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데트/액자배달조] 두 번째 첫인사
8120자. 주세페에게 사과하는 오데트(CP) + 액자배달조.
출처 | Zaparowana
이것은 오데트 랑베르가 일행과 좀 더 가까워지게 된 최근 며칠 간의 기억이다.
말할 수 없어
부드럽게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새소리. 눈꺼풀을 가볍게 두드리는 햇살. 그리고 상쾌한 새벽 공기가 오데트의 잠을 깨웠다. 오늘도 거짓말 같은 아침이 밝아왔다. 오데트는 근 몇 주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오랜 격언을 마음 깊이 통감하고 있었다. 생면부지들과의 노지 생활에 적응하다니. 몇 주 전의 자신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라며, 스스로의 기행에 감탄 섞인 한숨을 내뱉은 오데트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여정을 떠난 이래로 가장 개운하게 눈을 떴다. 컨디션은 완벽하다. 다만 한 가지. 매일 아침 내려 마시던 커피를 안 마신 듯한 허전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인정하기 싫지만 아마도….
“이런, 제가 숙녀분의 단잠을 깨워버렸나요? 더 주무셔도 되는 시간인데.”
…저 인간이 원인이겠지. 몇 자루나 되는지 모를 단검을 늘어놓고 하나하나 닦고 있던 남자가 오데트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쪽 때문 아니에요.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요?”
“잠시 정찰이요. 레이디의 호위는 이 주세페 로시가 맡고 있었으니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이 여정이 끝나는 순간까지도요.”
물론,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 그 이후로도. 점입가경의 대사를 곁들인 윙크를 받은 오데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순 정신이 아득해진 건 치사량을 넘어선 주세페의 느끼한 헛소리에 대한 방어이기도 했지만, 한량에게 익숙해지다 못해 안정감을 느낀 스스로에 대한 기함이기도 했다. 기름칠 한 말 몇 마디 못 듣고 눈떴다고 루틴을 빼먹은 듯한 찝찝함을 느끼다니. 극한의 환경에 떨어져 정신이 나가버린 게 분명하다. 이젠 울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역시 아직 잠이 부족하신 거 아닌가요?”
“전혀요.”
“적응을 잘 하셨나 싶었는데, 요 며칠 또 피곤해 보이는걸요. 아니면 어딘가 불편하다거나? 숨기지 말고 말해주세요. 돕고 싶어요.”
불편하다거나, 라…. 오데트는 생애 첫 야영과 행군에는 어느 정도 적응을 끝마쳤다. 그러나 주세페의 말마따나 최근 새로운 종류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고, 온종일 붙어있는 일행에게 그것을 감출 수 있을 만큼 포커페이스에 능숙하지는 못했다. …낌새를 차린 것 같은데 그냥 확 말해버릴까? 마침 둘뿐이기도 한데?
“…사실은, 그….”
그래, 말하자.
“그?”
결판을 짓고, 홀가분해지는 거야…!
“…더 자고 싶어요.”
말할 수 있을리가!
“그럼 좀 더 안쪽으로 모실까요? 지금 계시는 자리는 볕이 들기 시작했거든요.”
“그러죠!”
주세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낌새를 보이자 오데트가 황급히 이부자리를 싸 들고 가까운 그늘로 발걸음을 부산히 옮겼다. 뒤통수 너머에서 오는 의아함 가득한 시선을 의식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몸을 누였다.
“…깨워주세요, 못 일어나면.”
“물론이죠, 레이디. 짧은 여행이 되겠지만, 꿈나라에서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아,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하려던 말은 한 음절도 꺼내지 못하고 허둥지둥거리기만 했다. 다행히도 주세페가 자리를 뜨려 하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것에 안심하며 오데트가 긴장으로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예정에 없던 등반 도중에 쓰러진 후, 일행 모두가 오데트를 더 챙겨줬지만 가장 섬세하게 신경을 써준 건 주세페였다. 같은 비능력자라는 공감대 때문인지, 그저 여자 보기를 꽃같이 하는 한량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데트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면 주세페는 분명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거나, 침구를 손수 옮겨준다거나 하는 친절을 보였을거다. 최악의 경우, 둘 다이거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갑갑해진다. 일어날 것이 자명했던 미래가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오데트는 주세페의 친절을 가만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 특히 그에게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생각을 덜 해볼까
“…미안해.”
