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황혼녘

어느 여행자에게

끝내 부치지 않을 글들

6월 첫째 주 금요일 *

친애하는 당신에게,

일기를 쓰듯 편지를 쓰기로 했어요. 사실 이걸 편지라고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지만요. 당신에게 말을 걸듯 쓰고는 있지만, 당신이 정말로 이 글을 읽을 날은 가급적 오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부치지 않을 편지를 누군가 - 이 경우에는 당신이 - 읽으리라고 상정하면서 쓰는 건 참 묘한 기분이군요.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사적인 편지를 쓰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요. 서신은 나에게 공적 업무의 통로 이상이었던 적이 없잖아요.

내가 당신과 얼마나 빠르게 가까워졌는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내 속을 터놓았는지를 생각하면, 내가 당신 이외의 사람들과 어떻게 거리를 뒀고 또 얼마나 많은 비밀을 안고 살아왔는지를 당신은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당신이 그날 그 회랑에서 내 인생으로 걸어들어오기 전까지는 제법 비밀을 잘 지키면서 살아왔거든요.

이미 몇 번 얘기했지만, 그때 나는 두려웠어요. 아마 당신과 비슷한 이유로 그랬던 것 같아요. 나는 대전쟁을 꽤 가까이에서 목도했고 능력자들의 존재 또한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여러 갈등도 전부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고 있었고요. 그들을 찾아가거나 사태 해결에 개입할 생각을 굳이 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첫 번째 거대 일식 전부터 이곳에 있었고 이미 크게 한 번 상처를 입은 바 있어요. 20세기 초반에 접어들어서까지도 그때의 기억으로 길게 침잠해야 했죠. 그랬기 때문에 내 존재를 감추고 살아온 시간이 그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아요.

나는 준비가 안 됐었어요. 자기파괴적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만 했죠. 조금 더 빨리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했더라면 회복 또한 빨라지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지만, 그때의 내가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면……. 글쎄요, 나 이전에 내 주변인들에게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네요. 우울함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바닥을 찾기란 쉽지 않은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숨어 왔어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고요. 능력을 숨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굴거나, 적어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날 찾는 사람이 없게끔 치밀하게 행동했어요. 그때의 나에게는 갈등 속으로 뛰어들 여력이 없었으니까.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한 걸음 벗어난 채로, 마치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서 자기 자신을 갈무리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벅찰 때가 있었어요. 1832년 여름, 역사의 부름을 받고 죽음의 눈동자를 조용히 응시하던 내 친구들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힘들 때가 많았어요. 나는 왜 그때 거기서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는지, 아니, 왜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는지 고민한 적도 있었고.

다들 나를 알지 못했던 것도 당연한 셈이죠. 이 세대, 그리고 그 이전 세대에도, 나는 갈등을 부러 피해 왔고 그랬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날 일이 없었으니까요. 도망친 곳에서 찾은 안식은 물론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일시적이고 또 불완전했어요. 언제고 부서질 것처럼 불안했던 점은 말할 것도 없을 테죠. 우리가 그 불안함을 공유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당신에게 마음을 내어 주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요컨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던 거예요. 이것도, 저것도요. 나는 분명히, 언젠가는 긴 도피를 끝내고 전장의 경계에 발을 딛었을 거고, 또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했을 거고, 그래서 다치게 되었을 거예요. 상처가 크든 작든 다치는 일은 분명 생겼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도 나는 여전히 나였을 테니까. 오래 도망칠 수 없었을 테지만, 설령 계속해서 도망쳤더라도 행복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내 사랑, 언젠가 당신이 이걸 읽게 된다면, 부디 나의 부재가 당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을 시작으로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알리기로 한 것은 전부 나의 선택이에요. 도망치지 않고 마주보기로 한 것도 나의 선택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해 준 것 혹은, 당신이 내게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들. 빠짐없이 나의 선택이에요. 당신은 지나치게 사려 깊어서, 내게 함부로 - 심지어 애정조차도 - 요구한 적 없으니. 전부 나의 선택이었고, 나만의 선택이었어요. 어쩌면 조금은 이기적일 정도로 그랬죠. 내 마음이 너무 커서, 내 삶에 당신이 너무 큰 무게로 닿아서, 그걸 어떻게든 감당해 보려고 했던 선택들이니까.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나만이 질 수 있어요. 책임에 따르는 대가는 나만이 치를 수 있고, 또 나 혼자 치러야 하는 거예요. 당신이 아니라 내가, 혼자서, 오롯이. 무엇이 됐든 간에 그건 내 몫이에요. 그러니 나 때문에 시달리지 말아요. 책임감에도, 죄책감에도, 그 무엇에도. 당신은 그저 당신이 바랐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자유로우면 돼요. 날 위해 무언가 해 주고 싶다면 그것만이 최선이에요.

아, 이런. 너무 비장해지고 말았네요. 유월이라 그렇다고 생각하고 한 번 넘어가 줄래요? 그때의 심상들은 분명 과거에 두고 나아온 게 맞는데, 사람에게 향하는 애정이라는 건 달라진 바가 없다 보니 자꾸 유난스러워져 버리고 마네요. 민망하게도 말이에요.

