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그] 연애

시현이가 어떤 연애를 했는지.. 궁금하다하셔서...

가볍게 썼어용

 


“야, 최시현 모솔이래.”

 

순간 교실 안이 술렁였다. 엎드려 퍼자고 있는 놈을 제외하고 그 말을 들은 27쌍의 눈이 시현에게 꽂힌다. 컵라면의 비닐 포장을 뜯고 있던 시현이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올린다.

 

“남중 나왔거든, 나. 심지어 남고네? 하, 칙칙해.”

“그래도 쟤 번호 많이 따이지 않았냐?”

“맞아. 여자애들이 번호 물어보는 거 많이 봄.”

 

시현이 컵라면에 물을 받으러 가려고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신상 그렇게 막 파는 거 아니야. 알도 없고.”

“별걸 다 신경 쓰네. ……근데 너 알 무제한 아니냐?”

 

시현은 정수기에서 컵라면에 물을 받아 돌아와선 자리에 앉았다. 방금 저녁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팠다. 키가 크려나. 야자 시작 전까지 먹으려면 서둘러 먹어야 했다. 옆자리 친구가 한 입만 달라는 말에 꺼지라고 가볍게 말한 후 컵라면을 먹었다. 그나저나 이번 모의고사 때 언수외 합이 4등급 이내면 이준 형―외사촌―이 갖고 싶은 것 하나 사준다고 했다. 3도 아니고 4? 나를 너무 개무시하는 것 아닌가. 고등학교 1학년의 시현이 오만하게 생각했다.

 

 

 

 

 

 

“이름이 뭐예요?”

 

야자를 마친 후 학교 앞 패스트푸드점에서 같은 반의 제일 친한 친구인 권은재와 햄버거를 먹고 있던 시현은 제게 다가와 이름을 물어보는 여학생 두 명을 보고 시선을 올렸다. 떨리는 손, 창백한 얼굴, 약간의 식은땀.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지만 아무 감흥이 없다. 입안의 음식물을 소리 없이 씹어 삼키곤 깨끗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잘생겨서요.”

“부모님이 모르는 사람에게 신상정보 알려주지 말라고 가르쳐주셔서요. 죄송합니다.”

 

여학생들이 시무룩하게 돌아가자 맞은편에 앉아 지켜보고 있던 권은재가 웃었다.

 

“철벽 여전하네. 다음 달에 수능 끝나면 전화번호 좀 팔 거야?”

“봐서. 그런데 너 의대 쓸 거지?”

“응. 너는? 사시 폐지된다던데?”

“뭐 방법 있나. 로스쿨 가야지. 과는 생각하고 있는 중. 그런데 너 의사 되면 내 건강 책임져줄 거지?”

“변호사 된 시현이가 나 소송 걸렸을 때 다 변호해줄 거라면 해줄게.”

“수지타산이 안 맞는데…… 종이에 손가락 베여도 너한테 가야겠다.”

“아하하. 그래.”

 

뭐가 ‘그래’야, 호구 놈아. 시현이 콜라를 빨대로 빨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시현은 한국대 경영대에, 절친인 권은재는 한국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같은 학교지만 둘 다 너무나도 바빠서 같이 점심을 먹을 시간도 없었다. 가끔 밤이 돼서야 학교 앞 치킨집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예과 때는 놀아도 된다고 한 사람 누구야?”

“……여기도 다들 미쳐서 공부하는데?”

 

다음날에도 공부해야 하니 취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맥주 두 잔씩만 마셨다.

하지만 서로를 경계하느라 그런 분위기가 나왔던 터라 한 달이 지나니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점심에 학교 식당에서 만나 같이 밥을 먹으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그러다 각자 과 친구를 사귀어 둘이 만나는 빈도수가 조금 줄어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시현은 경영대 차도남이란 별명도 얻었다. 쭉 공부만 하는 삶을 살다 얻은 자유가 즐거웠다.

그리고 과 MT에 갔을 때, 경영대 여신이라고 불리는 동기, 유은아가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시현의 옷 소매를 잡았다.

 

“시현아. 같이 편의점 가줘.”

 

지금 난 움직이기 귀찮은가?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방 공기가 탁해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다.

자리를 비워도 되나? ―주변을 둘러보니 반 이상 뻗어 있고 담배 피우러 간다고 자리를 떠서 파하는 분위기이긴 했다.

