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즈

240721_다이글

White Luna by 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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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리우스의 습격에 홀든이 무너진 날, 홀든 가가 있던 잘츠부르크는 거대한 장례식장이 되고 말았다.

당연했다. 검의 길을 꿈꾸는 쾌검사 지망생들부터 검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근처 사는 김에 엄마아빠 등쌀에 떠밀려오게 된 동네 꼬마들까지 있는 곳이 홀든이었으니까. 홀든 가의 쾌검사들은 필사적으로 분투하여 마을을 지켰으나 그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지는 못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죽은 이들의 유가족이었고, 그들의 수습만으로도 힘들었건만 서재에 쓰러져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또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가 깨진 채 목이 부러져 죽은 볼프강 홀든 경의 모습과 비밀 통로에 묻은 핏자국을 목도한 홀든 가의 집사 바스티안은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으니.

그 처참한 현장의 수습을 지휘하는 건 결국 홀든의 장남인 다이무스의 몫이었다. 다이무스는 아버지와 쾌검사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생존자를 구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간신히 숨이 붙어있었던 어린 소년, 루카는 충격으로 힘들어했지 어렵게나마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독을 뿌리는 여자와 식물을 부리는 어린 남자, 그리고 가면을 쓴 강화인간. 그들이 강화인간들을 이끌고 가문을 습격했으며, 가주님께선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가라 지시하셨다고. 이후 홀든의 검사들이 모두 쓰러지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붉은 머리의 여자와 백발의 남자가 찾아왔으며, 그 여자가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안타리우스는 그 여자가 어떤 경로를 통해 알려준 가주님의 비밀을 얻으려고 오게 되었으며 여자가 제 동생을 조종해 저를 찌르고 인형을 이용하여 동생을 짓밟았다는, 긴 이야기를 모두 꺼낸 루카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다이무스는 루카가 어느 정도 진정할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그 옆을 지키다가 그가 간신히 눈물을 그치고 나서야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혹 아버지의 유언은 있었나?

 

루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주께서는, 그러니까. 아비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아들들에게 남길 말씀은 없으시다고…… 그 말씀만. 세 형제는 그 말을 듣곤 약속이나 한 듯 한숨을 뱉었다. 정말로 아버지다운 유언이구만. 이글은 속으로만 그리 생각했다.

그래, 알겠다. 다이무스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잠시 쉬었다가 덧붙였다. 살아있어줘서 고맙다. 그 말에 루카는 고개를 떨어뜨리곤 다시 한 번 눈물을 떨어뜨렸다.

 

이후 장례식을 치르는 것도,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쉴 곳을 배정하는 것도 모두 다이무스의 일이었다. 물론 벨져와 이글 또한 돕기는 도왔으나 그 책임감 강한 완벽주의자는 모두 다 제 손으로 처리해야 속이 편한 모양이었다. 과연 홀든 가의 장남, 볼프강 홀든이 선택한 후계자다운 모습에 안도를 했는지 입 가벼운 이들이 뒤에서 슬그머니 떠드는 말이 들려왔다. 이번 사건의 타격이 크고 앞으로 홀든이 어찌 될 지야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다이무스 홀든이 저렇게 잘 버티고 있으니 다시 재건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뭐, 이글 또한 그들의 평가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이무스 홀든은 홀든을 다시 세울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기회를 어떻게 얻느냐는 문제가 남아있지만 사실 그것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여러 문제들을 제쳐 놓고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선택만 한다면.

 

“큰형?”

 

이글은 서재의 문을 열고 그를 부르고 나서야 똑똑, 열린 문을 두드렸다.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노크에 뒤를 돌아본 그가 낮은 한숨을 토해냈다. 뭘,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구만. 삐걱대는 문을 조금 거칠게 닫은 이글은 반쯤 박살 난 소파의 그나마 멀쩡한 부분에 걸터앉았다.

 

“여기 있다고 들어서 와봤어. 한숨도 못 잤나 보네?”

“……그래.”

“잠깐이라도 눈 붙여야지. 그러다 큰형까지 쓰러져.”

 

다이무스는 대답 대신 평소보다도 더 어두운 눈으로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글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바닥을 보고선 미간을 찡그렸다. 아버지가 쓰러져 있던 자리였다.

 

“……그, 작은형이랑 이야기 좀 하고 왔어. 작은형 말로는 저 비밀 방 안에 잘츠부르크 축제와 인식의 문에 관한 자료가 있었을 거라던데.”

 

안 그래 보여도 퍽 섬세한 감성을 지닌 남자다. 돌려놓을 수 없는 일을 되새기며 홀로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어찌할지 계획을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오기도 했으니, 준비했던 화제를 꺼내자 다이무스가 눈길을 이쪽으로 향했다.

 

“작은형은 이대로 안타리우스를 추적할 거래. 축제를 직접 다녀온 작은형이 가장 위치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나도 따라가기로 했어. 루카의 말대로면 그 빨간 머리 인형사도 안타리우스 놈들을 따라간 것 같고…….”

“이글.”

 

빨간 머리 인형사. 안타리우스에 홀든의 소문을 흘리고, 루카와 노아를 인형으로 짓밟은 여자. 그 여자의 흔적을 찾으면 이글은 그 인형사를 쫓고, 벨져는 그대로 안타리우스의 목표인 인식의 문을 엿보았던 장소로 향하기로 했는데 형은 어쩌겠냐는 질문을 다 꺼내기도 전에 다이무스가 그의 목소리를 잘라냈다.

