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데트/액자배달조] 아가씨 한 명을 달래려면 上
8900자. 액자배달조(NCP) 비중 高.
출처 | Michael Angelo 77
“그거 있잖아요, 그…!”
“음~, 양배추?”
“아니….”
“브로콜리?”
“아니.”
“그럼, 햄버거?”
“뭐, 거기도 야채가 많이 들어가긴 하지.”
“둘 다, 좀! 더 생각이 안 나잖아!”
떠오르지 않는 어휘에 골머리를 앓던 오데트가 짜증 섞인 호통을 내지르자 그의 옆에 붙어 앉아있던 키아라와 주세페의 어깨가 동시에 들썩였다. 어리둥절해져서는 저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사촌을 그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는 표정을 보아하니 주세페에게는 딱히 오데트를 진정시킬 의사가 없는 듯했다. 지켜보기만 해서는 정리될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케니스가 일행의 스무고개 같은 언쟁에 끼어들지 않고서 우물대고만 있던 입을 열 채비를 했다. 그 덕에 일행 중 가장 빨리 저녁 식사를 마친 참이었다.
어디, 옛 기억을 더듬어 말해보자면….
“괜찮습니다, 랑베르 씨. 부족한 실력이지만, 제가 프랑스어를 배웠었거든요. 편히 말씀하세요.”
“…Vraiment?”
“Bien sûr.”
햄버거를 야채 묶음 취급하는 황당무계한 발언과 그 뒤를 이은 더욱 황당한 동조에 터져 나온 오데트의 큰소리가 순식간에 멎었다. 이제는 저 두 사람에게 익숙해질 법도 한데, 피곤해서 감정 조절이 잘 안되는 건가? 판단은 나중에. 깊게 잡혔던 오데트의 미간 주름이 사라졌으니 되었다. 케니스는 일단 오래간만의 외국어 회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것은 오데트 랑베르가 열병을 털고 일어난 직후 며칠 간의 이야기이다.
케니스 하트의 중재가 필요하다
미지의 세계와 연결된 문이 열려 온 세상이 뒤집힌 것도 어느덧 몇 개월째. 짧기도 길기도 한 그 기간 동안 케니스의 세상도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으나, 당장 해야 할 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바로 하나의 거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료들을 규합하는 것. 케니스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들의 곁을 잠시 떠나 새로운 일행과 여정을 함께하고 있었다.
“케니스 네가 프랑스어를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안 해봤지 뭐야? 아무래도 나 빼곤 다들 영어로 대화하니까…. 그나저나, 발음이 정말 좋은데. 혹시 프랑스에 살았던 적이라도 있는 거니?”
이렇게 즐겁게 말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버거웠던 일정에 몸도 머리도 지쳐 간단한 영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반가운 모국어를 마주한 오데트가 기운을 차리다 못해 항상 그늘만 가득하던 얼굴에 화사한 웃음꽃을 피워냈다. 함께 지낸 이래로 가장 편안한 언동을 보이는 그를 보며, 케니스는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신이 단 한순간도 언어적으로 소수자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능숙하다 한들 모국어보다 편할 리가 없는데. 갑자기 낯선 환경에 떨어져 힘든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얼마 전엔 정말로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오데트를 대할 때는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렇듯, 새로 만난 사람과 교류를 하면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여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케니스는 도망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급박한 여정의 와중에도 새 동료들을 파악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태생부터 교육받아 온 리더로서의 습관이기도 했고, 타인과의 소통을 좋아하는 외향인으로서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요즘 들어 둘이서만 즐겁게 대화하는 일이 잦지 않나요? 그것도 저랑 키아라는 못 알아듣는 말로. 저, 서운하려고 해요.”
“아니, 딱히 일부러 그런 건…. 모국어가 더 편한 건 당연하잖아요.”
“그렇지만, 지켜보기만 해도 즐겁더군요. 제가 모르는 언어를 즐겁게 구사하는 오데트 양에게선 평소와 달리, 재잘대는 숲의 요정 같은 발랄하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이 느껴졌거든요.”
“아, 네.”