“응? 뭐가요?”
뭐냐니…. 힘이 빠져 고개를 푹 숙이니 정수리를 익혀버릴 듯이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금방 고개를 들어 올린 오데트가 앉은 채로 뭉그적대며 모닥불에서 몸을 살짝 물렸다. 장작을 너무 많이 넣었나? 혹시라도 해가 뜨기 전에 불씨를 꺼뜨릴까 봐 주변에 있던 잔가지를 모닥불에 모조리 집어넣었다. 오데트는 생각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것도 부정적인 쪽으로. 키아라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수많은 경우를 떠올리고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맞닥뜨린 상황은 오데트의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났고, 그로 인한 허탈함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어이가 없어서 흘러나오는 헛웃음을 참아낼 의지조차 사그라들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였다.
“장난이구나!”
그것을 어떻게 이해한 것인지 키아라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오데트를 놀랬다. 렉스인지 렉시인지 하는 친구가 장난을 들키기 전에 항상 그런 웃음을 지었다며, 오데트가 드디어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기쁘다는 둥 재잘대기를 멈추지 않으며 오데트 주변을 정신없이 배회했다. 키아라에겐 붙잡을만한 옷자락도 없었지만, 애초에 운동치인 오데트가 날다람쥐처럼 재빠른 그를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슬슬 올라오던 짜증을 억누른 오데트가 키아라가 그랬듯이 벌떡 일어나자, 놀란 키아라가 그제야 달음박질을 멈췄다. 곧이곧대로 소리를 질렀다간 다른 사람들까지 깨워서 일대일이 아닌 공개 사과쇼를 해야 했겠지. 키아라는 이런 식으로 아무 일이 없을 때에도 사람을 화나게 만들곤 했다.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뜬 것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 같아 기가 찼지만, 잘 참아냈다. 키아라를 향한 마인드컨트롤에 성공한 스스로를 칭찬하며 오데트가 못다 한 사과를 이어갔다.
“…내가 그동안 너한테 무례하게 굴었잖아. 기분 나빴을 텐데, 사과할게.”
“그랬어요? 잘 모르겠는데…. 엊그제랑 그 전날이랑 그 전전날에 소리 질렀던 거 말이에요? 또 그 전날에도? 아, 처음 만났던 날에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키아라는 또 가끔씩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게 굴곤 했다.
“괜찮아요! 오데트는 항상 피곤한 상태잖아요. 그럼 짜증이 더 잘 날 수가 있다고 주세페가 이해해줘야 한댔어요.”
“그 사람이? …또 다른 얘기는 안 했니?”
“그 다음은 내가 얘길 이어갔죠. 오데트를 피곤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고.”
“…그래서, 결론은 나왔고?”
“그럼요! 오데트는 일단 체력을 길러야해요. 그러려면 많이 먹고 많이 움직여야하고요. 내가 도와줄게요!”
일행들과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지낸 것도 벌써 수 일이 지났다. 오데트는 여전히 눈치 없고 단순무식한 키아라가 자신과 맞지 않고, 세상의 명운이 걸렸다는 이 임무에도 어울리지 않는 인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긍정성과 활기는 오데트가 비현실적인 하루하루를 견디는데 꽤나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키아라는 항상 타인과 진심으로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나 같으면 프로젝트에 기여도도 낮은 주제에 성질만 내는 팀원이 있다면 절대로 마음 써주지 않았을 텐데. 키아라의 그릇이 어떤지는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자신의 것은 소스볼보다도 작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데트가 큰 자괴심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피로감에 키아라가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악의가 없단 걸 알고 나니 열 번은 났을 화가 여섯 번 정도로 줄었다. 이 정도면 견딜만하지. 말한들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원래 잘 안 먹어요? 음식이 입에 안 맞나? 내가 맛있게 먹는 법 알려줄까요?”
