직할 수 있을거라고 응원해주시곤 했다. 언제 한 번 해명을 하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다보면 어느새 집이었다.

이엔이 씻고 나오는 동안 저녁 식사는 금방 차려졌다. 미리 준비해둔 덕이었다. 따끈하게 김이 오르는 밥과, 갈색으로 양념된 돼지고기는 군침이 도는 모양새였다. 나름 영양균형도 고민한 건지 샐러드와 야채 반찬도 함께였다. 이엔은 감탄하며 자리에 앉는다.

"매일 준비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제가 와서 해도 되는데..."

"이엔이 맛있게 먹을걸 생각하면 기쁘니까..."

"그래도 가끔은 제가 하게 해주세요. 저도 형님께 맛있는 걸 해드리고 싶단 말이에요."

조금 투덜거리는 이엔의 말투에 란이 다정하게 웃고 만다. 그리고 대답하는 대신 고기를 한 점 집어 이엔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맛있어?"

"맛있어요..."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란은 반찬을 이엔의 밥 위에 올려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결국 이엔도 웃어버리고 만다. 차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식사시간이 이어졌다.

란이 한다고 했지만 한사코 제 몫이라며 고무장갑을 뺏어간 이엔은 설거지를 빛이 나게 말끔히 해치웠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귤을 까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란은 잠시 앉아있다가, 굳이 몸을 기울여 이엔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어리광같은 몸짓에 이엔은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귤의 껍질을 다 까고 나서 알맹이만 란의 입가에 대어주면 란은 냉큼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형님... 아기 새 같아요."

"이엔의 단어 선택은 종종 당황스럽다니까..."

"그럼 아니에요?"

"그래그래... 난 이엔만의 아기 종달새..."

란은 익숙하게 자기모에화를 하며 이엔이 먹여주는 귤을 마저 받아 먹었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면 나란히 누워 꼭 끌어안고 잠이 들기도 하고. 종종 눈이 맞으면 늦은 시간까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대체로 그런 날들이었다. 오직 둘이라는 이유만으로 넘치도록 행복했고, 기꺼웠다. 그렇게 평범하디 평범한 어느 일상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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