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기억.
#CYP #잭클
꽃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가볍군. 클리브 스테플이 여린 벚꽃송이를 손에 들고 처음으로 뱉은 감상이었다. 직접 따온 것은 아니다. 물론 주운 것도 아니었고. 봄이 왔다는 것은 이따금 코트를 벗어 팔에 걸어든 채 걷는 날이 늘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기는 했지만 한가하게 꽃을 구경하거나 심지어 주워 모으는 것은 저와는 거리가 멀었던지라 꽃을 보며 봄을 상기하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다발도 아니고 송이로 떨어져 있는 벚꽃같은 경우에는 더더군다나 생소할 따름이었고. 손수건 위로 점점이 흩뿌려져 있는 꽃들을 사뭇 진지하게 훑던 시선은 결국 웃음기를 머금었다. 저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그 진지한 표정을 하고는 꽃나무 아래서 꽃송이를 하나 둘 씩 주워 모으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그 모습을 정말 '제 눈으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잭, 하며 클리브는 허공에 말을 걸었다. 그가 정말로 듣고 있는지 혹은 듣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발화였다. 하지만 정말 듣고 있다 해도 알 방법이 없었으며 그 반대라고 해도 마찬가지였기에 멋대로 혼잣말을 시작할 적에는 가타부타 그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이미 한참 전에 마음을 먹은 후였다.
"이런 꽃은 아무리 한웅큼을 쥐어도 어떤 기억도 읽을 수 없다는 것 압니까?"
그렇게 운을 띄운 남자가 꽃송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살살 돌렸다. 여린 꽃잎이 뭉개지지 않도록 몹시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야기인지 혼잣말인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특히 이런 꽃들의 경우에는 더 그렇답니다. 바람에 날려 떨어질 때가 되어 떨어진 꽃들 말이지. 쥐어도 아무것도 읽을 수 없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그래서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곤 했어. 너무 약하고 여려서 기억이 묻어있을 만한 구석이 없어서 그런걸까, 하고요.
클리브 스테플에게 있어 읽을 수 없는 사물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진실도, 사소한 비밀도 간직하지 못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뿌리도 잎도 없이 툭 떨어져 있는 약하고 여린 것, 한 때만 아름다운 것, 쉽게 짓이겨지는 것들. 아무리 튼튼한 나무더라도 한 번 피운 꽃은 어김없이 떨어진다. 심지어는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어도 떨어진다. 폭력적인 손길과는 한 광년쯤 떨어져 있을 작디작은 고사리손에도, 잠시 가지에 앉았다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에도, 나그네의 모자도 떨어트리지 못할 잔바람에도. 튼튼한 가지며 새파란 잎은 꽃을 지켜주지 못하고, 꽃은 결국에는 떨어진다. 불의의 사고가 아닐지라도 단지 때가 되면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끝내 잎을 하나, 둘 떨어트리고 계절이 가거든 거기 꽃이 피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꽃이야말로 의미없음의 대명사쯤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누구도 자신에게 꽃을 선물한 적 없다는 것 또한 어쩌면 이유가 될지도 몰랐으나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꽃을 받아 보고 나니까, 좀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해. 그래, 나도 압니다.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건 알지만 꽃을 받아 보니까 알게 되는 것도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웃지 말고 가만히 들어봐요.
꽃에는 어떤 기억도 없지만 나무에는 기억이 남았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것들은 뿌리와 잎으로 보고 들은 것들을 무척 꼼꼼하게 저장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어떤 현장에건 나무가 있으면 그 위에 손을 얹는 습관이 생겼다. 나무는 언제고 가장 묵묵히, 가장 침착하게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는 가장 쓸만한 정보를 알려주고는 했다. 아무리 주도면밀한 범인이라도 나무에 기대거나 손을 얹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주의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특히 그랬다. 물론 클리브는 기자일지언정 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서 그 정보들은 아주 한정적인 상황에만 쓰이곤 했지만 어쨌건 유용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부인할 여지가 없었다.
―왜 나무엔 기억이 남을까, 생각해 봤거든.
―어쩌면 꽃이 떨어지면서 그 동안 담고 있던 모든 기억을 나무에 맡기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꽃은 기꺼이 바람에 몸을 실을 수 있는거지. 그 작은 몸에 기억이란 건 너무 무거운 짐일테니까요.
꽃잎이 바람결을 타고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광경을 상상한다.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던 광경이었다. 유달리 날이 좋았고, 바람은 강했고, 센 바람에 강이 희게 빛나며 잔물결을 그려내는 모양을 보고 있었지. 갑자기 눈앞에서 흐느적대며 유영하던 흰 꽃잎에 고개를 들어보니, 멀리 심긴 꽃나무들에서 한꺼번에 터져나온 꽃잎들이 나부끼며 바람에 실려가는 풍경이 펼쳐졌다.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서 그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엔 옅은 분홍빛으로 물든 햇빛이 거리를 꽃잎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 날이 있었단 기억이 이제야 떠오른 것은 아마도 손에 들린 꽃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중심적인 생각일 지는 모르겠지만 또 이런 기회가 아니면 그런 사소한 일을 떠올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물론 그에게 들려줄 일도 없었을 테고.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기억에는 무게가 있거든. 꽃도 피어나서 지기까지 너무 많은 걸 보고, 듣고, 겪었으니 그걸 가지고선 채 떨어질 수가 없어서 기억을 머물던 곳에 두고 대여섯 장 되는 잎만 가진 채로 떨어지는 거야. 좋은 바람을 만나면 얼마간은 더 날 수도 있겠지, 그러다가 더 운이 좋은 몇 송이는 이렇게 상냥한 손을 만날 수도 있을거고.
헝겊으로 기워진 작은 곰인형을 떠올린다. 그 작은 몸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버거운 기억을 안고 있었던.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 뇌를 찢고 흠집을 남겨놓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제 것이 아닌 기억임에도 되새기는 순간엔 호흡이 거칠어지고 신경이 저절로 곤두섰다. 꽃송이를 빙글빙글, 하릴없이 돌리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언젠가 당신도 그러고 싶은 때가 오면, 잭.
―굳이 간직하지 않아도 될 기억은 여기 두고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 만큼의 기억들만 골라서 들고 갔으면 합니다.
아주 뾰족하고 날카롭고 메마른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지는 앙상하고 마른 잎 하나 매달리지 않은 나무 한 그루. 그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 가장 바람이 세차게 불고 가장 처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는 자리에는 갈색과 녹색이 뒤섞인 작은 옹이가 하나 붙어있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면 옹이가 아니라 꽃눈이다. 꽃눈은 아주 딱딱하고 작게 웅크려 있어서 그 자리에서 꽃이 피어날 날은 요원해보이지만 원래가 모든 꽃은 한 계절에 전부 피어나지 않는 법이므로 클리브는 걱정을 거두기로 했다. 다만 언젠가 그를 피워낼 계절이 불어오기를 양손을 모아두고 기다릴 셈이었다.
잭이 건네준 꽃송이들은 차례차례 클리브의 가장 아끼는 책 페이지 위에 몸을 뉘였다. 그런 계절이었다. 상냥한 손길과 연한 꽃잎에 외로움이 말라가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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