“하. 미국인이 프랑스인한테 할 말이니, 그게?”
“미국인이 왜요? 음~, 외국인한테는 조언하면 안되는건가? 그렇다면 케니스도 못 할테고…, 주세페도? 그럼 오데트한테 아침 식사를 맛있게 하는 법은 대체 누가 말해줄 수 있죠?!”
키아라의 화법은 그의 능력을 닮아 있었다. 대화 중 어느 포인트에서 빠져나가고 또 어디서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신출귀몰한 말솜씨. 이런 식으로 흘러갈 대화가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데트는 평소와 달리 키아라의 말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말로 하지 말고 조용히 만들어만 주든가.”
“앗, 그런 방법이!”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기 때문인지 난데없는 발화에 적응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화가 필요해
“…솔직히, 저 사람이 나한테 학을 뗀대도 할 말은 없어.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지…. 어쨌든 당분간은 여정이 계속될 테니 최대한 원만하게 수습하고 싶거든? 근데 저 인간은 능글거리기만 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어, 감이라도 와야 운을 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랑베르 씨.”
“아니, 애초부터 나한테 벽을 치고 있었던 거라면 어쩌지? 이렇게 나 혼자 숨 막히는 상태로 계속 가야 한다면? 한 번 의식해버린 이상 신경 끌 수가 없는 성격이란 말이야, 나는!”
“랑베르 씨?”
“본인 말로는 그동안의 내 태도에 전혀 상처를 안 받았다는데 그게 말이 되니? 사람이 그렇게 단순할 수가 있을까? 아아, 저 아무 생각없어 보이는 태도가 진짜인지 어떤지 전혀 파악이 안돼!”
짝-! 눈앞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박수 소리에 놀란 오데트가 하고 있던 두 가지 행동을 모두 멈췄다. 공황에 빠져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넋두리가 막히니 밤의 숲에는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아니, 가만히 집중하면 몇 걸음 뒤에서 잠을 자고 있는 두 사람의 숨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목소리가 꽤나 커졌었는데, 다행히 깨어나지는 않았나. 오데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던 양손을 얼굴로 가져가 마른 세수를 했다. 그렇게 그가 평정을 찾을 때까지, 케니스는 조용히 오데트를 지켜보며 기다려주었다.
“…항상 못 볼 꼴만 보여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여러 가지로 신경 써줘서.”
“그런 말씀 마세요. 동료로서 당연한 일인 걸요. 그리고, 랑베르 씨가 팀에 합류해 주셔서 저희 모두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모르실 겁니다.”
사과를 하려던 건 맞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키아라에게 휩쓸린 덕에 어제의 오데트는 주세페에 대한 근심을 하룻밤이나마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상태의 문제를 잠시 잊어본들, 불을 끄지는 않고 불이 난 방의 문만 닫아두는 꼴이 아니겠는가. 케니스와의 대담에 저도 모르게 닫아뒀던 문을 연 오데트는 걱정의 화마에 휩싸여 하소연이라는 비명을 원 없이 지르고야 말았다. 다행히도 케니스는 그 방면의 훌륭한 소방관이어서, 큰불은 한순간에 진압되었다. 그의 그런 면모가 능력과 관련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키아라한테 사과할 때는 어떠셨나요?”
“어제는…잠깐, 설마 내가 그 애랑 얘기하는 거 들은거니?”
“음…, 키아라 목소리에 잠깐 잠이 깼었거든요.”
어젯밤, 담소를 끝마친 오데트는 키아라에게 한 가지 신신당부를 했었다. 모두에게 직접 사과를 할 예정이니, 오늘 나눈 대화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한밤중에 일어났다는 사실 또한 비밀에 부쳐 달라고. 미리 알게 되면 민망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과도 받았겠다, 즐겁게 대화도 나눴겠다. 오데트와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한 키아라는 자신감 넘치는, 어떻게 보면 결연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으로 오데트에게 맹세했었다. 제 사촌은 물론이고 케니스가 물어봐도 절대로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겠노라고. 키아라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키지도 못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본의 아니게 엿듣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아니, 좀 창피하긴 한데…. 저 사람이 아니라 네가 들었다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
“들은 김에 여쭤보자면, 키아라랑 꽤 친해지신 것 같던데요.”
