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CYPERS #잭
“형편없었어.”
극장에서 나오는 내내 영 표정이 좋지 않았던 잭이 퉁명스럽게 뱉은 말이었다. 몹시 짧고 간결한 불평을 토해낸 그는 불평에 꼭 걸맞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척이나 형편없는 것을 본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얕게 주름이 잡힌 미간과, 불만스러운 각도로 꺾어진 눈썹이라던가, 비뚜름한 각도로 다물린 입매 같은. 그의 표정을 만들어 내는 모든 요소가 전부 그랬다.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클리브가 물었다.
“좋아, 어느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 번 들어볼까.”
“전부.”
사려깊은 물음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퉁명스러운 대답에 곧장 무용해지고 말았다. 정말이지 꼭 이런다니까. 클리브가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다수의 경험 끝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잭의 연기에 대한 품평은 상당히 까다로운 데가 있었다. 그 스스로가 변신 능력자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어설픈 연기나 형편없는 각본을 그대로 보아 넘기는 일이 없었다. 특히나 각본가가 적당한 선에서 이만하면 됐겠지, 하고 관객들에게 냅다 떠넘기는 부분이라면 질색을 했다. 그런 도중 하필 오늘 함께 보게 된 연극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클리브의 입장에서도 단언컨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전개와 게으른 장치들이 돋보이는 졸작이었으니 이런 담화가 오고 가는 것은 이미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따라서 상황상 그의 짜증스러움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클리브는 이런 순간을 마주하게 되면 다름이 아니라 그런 잭을 앞에 두고서 웃음을 참는 것이 가장 고역이었다. 연극에 불만을 가득 품은 잭은 희대의 살인마, 런던의 밤거리를 피로 물들이는 잔인한 괴물, 극악무도하고 고약하고 소름 끼치는, 따위의 수식어를 낙인처럼 새기고 다니던 사람치고는 퍽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기에.
아이고, 하며 짐짓 곡소리를 낸 클리브가 특유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고선 그를 들여다보았다.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빙긋 웃고 있는 클리브를 발견한 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클리브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면 늘 뜬금없고 곤란한 질문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역시 직접 써보는 건 어때, 잭? 각본 말이야.”
“그 얘기는 지난번에 이미 끝났던 것 같은데.”
“어허, 끝나긴? 삼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였을 뿐입니다.”
끈질기기는. 잭은 생각했지만,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해 봤자 클리브에게서 돌아올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 역시 다수의 경험 끝에 알게 되었다. ‘당연하지, 끈기는 좋은 기자가 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덕목이거든요.’ 였던가. 잭은 아직도 그 말을 할 때에 클리브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생생했다. 광대뼈가 동그랗게 솟고, 입술엔 개구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제 서른 줄을 바라보는 남자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기 때문이었던가, 아니면 자신을 향하는 미소가 생경했기 때문이었나. 그의 표정이 한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싶더니 어느샌가 기억에 단단히 박혀 그를 바라볼 때면 자연히 그날의 미소가 떠오르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가 각본을 쓰는 데에 왜 이렇게 집착을 하지.”
잠시 느려진 걸음이 원래의 템포로 돌아갔다. 잭이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하면, 클리브 역시 보폭을 맞추었다. 눈짓도, 언질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야 당신이 매번 이렇게 까다롭게 구니까 궁금해지는 거지. 이렇게 까탈스러운 양반은 얼마나 대단한 각본을 쓰려나? 어쩌면 내 집 지붕 아래에 미래의 대문호가 살고 있던 건 아닐까, 이런 재능을 썩히면 안 되는데, 기자 월급이며 고료가 가뜩이나 아쉬운 와중에, 동거인의 위대한 문학적 재능에서 비롯한 인세를 보탤 수 있다면…….”
“그만, 클리브. 어디까지 망상을 하는 거야.”
끝도 없이 이어지려는 클리브의 주절거림을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끊어내며, 잭의 걸음이 다시 조금 더 빨라졌다. 그리 놀랄 것도 없다는 듯 곁으로 다시 따라붙은 클리브가 괜스레 과장된 제스처로 짐짓 입술을 비죽였다. 늘 이어지는 일상이었다. 티격태격하기를 한시도 멈추지 않으며, 둘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다음 코스로 접어들었다.
