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엔벨져다무] 환換 2
3편 빌드업
* 능력 없는 세계관
원래도 그런 편이긴 하지만 훨씬 더 진지한 태도로 티엔의 의사를 물어본 다이무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뒤 하인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만찬장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수천 번은 떠올려 이미 익숙해진 낯, 이제 인정해야 하는 이름, 벨져 홀든. 티엔의 옆에서 그가 무료하지 않게 가벼운 대화를 건네고 있던 다이무스도 착석해 있는 동생을 발견하고 미약하게 미간을 좁혔다. 티엔이 그 모습을 봤다면 속으로 한숨이라도 쉬고 있는 건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약간 심란해져 있어서 신경쓰지 못 했다. 부드럽게 굴곡져 흐르는 결에 은은하게 빛이 비치는 은발, 냉막한 인상은 달빛 아래서 봤던 얼굴과 한 치의 다름도 없지만 약간 색달랐다. 순수한 의미는 아닐지라도 은은하게 미소가 걸려 있던 얼굴과 표정 하나 없는 지금이 상당히 대조적이어서 그런 감상을 받게 된 것일 터다.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듯 얼굴을 펴고 안으로 들어서는 다이무스를 뒤따라 하인이 의자를 내어주는 자리에 앉은 티엔은 냅킨을 펼쳐 무릎 위에 올리고 무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벨져를 응시했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제는 말을 걸었으면서, 그는 지금 만사가 제 일이 아니라는 듯이 새로 입장한 두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티엔은 그 점에서 다시 한 번 깊은 인상을 받고 어제와 오늘의 행동이 다른 이유가 무얼까 짚어 보는 중이었다.
제 앞에 마주앉은 두 사람을 한 번씩 본 다이무스는 잔을 들어 목을 조금 축였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둘째에 대해 물어보던 친우가 여전히 흥미를 감추지 않는다. 벗이니만큼 제 가족들과 사이가 좋아지면 응당 좋은 일이라 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그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약간 불편했다. 물어보는 말에 대답해 주는 건 그리 선선히 했으면서 왜 지금은 마음이 술렁거리는지. 그렇다고 둘 사이를 가르자니 마땅한 이유도, 핑계도 없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한들 각자 띠고 있는 기류가 달라 하인들이 어쩌지도 못 하고 눈치만 보는 사이, 주방장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와 차례대로 티엔, 다이무스, 벨져의 앞에 향긋한 차와 또 그것에 어울리는 음식을 내놓았다.
"손님께서 동양 분이라 하셔서 어울리게 차려 보았습니다."
제가 설명을 올려야 맞겠지만 틀릴까 무섭군요. 만약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포크를 살짝 흔들어서 제 입을 막아주세요. 삭막하고 어색했던 분위기 안에서 홀로 웃음을 피워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그는 마지막으로 한가운데에 두터운 파이를 올렸다. 벨져에게 집중하고 있던 티엔은 파이가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그의 입가가 아주 약간이지만 부드럽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이게 그건가 보군.'
다이무스가 알려준 그의 좋아하는 것.
허. 좋고 싫음이 이렇게 명확할 수 있나. 주방장의 소개를 들으며 찻물로 간단히 입맛부터 돋운 티엔은 친우에게 약간 실례 되는 생각을 했다. 가까이서 지내기 때문에 변화를 잘 감지하지 못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듣는 내내 다른 생각을 했더니 금세 주방장의 설명이 끝났다. 티엔은 급히 훌륭한 설명만큼 식사도 기대된다 하며 다이무스와 함께 식기를 들어 가장 익숙한 요리부터 들었다. 웃는 낯의 주방장이 인사와 함께 물러가고, 티엔은 본고장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맛에 더해 어울리게 섞인 향신료를 맛보고 상당히 만족하며 다이무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소개를 부탁해도 되겠나?"
그 말에 숨을 깊게 들이켰다 옅게 내쉰 다이무스가 흘긋 벨져를 보고 티엔과 눈을 맞췄다.
"이쪽은 내 동생인 벨져다. 벨져, 티엔은 내 벗이자 중국에서 온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하니 품행을 조심하도록 해라."
한 입에 넣기 좋을 만한 조각으로 자른 고기를 삼킨 그가 유려한 손짓으로 천을 들어 입을 닦더니 그린 듯 입매를 휘었다.
"외부인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게 더 품위 없는 행동이지, 형."
"내 벗이다, 벨져. 말을 조심히 하라고 하지 않았나."
"쓸 데 없는 것에 집착하는 건 친구 앞에서도 바뀌질 않나 봐?"
소개를 마쳤으니 입에서 나오는 건 당연히 인사일 줄 알았다. 그래서 드디어 제대로 얘기를 해 보겠다 싶었는데 둘만의 대화로 빠져드는 걸 본 티엔의 눈이 살풋 가늘어졌다.
타인과 말을 나누는 게 어색해 괜히 말을 돌리거나 편한 사람에게 말머리를 돌리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 이건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인가? 그런 이들이 영 없지 않지. 그의 벗은 아무래도 상당히 배타적인 동생을 둔 듯하다. 하지만 못 끼어들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쪽도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티엔이 무표정한 얼굴에서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형제가 사이가 좋군."