“뭐…. 그렇게 됐어, 놀랍게도….”
오데트는 그동안 키아라는 물론이고 케니스와도, 지금처럼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평시에도 낯선 타인과의 대화를 그다지 즐기지는 않는 편이니, 살면서 가장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에 그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생각을 내려놓긴 했었지만 좌우지간 신경질을 내지 않고서 대화를 나눠본 결과, 오데트는 키아라가 생각보다 좋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상대를 알아갈 시간은 충분했다. 갑작스레 험난한 환경에 처한 것을 핑계 삼아 뾰족한 편견을 숨기지 않았던 건 오데트 자신이었다.
“주세페와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예요.”
“아니, 말은 고마운데, 딱히 그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은 건 아니거든?”
“하하, 이해했습니다. 어쨌든, 랑베르 씨의 걱정이 잘 해소되기를 바랄게요.”
케니스와 몇 차례 대화를 나눴을 때, 오데트는 주도권이 어느샌가 그에게로 흘러가 있는 지금 같은 상황을 종종 경험하곤 했다. 분명 사과하려고 말을 붙인 거였는데 어쩌다가 면담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린 거지? 스스로 대화를 이끌고자 한 건 아니었다 해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케니스의 흐름에 따라가게 된달까. 이 현상을 딱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세련된 리더십을 지각하면 오데트는 한 번씩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오늘의 건설적인 대담을 통해 첫 만남부터 높은 편이었던 케니스에 대한 오데트의 신뢰도는 더욱 높고 단단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와 인간적으로 친해지기는 힘들 것 같다는 막연했던 느낌 또한 구체화되었다.
“원래 갈등을 중재하는 걸 즐기니?”
“네. 몇 안되는 취미 중 하나입니다.”
얘도 정상은 아니구나. 역시 대화는 여러 번 나눠 볼 필요가 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악몽은 좀 잊으셨나요?”
“네, 뭐…. 덕분에요.”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주세페가 만면에 미소를 띠자, 오데트가 그를 흉내 내려 노력하며 어정쩡히 마주 웃었다. 수 십분 전, 마지막 사과만을 앞둔 오데트는 불침번을 서던 주세페에게 말을 붙일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악몽을 꿔서 깼다는 오데트의 급조된 핑계를 들은 주세페는 그를 자신의 옆자리로 초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어난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 오데트는 부름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대면하자니 사무치는 어색함에 기계 같은 반응만이 튀어나왔고, 평소와 다른 자신의 언동에 주세페가 의문을 품는 것까지도 눈에 보였다. 아, 이제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다시 자러 갈까. 오데트는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뒤이어 들려온 주세페의 고백에 오던 잠마저 달아나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한밤중에 단둘이서 조용히 얘기하니까 분위기 있고 좋은데요? 저랑은 언제쯤 담소를 나눠주실는지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네? 저랑은…, 이라면?”
“키아라랑 케니스랑은 즐겁게 시간을 보내신 것 같던걸요.”
“댁들은 왜 이렇게 잠귀가 밝은 거예요?!”
“청아하고 고운 레이디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자다가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요.”
“진지하게 들어요!”
오데트는 주세페를 대할 때, 다른 일행에게선 느낄 수 없는 독자적인 불편함을 느꼈다. 어디서 배워 온 건가 싶을 정도로 마르지 않는 저 느끼한 멘트도 멘트였지만, 항상 능글거리는 미소 뒤에 숨겨진 그의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표정에 날것의 감정이 잘 묻어나지 않는 건 케니스도 마찬가지인데도 그를 대할 때는 유사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뉴욕의 왕자와 달리 주세페는 제 가족밖에 모른다는 마피아니까. 가볍게 여자 꼬시기나 좋아하는 한량이니까. 그래서 외부인 여자를 진심으로 대할 리가 없으니까?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죠?”
