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페커미션 27. 7.62mm
1차 - 무명+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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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파이] 7.62mm
아직 살아남은 아스팔트가 있었던가, 파이는 답지 않게 멍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아스팔트에 구두굽이 부딪혀 나는 소리는 이제 제법 희귀해지지 않았나. 아스팔트도, 구두도. 아스팔트가 멀쩡했던 그곳에서도 굽을 갈아가며 구두를 유지하는 것은 소소한 사치의 영역에 속했다. 예리한 것으로 귀를 뚫듯이 들려오는 구둣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예전 기억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잘 관리된 굽이 내는 구두소리가 한 때는 자신의 것일 때도 있었다…….
파이는 이리저리 갈라진 아스팔트 터널 너머의 어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안에서 무언가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멸망한 세상에서 멸망하지 않은 징그러운 것들은 가끔 드나들었지만 그것을 무언가라고 칭하기엔 너무 하찮지 않은가. 의미 없는 것이 들락날락거리는 것을 무언가라고 굳이 칭할 생각조차 없었다. 미치지 않기 위해 그것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이 무용했음을 깨달은 이후 파이의 눈에 저 터널 너머 어둠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한없이 예리해진 청각이 구두소리를 핥을 것 마냥 세세하게 잡아내었다. 무언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보일 터였다. 빛과 어둠이 죽음의 선을 그어둔 곳을 지나면, 아래부터 천천히 무자비한 태양 아래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제 곧 무언가가 드러난다. 무언가가, 자신의 언행에 반응할 수 있는 무언가가. 파이는 설령 그것이 구두를 신은 흉측한 외계생물체라고 해도 반갑게 맞아 줄 수 있었다. 그는 저 무언가를 위해 기꺼이 귀한 물을 목 너머로 흘려보냈다. 말을 걸 수 있는데 목소리가 갈라지면 아깝지 않은가.
발끝이 드러나고, 종아리와 허벅지가 드러나고, 드러난 빛에 잔뜩 찡그린 얼굴이 드러나면서 파이의 눈에 서린 기대도 점점 희열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추방되기 전에 한 번은 보고 싶었더랬지. 나의 친애하는 유희, 역겨운 친근감, 반가운 열등감, 뒤틀린 정도正道.
그의 0, 절대 무한하지 않을 정지된 기준점, 애를 쓰고 노력해야 겨우 제자리에 고여 있을 수 있는 불쌍하고 거만한 멍청이. 그러나 잃고 나서야 아는 것이 있다고 하던가? 파이는 인정했다. 추방된 후로 그는 제법 자주 생각나는 인물이었다. 가장 자주 생각나지 않았나? 마음 속 의문은 무시했다. 그렇다고 대답하느니 차라리 도마뱀과 대화하며 죽어가는 게 나았다.
그가 눈을 찡그리고 빛에 익숙해지는 사이 파이는 섬세하게 말을 골랐다. 얼마나 오랜만인지! 사실 추방된 지 얼마나 지났는지 날을 세지 않아서 전혀 모르지만 어쨌든 오랜만이라고 느끼면 오랜만인 것이다. 오랜만에 그에게 말을 건네는데 허튼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파이는 죽어가는 태양만큼이나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키스하고 싶어서 왔나요, 주인님?”
빛에 적응해 차차 펴져가던 인상이 다시 마구 구겨졌다. 파이는 낄낄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미로에 놀려먹는 재미를 두고 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는 유쾌하였다.
“행색은 돌아버린 꼴을 했으면서 정신은 아직 멀쩡한가보군요.”
“그래서 안타깝기라도?”
“글쎄…….”
그야 물론 안타깝지, 라는 대답을 기다리던 파이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설마 내 정신이 멀쩡한 게 다행이에요?”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안위를 걱정해서 다행인 게 아니니까.”
그, 무명은 천천히 다가와 파이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파이는 무명이 무엇을 하든 일단 내버려둘 작정이었는데도 하마터면 그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날 뻔했다. 안 될 일이었다. 그의 앞에서 뒷걸음질 치다니. 무슨 짓을 하는지 보자 싶어 가만히 있으니 세상에, 무명은 제 얼굴에서 너덜너덜해진 안대를 벗겨낸 다음 품에서 아직 쓸 만해보이는 안대를 꺼내 잘 묶어주는 것이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에 대한 연민이나 배려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니까.”
