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눈 내리는 날의 너는 어디에 있는걸까?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의 소리와 나이오비 씨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쉽사리 일으킬 수 없는 몸에 고개는 여전히 베개에 묻혀있었다. 손을 휘적거려 선반에 닿으면 비몽사몽 하게 손 끝으로 더듬어 안경을 찾는다. 손가락에 툭, 안경다리가 걸리면 그대로 잡아 더는 미룰 수 없는 몸을 일으켜 안경을 쓰고 칙칙하게 불빛 하나 없던 방의 커튼을 걷자 나풀나풀, 하얀 결정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만으로 나의 잠은 확실히 달아났다.

방문을 열고 커피를 내리고 있자, 엘리와 피터가 꽁꽁 싸맨 체로 나이오비 씨의 주의 사항을 듣고 있었다. 

“눈덩이 안에 아무것도 넣지 않기.”

엘리는 그 말에 눈을 한껏 반짝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가지 않기,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않기. 이게 가장 중요해. 알겠지?” 

“모르는 사람을 쫄래쫄래 따라가는 바보가 어디 있어.”

피터가 투덜거렸지만 아마 엘리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의 입이 삐죽, 나왔지만 눈 오는 날의 관용으로 금세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토마스의 말 잘 듣기.”

“네?”


이제 막 내린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다가 갑작스러운 호명에 서둘러 나이오비 씨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요? 진짜요? 저 방금 일어났는데요!?’ 같은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나이오비 씨는 미안하다는 뻥끗거림과 제스처를 했다.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빛을 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결국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왼손에는 피터의 손을, 오른손에는 엘리의 손을 잡고 나와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았다. 

나오자마자 엘리는 뛰쳐나가 신나게 달리기도 하고, 넘어져 뒹굴기도 하고 온갖 방법으로 눈 오는 날을 즐겼다. 피터는 조용히 엘리가 가지고 나온 모래놀이 삽과 호미를 들고 무언가 만들고 있었다. 

벤치에 옅게 쌓인 눈을 가볍게 털고 앉아 역시 어린아이들은 이런 모습이 가장 어울린다고, 아직 이렇게 눈이 내리는 것에 즐거워하고 신나게 놀아도 된다는 나만의 신념을 되뇌며 둘을 보고 있으니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엘리와 피터가 서로 투닥거리면서 눈싸움을 시작하고 엘리는 편을 만들겠다며 내 옷자락을 붙잡아 도와달라고 했지만 이러면 피터의 속이 상할게 분명했다. 나는 어떻게든 온갖 이유를 대가며 엘리를 설득했지만 엘리는 제 손에 쥐고 있던 눈덩이를 내 얼굴로 던졌다. 피터는 괜한 심술이라며 엘리에게 눈덩이를 던지고···. 

그것이 대전쟁의 발발이었다. 눈덩이가 아프진 않았지만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는 눈덩이를 맞고 있자니 얼굴이 시리고 안경은 눈에 뒤덮여 보이지도 않았다. 안경이 더 엉망이 되기 전에 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안경을 벗으니 공원 한가운데 가만히 눈을 맞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어?” 

나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다. 그 소리에 엘리와 피터도 나의 시선을 따라 그 소녀를 보았다. 안경을 아무렇게나 탈탈 털고 다시 쓰고 자세히 보니, 더 호라이즌에 소속의 눈 결정 능력자라던 캐럴이었다. 나와 아이들의 주변과 다르게 캐럴의 주변은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묘하게 차분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이쪽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캐럴은 고개를 돌리고 작게 고개를 꾸벅인 것 같았다. 나도 얼른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는 다시 하늘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내리는 결정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 나름의 눈 오는 날을 즐기는 방법 같아서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려는 찰나, 엘리가 캐럴을 향해 달려가버렸다.

“웅니···, 뭐해···?”

곤란하다, 내가 아니라 소녀에게 무척 곤란하다. 캐럴은 모종의 이유로 실어증에 가까운 상태라고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발이 미끄러워 허우적거리며 달려가 엘리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뜻밖에 목소리에 눈이 커졌다. 

“··· 눈 내리는 거, 구경하고 있어.”

“혼자?”

“응···.”

이, 이래도 되는 걸까?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소녀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소녀는 괜찮다는 것을 표현하듯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나는 그 표현에 고개를 또 꾸벅이며 고맙다고 전했다.

“눈, 조아해??

“응.”

“나도 조아해! 눈!”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명쾌하게 답변하고 있었기에 엘리는 금세 수다스러워졌다. 피터는 아무런 질문도 대화도 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캐럴은 나름대로의 아이들을 놀아주기 위해서 빙판을 만들어 엘리와 피터에게 스케이트를 타게 해주기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것을 주황빛 하늘이 될 때까지 신나게 즐기며 놀았다. 

슬슬 돌아가야 할 때를 느낀 모양인지 엘리는 내게 달려와 속삭였다.

“토미 옵빠, 능력 써도 대?”

“응?”

엘리는 자신을 즐겁게 해 준 캐럴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주변에 사람도 없고···, 작은 상상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는 팔짝팔짝 뛰어가며 캐럴에게 달려갔다. 둘은 무언가 이야기를 하더니 내가 앉아있던 벤치에 그림이 그려지듯 사람의 형상이 앉아있었다. 캐럴과 비슷하게 생겼고,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이었다. 

‘캐럴!’ 이라고 외치는 소년의 말과 함께 눈이 녹는 것처럼 사르르, 사라지는 상상을 멍하니 보다가 소녀는 다시 엘리와 대화했다. 다시 부탁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나와 피터도 짧은 인사를 하고 공원을 등졌다. 마지막 반응이 걱정되어 뒤를 돌아보자, 캐럴은 그대로 벤치를 응시한 채,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굳어있었다.

다만 눈보라가 거세게 불어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아까보다 더 큰 결정으로 펑펑 쏟아지는 눈에 서둘러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연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은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들을 나이오비 씨에게 주며 캐럴과 놀았던 이야기들을 했다. 

캐럴에게 보답으로 캐럴의 오빠의 형상만을 만들어주었다고, 기뻐했고, 고맙다고 들었다며 자랑하는 엘리의 말에 나이오비 씨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엘리를 칭찬해주며 따스한 코코아를 마시자며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따스한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받고 생각했다.

오늘이 아이들에게 즐거운 날이었기를, 캐럴에게 더없이 행복한 날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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