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17_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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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은 추억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글의 아버지 볼프강 홀든 경은 고루하고 고지식하며 비인간적일 정도로 냉혹하고 엄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삼형제에게 너희는 형제가 아니라 가주의 자리를 두고 싸워야 하는 경쟁자라 가르치며 키웠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심지어 형제들을 두고 미묘한 알력 싸움이 일다 못해 누군가의 계략으로 막내가 독약이 든 초콜릿을 먹게 되더라도 그대로 방치해 두었으니.
형제 중에서도 아버지와 특히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이글이었다. 사유라면 당연히, 아버지의 말을 하나도 듣지 않는 아들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타고 난 게 틀림없는 이 반골 기질은 언제나 아버지 생각과 반대로 튀기만 해서, 이글은 어느 여름 밤 저를 보는 아버지의 눈길이 혐오와 경멸로 뒤덮이던 기억을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이글은 그 어린 날 아버지가 직접 초콜릿에 독약을 탄 게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진위야 어쨌든 의심을 떠올린 순간부터 가족 관계가 파탄났음을 깨달았다. 아, 완전히 어긋났구나. 어차피 시작부터 맞지 않았던 양반이지만. 그리 생각했던 날 이글은 집을 나왔고 아버지와는 일부러라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겠지, 지금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니, 그래서인가?
이글은 수화기를 든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어쩌면 그 탓은 아닌 지도 모르지. 어머니의 말대로 내가 무언가 잘못된 자식이라 그럴지도. 이전까지의 관계야 어찌됐든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가문의 식솔들이 모두 죽었는데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은 건 어딘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아무튼, 지하연합에 보고나 해야지.
이글은 다이얼을 돌렸다. 뚜, 뚜, 뚜. 단조로운 신호와 전화 교환원의 안내 끝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 앤지 헌트입니다.」
“앤지? 이글이예요.”
「이글?」
“응. 그, 상황 보고하려고…….”
「뭐, 이글?!!! 앤지, 이글이예요?!」
「꺅! 밀지 마!」
「이글 어떻대?! 괜찮대?!!」
「아, 다들 천천히 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우당탕,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지하 연합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앤지가 작게 한숨을 내뱉더니, 무언가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전화를 스피커에 연결한 모양이다.
「이글, 들리죠? 다른 사람들도 듣고 있는데 이야기 좀 해줘요.」
“어어. 음, 그…… 아무래도 이쪽 상황은 알고 있는 모양이네.”
앤지의 말에 이글은 뺨을 긁적였다.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다니. 어쩐지 좀 머쓱한 기분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럼 간단하게 말할게. 독일에서 납치당한 능력자들을 구하는 임무는 무사히 완수. 그 공포 능력자는 놓쳤지만, 구출 목표는 무사히 호송 중이야. 다이무스 형과 나는 귀환 도중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홀든 저택에서 습격 연락을 받아서 현재는 홀든 저택에 와있고. 현장 상황은…….”
문득 목 안이 까끌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글은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이게 뭐 어려운 말이라고 이렇게 껄끄러울까. 말을 뱉을 뿐인데 목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쾌검사 전원 사망. 볼프강 홀든 사망. 홀든은 완전…… 괴멸이야.”
수화기 너머에서는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숨을 꿀꺽 삼키는 듯한 작은 소음만이 있었을 뿐이다.
뭐라고 말 좀 하지, 어색하게. 그리 쏘려던 이글은 그게 적절하지 않은 말이라는 걸 늦지 않게 떠올렸다. 이 친구들이 무엇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지도 알만 하니까. 잠시 머뭇거렸던 이글은 한숨을 뱉었다.
“임무 보고는 이상. 앤지, 여기 상황이 이래서 현장 수습하느라 연합에는 바로 복귀하진 못하겠어요. 양해해줘.”
「……당신은 진짜.」
그의 마무리를 들은 앤지의 목소리에 짜증에 가까운 한탄이 묻어났다. 아이고. 그 뒤로 누가 그렇게 내뱉는다. 휴톤인가?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고? 그러고 있는게 답답했는지 레베카가 빽 외쳤다.
「야, 이글. 누가 그런 게 궁금하대?! 왜 어울리지도 않게 성실하게 보고나 하고 있어?!!」
“뭐? 그럼 무슨 말을 하라고?”
「아이고, 이 녀석아. 너는 괜찮아? 가족이…… 그렇게 됐잖냐, 우리 모두 그 이야기를 듣고…….」
휴톤의 말이 이어지다가는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흐려진다. 이글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신파극도 아니고.
“나는 괜찮아. 뭐랄까…… 음. 뭐라고 해야 할 진 모르겠지만, 진짜로. 난 생각보다 괜찮아. 나보다는 형들이 걱정이라…….”
