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뿅 外

모멘텀

현필판석




현필은 기세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기세가 8할이라는 농구선수인데도 통 정이 들지 않고, 여전히 남의 말처럼 어색하다. 진짜 주인이 늘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주눅이 드는 건 아니지만, 형의 경기를 보면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현철을 보는 눈에 언제까지 경외가 남아있겠느냐 물어보면 요즘은 대답보다 먼저 속이 발끈 차올랐다. 경기가 끝나기 전에 감독님께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운다.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요란한 환호성 틈에 용케도 현필의 말을 잡아챈 부주장이 불안한 듯 소매를 붙든다. 그 손을 감싸 부드럽게 떼어내고, 도 감독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익숙한 이름이 유령처럼 뒤통수를 간지른다. 신현철, 신현철.

 

“오.”

“...어.”

“산왕, 15번.”

“이제 4번인데.”

“예전엔 15번이었잖아. 나랑 똑같은.”

“너도 이제 4번인 걸로 아는데...”

 

장소들이 다 마땅치 않아 결국 자리 잡은 곳은 옹색한 체육관 뒤편이었다. 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삭막하고 후미진 풍경에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저보다 훨씬 이 장소가 잘 어울렸다. 명정공업의 김판석은 그처럼 3년을 마주쳐도 통 변하질 않았다. 여전히 어딘가 황량한 구석이 있는 문제아로 이름이 드높았다. 소문에 못을 박기라도 할 참인지 들고 있는 라이터까지 완벽했다.

 

“그러니까. 나는 15가 마음에 드는데. 담배?”

“... 피면 안 좋지 않아?”

“당연하지. 근데 금연이 쉬운 게 아냐.”

“걱정하시겠다.”

“... 누가?”

 

잇새에 필터를 물고, 별스럽지도 않은 말투였다. 그렇기에 더 외롭게 들리는 몇 가지 사연들을 안다. 그것들에 일일이 반응했다간 금방 잡아먹히고 마는 제 성정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죄 피곤해져 부러 저 멀리까지 시선을 돌리고 떨어져 섰다. 입가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선명하게 보이긴 했지만, 코 끝에 닿아 목을 긁어놓을 일은 없는 거리였다. 허, 가볍게 웃은 판석이 이내 가늘게 뜬 눈으로 한참 현필을 가늠하다가 툭, 그런다.

 

“산왕은 원래 큰 놈들이 많은가? 나 1학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우리 1학년 때는 내가 제일 컸는데...”

“그건 지금도 그럴 것 같아. 아니, 신현철도 크잖아. 1학년 때 한번 마주쳤는데 그땐 나보다 작은 것 같더니 지금은 좀 더 큰 것 같더라고.”

“...”

“왜 그렇게 봐?”

“아니...”

 

혼란스러웠다. 물론 산왕이나 같은 동네 출신이 아닌 다음에야 현철과 현필의 관계 따위 남들한텐 알 바인가 싶지만, 농구를 시작하고부터 볼 일 없던 반응이었다. 재를 털며 나른한 얼굴을 한 판석이 아, 단말마를 낸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5분이 흘러서였다.

 

“그러고보니까 너 이름이 신현필이었던가?”

“응.”

“아, 신현철. 신현필. 신현필, 신현철.”

“...”

“아아- 오케이, 오케이.”

“...저기.”

“생긴 건 동생 쪽이 낫네.”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담벼락에 꾹 누르는 무심한 손 앞에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을 내밀었다. 속에 끼워진 작은 볼펜까지 꺼내 손에 들려주자 눈썹을 구기던 판석이 펴놓은 페이지 빼곡한 숫자들을 확인하더니 꽤 즐겁게 입꼬리를 올렸다. 번호를 따시겠다.

 

“두부같이 생긴 게 앙큼하네.”

 

김판석의 글씨는 의외로 얌전했다. 획이 날카롭지 않아 보기에도 좋았다.

 

 

이후 김판석은 염탐을 왔다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아저씨가 그런 걸 좋아해. 좀 잘하는 애들 대학이고 고등학교고 구분 없이 보러 다니고... 그간 나눈 대화를 통해 ‘아저씨’가 명정의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현필은 판석의 자취방에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방이었다. 2미터에 가까운 장정이 살기에 부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단히 넓지도 않아 판석의 몸에 꼭 맞는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제게는 좀 비좁았다. 침대에 등을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바닥에 앉았다. 판석은 의외로 상식적인 집주인이었다. 탄산 캔이긴 했지만, 마실 것을 꺼내 놓고 현필의 자세를 살피는 모양이 익숙해 보였다. 물방울 맺힌 캔 표면을 손끝으로 쓸고만 있자 판석이 먼저 캔 뚜껑을 따줬다.

 

“나랑 자주 보면 너네 형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형은 바빠서...”

“아, 그래서 몰래? 너 진짜 응큼하다.”

 

사실 형에게 말하지 않은 것보다 감독님조차 모르는 밀회라는 사실이 훨씬 엉큼했다. 거기까지 말하면 정말 제대로 놀림당할 것 같아 입을 닫았다. 그러나 정작 말을 꺼낸 판석은 막상 그 이상의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품을 쩍 하다가, 뭉친 목을 푸는지 커다란 손이 자기 목덜미를 몇 번 주무른다. 얼마 전 도 감독을 통해 받은 비디오 속 판석의 모습을 떠올린다. 흐릿한 화질에도 림에 대롱대롱 매달린 등줄기가 굳어있는 게 보였다. 저만큼이나 커다란 키. 저만한 몸이 얼마나 쉽게 긴장하는지는 누구보다 현필이 더 잘 알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다가 허공에 멈추고 먼저 물었다.

