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페커미션 28. Тульский Токарев
1차 - 무명+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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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파이] Тульский Токарев
저는 정말이지, 할 말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단 말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 채워진 게 없는 것, 감각이 없는 것, 어디에도 없는 것.
무명이 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뇌를 뭉개려드는 죄책감과 심장을 조이는 의무감이 거미줄 같은 줄로 줄다리기를 한 결과 겨우 도출한 결론이었다. 그는 어느 사분면에도 속하지 않기 위해 자아 위에 견고하게 고치를 둘렀다.
관리측은 그것을 높게 친 것일까, 무명은 쫓겨나지 않았다. 오히려 최종선발과정에 올라……. 그래,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한 번 죽어버리고 페널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탈락하지 않는 것으로 제 고치의 견고함을 증명했다. 그 어느 지점에서 탈락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본인마저도 놀라움이 고치를 두드릴 정도로 의외인 결과였다.
무명은 분리와 억압에 능숙했다. 능숙? 아니, 그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제 죄악과 의무가 만든 결과물에 가까웠다. 어찌되었든 무명의 자아는 분리에 익숙했다. 아바타와 현실 육체의 분리와 희미한 연결을 아주 드물게 감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는 미로 속에서 실제 세계를 함께 밟고 있었다. 본인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그래서 무명은 누구와는 달리 천성적으로 다정하던 자가 탈락했을 때, 실제 그 자의 육체에도 총알이 박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분리에 익숙한 정신 속 무의식이 알려주는 실제인 것도 모르고. 그러나 무명은 저도 모르게 계속 생각을 이어나갔다.
실제로 그 자에게 박힌 총알은 어디서 나왔을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미궁을 지휘하는 자, 혹은 단체는 총을 가지고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계층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체가 있는 곳 근처 어딘가에, 실제로 총이 있다.
이를 깨달은 순간 무명의 고치는 금이 갈 뻔할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만큼 그는 총이 갖고 싶었다. 혹은 총알이라도. 쓰임새를 생각한 욕구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정교한 살상의 형태를 한 쇳덩어리를 가지고 싶었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하는 것도 없다- 그 견고한 규칙을 위협하는 유혹이었다. 총이라는 물건은 그 자체로 죽음처럼 보였다. 가지고만 있어도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드는 작고 억센 물건. 무명은 그것이 몹시도 갖고 싶었더랬다.
혹시 자신은 죽고 싶은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확하게는 감정을 너무 납작하게 눌러놓은 탓에 죽음에 대한 감정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반대로 살고 싶은가, 라고 물으면 그런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래, 죽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딘가에 부하를 주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삶이란 의무였기에 죽음의 호오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는 현실이었다. 다만 삶이 의무가 된 이유가 만약 사라진다면, 그래서 더 이상 삶이 의무가 되지 않는다면 과연…….
아니, 모두 쓸 데 없는 생각이었다. 지금 같은 시대에 살상무기라는 것은 구비할수록 좋은 물건이 아니던가. 자신의 호오 따윈 알 바 없이, 무기는 예비일 뿐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필요에 의한 구비일 뿐이다.
무명은 그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고치의 균열을 막았다. 자신의 진짜 신체로 깨어났을 때에 바닥을 열심히 살핀 것도, 화약이 빠진 탄피들을 아쉽게 바라보던 것도, 그러다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흘려둔 총탄 하나를 발견해 아무도 모르게 숨겼던 것도, 그 때의 고치가 희열에 또 다시 흔들리고 있었던 것도 모두 다 필요에 의한 기계적 사고의 결과라고 생각하면서.
감정을 감정이라고 인식하고 저를 다잡는 편이 좋았을까? 그랬다면, ‘그들’이 생존자가 가진 정신적 억압을 다 끊어주겠다는 개소리에 조금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을까. 감정이 솟아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바빠 애초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가 가진 모든 종이가 불타오를 때까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불타오르는 종이에도 흥미가 없어 보이는 무명의 표정에 크게 만족했다. 그 때 무명은 너무 큰 충격에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주로 가기 위해서 메모들은 태워져야 했다. 우수한 자만이 자격이 있고, 우수한 자에게 정신적 속박은 없어야 했으므로- 그건 일견 맞는 소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애초에 왜 미궁으로 향했던가?
그저 별 뜻 없이, 그냥…….
적어도, 이런 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재만 남아 숙소로 돌아간 다음에야 무명의 고치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명은 누군가 날카로운 날들로 심장을 마구 휘젓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가장 큰 의문이자 혐오스러운 것은, 자신이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메모와 함께 타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무명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오열하면서 동시에 분리된 자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는 왜 불타죽지 않았어?
네 죄책감은 그 정도로 얕았나?
견고하고 단단한 그 죄책감이 어쩌다 그렇게 닳아버렸나?
어쩌다가?