의도가 없었다 한들 결과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 저도 모르게 조직 내 따돌림을 주도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오데트가 순간 죄책감을 느낄 뻔했으나, 언제나와 같은 주세페의 느끼한 헛소리에 얼굴에 떠올랐던 겸연쩍은 기색을 금세 거뒀다.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위기를 풀어나가는 주세페에게서도 케니스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한없이 가벼운 태도를 가진 한량 같지만, 그는 특유의 능글맞으면서도 유쾌한 입담으로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오데트는 주세페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지도 않았고, 그 이상 케니스와 단둘이서 프랑스어로 대화하기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상대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자신의 감정을 피력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레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화술은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알게 되면 제게도 조금이나마 애정이 담긴 눈길을 보내주시려나요? 아, 그러고 보니 몇 문장 아는 게 있는데. 물어봐 주세요, 오데트 양.”
“알면 그냥 말하면 되지 뭘…. 뭔데요?”
“Tu as de beaux yeux.”
“흠, 그리고요?”
“Tu me manques.”
“…또?”
“마지막으로, Je t'aime.”
“….”
아, 좋지 않다.
“…죄송하지만, 제가 연애 생각이 없어서….”
“크흡.”
“아니, 너한테 말한 게…. 것보다, 무슨 뜻이야 그거? 오데트 양은 왜 웃은 거죠?”
“흠흠, 내가 언제요?”
“방금 귀엽게 웃으셨는걸요!”
“아, 뭐래. 전혀요.”
주세페가 할 줄 안다는 프랑스어가 하나같이 사랑을 속삭이는 말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오데트도 마찬가지였기에 옆에 있던 사람이 다 무안해질 정도로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일 터. 정작 반응의 대상인 주세페는 순식간에 싸늘해진 그의 표정을 목전에서 마주하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또 그렇게 만드는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인지 자신의 페이스를 잘 굽히지 않았다. 장점이 더 많은 성격이라 해도 오데트 같은 타입에겐 매를 버는 경우가 잦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특유의 긍정성과 마이페이스는 집안 내력인가? 케니스의 눈길이 코앞에 있는 일행의 투닥거림에도 개의치 않고 입안 가득 빵을 물고 있는 키아라에게로 향했다.
“…맛있어, 키아라?”
“응, 완전!”
“그래, 많이 먹어.”
“케니스 너도!”
완벽한 해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일방적 갈등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면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의 개선에도, 오데트의 정신력 보전에도 도움이 될 터. 케니스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여정에는 크고 작은 고민이 끊일 날이 없었다.
키아라 호킨스의 간식이 필요하다
여정이 이어지며 손에 꼽을 수도 없이 많은 날밤을 지새웠지만, 키아라는 여전히 불침번 일을 심심하다고 느꼈다. 공을 치며 놀 수도 없고, 멀리 산책을 나갈 수도 없고, 가만히 앉아서는 대화도 속닥거리며 해야 하니 좀이 쑤셨다. 그러나 자신이 자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이 같은 시간을 견디며 자신을 지켜줬음을 알았다. 키아라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성격이었고, 그를 위해서라면 이런 지루함 쯤은 참아낼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배고프다.”
“쿠키라도 먹을래? 아까 주세페가 덤으로 받아온 거야.”
“응! 고마워, 케니스!”
“주세페가 받아왔대도.”
“고마워, 주세페…!”
키아라가 등 뒤 저편에서 자고 있는 주세페에게 감사를 속삭이며 쿠키를 크게 베어 물었다. 맛있다! 언동만큼이나 활발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지는 신체를 가진 키아라는 눈을 뜨고 있으면 식사를 언제 했든 간에 금방 다시 배가 고파지곤 했다. 반면, 여정의 첫날부터 병아리 눈물만 한 식사량을 선보인 오데트는 한번 앓아누운 뒤에도 변함없이 소식을 추구해 오늘 저녁에도 키아라를 다시금 놀라게 만들었다. 또 쓰러지지 않으려면 체력을 길러야 할 텐데. 그러려면 우선 많이 먹고 많이 움직여야 하고. 이십 년을 살면서 처음 만난 허약체질의 친구를 걱정하며 키아라가 오데트 몫의 쿠키를 공간 안에 보관했다. 이탈리아 빵은 그렇대도, 쿠키는 입에 맞을 지도 모르지. 나란히 앉아 같이 저녁 식사를 했던 오데트는 빵 하면 프랑스라고 주장했지만, 키아라는 이탈리아 빵도 엄청 맛있다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떠오르는 말은 바로 뱉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가 이해할 수 없던 일행의 대화를 듣고도 끼어들지 않았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건 무슨 말이었지? 키아라가 뒤늦게, 자신이 입안 가득 빵을 뜯어 넣고 음미하는 동안 주세페가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어떤 말을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있지, 아까 주세페가 뭐라고 말했던 거야? 프랑스어랬던가? 케니스는 알아들었어?”