그렇지만 준비되지 않은 것보다는 뭐라도 써서 남겨 놓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펜을 들었어요. 행여 달갑잖은 상실이 우리를 덮쳐 오더라도 당신은 나보다 온전할 수 있도록. 물론 최선의 시나리오는 이 글이 당신 손에 들어가지 않고, 어느 평온한 토요일 오후에 벽난로 속으로 밀어넣어지는 경우겠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 무엇이 어떻게 되든 시간이 당신에게 다정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랫집 사람들은 이 시간에 드나들지 않으니 아마 당신이겠죠? 들키지 않고 저녁 인사를 하려면 편지는 이만 넣어둬야겠어요. 곧 봐요, 릭. 기회가 되면 또 편지할게요.

언제까지고 당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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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6월 7일 토요일


6월 10일

당신에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조금 망설이다가 펜을 들었어요. 지난 금요일에 문득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놔 놓고는, 편지를 조금 더 써 볼지 말지 한참 고민했거든요. 아무리 유월 초라지만 내용이 너무 무거워진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요. 그렇지만 지난번 편지 앞머리에 내가 "일기를 쓰듯 편지를 쓰기로" 했다고 적어 뒀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은 더 써 보려고 해요. 일기는 편지보다도 더 내게 있어 낯선 글이지만, 사람들이 다들 쓰고 또 쓰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어련히 있겠거니 하고 답잖게 굴면서 말이에요.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나는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월요일을 보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하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해도 될지 몰라요. 물론 그땐 금요일이었고, 겨울이기도 했고, 점심 시간 즈음에 당신이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이것저것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날씨는 슬슬 더워지고 있는데 차는 여전히 따듯한 게 좋아서 오후 네 시쯤 뜨거운 얼 그레이를 한 잔 마셨어요. 사무실에 비스킷 선물 들어온 게 있어서 두어 개 곁들였고요. 먹어 본 적 없는 베이커리 제품인 것 같은데 커피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당신 생각이 났어요. 퇴근길에 사서 들어갈까 했는데 오후 업무가 바빠서 깜빡하고 말았네요. 내일 출근하자마자 상표부터 눈여겨보려고요. 당신 입에도 맞을지 궁금하거든요.

동료들은 언제나와 같이 동료들이고, 일도 언제나와 같은 일이에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까 굳이 길게 쓸 필요까지는 없을 테고요. 이 직업의 - 그러니까, 학예사로 일하는 것의 - 좋은 점 중 하나는, 아마 "언제나와 같은 일"이 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부분일 거예요. 내 손을 거쳐 가는 작품들은 주기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바뀌고 또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죠. 개중에는 복원이 필요한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이야기들을 내가 알아내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아요. 그게 회화가 되었건 조각이건 간에 말이에요.

더 알고자 하는 것, 더 알아내고자 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것. 여느 학자가 갖춰야 할 자질 같죠? 실제로도 그럴 거고요. 대부분의 경우에 학예사라고 줄여 부르긴 하지만 이 업의 제대로 된 명칭은 학예'연구'사니까 연구와도 떼어낼 수 없다고 봐야겠죠. 계속해서 읽고, 작품을 분석하고, 문헌을 뒤지는 게 예삿일인 것도 당연하고.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보통 들어오는 질문은 보통 정해져 있는데, 당신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부터가 한 적 있는 질문이니까요. 

기억하나요? 맞아요. 뭔가 하나를 붙들고 파고 들어가는 걸 좋아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왜 하필 미술품이냐는 질문이 대다수예요 - 그것도 여기까지 말을 꺼낼 수 있었다는 전제 하지만요. 달리 말하면 왜 다른 학문이 아니라 이 길을 가기로 했냐는 건데 아쉽게도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좋아서, 가 아마 제일 정확한 대답일 거예요. 그냥 그래서. 별 이유 없이 마음이 가는 것들이 때때로 있잖아요.

아, 물론 그냥 그렇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면 뭐라도 가져다 붙일 수는 있겠죠. 단적인 예시는 내 능력일 테지만 내가 시간을 뛰어넘을 줄 안다고 온 세상에 광고를 할 마음 같은 건 없으니 별 쓸모가 있지는 않겠네요. 그래도 당신에게는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것도 혹시 기억하나요? 당신이 내게 왜 일을 하냐고 물어봤을 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말이에요.

당신이 기억하고 있다면 기쁠 테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조금 섭섭할지도 모르겠어요. 긴가민가하다면, 글쎄, 당신을 놀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죠. 날이면 날마다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다음 편지쯤에 기분이 나면 뭐였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 줄게요. 아니면 몇 시간쯤 더 기다렸다가 당신이 돌아오면 물어보든지. 어떻게 할지는 차를 한 잔 하면서 생각해 볼게요. 이 편지를 읽을 즈음의 당신이라면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이미 알고 있겠죠?

당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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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목요일

내 사랑,

목요일 저녁은 대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걸까요?