이 여자와 같이 빠져나가면 돌 소문은? ―딱히 퍼져도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 아무 사이도 아니니 금방 사그라질 소문이다.

1초 안쪽으로 모든 생각을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함께 펜션을 빠져나왔다. 편의점으로 걷는 중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은아의 아래 팔뚝을 잡아주었다.

 

“취했어? 얼마나 마셨어.”

“몰라. 술 처음 먹어봤어.”

 

은아가 헤실 웃더니 눈을 마주쳐왔다. 순간 시현은 지금 상황과 그녀의 눈빛, 표정을 읽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챘다. 습관적으로 거절의 말을 준비하려다 잠깐 멈칫한다. 이제 그럴 필요가 있나? 시간적 여유도 있는데, 연애 경험 좀 쌓는 것도 괜찮지 않나? 모솔이라고 놀림 받기엔 쪽팔릴 나이가 되기도 했다. 오래 보진 않았지만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본 그녀는 귀찮게 치덕거리거나 시끄럽게 굴지도 않아서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감정 없이 이성적으로 천칭을 움직여 ‘자신이 얻을 이득’을 계산했다.

 

“시현아, 여자친구 있어?”

“아니.”

“그럼 나랑 사겨볼래?”

 

이미 고민을 끝냈던 터라 바로 대답했다.

 

“그래.”

 

 

 

 

 

손을 잡고 돌아오자 다들 난리가 났다. 남자고 여자고 눈물을 글썽이는 애들이 몇 보였다. 어울린다는 말을 잔뜩 들었다. 귀찮아서 그녀를 여자 방으로 데려다주고 남자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아무도 안 들어와 있었다. 베란다로 나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권은재. 나 여자친구 생겼는데, 뭐 어떻게 해야 되냐.”

[……시현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넌 오래 사귄 여자친구 있잖아.”

[……내가 너랑 이런 얘기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상대가 나를 이렇게 대해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걸 해봐. 나는 그렇게 하고 있어.]

“그거 나한텐 좀 어려운데?”

[해보기라도 해봐. 그런데 누구야?]

“유은아.”

[경영 여신? 납득은 되네…….]

 

술 마시고 야밤에 자아 성찰이나 했다. ‘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나, 상대가 어떤 태도를 보였을 때 기분이 좋을까.’ 시현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잘 모르겠다. 타인에게 그렇게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나, 안 되나를 판단하는 것 외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같이 있어서 특히 좋았던 타입은. 아, 권은재.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주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권은재와 제일 빠르고 깊게 친해진 것 같다. 그렇다고 권은재를 딱히 연애 대상으로 본 건 아니고―상상만 해도 진심으로 구역질이 난다. 지금은 친구보단 가족과도 같은 사이였다.― 그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후 다정한 사람을 보면 그냥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시선이 가게 되곤 했다.

다정하게 대해주자. 권은재처럼 굴어보자. 결론을 내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은아야. 네가 내 첫 여자친구야. 어리숙한 면이 있어도 봐줘. 고칠게.”

 

권은재의 말투를 따라해 봤다.

 

 

“시현이는 다른 사람한테는 안 웃어주는데, 나한테만 잘 웃어줘서 설레.”

“정말?”

 

권은재처럼 웃어줘 봤다.

 

 

“별 건 아닌데, 이거 보니까 네 생각이 나서 사봤어.”

“……! 어떡해. 너무 좋아.”

 

권은재처럼 행동해 봤다.

 

 

 

 

 

 

한 달 후, 시현이 권은재를 앞에 두고 맥주를 들이켰다.

 

“야, 미안한데 욕 한 번 쓸게. ……진짜 존나 힘들다. 넌 어떻게 그렇게 사냐?”

 

다정이란 것은 감성적이고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었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행동하는 이성적인 시현에겐 너무나 힘든 행동이었다.

치킨을 앞접시에 덜어 집게와 포크를 이용해 한입 크기로 쪼개던 권은재가 약간 당황한 듯 시현을 쳐다본다.

 

“내가 뭐?”

“은아한테, 너처럼 굴고 있거든.”

“나처럼? ……좋은 방법이긴 하네. 싸가지 없는 타입보단 다정하게 구는 게 더 통하긴 해.”