“아까? …아, 저녁 먹을 때?”
주세페는 이탈리아인이지만 키아라가 아는 바로는 영어도 잘하고 다른 외국어도 조금씩 할 줄 알았다. 미국에 있었을 때도 외국인 언니들이랑 곧잘 대화하고 한두 마디씩 배워오곤 했으니까. 스무 살이 되도록 아빠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조차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키아라는 그런 주세페를 언어의 천재쯤으로 여겼다.
“‘눈이 예뻐요,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라는 말이었어.”
“오~, 케니스도 언어 천재였구나! …근데 오데트는 왜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거지? 다 좋은 말인데?”
“누군가에게 좋은 말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다 그런 건 아니야.”
“그런가? 흠, 그럼 오데트는 애정이 담긴 말을 싫어하나보다.”
“그렇다기보단…, 누가 하는 말인지가 중요하지.”
“…헉, 그럼 말이 아니라 주세페를 싫어하는 거야? 진심으로?”
"그동안은 어떻다고 생각했는데?”
“저러다 곧 잘 지내겠거니~ 했지!”
주세페가 오데트에게 해줬다는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키아라의 아빠인 라파엘레가 키아라의 엄마인 마리아에게 자주 해주는 말이었다. 호킨스 부부는 사소한 갈등으로 매일같이 투닥거렸지만, 곧잘 화해하고, 또 곧잘 서로를 향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 온 에너지를 쏟고는 했다. 이십 년이 넘도록 열정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 중인 부모 밑에서 자란 키아라는 다툼이라는 것을 관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여겼고, 그래서 자신의 다툼도 타인의 다툼도 금방 지나갈 순간이라 생각해왔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였구나. 두 사람이 영영 친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지루한 시간도 아직 덜 가신 허기도 더 이상 신경 쓸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주세페는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 오데트는 아직 같이 지낸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 걸 거야.”
“나도 네 생각에 동의해.”
“내가 얘기해 볼까? 오데트한테 주세페의 장점을 알려주는 거지!”
“글쎄, 남한테 듣는 걸론 잘 와닿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음, 이건 둘 사이의 일이라 내가 더 말을 얹기는 조심스럽네.”
“왜? 넌 이 사람 저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거 좋아하잖아.”
“하하, 부정은 못 하겠네. 아무튼, 조금만 더 지켜보자. 키아라 네 말마따나 같이 지낸지 얼마 안 됐잖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관계도 있는 거야. 너랑 파올라가 그랬던 것처럼.”
“…! 그거야!”
케니스의 예시를 들은 키아라의 머릿속에 한 줄기의 섬광이 관통했다. 주세페가 처한 상황이 과거의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왜 진작에 눈치채지 못했을까? 얼마 전에 말로만 짜증을 내던 오데트가 결국 주세페의 오금을 걷어 차버린 것까지 목격했으면서 말이다. 많이 아파 보였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낮은 신음을 뱉던 사촌을 떠올린 키아라가 파올라에게 꿀밤을 맞았던 정수리가 욱신거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파올라는 키아라가 입을 열 때마다 이유 모를 화를 냈고 종내 폭력까지 휘둘렀으나, 이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키아라는 그와의 관계 개선의 성공 요인으로 자신있게 한가지를 꼽았다.
“파올라도 나랑 질릴 때까지 케이크를 먹고 나서야 친해졌잖아? 주세페랑 오데트도 좋아하는 일을 같이 하다 보면 친해질 수 있을 거야, 분명해! 좀 이따 주세페가 일어나면 내가 해결책을 말해주고~, 그럼 내일이든 모레든 즐거운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이 친해지겠지? 나도 해냈으니 주세페는 당연히 잘 해낼 거야. 주세페는 항상 모두와 잘 지냈거든!”
키아라는 주세페를 좋아했고, 오데트도 좋아했다.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케니스가 상황을 더 지켜보자고 말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마음 깊이 바라기에 번뜩하고 떠오른 묘안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흘러넘치는 기대감에 용케도 얌전히 앉아 있던 키아라의 몸이 오뚝이처럼 좌우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주세페가 빨리 일어나면 좋을 텐데.”