「이글…….」
「……그래요, 상황은 알겠어요.」
말이 길어지기 전에 잘라내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앤지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이글은 그런 앤지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야 걱정해주는 동료들의 마음은 고맙지만, 그들 앞에서 아버지를 애도하며 수화기를 붙잡고 질질 짜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벨져 홀든도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릭 톰슨과 같이 곧장 그쪽으로 간다고 했어요. 혹시 이미 도착했나요?」
“아, 응. 조금 전에. 큰형이랑 같이 시신 수습하고 장례식 준비하느라 바빠.”
「그래요. 볼프강 홀든 경의 장례식 일정은?」
“……준 전시 상황으로 봐서, 그냥 우리끼리 쾌검사 식으로 짧게 애도하고 끝내기로 했어. 그러고 나선 바로 안타리우스 녀석들을 추적할 거야.”
「……그래요.」
설마 장례식을 한다면 장례식까지 와줄 생각이었나. 전화 너머에서 웅성이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글은 소리 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홀든의 상황, 그리고 안타리우스의 움직임 때문에 지하연합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다. 애초에 장례식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는 걸 벨져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안타리우스 놈들을 최대한 빨리 추적할 수 있도록 공간 이동 능력자인 릭 톰슨만 데리고 온 걸 텐데. 릭의 능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다섯명까지니까.
「그, 이글. 볼프강 홀든 경께 애도를 전할 수 없어서 유감이야.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겠지만…… 힘내.」
그 사이 앤지에게서 수화기를 건네 받았는지 루이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뒤이어 다른 녀석들이 질세라 말을 이었다.
「그래, 잘 보내드려라. 다른 걱정일랑 하덜 말고.」
「그래, 그 뭐냐. 걱정된다던 형들도 네가 잘 챙겨주고.」
「아, 그렇다고 형들 걱정만 하지 말고, 이글씨도 몸 조심하시고요! 너무 버티기만 해도 안 좋은 거 아시죠……?」
하긴, 이런 녀석들이었지. 어쨌든 이글은 그들의 다정함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연합에 오래 머문 것이기도 했다. 이글은 멋적게 답했다.
“그래, 고맙다. 나중에 보자고, 다들.”
「이글. 우리 쪽에서도 안타리우스를 추적할 사람을 더 보낼 거예요. 누가 가게 될 진 결정되고 나서 연락할 테니…… 지금은, 장례식만 생각하세요.」
“그래, 알겠어요. 연락 기다릴게.”
전달 사항을 모두 전한 건지 앤지가 그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서늘한 정적이 함께 내려앉았다.
역시 내가 이상한건가.
이글은 전화기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 통화한 지하 연합 동료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버티기만 하지 말라고. 역시 힘들고 아픈 게 당연한 건가? 그게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받지 못했던 아버지라도?
이글은 아버지가 자신을 어떻게 보았는지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글은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실망시켰고, 아버지는 그런 이글을 경멸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그 사이에서 결국 이글을 원망하기로 했다. 어쩌다 내가 너 같은 애를 낳아서. 왜 너는 네 형들처럼 하지 못하고. 그런 말들이 새삼스럽게 아프지 않을 정도로, 심장에 굳은 살이 완전히 박혀버릴 정도로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괜찮아도 되는 걸까. 아니, 정말 괜찮은 건가. 새삼스러운 의심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아버지를, 이 가족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별을 맞이할 거라고도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아, 싫다.
이글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싼 침묵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걸음마다 닿는 곳 모두가 폐허였다.
이 집이 이렇게 조용한 적이 있었던가. 홀든은 무가였고 집에는 군대나 마찬가지인 쾌검사들이 늘 훈련을 받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기합 소리와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금속음이 쉴새 없이 울렸던 연병장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독에 젖어 시커멓게 물든 모래와 풀더미가 얽혀 무너진 담벼락만이 이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랑 대련하자!
엉망이 된 집 어딘가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것처럼, 기억속에 남은 목소리가 떠오른다. 처음 목검을 잡았던 날이 언제였더라. 이제는 아득하기까지 한 그 날, 이글은 그저 신이 나서는 무작정 쾌검사들을 붙잡고 대련하자고 조르곤 했다.
─막내 도련님, 연병장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다쳐요!
─아이고, 도련님이 넘어져서 다치시기라도 하면 주인님께 저희가 혼난다고요.
─도련님, 유모가 무화과 파이를 구워 놨다는데 그것부터 드시고 오시죠?