“오, 그 안대를 품에 간직한 것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는 말인가요?”
“간직한 게 아니라 가지고 온 거죠. 예, 다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아무래도 나처럼 쫓겨나서 죽을 날 받아놓은 건 아닌가보군요?”
“물론입니다.”
무명은 제법 비위가 상한 듯 눈매를 치켜떴다. 파이는 무명의 표정에서 읽히는 생각을 소리 내서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날 대체 누구랑 비교하는 거야. 쫓겨나도 너 같은 꼴로 쫓겨나진 않아. 일관된 혐오가 파이는 퍽 기꺼웠다.
“그저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왔을 뿐입니다.”
“어라, 추방자도 규칙이란 것에 속할 수 있었던가?”
“미로의 규칙 말고요.”
무명은 이어 더러워진 파이의 얼굴을 천으로 닦고 누더기가 된 겉옷을 벗기더니 자신이 입던 겉옷을 벗어 걸쳐주었다. 행동만으로는 퍽 상냥했는데 눈빛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제가 지켜야 할 저의 규칙 말입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죠.”
그리 말하고는 어중간하게 깔끔해진 파이의 꼴을 한 번 눈으로 훑는 것이다. 파이는 이번에도 무명의 표정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지키지도 않을 거고 지킬 생각도 없을 테지만. 파이는 조금 억울했다. 그렇게까지 밉보였던가, 자신은? 그러나 파이는 그 어떤 감정도 내놓지 않고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를테면 어떤?”
“약속한 것은 지킨다. …같은 것.”
“약속? 우리 사이에 약속한 것 따위…… 너무 많아서 그 중에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추방자를 찾아올 정도로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약속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얄미울 정도로 예상했다는 투의 대답이었다. 파이의 입술 끝이 아주 조금 내려왔다. 약속? 그 하잘 것 없는 약속들 중에서 무엇을 말하는 거지? 그러나 무명이 품 안에서 꺼낸 다른 물건을 보고 파이는 그만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이 순간만큼은 무명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물건이었다.
“세상에, 그걸 어디서 구했어요?”
“21세기가 되어서도 자주 쓰인 구시대의 유령입니다. 툴스키 토카레프. 1930년에 만들어진 구식권총이지만 생산성이 우수해서 오랫동안 살아남았죠. 진열대에 장식되어 있던 걸 가져왔습니다.”
“진열대……. 잠깐, 네가 무언갈 훔쳤다고요?”
“그렇습니다.”
“네가?”
“예.”
“세상에! 웬일로?”
파이가 놀라 소리치자 무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사람 같은 몸짓에 파이는 두 번 놀랐다. 자신이 아는 무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어지는 무명의 말로는 더욱 더 그랬다.
“7.62 mm 총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네가? 총알을? 대체 어떻게?”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잠깐, 네가 총알을 구했기 때문에 총을 훔쳤다고요? 너 무명 맞아?”
파이의 반응에 무명은 귀찮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곤란한 듯, 혹은 귀찮은 듯 보이기도 하고 언짢아 보이기도 하는 이상한 한숨.
“당신은 현재 그곳의 상황을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네. 우선순위와 중요성으로 판단하건대 훔쳐오는 것이 가장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자신마저 추방한 곳이었으니 지금 꼴이 멀쩡하지 않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상상은 가지 않았다. 총알을 구해 총을 훔치고 나오는, 규칙준수라고는 발끝에도 못 미치는 행위가 규칙을 지키는 거라니. 파이로서는 점점 더 난해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명은 아까 내쉬었던 그 복잡미묘한 한숨을 다시 한 번 내뱉고는, 정말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을 뱉어내었다.
“약속했으니까요. 언젠가 당신을 끝내주기로.”
파이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크게 웃었다. 있는 것이라곤 없는 삭막한 곳이 파이의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폭소로 가득 채워졌다. 무명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파이가 웃는 걸 굳이 막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으하하하! 아니, 그 약속을 지키는 게 최우선 규칙이 되었다고요? 네게?”