“내가 어쨌는데, 우리 공주님?”
“꺅! 놀랐잖아, 주세페~! 기척도 없이!”
“하하, 둘이서 너무 재밌게들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거 아냐? 벌써 교대 시간이거든.”
“아, 어느새 시간이…. 그럼 고생하세요, 주세페. 저는 자러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Buonanotte~.”
“어, 나도 그 말 알아! Buonanotte, 케니스~!”
Buongiorno, Buonpomeriggio, Buonasera, Ciao! 쓸 일도 없었을 이탈리아어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냐는 주세페의 칭찬에 우쭐해진 키아라가 짧은 외국어 실력을 뽐냈다. 인사 나누기를 좋아하는 키아라는 십여 년을 배워도 일자무식에 수렴하는 이탈리아어 실력에도 인사말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앗, 이걸로 뿌듯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주세페의 장난에 놀라 깜빡했던 소식을 떠올린 키아라가 정신을 차렸다.
“주세페! 나 주세페한테 들려줄 말이 있었어!”
“응? 무슨 말일까?”
“잘 들어봐. 흠흠, uno, due, tre, quattro, cinque, sei, sette, otto, nove, dieci!”
주세페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원인은 물론 맥락 없이 치고 들어온 키아라의 이탈리아어 숫자 외우기 쇼였지만, 그가 놀란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었으니.
“이럴 수가, 키아라! 이탈리아어로 숫자를 셀 수 있게 되었구나!”
“히히~, 대단하지 대단하지!”
잠든 이들을 의식한 주세페의 조용한 박수 세례까지 받자 키아라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수년 전, 주세페가 이탈리아로 귀국한 뒤, 키아라는 자신을 위해 영어를 배웠다는 사촌을 위해 자신도 이탈리아어를 배워야겠다는 기특한 결심을 했었다. 생각만큼 공부가 잘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성과는 있었는데, 케니스와의 여정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어로 인사를 한 덕에 떠올랐으니 다행이었지. 주세페가 기뻐하니 키아라도 기뻤다. 역시 인사는 잘 하고 볼 일이다.
주세페 로시의 접근이 필요하다
“틀렸어요. 입술에 힘을 더 빼고, ‘ve’와 ‘vou’의 중간쯤 되는 발음이 맞아요.”
“여기서 더 빼라고요? 아아, 신이시여. 강렬한 악센트가 매력인 천상 이탈리아노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다니…!”
“못 하겠으면 관둬요. 내가 배워달라고 사정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로시는 시련 또한 달게 받아들이죠.”
최근 주세페는 오데트와 함께 불침번을 설 때 그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언어 자체에 관심이 생긴 것은 아니다. 주세페는 이미 영어를 제외하고도 프랑스어를 포함한 여러 외국어를 조금씩 구사할 수 있었는데, 할 줄 아는 말의 의미는 모두 비슷했다. 자신이 실력을 뽐내자 오데트는 물론이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케니스의 얼굴에도 사늘한 기색이 올라온 것을 알았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뭐, 언어의 목적은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온전히 전하는 것이니까 그에 충실했을 뿐이지. 주세페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그럼 제가 안다던 문장들도 발음이 잘못되었나요?”
“나쁘진 않았지만, 고칠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았죠.”
“이런, 맙소사. 이번 기회에 오데트 양이 교정해 주신다면 제 연애 사…, 아니, 삶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 로시가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관둬요, 뭘 또 거창스레…. 뭐라고 말했었죠?”
주세페가 대답 대신 양손 검지를 세워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깜빡이는 녹색 눈동자에 자신의 회색 눈동자를 마주 깜빡이던 오데트가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Tu as de beaux yeux.”
“오~, 원어민의 발음은 확실히 다르네요. 멋져요! 다음은요?”
“하여튼 과장은…. 흠흠, Tu me manques.”
“과장이라니요! 저는 진실만을 말하는 남자랍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Je t'ai…. 아니, 잠깐. 이거 일부러 시킨 거죠, 당신?!”
“아~, 하하. 부디 용서하시길.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여정의 도중은 물론 끝난 뒤에도 오데트 양으로부터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 들어보고 헤어지게 될 것 같아서 말이죠….”
“댁이 이딴 식이니! …까…!”