기다림이라는 게 으레 다 그렇다지만 목요일은 유난히 더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것 같아요. 주말에 가까운 듯 가깝지 않아서일까요? 이쯤 하면 한 주가 끝나 갈 때가 된 것 같은데, 실상 휴일까지는 조금 남아 있으니까요.

모두에게 동등하게, 절대적으로, 또 일정하게 흘러가는 게 시간이라지만, 이런 저녁에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곤 해요. 휴일로 넘어가는 밤과 지금 같은 평일 저녁에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흐른다는 사실은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받아들이기 참 힘들단 말이죠. 이렇게 어서 흘러가 버렸으면 할수록 오래오래 곁을 맴도는 걸 보면 시간에게는 변덕스러운 장난꾸러기 같은 구석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여느 장난꾸러기에게 그렇듯 말을 걸어 볼 수는 없지만요. 대화로 해결하기는커녕 대화를 시도하는 것부터가 심지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난관이니 말이에요.

음, 당신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아니까, 아마 정말로 그렇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네요. 맞아요.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미래나 먼 과거를 향해 갈 수 있고, 조금 더 노력한다면 시간을 조금 더 빨리 혹은 느리게 가게끔 할 수도 있어요. 으레 그래 왔듯이 내가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시간을 뛰어넘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나를 중심축으로 고정해 두고 나머지 모두의 시간을 돌려 버리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요. 하지만 시간을 되감거나 빨리감는 게 힘든 건 차치하더라도 -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거듭 당부했듯 무리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 그 모두는 내 의지와 지각에 깊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아요. 여러모로 아쉽게 됐죠.

뭐가 그렇게 아쉽냐고요? 글쎄요, 나는 내가 그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고, 바라는 게 많지 않으니 아쉬울 것도 많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살다 보면 몇 가지 예외가 생기는 건 피할 수 없나 봐요.

혼자 지낼 적에는 비어 보일래야 비어 보일 수 없던 거실 한복판을 노려보면서 있어야 할 사람이 없잖아, 하고 투덜거리고 싶어서 하는 말이 맞아요, 릭. 당신이 그 몇 안 되는 예외인 셈이죠. 시답잖은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나가도 귀찮지 않고, 심지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다만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집 전체가 기묘하게 편안해지는 사람이 아주 가끔 있어요. 흔치는 않지만, 드물게 있긴 있더라고요.

우리가 만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을 때에, 그러니까 당신이 내 곁에 머물기로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에는, 때때로 이 편안함이 어디서 기인하는 건지 고민하곤 했어요. 당신의 어떤 부분이 내게 그토록 쉽게 스며들었는지, 내 어떤 부분이 당신이 열고 들어올 문을 마련해 두었는지 같은 것들을요. 당신을 어떤 의미로든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에 과연 어떤 디딤돌들이 놓여 있었는지, 나는 그 지표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혹은 뒤늦게야 깨달았는지를 곱씹어 보기도 했었어요. 나는 과연 당신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사랑하는지, 혹은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사랑하는지, 당신과 나를 찾아온 어떤 "다름"이 - 그러니까, 우리의 능력이 -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같은 것들을, 그리고 만약 우리 둘 중 하나에게, 어쩌면 둘 모두에게 이런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주어졌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했어요. 만약 그랬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만났을까요? 몇 년 전의 겨울에 그랬듯 서로를 알아봤을까요? 지금 내가 그렇듯 당신을,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든,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분명 그랬을 거라는 대답은 이상적이지만 공허해요. 그리고 당신은 이상의 반대편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눈이 밝은 사람이죠. 우리는 무언가를 쉽게 확신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또 너무 많은 좌절을 목도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당신을 어떻게든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확언할 수 없어요. 아마 당신이 그래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 것 같아요. 어쨌거나 당신과 내가 향하는 곳은 비슷한 듯 약간 다르고,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지만, 당신의 최우선은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 사랑이 절대불변이 아니라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이, 우리가 발 디딘 이 공간이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요? 우리의 현실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데. 어느 불안한 밤에 부질없는 가설들을 뇌까리다가도 나는 당신을 기다릴 테고, 그 가설들을 굳이 검증해 보려 하지 않을 텐데. 당신이 현관 계단참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의심이 설 자리는 사라질 텐데. 

그러니 오늘도, 다만 당신이 내게 사랑스러운 것처럼 나도 당신에게 비슷한 무게감으로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신도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하면 기쁘겠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내게 달갑듯 나도 당신에게 달가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앞에서 늘어놓은 무수한 "만약"들보다 더 자주. 어쩌면 매일같이.

아, 편지를 쓰다 보니 벌써 밤이네요. 건물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당신인 것 같아요. 이 시간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래도 드무니까. 이만 펜을 내려놓고 문간으로 나가 봐야겠어요. 집 현관 앞에 서서 기다리다가 당신이 들어오면 뺨에 입 맞춰 줘야지. 그리고 물어봐야겠어요. 오늘 하루는 어땠느냐고. 곧 돌아올 당신에게도,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당신에게도.

사랑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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