그런 이글을 보고 쾌검사들은 웃으며 말했다. 검을 맞대려고도 하지 않는 그들에게 짜증을 내긴 무슨, 그냥 무화과 파이라는 말에 신이 나서 체계 없이 휘두르던 목검도 내던지고 뛰어가는 이글을 보고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던 시절이 두서없이 떠올라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걸 대체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화가 난 건가? 슬픈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건 아닌데. 분명 아무 것도 아닌데. 아무리 즐거웠던 시절이 있다 한들, 이글 홀든은 결국 인정받지 못했던 홀든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냥…….
“한참 찾았다, 이글. 여기서 뭐해?”
벨져의 목소리에 이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젠장, 하필 지금. 이글은 입술을 깨물었다.
“형이 곧 입관할 테니 빨리 오라고…… 이글?”
“아, 잠시만…… 잠깐만, 있다, 갈 거니까.”
벨져가 퍽 놀란 얼굴로 그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글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길, 쪽팔리게.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지만 그런데도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너…….”
많이 놀란 건지 벨져는 망연한 기색으로 발걸음 하나 떼지 못했다. 하긴, 작은형은 어렸을 때도 그랬다. 뭐든지 잘하는 벨져가 유일하게 못하는 것이 우는 이글을 달래는 일이었다. 이글이 드물게 울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굳어버려선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게 벨져였고, 우습게도 이 나이가 되서도 벨져의 변치 않은 행동이 이글의 눈물을 그치지 않게 만들었다.
“젠, 장, 왜……!”
왜 그치지 않는 거냐고. 정말로 슬프지도 않은 주제에 멋대로 울게 되는 거냐고! 이글은 거칠게 젖은 눈가를 문질렀다. 그냥, 진짜로 아버지를 사랑해서 슬프거나 한 게 아닌데.
“벨져, 이글을 데려오라니까…….”
“형.”
아무래도 오지 않는 동생들이 걱정이 된 모양인지, 뒤이어 다이무스까지 들어왔다. 태산이네, 진짜. 쪽팔려서 살겠냐고. 그런 생각을 애써 떠올려봤지만 눈물은 전혀 그치지 않았다.
벨져가 이글을 가리켰고, 그 모습을 본 다이무스도 우뚝 멈춰 섰다. 이글은 어쩔까 하다가 두 형제에게서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쓸데없이 오해하는 건 사양이었다.
“이글.”
“슬, 퍼서 우는 게 아냐! 그냥, 그러니까…….”
다이무스의 부름에 이글은 소리지르듯 대꾸했다. 슬플 리 없지. 슬프지 않다. 나보다는,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큰형이나 작은형이 더 슬플 거라고. 그런데도 눈물이 멎지 않는 이유는—
“그냥, 킁, 이제는…… 어쨌든, 다 없단 생각에…… 그냥, 그래서 그렇다고…….”
부모로서야 어쨌든 한 사람의 검사로서는 경애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태어나 처음으로 동경했던 검사가, 이 길을 걸으며 검을 나누어 줬던 사람들이 모두 없어져버렸으니까.
“제길, 꼴, 사납게…… 조금, 만, 조금 있다가…… 갈 테니까, 그냥 형들 먼저…….”
“……하아.”
그 모습을 보던 다이무스가 나직하니 한숨을 내쉬더니 성큼성큼 걸어와선 이글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아버지 장례식에 자식이 우는 게 뭐 보기 싫은 모습이라고. 가자.”
“……그래, 꼴사나운 것도 아니니 숨길 것 없다.”
다이무스의 말에 벨져마저 고개를 끄덕이곤 이글의 반대편 손을 잡곤 걸어갔다. 맙소사. 이글은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나이에 형들 손잡고 아버지 앞으로 가다니, 진짜 꼴사납기론 이보다 더한 일도 없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데도 두 형의 손을 뿌리치고 싶지는 않았다.
홀든의 쾌검사들이 안식을 찾아 땅으로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관 안에 누이고 그 앞에 나란히 선 세 형제는 관례대로 그의 가슴 위에 검을 내려놓았다. 검사로서 평생을 함께 싸워왔던 검이 그의 마지막 길까지 지켜 주길 바라는, 쾌검사의 예였다.
삽을 쥔 건 다이무스였다. 아버지의 관 뚜껑이 닫히고 그 위로 흙이 천천히 덮여 관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이글은 볼을 타고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도 울어 눈가가 빨갛게 붓는 걸 보다 못한 벨져가 그의 손을 잡아 내리곤 말없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흙을 모두 덮은 다이무스는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글의 머리를 토닥였다.
세 형제는 그렇게 한참이나 아버지의 묘 앞을 지켰다. 볼프강 홀든, 아버지의 이름 하나 적힌 묘비마저 마련하지 못한 초라한 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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