무명의 입술에서 저도 모르게 정답이 흘러나왔다. 단 두 음절의 한 단어, 진짜 이름일 리도 없는 그것, 입술 새로 터지는 소리로 시작해 혀뿌리가 입천장을 닫으며 끝나는 단어.
파이.
그렇다, 무명에게 있어 가장 큰, 혹은 유일한 자극이었던 것. 그는 끊임없이 무명을 자극하고 도발하며 반응을 보는 것을 즐겼다. 단 한 톨의 호감도 없으면서 호감을 뒤집어쓰고 끊임없이. 무명은 그것을 아주 하찮게 여겼다. 그런 도발 정도로 자신의 고치에 흠집 하나 갈 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은 낙숫물인 법이었다.
끊임없는 자극에 무명은 어쩔 수 없이 생각해야했고, 움직여야했고, 반응해야했고, 감정을 느껴야 했다. 그것이 혐오이든 미움이든 증오이든, 어쨌든 감정은 감정이었다. 파이는 파이의 증오로 끝나버린 무명의 줄다리기를 불러와 교묘하게 조종했다. 무명은 견고한 척 하면서도 거기에 끌려가 결국 기계와는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정말이지 웃긴 일이었다. 무명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 무명에게 호감이라고는 전혀 없으면서, 사실은 무명을 그토록 미워하면서 한 모든 행동이 무명의 의무와 죄책감을 갈아내고 있었다. 그래, 허용되지 않던 혐오라는 감정을 파이에게 늘어놓는 것으로 갈 곳 없는 무명의 억울함을 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실의 원인이 자신이기에 도저히 무의식에서마저도 꺼낼 수 없었던, ‘메모를 상실한 것’에 대한 억울함. 무명이 원인이 되지 않았다면 하늘에 대고 수천 번을 고했을 상실에 대한 억울함을, 파이를 마음껏 미워하는 것으로, 은연중에, 그렇게……. 그렇게 그의 고치가 조금씩 마모되어 갔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와 그 입술에서 나온 모든 궤변이 위로처럼 들렸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단 한 발의 총알만을 가지고 있던 무명이 총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죽으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다. 메모를 태워버린 유토피아는 내 낙원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규칙을 따를 필요도 없어졌고, 그들의 규칙이 내 규칙이 아니게 된 이상 따라야할 건 나 스스로 만든 규칙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규칙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항목이었다.
삶도 죽음도 정말 아무래도 좋을 일이 되어버렸으니 죽으려 들 의욕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후세계가 없다면 다행이지만 있다면 곤란했다. 메모는 자신의 꼴에 만족하지 못할 테니까. 메모가 바라는 것쯤이야 뻔했다. 내가 메모의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사람처럼 웃고 울며 나아가는 것. 하지만 그렇게 살아지지가 않았다. 살아야하는 의무가 있는데 무표정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메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함에도…….
너 자신에게 처벌을 가하면 마음이 편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숨을 쉴 수 없는 데 살아야 하는 모순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 기계로 살았고, 메모를 잃어버린 지금까지도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단지 할 일이 있었기에 그걸 하러 갈 뿐이었다. 모든 규칙을 다 준수하고 나면 어떻게든 되려니 하는 생각으로.
죽음처럼 분단된 어둠이 점차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 본 파이는 퍽 의외였다. 파이는 터널에서 나오는 것이 나임을 알고 나서도 무척 기뻐했다. 멸망에 고개 숙인 황야가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나를 미워하는 주제에 나를 반기는 그를 보고 문득,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파이란 인간이 참으로 가없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술이 올라갔다. 가엾어서일까? 반가워서일까?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아주 조금, 웃고야 말았다. 무척 편안하게.
아, 당신은 기어이 나를 앞으로 움직이게 만들었구나. 본인은 죽어도 알지 못할 방법으로, 죽어도 알지 못하는 일을 해냈구나.
나는 알았다. 이제 메모는 나를 보아도 덜 슬퍼할 것이다.
나는 단지 조금 심술이 나서 미소를 지우고 표정을 굳혔다. 그야, 날 움직인 게 그라니 심술이 날 만하지 않냔 말이다. 물론 죽어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이전의 나를 연기하며 그와 익숙한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래, 역시 나와 당신 사이엔 이 정도의 혐오가 좋았다.
나는 총구를 내 머리에 겨누고 기꺼이 증오하는 파이의 어깨에 기대었다.
아, 내 사랑하는 친우여, 네가 분명 바랐을 미소를 나는 지을 수 있게 되어버렸어. 웃어도 괜찮게 되어버렸어. 그러니 네 흔적을 지키지 못한 나에게 처벌을, 네 바람을 이루어낸 나에게 포상을. 영원히 나아가지 않을 수 있는 규칙 속의 안식을.
손에 힘을 주기 직전, 나는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파이만이 볼 수 없을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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