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사이퍼즈 #잭클
잭이 보기에, 클리브 스테플은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잭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클리브 스테플의 가장 오래된 동거인이다. 클리브 스테플이라는 남자는 아주 오랫동안 무연고자였고, 누구보다 호의적이고 살가운 낯을 하고서는 실상 곁에 사람을 잘 두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잭 또한 처음에는 그를 수많은 친구 가운데 둘러싸여 있는 사람으로 착각할 뻔했었다. 다만 오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의도치 않게 제법 오랜 시간을 그의 몸 안에서 함께 지내온 그는 클리브가 남들에게 보일 일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그 자신의 시점으로 관찰할 수 있었으므로. 이를테면 그는 절대 저녁 약속을 잡지 않았다. 늘 누구에게던 ‘그럼 다음에,’ 하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으나 절대로 정확한 때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의 전화선은 해가 질 무렵이면 늘 뽑혀 있었고, 우편함에는 한 번도 사적인 편지가 들어온 적이 없었다. 클리브의 주변 관계는 늘 그런 식이었다. 잭이 기억하는 친구 역시 대니 한 사람이 다였다. 그마저도 그 적당히 건조하고 용건에 충실한 몇 번의 만남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직업을 고려해 친구라는 이름으로 꾸준한 교류를 이어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클리브는 요컨대 그런 사람이었다. 인생에 본인 스스로와 일 외에는 무엇도 들이지 않는 사람. 온 런던에서 일어나는, 아니 온 영국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사건들에는 쉽게 호기심을 가지면서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 노파인지, 젊은 여성인지, 아니면 콧수염이 난 중년의 신사인지에는 어떤 호기심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호기심은 늘 자신을 배제하고 발휘되었다. 아마도 지금에야 옆집의 이웃에 대해 딱히 기억해 두고 있지 않겠으나 당장이라도 옆집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그리고 달음박질 치는 소리가 나면 그때야 그의 호기심이 그리로 뻗어 나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잭이 그런 것들을 깨닫는 데까지는 약 1년 남짓이 걸렸다. 능력자 전쟁이 어설픈 종전을 선언하고 잭이 클리브로부터 분리되어 그의 집 방 한 켠을 차지하고 살게 된 지는 이제 반년을 지나가고 있었고. 잭은 반년이라는 그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을 두고 자신이 클리브 스테플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가장 오래도록 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된 것을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클리브는 때때로 잭에게만은 속에 가만 삼켜 두었던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뱉어내곤 했다. 잭이 이미 그의 내면으로부터 분리된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클리브 본인이 오히려 그의 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클리브의 이야기는 때로 혼잣말의 형태를 띠었고, 그가 조금 더 상태가 좋을 때는 평범한 대화의 형식을 취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은 달랐다.
“클리브.”
“아, 미안합니다. 우리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죠?”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클리브가 서두를 꺼내고, 잭이 그에 대해 몇 가지 견해를 중얼인다. 클리브는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다가 어느샌가부터는 완전히 대답하는 것을 잊은 채 깊숙이 내면에 잠긴 눈빛을 하고서는 그대로 어딘가 멀리 떠나버린다. 당연하게도 잭은 더 이상 클리브의 내면에 잔재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지금 어떤 기분에 잠겨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잭은 분리 후 6개월이 지난 이제서야 그의 내면에서도 점점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클리브 스테플의 애매모호한 특혜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 그리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결국 더 이어지지 못한 대화에 잭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최근의 클리브는 확실히 이상했다. 하지만 무엇이 그를 이상하게 만드는지, 저 옅게 잡힌 미간 주름 사이에는 무슨 생각들이 끼어들어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클리브는 말하지 않았고, 잭은 유추하지 않기로 했다.
그 어정쩡한 관계는 다시 한 달을 꼬박 채웠고, 이윽고 완전히 끝나버렸다.
“잭.”
잭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시선의 끝에는 클리브가 있었다. 아마도 자신은 소파에서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봄기운이 스민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한동안 쳐둔 채 걷지 않았던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며 살랑이는 모습을 꿈꾸듯 지켜보던 잭의 시선이 천천히 클리브를 향했다. 아직 퇴근할 시간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그의 이마가 다가왔다. 콩, 이 더 어울릴 것이다. 눈을 잠깐 감았다가 다시 뜨면 클리브의 눈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 오늘은 이야기합시다. 당신에게 해줄 말이 있어요.”
느닷없이 꺼낸 말에 잭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다른 대답을 건네지는 않았다. 클리브는 아주 오랫동안 이상했고, 앞으로도 이상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 그의 표정만 보더라도 그랬다. ‘어느 누가, 감히, 나를 보고 이런 식으로 눈을 빛낼 수 있겠어.’
잭은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클리브의 이야기는 아주 길어서 생각할 시간도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분리 이후 그가 느낀 기묘한 상실감과 자꾸만 내면에서 들려오는 잭이 아닌 잭의 목소리에 대한 두려움, 그보다 더한 반가움, 그리고 점차 그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생기는 불안감에 대한 이야기였다. 잭은 그제야 클리브 본인도 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수월치 않았음을 깨달았다. 누구와도 가까워 본 적 없던 남자는 난생처음으로 혼자가 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와 동떨어져 이 밖에 존재하는 자신을 완전히 타인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전처럼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알 수 없는 막연함을 느끼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가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러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사라졌어요.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쉬워 보이지는 않는데.”
“당신이 여기 있잖습니까.”
클리브는 구겨진 코트 자락을 툭툭 털며 말했다. 목소리는 아주 끈질기고 사려깊게 클리브가 무슨 일을 하건 한마디씩 거들어가며 한시도 쉬지 않고 튀어나왔으나 점점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점점 뜸해지고, 작아지고, 나중에는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모호해졌다가, 끝내 오늘은 아주 들리지 않게 되었단 것이다. 클리브의 등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을 등진 채 그가 말했다.
“당신이 집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유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거든. 언제건 목소리가 들리면 ‘아, 아직 여기에 있구나’하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니, 나는…….”
이제야 잭은 클리브의 코트가 구겨진 이유를, 청바지 밑단이 흙탕물로 얼룩덜룩하게 젖은 이유를 짐작했다. 그가 제 이름을 부르며 그토록 안도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 역시도. 그제야 오랜 의문이 풀어진다. 그 자리엔 대신 안도감이 찾아 들었다. 뻗은 팔이 서로 엮인다. 그의 내면에서 들리던 목소리 따위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확실한 형태로 잭은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기로 했다. 심장 박동과, 체온과 촉감으로. 그러면 클리브도 똑같은 것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잭에게 돌려주었다. 어정쩡하게 이어지던 관계는 노을을 등지고 끝이 났다.
잭은, 그리고 클리브는 드디어 새 동거인을 맞아들였다. 야트막한 울타리를 지나, 현관문을 열고, 긴 복도를 걸은 끝에야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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