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펜

적과흑AU

엔란 by 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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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낡은 원고지였다. 어느 저택 서랍 속에 잠들어있던, 영원히 비어있던 원고지. 그렇기에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은 언제나 가득 채워지는 것이었다.

검은 글자와 붉은 글자가 제멋대로 뒤엉키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눈물로 호소하는 캐스트의 이야기를 이리저리 엮어 새로운 진상을 만들고 나면 옅은 만족감이 느껴졌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는 란의 손끝에서 취향대로 뒤엉킨다. 란은 탐욕스럽게 그 이야기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언젠가 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또 그렇게 모으다 보면... 언젠가 그의 텅 비어있는 종이가 까맣게 채워질 수 있을테니까.

-란 경은 거점으로 찾아오시오!

대서고에서 마법의 역사에 관한 책 한 권을 꺼내 읽고 있으면, 갑자기 책 위의 글자들이 제멋대로 자리를 옮기더니 저 한 줄을 엮어내었다. 오늘의 파벌장은 꽤 신이 났네... 이 알림으로 모든 용건을 끝낼 수도 있을텐데 굳이 불러내는 걸 보면 꽤나 의욕 있는 성격인 것 같았다. 이럴 때의 그는 귀찮아서 싫은데. 문득 란은 못본 척 하고 가지 말까... 하는 불경한 생각을 떠올렸다.

-확인한 거 다 암!!!

정말이지 귀찮은 성격이었다. 란은 주섬주섬 소파에서 일어나 바닥에 떠오른 마법진으로 한 발을 내딛는다. 살짝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눈 앞에는 셸라스마하가 히죽히죽 웃는 표정으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동그란 공을 던졌다 받았다 하는 것이 부산스러웠다. 그는 과장된 태도로 인사를 건네더니 란도 인사를 건네기 전에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파벌장들끼리 중요한 안건의 회의를 할 건데, 각 파벌에서 마술사들을 한 명씩 동석시켜 회의의 증인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

"지금?"

"하..."

란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파벌장은 개의치 않고 바닥에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그럼 갈까? 막무가내인 그 태도에 화를 낼법도 하지만 란은 별 말 없이 그를 따라 마법진 안으로 다시 발을 내딛는다. 느긋하게 대서고의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이 완전히 무너졌지만, 그 또한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 갑다, 하는 무신경한 태도였다. 어차피 이야기는 파벌장이 알아서 끌어갈테고, 그는 멍하니 다른 마술사들을 구경이나 하려고 했다. 도착한 장소는 제법 넓었고, 이미 몇몇 파벌이 도착해 있었다. 하얀 극장은 다소 늦은 편이었지만 아직 오지 않은 파벌도 있었다. 먼저 앉아있던 것은 주로 푸른 법정과 황금의 육분의, 무색 외날개 정도였으려나. 파벌장의 옆에는 각각 동석한 다른 마술사들이 함께 앉아있었다.

그리고 란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고르고 골라 꾸역꾸역 채워넣던 종이 위에 멋대로 한 줄의 이야기가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갑작스러워서, 란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단정한 차림새와, 살짝 긴장한 표정, 그리고 황금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파벌장을 향한 존경의 눈빛에 평소라면 어지간히도 좋아하나보네. 라고 건조한 감상을 내어놓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 감정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보석을 수집하던 다른 마술사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빛이 저만큼 아름답다고 한다면 란 또한 홀린듯이 수집해왔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반짝이는 감정은 보석과는 달라서 단지 시선을 조금 옮기는 것만으로도 달라져버리고 만다. 그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란과 눈이 마주치면...

란은 활짝 웃었다.

"또 당신인가요?!"

질색하는 이엔을 바라보며 란은 옅게 미소를 짓는다. 응... 뻔뻔하게 대답하면 다시 이엔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명백하게 불쾌해하는 태도에 마음이 아플만도 하건만, 란은 그저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이엔은 란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또 한 줄의 이야기가 채워넣어진다. 때때로 란은 신기함을 느끼곤 했다. 다른 이야기들은 한참동안 엮어내고, 다듬어도 모자라 그저 글자의 형태로 그의 손 위를 맴돌아버리는데, 어째서 그의 이야기만은 이렇게 거침없이 채워넣어지는지. 그가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 그런 생각을 채 떠올리기 전에 그저 지워지지 않는 글자로 흰 종이 위에 가득 채워지는 것이었다.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나? 칭호가 집필의 마술사라거나... 그의 칭호라면 이미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괜히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만다.