다음 코스로 정해 두었던 공원이 극장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입구를 넘어설 무렵에는 둘 모두 뜨끈한 런던의 여름 공기에 조금 지쳐 있었다. 아니, 정말 그런가. 잭은 내심 반문했다. 기온에 지쳐버린 건지, 한시도 쉬지 않고 이어지던 입씨름에 지친 건지 모를 일이지. 생각하자면 시선은 공원의 풍경을 살피느라 이제야 겨우 잠잠해진 클리브를 훑었다. 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길 없을 클리브는 한창 과장된 태도로 심호흡하는 중이었다. 어쩐지 웃음이 날 만큼 한가한 모습이다.
두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 접어든 공원은 한산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잔디 위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아이가 딸린 부모가 두서넛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이 다였다. 런던 시내를 벗어난 것이 느껴지는 신선한 공기를 폐 속에 가득 채우겠다며 한참이나 말도 없이 심호흡에 집중하던 클리브가 팔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이 꼭 햇살 아래서 게으르게 몸을 뉘인 고양이처럼 보였다. 나른한 표정을 한 채, 클리브가 말했다.
“역시 런던은 사람 살 곳이 못 돼. 우리 언제 이사 갈까요?”
“그런 건 우선 기자 양반의 지갑 사정이 조금 넉넉해진 후에 고민해 봐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집세를 내고, 두 사람분의 생활비를 제하고 나면 저축할 수 있는 금액이 얼마나 되더라.”
“으악. 잭, 내가 누차 말했지만, 이럴 땐 그저 적당히 맞장구나 쳐주면 된다니까. 평화로운 공원 산책 중에 그런 현실적인 지적은 규정 위반이라고요.”
“내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기 시작하면 너는 한적한 교외의 저택에서 노후에 기를 말의 품종까지 정하기 시작할 테니까. 별수 없지.”
“역시 말의 품종은 뭐가 좋겠어? 나는 밀색 갈기를 가진 녀석이라면 좋겠는데.”
물 흐르듯 이어지는 반문에 잭의 입이 꾹 다물렸다. 흘금, 그의 시선이 곁에서 걷고 있는 클리브를 티 나지 않게 바라보면 아니나 다를까 개구지게 웃고 있던 클리브가 익숙하게 그의 시선이 흐르는 방향을 눈치채고서 태연히 눈을 마주쳐 보였다. 잭이 다시금 묵묵히 시선을 거둔다. 더 연관되지 않겠다는 듯 아주 완고한 표정으로. 그맘때엔 극장에서부터 참고 있던 떠들썩한 웃음이 여과 없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습관 같은 추임새를 덧붙이며 웃는 클리브에게 잭은 끝까지 눈길을 주지 않았다. 눈길을 주기엔 뺨 위로 옅게 스민 열기가 영 거북했던 탓이다. 여러모로 요란스럽기 짝이 없는 산책이었다. 다행히 눈총을 줄 만한 사람은 없었고, 머리 위를 드리운 나뭇가지 위에서 청설모 한 마리가 느닷없는 웃음소리에 놀라 재빠르게 달려가는 소리만 약하게 겹쳐 들렸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클리브 스테플의 서른 몇 번째 여름. 그건 동시에, 잭이 맞는 세 번째 여름이기도 했다.
잭에게 몸이 생기고 난 뒤, 클리브는 한동안 제대로 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건 단지 갑작스럽게 생겨버린 ‘진짜’ 동거인의 존재가 어색하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잭에게 제대로 된 신분을 주고 싶다는, 그 이전에 가장 우선해 그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자신의 의지라고는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끔찍하고 잔인한 연쇄살인 사건의 비밀을 파헤쳐서 정부로부터 잭 더 리퍼는 조작된 살인마였으며 이는 모두 영국 왕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공표 받지 않고서는 잭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사회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몇십 년이 될지 알 수 없는 세월을 살아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일개 기자의 힘으로 정부 차원에서 조작하고 덮어버린 일을 캐내는 것은 숱하게 많은 위협과 위험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오래 전 지나버린 일에 증인은 많지 않았고,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은 이제 슬슬 이름도 가물가물해지려는 옛날 살인마를 위해 기꺼이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당연한 이치였다. 누구도 과거를 파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클리브를 제외하고는.