“그렇습니다.”
“아, 웃겨. 그럼 넌 지금 나를 굳이 망자의 예우를 갖추어서 죽여주려고 하는 거라고요? 그것도 그 귀하고 비싼 총으로?”
파이가 걸쳐진 그의 옷자락을 하늘하늘 흔들었다. 때려칠까, 생각나게 할 정도로 얄미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무명은 짜증내지 않았다. 마지막이 아닌가. 굳이 짜증을 내느니 그냥 실컷 비웃도록 내버려두자 싶을 뿐이었다. 물론 틀린 것은 정정해야 했지만.
“정확하게는 죽여주려고 한다기보다…….”
무명은 권총을 바로 쥐고 천천히 제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없는 총이 까만 머리칼 안으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에 힘을 한 번 주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버릴 수 있었다. 파이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잠깐, 지금 자살하려는 겁니까?”
하지만 처음 보는 파이의 싸늘한 얼굴에도 무명은 아랑곳 않고 천천히 행동을 이어갔다.
“그렇다기보다…….”
제 관자놀이에 총을 댄 채, 무명은 파이를 다른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 머리와 파이의 머리를 옆으로 맞대었다.
“……설명해.”
“따라야 할 규칙은 둘인데, 총알은 하나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부득이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하나는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거고, 다른 하나는 뭐지? 자살해야 한다는 규칙도 있나?”
“아뇨. 정확하게는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이자, 규칙을 지킨 것에 대한 상입니다. ……지키지 못했거든요, 메모의 종이들.”
“그…….”
“그러고도 메모가 원할 일들을 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그래요, 자격이 주어진 겁니다. 후퇴할 수 있는, 정말로 고요해질 수 있는 자격을…….”
“원할 일들이라. 예를 들자면?”
“거기까지는 말씀드리고 싶지 않군요. 말씀드렸잖습니까, 당신은 제 유일이 아니라고요.”
“하.”
파이는 얼굴 표정을 풀었다. 그로서는 목숨보다 소중했을 것을 지키지 못했다는데 자살을 하는 거냐고 난리를 피울 계제는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그대로 후퇴한 채로 남아있겠다는데 닦달해서 앞으로 떠밀 생각도 없었다. 왜일까? 그야 그냥 자살하고 싶어 하는 건줄 알았을 때에는 정말 실망했지만, 자살이 아니라, 같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이유 모를 만족감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무명이라는 자의 결말을 낸 건 메모일지 몰라도, 그 결말의 현장에 있던 것은 파이였다. 메모도 다른 그 누구도 아니라.
머리가 맞닿은 채로 듣는 목소리는 꽤 달랐다. 말을 할 때의 울림, 진동소리, 그의 체향, 머리카락이 닿는 느낌, 그 모든 것이 제법 신선했다. 그래도 말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양심의 소리는 기계 같은 인간이 주는 가장 비기계적인 온기에 묻혀 고개도 내밀지 못했다.
바람이 불었다. 인간의 살을 저미는 것 같은 바람이었다.
“그럼, 약속을 실천해도 될지.”
“하하, 뭐라 할 말이 없네. ……그럼요. 뭐, 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딱히 없습니다만. 당신은?”
“마지막 말은, 역시 이걸로 하죠. 키스하러 온 거군요, 당신은.”
“끝까지 궤변이군요.”
“머리를 맞대고 총알을 섞는 거니 키스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뭐, 편할 대로 생각하십시오.”
“마지막이라서 봐주는 건가요? 아하하하!”
처음 듣는 것 같은 경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무명은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무명은 그의 마지막 말을 같잖은 궤변이 아니라 이 웃음소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그는 갈라진 터널을 걸을 때만 해도 굳이 꼭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둠을 향해 기대에 찬 얼굴을 한 파이를 보고 저가 한 짓을 자각한 뒤로는 반드시, 이렇게 끝을 내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유쾌하기 짝이 없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무명은 자신의 미소를 죽음으로 묻어두기로 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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