"대체 왜 자꾸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냥... 이엔을 좋아하니까..."

그를 좋아했다. 그것은 최초로 새겨진 이야기였다. 란은 단 한순간에 자신을 채워넣었던 그 감각을 기억했다. 이엔은 그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였다. 고작 그 이유가 전부였다. 계속해서 이엔을 눈으로 쫓고, 싫어하는 걸 빤히 알면서도 말을 걸고, 헛소리 취급을 당하면서도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만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는 또 비어버리고 말기에. 경멸이나 짜증이나 귀찮음이어도 괜찮았다. 그 감정만으로도 이엔이 그를 바라봐준다면 그는 외딴 서랍 속에서 혼자 남아있던 원고지가 아니게 되니까.

그는 단지 존재만으로 그를 충족시켜 주었다.

마치 거대한 운명처럼, 마법처럼. 란이 종이라면 이엔은 펜이었다. 빈 종이는 상대가 채워주기를 갈망하지만, 펜은 어디에도 제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조차.

"...저도... ...좋아한다고요."

란은 에클레어를 입에 물다 말고 움직임을 멈췄다. 어느 때처럼 이엔에게 매달려 같이 티타임을 가진 날이었다. 이엔은 상냥해서, 떼를 쓰며 조르면 마지막에는 같이 시간을 보내주곤 했다. 란은 억지라는 걸 알아도 그저 같이 있는 순간이 좋아서 이엔을 붙잡고 늘어지곤 했는데. 오늘은 유달리 이엔이 조용했고, 조르는 말에도 별다른 반대를 보이지 않았다. 혹시 어디 아픈가? 마술사는 불로불사라는 걸 알아도 종종 그는 그런 걱정을 하곤 했다. 아니면 기분이 안좋은가? 어쩌면 뻔뻔하기 짝이 없는 란의 태도에 이제는 거절하는 것마저 포기해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란은 평소처럼 걱정의 말을 건넸을 뿐인데 돌아온 대답이 저것이었다.

무슨 말을 했더라? 기분이 안 좋냐고 물었고, 걱정된다고 했다. 아, 혹시 티라미수를 더 먹으라고 했나? 그러면서 이걸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저도 (티라미수를) 좋아한다고요. 라는 말이 틀림 없었다. 약 5초동안 행복회로를 돌린 란은 이엔의 앞접시에 티라미수를 좀 더 덜어주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응... 많이 먹어..."

이엔은 묘한 표정이었지만 그냥 제 앞에 놓인 디저트를 냠냠 먹었다. 그가 말없이 디저트와 차를 먹는 동안 계속 이야기를 꺼내는 건 란의 몫이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 디저트도 차도 바닥을 보이면 이엔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평소에도 접시가 비면 티타임을 끝내는 일이 잦았기에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란은 이엔을 거점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함께 일어난다. 필요없다고 톡 쏘고 가버릴 만도 한데, 이엔은 이번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역시 평소와는 아주아주 달랐다. 란은 슬슬 진지하게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이엔... 혹시 기분이 많이 안 좋아?"

"그.. 그런거 아니에요."

"나 때문에 기분 상한거라면..."

"아니라니까요."

거듭된 부정에 더 말을 이어가기도 애매했다. 란은 손을 뻗어 이엔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린다. 이엔의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 걸 그만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어쩐지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이엔을 좋아하니까... 걱정돼."

"...저, 저도... 저도 좋아하니까..."

또 다. 이번에는 뭐더라. 홍차? 책? 애써 현실도피를 해보지만 이번에는 지나치게 똑똑히 들어버렸다.

"...왜?"

"왜, 왜라니..."

"아니 하지만... ...싫어하잖아?"

"지금은... 아니에요."

이엔은 란을 좋아한다.

고작 단 한 줄이었다. 그 한 줄이 여태껏 비워져있던 란을 가득 채워버렸다. 란은 당혹스러웠다. 항상 부족하게 텅 비어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온전해지는 감각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조금 어지러웠고, 심장이 떨렸다. 멎어버릴 것 같기도 하고.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심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묘사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고 있는 모든 서술을 다 집어넣어도 부족하기만 해서, 그의 빈 종이가 팔랑팔랑팔랑 넘겨지고 만다. 수백장이었다. 어쩌면 수천장일지도 몰랐다.

고작 그 단 한 줄이...

"...내일 같이 산책할래?"

그는 문득, 두려워지고 만다. 이 모든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다시 백지로 돌아가게 될 그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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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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