 

“내가 주물러 줘도... 될까?”

“... 두부, 넌 뭐 그런걸 이렇게 간지럽게 물어봐.”

“그, 그런가...”

“어, 그게 더 이상해.”

 

그러면서도 현필의 손을 잡아다 턱, 시원하게 제 목덜미 위에 올려둔다. 주물러주는 손이 기분 좋은지 아예 커다란 등을 굽히고 상 위에 엎드리기까지 한다. 올라붙은 승모가 유독 단단하고 두툼해서 기분이 새삼스러웠다. 신체 조건이 비슷해서인지 손바닥 아래 만져지는 감촉이 꼭 제 것 같았다. 그걸 자각하니 괜히 입술이 말라 덩달아 손도 미끄러졌다. 그러기 무섭게 키득, 소리와 함께 웅크린 판석의 등이 떨렸다.

 

“왜, 왜 웃어...”

“긴장한 게 웃기잖아.”

“놀리지 마.”

“놀린 거 아니야. 그냥... 내내 의외다 싶은 거지.”

“뭐가?”

“내가 굳이 왜 집으로 부른 건지 알잖냐, 두부야.”

 

아이스크림, 와플.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처음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말해놓고 판석이 잡은 약속 장소는 어폐투성이였다. 꼭 하나씩 달고 화려한 디저트들이 있었고 간혹 그런 메뉴가 아예 주가 되는 카페도 있었다. 현필도 기실 그런 것들을 즐기지 않아 이상했지만, 처음 몇 번은 우연의 일치라 생각해 얌전히 있었다. 그러다가 만남이 다섯 손가락을 넘어가며 겨우 물어봤다. 그랬더니 판석이 솥뚜껑 같은 손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스푼으로 제 커피를 휘저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두부 너랑 어울릴 것 같아서. 어지간히 제 멋대로인 건 둘째치고, 말끝에서 묻어나는 은근한 관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현필은 그 정도로 아둔하지 않다. 그런데도 그냥 두었다. 기세라는 단어를 꺼리는 건, 아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한참 불타오르고 격할 때도 그렇지만, 거짓말처럼 뚝 끊어질 때도 이길 수가 없다.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데도 지극히 자신만만해 보이는, 판석의 단단한 턱선을 눈으로 더듬으며 동시에 현필은 저와 팀을 상처 준 기사 몇 개를 함께 떠올린다. 종이 호랑이, 끊어진 산왕. 각종 매체들이 산왕의 매서운 기세가 이번에도 누군가 막을 틈 없이 매정하게 꺾였다는 것을 각자의 언어로 떠들어댔다.

 

그런 와중에 루키로 떠올라 부정할 수 없는 강호로 자리매김하는 원맨팀, 김판석의 명정에 대한 기사도 더러 섞여 있었다. 시작점에서 끓어오르는 기세는 늘 무서울 정도다. 잡초처럼 불쑥 솟아있던 지면이 이내 땅따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츰 지분을 늘려가더니 하나 둘, 명정 외에도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며 어떤 잡지든 무슨 춘추 전국 시대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판석의 매끈한 낯을 보며 현필은 드디어 오랜 시간 꼬리처럼 달고 다닌 기세라는 단어가 왜 불편했는지, 그런데도 그 단어와 한 몸처럼 붙어 살아가야 할 앞으로 어떻게 걸어야 할지 대강 기틀을 잡는다. 지금 당장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도. 둘 다 워낙 덩치가 큰 덕분에 서 있을 땐 하염없이 멀어 보이는데, 고개를 숙이면 입술이 닿을 때까지 정작 찰나도 걸리지 않았다. 맞닿은 입술에 살짝 힘을 주자 음료를 따주고 제 목을 주무르던 커다란 손이 이번에는 현필의 목덜미를 잡고 혀를 얽는다. 초입부터 숨이 헐떡거리지만, 속도 자체는 느긋한 편이라 다행히 할 말을 마무리할 짬이 났다. 떨어진 틈으로 나름대로는 빠르게 속삭였다.

 

“안 사귀는 사이에는, 난 이런 거 안해 판석아.”

“아, 미쳤나 진짜.”

 

눈까지 감고 집중하던 판석이 갑자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떨어진다. 침대에 아예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히는 것이, 어지간히 웃겼던 모양이다. 한참 큭큭대다가 겨우 보여준 손가락 사이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그 위로 가늘고 나른한 눈이 웃으며 또 물었다.

 

“그럼 사귀는 사이에는 하시고?”

“어, 응.”

“... 갑자기 빈정 확 상하네?”

“뭐...가?”

“사귀는 사람 있었다는 거잖아.”

“어... 한, 2명?”

“와.”

 

실망이야. 알고 보니까 마파두부네. 겁나 맵네. 눙치며 슬쩍 돌리는 등이 금방이라도 바닥을 박차고 나갈 것 같아 속이 탔다. 급한 마음에 팔꿈치를 붙들었지만,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 더 풀 것도 없었다. 이럴 땐 솔직한 게 능사였다. 그래서 내가 미안해야 할까? 그러자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흥미롭다는 듯 눈매를 휘던 판석이 손을 뻗어 뺨을 쥐었다.

 

“한창 불 붙었는데, 일단 하고 얘기해 그건.”

 

겹치는 입술은 직전보다 좀 더 뜨겁다. 맞닿은 살갗 위에 새겨진 무서울 정도의 기세가 더는 낯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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