 

“응? 엇?”

 

부름에 제대로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성큼 다가와선 이글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눈을 깜빡이던 이글은 조금 뒤늦게 그가 무얼 원하는지 깨달았다.

 

“……이런, 지금 필요한 건 앞일을 이야기할 동생이 아니었나 보네?”

 

농담조로 말하며 조심스런 손길로 그의 등을 감싸 안자 하아, 나직한 숨만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이글은 쓰게 웃으며 다이무스의 등을 토닥였다.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다이무스의 숨결이 살결을 간질였다.

참, 아버지 서재에서 이래도 되나. 심지어 저 자리에 쓰러져 계셨었는데. 그런 생각을 잠깐 했던 이글은 곧 아무래도 좋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든 돌아가셨든, 이게 뭐 언제는 해도 되는 사랑이었나. 잠깐 고개를 든 죄책감은 다이무스를 뿌리칠만큼 강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끼익. 반파가 된 소파가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작게 비명을 지른다. 정말 많이 지친 건지 아예 체중을 실어 기대오는 다이무스의 이마와 뺨 위로 입을 맞춘 이글은 조금 전과는 다른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아니.”

 

그렇겠지. 대답을 알고 있었기에 이글은 그의 뺨에 제 뺨을 마주 대었다. 허리를 감싼 팔이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힘으로 그를 끌어안는다.

 

“그냥…….”

“응.”

“전부 두고, 쳐죽이고 갈 수 있다면 가고 싶다.”

“응.”

“너만 그 인형사를 쫓으라 보내고 싶지도 않다. 그런 흉흉한 마귀를 쫓다가,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또 그런다. 나 그렇게 안 약한데.”

 

연인을 걱정하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이무스는 그리 말하는 대신 이글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아, 아파. 이글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야 팔에서 조금 힘이 빠진다.

 

“괜히 불안해하지 마. 다이무스는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

“나 참, 내 애인은 내가 뭐라고 말해줘야 안심이 될까. 응?”

“괜한 말 마라. 어차피 소용없으니까.”

“얼씨구. 진짜 나에 대한 신뢰가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이글은 손을 들어 다이무스의 뺨을 감쌌다. 눈이 마주치자 어둑한 눈동자 너머에 가라앉은 감정들이 읽힌다. 분노, 걱정, 슬픔, 그리고. 이글은 피식 웃고선 제 연인인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입맞춤이 그를 달래기에 더 효과적임을 알기에. 부드러우면서도 또 숨막히도록 강렬한 키스를 나누며 이글은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언젠가는 끝을 봐야만 하는 관계임을 알면서도 집어 삼킨 금단이었다. 기적같이 마음이 맞물렸다면, 사랑할 수 있을 때 모든 걸 다해 사랑하고 싶었으니까. 비록 아버지에게 걸려 이 머리통이 날아가는 상상은 해봤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끝을 맞이할 거란 상상은 해본 적 없다 해도, 이글은 이제 다이무스와 제가 맞이할 끝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홀든의 차기 가주는 다이무스가 될 것이다.

쾌검사들이 모두 죽고 그 이름이 바닥에 떨어진 홀든이라도 다이무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최강의 검사, 헬리오스의 에이스, 그리고.

 

—그리고, 아직 미혼이지.

 

사랑할 상대를 구분하지 못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글은 멍청하지 않았다. 다이무스가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 중 가장 손쉽고 강력한 아군을 얻을 수 있는 선택을, 이글은 배제하지 않았다. 혼약은 어쨌든 강력한 동맹이고 거래다. 이전까지는 몸 값이 과하게 비싸서 오히려 혼인을 요구하기 꺼려졌던 남자가 싼 값에 나온 셈이 될 테니 다이무스 홀든의 가치를 알아보는 자들은 다이무스에게 혼인을 거래하려고 할 것이다.

 

그 때가 우리의 마지막이겠지.

이글은 다이무스가 무엇을 선택할 지 안다. 다이무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홀든의 생존자들을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팔아서라도 그들의 기둥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글은.

 

“하아…….”

 

떨어진 입술 사이로 숨이 얽힌다. 이글은 다이무스의 목에 팔을 두르곤 속삭였다. 조금 안심이 돼? 다이무스는 어둑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불안은 이성을 집어삼키는 탐욕스러운 짐승임을 알기에 이글은 무어라 더 말하는 대신 한 번 더 그의 콧등에 입을 맞추며 생각한다.

 

이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의 막냇동생이자 그의 우군이 되어주겠지.

이글은 제 목덜미 위로 잇자국을 새겨 놓는 연인을 끌어안은 채 웃었다. 참, 나도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버지가 죽은 서재에서, 아버지의 죽음보다도 조만간 다이무스가 제 연인이 아니게 될 날이 올 것임을 더 슬퍼하는 자식이라니. 정말 패륜아도 정도가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글은 다이무스를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고 그의 귓가에 아직은 자신의 연인인 남자의 이름을 속삭였다.

 

“다이무스.”

 

그래도 하나 바랄 수 있다면.

그 순간이, 아주 늦게 오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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