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스

승천의 날

어두운 충동, 아스타리온

Todd: Was hält dich zurück?

Todd: Dies ist der Augenblick.

Todd: greif nach der Macht,

Todd: tu es aus Notwehr!

Rudolf: Notwehr……!

카사도어 자르의 지하 던전은 끔찍하게 깊었다. 싸움이 영 불리해질 성싶으면 당장 동료들을 붙들고 슬그머니 내빼는 것이 최근 내가 갖게 된 새로운 특기였으나, 엘리베이터 발판 위로 짐승의 목구멍처럼 쭉 뻗은 통로는 마치 우리더러 나갈 테면 나가 보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아울베어 굴도 아닌 아울베어 뱃속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셈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늘씬한 목구멍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천장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가늠이 안 됐다. 실은 가늠할 줄 몰랐다.

“성 지하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었을 줄이야. 전혀 몰랐어…….”

나는 반 걸음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진짜?”

잔뜩 찌그러진 새하얀 눈썹이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자기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는데? 응?” 목소리라기보다는 거진 쇳소리였다. 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 그의 시선을 피하며 괜히 뒷목을 주물렀다. “아니, 뭐……. 이백 년이면 개구멍 하나는 뚫리지 않나 싶어서.” 그는 코웃음을 쳤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텅, 텅, 하는 지하 공동 특유의 메아리가 겹겹이 울렸다. 나와 그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말없이 걸었다. 몇 발자국 뒤에서 섀도하트와 레이젤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대화 내용이 들리기는 했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여유가 없었다.

"계획은 그대로야?" 나는 곱슬거리는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카사도어의 의식을 빼앗겠다는 계획 말이야? 오, 그야 그대로지." 그가 대꾸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좀 구체화된 계획은 없어?" 대답은 삼 초 안에 돌아왔다. "아는 것도 없는데 구체화는 무슨 구체화?" 나는 눈을 흘겼다.

통로를 틀어막은 문은 어김없이 웅장한 풍채를 뽐내고 있었으나, 지상의 고성 어드메에서 주운 ‘자르 일족의 반지’는 지하 던전에서도 문제없이 통했다. “다행이네. 그 기묘한 사전을 또 뒤적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나는 서서히 열리는 문 너머의 기다란 복도를 응시하며 섀도하트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음산한 푸른 빛이 사방에 꽉꽉 눌러담겨져 있었다.

“뻔하디뻔한 양식이군.” 끼고 있던 팔짱을 푼 레이젤이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 복도 끝에 놈이 있을 게 분명해.” 그 단언에 나는 다시 한 번 반 걸음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숨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렇대.”

“알아.” 그제서야 대꾸가 돌아왔다. “큰 소리 내지 말라고 했잖아.”

그는 큼직한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발소리가 다시 복도를 텅, 텅, 텅, 하고 울렸다. 나는 그제서야 그가 원래 숨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카사도어 자르와의 전투는 치열하다 못해 처절했다. 나는 신발 뒷굽으로 마지막까지 꿈틀거리던 웨어울프 한 놈의 대가리를 콱 짓밟았다. 놈의 두개골은 역겨운 꾸드득 소리를 마지막으로 제 역할을 마쳤다.

나는 동료 세 사람 중 누구도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그나마도 단단히 채비를 갖추고 싸움에 임한 결과였다. 베갯머리에서 날이면 날마다 위험하다느니 강력하다느니 칭얼거리는 통에 결행일 아침이 밝자마자 새 장비부터 구한 덕을 본 셈이었다.

나는 방금 저승길 여행을 떠난 웨어울프 놈의 시체를 발끝으로 뒤집었다.

(중략)

“난 해낼 수 있어.” 그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하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

나는 시선을 뒤로 돌렸다. 어둠의 군단을 상대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셀루네의 사도와 동료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는 기스양키 전사가 있었다. 나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정확하게 나를 향했다.

나는 문득 목구멍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슴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터져나올 것 같은,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어지는, 밑도 끝도 없이 비명을 지르고 싶어지는 것을 느꼈다. 긍정적이라고도, 부정적이라고도 정의하기 힘든, 그러나 참아내기도 힘든 감정을 느꼈다.

그는 나를 사랑했다.

내가 그의 신뢰의 대상이었다.

(중략)

내가 그의 눈을 가리고 그를 저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비명 지르는 그의 영혼에 재갈을 물렸다. 그의 이성에 목줄을 걸고 충동에 줄 끝을 쥐어 주었다. 이 꺼림칙하고 역겨운 시뻘건 빛 전부가 그를 위해 준비되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영원한 삶, 영원한 불신. 아, 이 얼마나 가엾은 존재인가! 눈 앞이 빙빙 돌았다. 마치 독한 와인을 숨도 쉬지 않고 들이킨 것 같았다. 나는 즐거웠다.

취기가 가라앉을 무렵 의식의 붉은 빛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래서 나는 뒤늦게 사방에 질퍽거리는 붉은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의 중심에 새롭게 탄생한 뱀파이어 군주가 서 있었다. 그의 눈도 붉은색이었다. 아스타리온은 웃었다.

나 역시 웃었다.

나는 말했다. “생일 축하해, 아스타리온.”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