클리브는 목이 다 쉬도록 소리를 쳐가며, 구두의 밑창이 덜렁대며 떨어져 나갈 때까지 뛰어다녔고, 진창에 구르고 때로는 낯선 이에게 얻어맞으면서도 한참을 사건에 매달려 있었다. 동료 기자와 편집장 모두 그런 클리브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큼 실패했으면 그만둘 법도 했으나 그의 사건에 대한 집착은 누가 보더라도 기묘한 데가 있었다. 심지어는, 끝내, 잭 역시도 클리브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온 클리브의 손을 붙잡고 그에게 ‘이제 그만해도 돼’, 하며 말을 건네기 전까지.
그 날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잭과 클리브 둘 다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했다. 잭은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서 기억이 나지 않았고, 클리브는 너무 많이 울어대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둘은 대화를 했다. 아주 오랜 대화, 밤을 꼬박 새우고 날이 밝고 난 후에도 퉁퉁 부은 눈을 마주한 채 이어지는 대화였다. 대화가 끝이 날 무렵, 클리브는 한숨처럼 고백했다. 무척 형편없는 고백이었다.
‘내가 아마도, 그러니까, 이걸 사랑이라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 긴 대화 중 아직까지도 잭이 유일하게 또렷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단락이었다. 그 말을 하던 클리브가 어찌나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도 또렷했으며, 그 더듬대는 목소리가 어느 부분에서 말을 멈추고, 어느 부분에서 숨을 들이마셨는지도 마찬가지로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1년 반의 폭풍이 그쳤다. 눈이 퉁퉁 부은 클리브는 난생처음 보는 표정으로 웃는 잭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고, 잭은 그의 붉어진 눈가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둘 모두의 암묵적인 동의를 거쳐 드디어 삶이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었다. 거센 바람과 쏟아지는 장대비와 머리 위로 낮게 드리운 먹구름이 개고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햇살이 뿌연 창문 너머로 비쳐 드는 5월.
잔혹한 비밀을 감춘 채로도, 지독한 과거와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안은 채로도, 잭은 천천히 삶을 꾸려 나갔다. 런던의 낡은 아파트 한 층을 차지하고, 아침이면 거실의 큰 창을 열고 밤늦게까지 마감에 시달린 동거인을 가차 없이 깨워 일으키며 병아리콩 샐러드와 계란프라이를 올린 토스트를 접시에 담아 먹이고, 클리브의 오래된 컬렉션이 소장된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읽다가 해가 저물 무렵에는 큰길까지 나가 터덜터덜 돌아올 그를 기다리는 삶이었다. 지루하고 별것 없는 삶, 평화롭고 포근한 일상이었다. 그건 잭이 눈을 뜬 이후로 내내 바라왔던 것이기도 했다.
둘은 클리브가 휴일을 받은 날이면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새로 책장에 들여놓을 책을 찾겠다고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날도 있었고 아닌 날도 있었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평이 괜찮은 연극이 상영되고 있을 때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표를 구해 극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각종 소설을 장르 불문하고 섭렵해 버린 잭이 클리브가 우연히 구한 표로 함께 연극을 관람하고 난 이후 무척 감명 깊어 했기 때문에. 그 후에는 극장에서 나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바깥에서 꼭 저녁을 먹고 들어가는 것까지도 자연스러운 일과로 편입되었다. 이러다보면 아마도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 이후에 다른 일정이 끼어들게 될지도, 혹은 아주 대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까지의 많은 일상들처럼 말이지, 생각하며 클리브가 설명 없이 다시금 웃음을 터트리고 잭은 굳이 고개를 기울여 의문을 표했다. 끊길 듯 끊기지 않을 듯, 잔잔하게 이어지는 웃음소릴 헤프게 두른 채, 꼭 닮아버린 보폭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여름이 우거진 산책로로 들어섰다. 나뭇잎 사이를 파고든 햇살이 희게 빛나는 머리칼 위에서 모래알처럼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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