잠든 일행을 의식한 오데트가 뒤늦게 높아지던 목소리를 낮췄으나 주세페를 향한 눈초리는 여전히 매서운 모양새를 띠었다. 아니, 어쩌면 이전보다 더욱 사나워진 것 같기도? 얼마 전에 갑자기 쓰러졌을 때는 핀잔을 주기는커녕 입을 열지도 못해서 걱정스러웠는데, 부러 장난을 쳐 상태를 살펴보길 잘 했지. 컨디션은 완전히 회복된 것 같다. 열병이 아닌 역정으로 얼굴을 붉히는 오데트의 면전에서 주세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구나.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어서, 랑베르 씨가 제게 당분간 불침번 순서를 바꿔달라고 부탁하신 거였군요.”
“그렇게 천덕꾸러기 보는 눈으로 보지 말아 줄래? 가만 보면 그런 눈빛을 은근히 자주 보내, 나한테. 첫째라 그런가?”
“글쎄요, 제 동생을 이런 식으로 바라본 적은 없었는데요. 장난기는 있을지언정 착한 아이였거든요.”
“하하, 그럼 나는 나쁜 아이라는 뜻?”
“되도록이면 참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더 악화되었을 줄이야…. 저랑 얘기 좀 나누시죠, 주세페.”
주세페의 너스레에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은 채 케니스가 자세를 반듯하게 고쳐 앉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지난밤 자신이 키아라와 나눴다는 대화였는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어서 그것을 전해 들은 주세페는 무심코 스스로의 심장 부근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오라버니의 인간관계까지 걱정해 주다니. 감동에 젖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못 본 사이 훌쩍 커버린 키처럼 내면까지도 몰라보게 성장한 키아라의 기특함에 매몰되어 더 이상 케니스가 전하고자 하는 요지는커녕 목소리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동생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다니!
“…듣고 계십니까?”
“그럼, 듣고 있지. 우리 키아라의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곱다는 얘기잖아.”
“그 키아라가 걱정하지 않도록 두 분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얘기였죠.”
“그래, 그거.”
하여튼 둘 다 매사에 심각하다니까. 농담을 못 견뎌. 오데트만큼 자주는 아니었지만 케니스도 한 번씩 주세페를 향해 지금과 같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곤 했다. 짧은 한숨과 깊은 눈 깜빡임 한 번으로 주세페의 진지하지 못한 태도 대한 감정을 갈무리한 케니스가 발언을 이어갔다.
“이제 막 회복하신 분이잖습니까. 랑베르 씨에겐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뿐인 환경일 텐데, 이전보다 더욱 세심하게 배려해 드려야죠.”
“알지 알지, 우리 오데트 양 상태가 어떤지는. 근데, 왜 내가 배려를 안 하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거지?”
“제가 랑베르 씨로부터 불침번 파트너를 바꿔달라는 초유의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아, 그건 나도 장난이 과했다고 인정. 그치만 지금까지의 공을 없었던 일 취급하는 건 좀 억울하네!”
사람과 섞이길 좋아하는 주세페는 인생의 대부분을 집단에 속해 있었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소신으로 주변인과 부대끼며 살아왔다. 사랑하는 패밀리의 품이 아닌 급하게 조직된 팀이라 해도 다를 건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기도 전부터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오데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세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매일같이 잠꾸러기 아가씨의 곁을 지키고, 감미로운 노래로 아침을 열어주고. 음, 레이디의 체력을 고려하지 못해 부담을 드리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건 나만의 책임은 아니잖아?”
“…인정합니다.”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차도 구해서 여기까지 편하게 왔고.”
“정확히는 훔친 거죠.”
“아직도 따지기야? 아무튼, 너만 신경쓰고 있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라고. 나 오데트 양 좋아해!”