“……이 새끼가, 은근슬쩍 나 싸가지 없다고 멕이는 거 봐.”

“아무튼. 은아는 좋아해?”

“어. 많이 좋아하더라. 그런데 내가 힘들어서 안 되겠어. 이제 헤어지려고.”

“……응?”

“다정하게 대해보는 연습도 많이 해봤고, 연애도 생각보다 즐겁지 않고.”

 

시현은 이미 천칭을 기울여 헤어져도 되겠다는 계산을 마쳤다. 평판의 문제 같은 게 있긴 했지만 제 정신적 피로보다는 무겁지 않았다. 권은재가 당황한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넌 은아 안 좋아해?”

 

시현이 반쯤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키고 빈 컵을 내려두었다.

 

“그냥 동기.”

“……근데 왜 사겼어?”

“모솔 타이틀 떼려고.”

 

권은재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빨리 헤어져. 그게 은아를 위한 길이겠다.”

“그래.”

 

 

 

 

다음날 시현이 은아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은아가 이유를 물어봐서 아무 이유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그때부터 온갖 소문이 돌았다. 경영 여신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느니 유부녀 취향이라느니 게이라느니. 시현의 강한 정신은 그런 헛소문이나 타인의 평가, 태도 같은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처럼 평범하게 돌아다녔다. 어차피 곧 사그라질 소문이라고 계산했다. 은아를 좋아했던 남자들이 퍼뜨렸던 소문인 모양이라 여자애들이 헛소문이라고 정정해줄 테니까. 그리고 시현의 계산대로 됐다.

그리고 1학기를 마친 후 군대에 다녀왔다. 군대는 비합리적인 곳이라 꽤 힘들었다. 아무리 시현이라도 버티지 못해 날카로운 정신이 조금은 마모됐다. 조금은 굽히는 태도를 배웠다.

 

 

 

시현이 제대 후 복학했을 때 권은재는 본과 학업 때문에 얼굴 볼 시간이 전혀 없었다. 의사들은 20대 초반에 현역으로 가지 않고 의대 졸업하고 수련의―인턴, 레지던트―과정을 마친 후 군의관으로 간다고들 한다. 군의관은 3년이지 않나? 잘 모르겠지만 그의 인생이니 참견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학사과정과 로스쿨 준비를 병행하느라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을 때, 누군지는 모르지만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쳐 낯익은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캔 에너지드링크를 내밀며 말했다.

 

“최시현 선배…… 맞죠? 이거 드세요…….”

 

시현이 잠시 그걸 바라보다 받아들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름이?”

“정외 12학번 신아름입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알았어. 잘 마실게, 아름아.”

 

요즘 도서관에서 온갖 쪽지와 간식거리를 다 받고 있었다. ‘제 번호예요. 연락주세요.’, ‘여자친구 있어요?’, ‘같이 술 마셔요’. 슬슬 귀찮아지고 자신의 공부에도 방해가 되고 있어서 이걸 어떻게 막아야 할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신아름을 만나 같이 공부하면서 이 주정도 지났을 때.

 

“오빠, 저랑 사겨요…….”

“음, 그래.”

 

단순히 그 이유로 신아름과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다정함’을 꺼내 들었다. 자신의 속셈에 이용당하고 있으니 잘 대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시현 오빠는 보기와는 다르게 다정다감하네.”

“그래? 그렇게 보여서 다행이야.”

 

조금 더 편하게 공부하기 위해 시작한 연애라 아무리 신경을 쓴다 해도 공부 쪽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연애보다 제 미래가 더 중요하기도 했다. 두 달이 지났을 때 신아름이 화를 내며 이별을 통보했다.

 

“공부가 그렇게 좋으면 공부랑 연애해!!”

 

그래도 기념일이며 데이트며 연락이며 꼬박꼬박 챙겨줬는데 그녀에겐 부족했나 보다. 그런데 내가 로스쿨을 준비하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시현이 마음속으로 불평했지만, 겉으로는 다정한 미소를 띠었다.

 

“미안해.”

 

시현은 냉정한 이성으로 ‘난 사랑 같은 건 글렀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길래 이렇게 멋있게 빼입고 다녀.’

‘이제 말해도 되나.’

‘뻔히 아는 거 묻지 좀 마.’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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