하지만 오늘 본 주세페는 악몽을 꿨다는 일행을 달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아직은 쌀쌀한 밤공기를 염려해 담요를 가져다 어깨에 둘러줄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오데트도 이제는 안다. 그에 대한 대부분의 판단이 자신의 편견이고 고집이었음을. 가까이서 불을 오래 쬔 탓일까, 오데트는 눈이 점점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악몽 같은 거 안 꿨어요.”
“하하, 그건 다행인 일이네요.”
“그리고…, 그래요. 당신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동안의 태도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과정임을 알았지만, 미성숙한 자신을 마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짓을 한 번 더, 그것도 가장 말을 꺼내기 힘든 상대한테 해야 한다니. 오데트는 오랜만에 울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기분이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오데트는 주세페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 것을 확신했다.
“얼굴 안 보고 얘기해도 되죠? 예의가 아닌 건 아는데, 지금 너무 창피하거든요.”
역시 불을 오래 쬔 탓인지 얼굴이 뜨거웠다. 확인해 볼 것도 없이 발개져있을 양볼이 괜스레 더 오데트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예의를 차리고 말고가 대수랴. 어깨에 둘러져 있던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오데트는 오래도록 혀끝을 떠나지 못했던 말을 입술 너머로 내뱉을 수 있었다.
“미안해요.”
“음, 어떤 점에서요?”
“그동안 당신을 함부로 대한 거요. 말도, 행동도…. 설령 사실이래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데. …아니,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아무튼!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줬다면, 미안해요. …진심이에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놈의 진실의 입! 그렇지 않아도 서툰 오데트의 말치레는 긴장을 하면 더욱더 형편없어지고는 했다. 답지 않게 낙관한 탓에 마주한 절망이 전에 없이 괴로웠다. 어색함에 숨 막히는 단체 생활을 하게 될 미래의 자신에게 오데트가 이른 애도를 표했다.
“이제 얼굴을 마주해도 될까요?”
“…꼭, 그래야 하나요?”
“어, 설마 이렇게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그냥 자러 가실 건 아니죠? 그럼 정말로 상처가 될 것 같은데….”
주세페의 능청스러운 애걸이 은근하면서도 깊게 오데트의 양심을 찔러왔다. 마지못해 얼굴을 거의 뒤덮고 있던 담요를 살짝 내린 오데트가 지근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한 탓에 일순 흠칫거렸으나, 물러나지는 않았다. 주세페는 오데트를 대할 때 대부분의 순간을 싱글싱글 웃고 있긴 했지만, 지금의 미소는 평소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렇게 솔직한데 왜 여태 몰랐을까? 오데트는 이제야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주세페는 오데트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내가 사과할 거란 거, 진작에 알고 있었죠?”
“며칠 전부터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죠.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더 로맨틱한 말일 줄 알고 기대했었는데….”
“아, 제발. 그런 농담 좀 하지 마요, 진짜.”
오데트가 진저리를 치더니 주세페로부터 멀찍이 몸을 물렸다. 그래, 그가 좋은 사람인 건 잘 알았다. 하지만 날라리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데트는 주세페의 저런 징글맞은 점 때문에 그가 자신과 상극이라 느꼈고, 그것은 일이 어떻게 되어 그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더라도 평생 변치 않을 감상이라 확신했다.
“오데트.”
아, 이런 식으로 함부로 선을 넘는 점도. 왜 허락도 안 했는데 마음대로 이름을 부르는 걸까? 갑자기 닥쳐온 비현실적 나날에 휘청이던 오데트는 주세페에게 기본적인 거리감에 대한 지적을 할 시기를 한참이나 놓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정정을 요구하자니 스스로의 꼴만 우스워지는 것 같아 포기했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산란한 때에는 다시금 짜증이 올라오곤 했다. 그래도 평소와 달리 머리가 지끈거리지는 않는 것을 보니 그의 무례에도 적응이 되었나 보다. 깊은 한숨 한 번으로 감정을 갈무리하는데 성공한 오데트가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샌가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선 주세페와 시선이 맞았다. 그가 오데트를 향해 내민 건 빈손바닥이었다.