짧은 기간이나마 함께하며 살펴 본 바, 오데트라는 여인은 책상에만 붙어살았다고 전해 들은 대로 가녀리고, 유식하고, 무언가를 따지고 들려 할 때 가장 생기가 넘쳐 보일 만큼 예민한 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난 못해요,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라고, 회사와의 마지막 통신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호소하며 길길이 날뛸 때는 앞으로 어쩌려나~ 싶었지. 파티션 뒤로 숨어버리면 그만이었던 생활을 했던 탓인지 특히나 언짢은 사람을 견디는 법을 몰랐다. 때문에 주세페의 허랑방탕함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는데, 주세페는 그에 전혀 괘념치 않고 오데트를 향해 한결같은 호의를 베풀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그가 가족을 제외한 세상 모든 여성에게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바람둥이인 탓도 있었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 덕이 컸다. 기왕이면 잘 지내는 게 좋지. 역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데트가 자신을 혐오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주세페 또한 그가 자신과는 영 맞물릴 수 없는 기질을 가졌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아마도 처음 경험해 보는 것임이 분명할 야영에도, 마찬가지로 익숙하지 않아 보이는 산행에도, 심신 양면으로 따라오기 버거운 티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오데트는 여정 자체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리감과 호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다니, 볼수록 신묘한 매력을 지닌 아가씨라니까. 그는 주세페가 삼십 평생을 살아오며 본 중 가장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가녀린 육신 안에 강철같은…. 아니, 비유가 아쉬운데. 강철보다는 용수철? 겉보기엔 이리저리 휘청거리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본분을 잘 해낸다는 의미에서. 하여튼 간에, 알아갈수록 멋진 사람이잖아? 하루종일 투정을 부리다가도 관심 분야에는 순식간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귀엽기도 하고. 싫어할 이유가 없지! 잘 지내고 싶어, 진심으로.”
주세페의 솔직한 고백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케니스가 주세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뭐지? 그 묘한 눈빛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엔 주세페의 행실을 보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걱정이라니?”
“당신의 이성에 대한 과하면서도 가벼운 관심이 랑베르 씨를 향한다면, 그래서 당신에게 질린 그가 팀을 이탈하게 된다면 어쩌나, 하고요.”
“하, 하하.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이래 봬도 모든 관계에 진지하게 응하고 있거든?”
느낀 바를 저렇게나 숨김없이 말할 줄이야. 까다로운 아가씨에겐 통하지 않은 나의 매력이 옆에 있던 도련님에게는 먹혔구나. 케니스가 자신과의 거리감을 부쩍 좁혀온 것을 의식하자 주세페의 입에서 헛웃음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그의 갑작스러운 맞고백에 기가 막혔기 때문인지 어떤지는 아리송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기분이 나빠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관계의 전향적 발전은 언제 겪어도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단언하셨으니 저도 더는 입을 대지 않겠습니다만, 이 이상 미움을 사는 짓은 가급적 삼가 주세요.”
“에이, 오데트 양은 나 안 미워해.”
“며칠 전에 걷어차이는 거 다 봤습니다.”
“아차, 그것도 사과해야 되네.”
“…부디 삼가 주세요, 부디.”
케니스의 눈빛에 다시금 냉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뭐, 형식적인 약혼 말고 심장이 타오르는 듯한 사랑은 해봤을까 싶은 바른 생활 도련님이니 복잡한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도 있지. 케니스의 성장 환경에 대한 추론을 마친 주세페가 뒤이어 어떤 결심을 했다. 안 그래도 여타 근심이 많을 리더의 짐을 한술이나마 덜어주자고. 어디, 우리 아가씨가 좋아한다던 꽃이 뭐였더라? 지나가듯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기 위해 주세페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모쪼록 내일 지나갈 작은 마을에 꽃집이 있기를 바라며.
_To be continude.
사담
주세페 출시되고나니 캐해도 컾해석도 재정립되고
공식이 준 오데트 쓰러짐 모먼트가 넘 좋아서 그동안 이것저것 떠들었던거 모아서 써보고 싶었고
결정적으로 트친님과의 썰핑퐁이 넘 즐거웠음(감사해요 팜쥬님💕💕💕
주세페가 11월 말에 뜰것같길래 11월 초부터 붙잡고 있었는데
출시되고나니 겜하기 바빠서 밍기적거리고(주세페 ㅈㄴ 재밌음,,,
12월 초부터는 나라에 큰일이 터져서 밀리고(아직도 정리 안됨,,,
게다가 자세한 플롯 정해놓고 시작한것도 아니다보니 계속 고치고 밀리고 점점 길어지고,,,
감당 안될것같아서 결국 상하로 끊었습니다 이런건 첨해보네요
오데트 분량은 좀 더 다듬어서 하편에,,,
tmi
첨부터 액자배달조 각자의 시점으로 1인1파트 분배하자! 하고 썼는데
공식의 쭈 에피소드가 그런 형식이어서 헐,,,싶었음
민첩하지 못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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