“제대로 인사 나눠요, 우리.”
그 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오데트는 주세페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인사를 하겠다고 내민 손바닥을 살짝 돌려잡아 악수로 바꿔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우회적 거절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상대의 거절을 단번에 수긍하는 편인 오데트는 이런 점에서도 주세페를 이해하지 못했다. 기어코 그 인사를 다시 받아내겠다고? 이제 와서? 오데트가 그의 손과 눈을 번갈아 보며 기막히다는 눈빛을 보냈으나, 주세페 또한 목소리를 내는 대신 그윽한 눈웃음을 흘리며 오데트를 얼렀다. 이번에는 그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세페에게 마음의 빚을 져버린 오데트는 끝내 두 번째 거절에 실패했다.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릴게요. 오데트 랑베르 양.”
오데트가 내민 손을 가볍게 맞잡은 주세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며칠간 잠을 덜 자서 쌓인 피로가 뒤늦게 몰려온 걸까? 오데트는 제 손등에 한순간 닿았던 것이 코끝인지 입술인지도 구분을 하지 못했다. 온몸의 신경이 무뎌진 와중에 분명하게 느껴진 단 하나의 감각은 은근하게 무거워진 심장박동이었다. 쿵-. 쿵-. 생경한 울림이 잔잔히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던 오데트의 심장이 갑작스레 존재감을 드러내는 경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드물게 운동을 하거나, 갑자기 낯선 상황에 처하거나. 가만히 앉아있던 상황이니 후자겠지. 이제야 파악했다고 생각한 주세페가 평소와 달리 진중한 태도를 보이니 생소해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인과를 이해했다고 해서 박동이 가벼워지지는 않았지만, 근 며칠간 적응이라는 행위에 자신감이 붙은 오데트는 그것에 큰 불편을 느끼지도 않았다.
“…이제야 외웠네요? 내 성씨.”
“어라, 알고 계셨나요? 이름처럼 백조의 호수를 떠오르게 하는 그대의 아름다운 자태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서 말이죠. 성씨까지는 미처 외우질 못 했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참 나, 말은 잘 해.”
오데트는 이날 밤 여정을 떠난 이래, 어쩌면 인생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홀가분한 마음에 기약 없이 미래를 낙관했다. 그래, 이 또한 적응되리라.
사담
마지막 글 쓴게 벌써 반년 전이네요 그림에 재미들려서 그리다보니 어느새,,,
주데트땜에 다시 그림 그리고 또 다시 글도 쓰게 되었습니다
지난 글이 써본 것 중 최대 분량이었는데 또 갱신해버렸네요 대박임,,,
이번건 대사가 많아서 그런 것 같긴 함 ㅋㅋ
주세페도 출시확정이라하고 선공개 영상에서도 주데트 떡밥을 엄청나게 던져줘서
솔직히 그 전에는 관심씨피 정도였는데 애정도가 쭉쭉 올라버렸다네요 죽도록 사랑해,,,
4월에 첫 공개 되었을때랑 캐해도 꽤 바뀌었어요
오데트>주세페 방향은 못미더워한다는 언급이 꽤 나왔었는데 반대는 “예민해보이는 여자”라는 언급 정도밖에 없어서 그거 기반으로 쌍방 약혐관? 쭈가 데트를 싫어하진 않더라도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비즈니스 관계? << 이런거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공개 영상 보니까 주세페가 너무나도 이탈리아 남자였고,,,,,,,,,,,,(할많하않
주세페 대사 쓰기가 너무 힘들었음 느끼한 멘트가 떠오르질 않아서
게다가 오데트가 대놓고 막말을 너무 심하게 하더라구요 못미덥고 싫은건 알겠는데 ㅋㅋㅋㅋ
오데트가 주세페와도 키아라와 케니스와도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써본 글입니다
목숨걸고 으쌰으쌰 헤쳐나가야하는데 친해지는게 오데트한테도 좋겠죠
오데트 파이팅
힘내서 친해져주길 특히 주세페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