티엔이 말을 꺼내자 만찬장 안에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이무스는 친구를 두고 둘이서만 떠들고 있다는 걸 깨달은 모습이었고 그의 동생인 벨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도, 재미있다는 듯하기도 한 표정이었다. 티엔은 벨져의 눈빛에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은 호기심이 담기는 순간을 잡아채고 약간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아주 얕은 정도의 관심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눈빛이다. 미미한 변화였지만 사람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 본업인 티엔의 눈에는 아주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포크 옆에 함께 세팅된 젓가락을 들고 약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러울 정도야."
티엔의 말에 벨져의 눈썹이 조금 움틀거렸다. 그 반응을 보니 이쪽으로 관심을 가져온 게 확실해서 티엔은 제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식사를 이어 하는 척 고개를 조금 아래로 내렸다. 음, 맛있어 보이는군. 적당히 혼잣말을 하고 음식을 접시로 옮기는 순간 벨져의 말이 테이블에 얹어졌다.
"부럽다고?"
코웃음을 치는 듯한 음성이었다. 티엔이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벨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이런 게?"
말은 의문이지만 목소리도 시선도 도발적이다. 티엔은 눈길을 피하지 않고 벨져를 가만히 응시했다. 벨져는 자신과 다이무스의 대화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든 상황에 신경질을 내는 것 같았지만 예상외로 눈빛은 공격적이지 않았다. 티엔은 문득 다이무스가 어떤 얼굴로 자신과 벨져를 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고개를 돌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티격태격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허물없이 지낸다는 뜻이지. 그런 친밀감은 우리 같은 이들에게 없다시피 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거기까지 말한 티엔은 의도적으로 작게 웃음을 흘려 여백을 사이에 놓고 덧붙였다. 그런 모습을 봤더니 끼어들고 싶어지는군.
넌지시 흘린 말은 당연하게도 벨져의 귀에 들어갔다. 오붓한 대화를 방해당해 조금 신경질적이었던 표정이 곧 가라앉고, 도발적이기까지 했던 시선마저 잠잠해졌다. 거기서 조금 더 기다리자 잠깐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했던 벨져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비틀었다. 조금 전 다이무스와 둘이 대화하며 마치 보여주기처럼 지었던 표정과 달랐다. 그건 오히려, 이제껏 티엔이 보이고 있던 감정과 상당히 비슷했다. 흐름이 변했다.
"새로운걸. 보통은 안절부절 못 하면서 말리려 하던데."
이제야 말이 좀 통할 것 같은 대답이다. 자연스럽게 흐르게 된 분위기가 그에게 여유를 안겨 주고, 몰두했을 때 본 체 만 체 하던 흐릿한 곁시야로 다이무스가 관자놀이를 짚는 게 보였다. 그 행동은 무언가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마땅히 원활한 방도가 없어 보일 때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보인다. 다른 때라면 은연히 말머리를 돌리거나 도움을 줬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쪽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티엔은 이상하게도 즐거워져서 벨져에게 가볍게 응대했다.
"보는 눈이 없군. 다른 이들과 같게 취급하다니."
"하!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영광이라고 답하면 되나? 자네는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군. 다이무스가 그런 것처럼 말일세."
"형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도 정말로 새롭군, 놀라워서 밤을 새도록 토론도 할 수 있겠어."
공기는 완전히 화기애애해졌다. 티엔과 벨져, 둘만.
하지만 다이무스는 티엔에게 무안을 줄 사람이 아니고, 또 수많은 사업가와 거래를 트는 수완가답게 금세 태도를 바꿔 두 사람이 이어가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두 마디 말이 섞이면 그 위에 재치 섞인 농담이 얹어졌다. 주위에서 불편하게 눈을 굴리던 사람들도 불안을 속으로 가라앉혔다.
가볍게 차렸다지만 절대로 가볍지 않았던 오찬이 끝나갈 무렵, 벨져의 손짓으로 다가온 시종이 한가운데에 놓인 파이를 잘랐다. 부스러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잘린 조각이 금세 세 사람의 접시 위에 올라갔다. 벨져가 먼저 나이프를 들어 제 앞의 조각을 먹기 편한 크기로 자르며 대화를 이었다.
"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입술에 희미하게 묻은 기름기를 닦아낸 티엔이 마찬가지로 나이프를 들며 화답했다.
"부정은 않겠다."
벨져와 달리 무화과 파이를 좋아하지 않는지 다이무스 앞에 놓인 조각은 두 사람 것과 비교될 만큼 작았다. 하기야 그는 한참 업무를 하고 있을 때 타르트나 마들렌 같은 것에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티엔은 새삼스럽게 친우의 성향을 떠올리며 파이 조각을 입에 넣었다. 과연 무화과로 만든 디저트답게 달콤한 맛이었다. 귀국 선물로 돌리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다른 것도 맛있었지만 이게 가장 별미군."
티엔의 대답을 들은 오물거리던 작은 입이 또다시 곱게 곡선을 그렸다. 버터 향이 향기롭고 바삭한 파이지에 적절히 뭉개진 달콤한 무화과 필링을 음미하느라 잠깐 말이 없던 벨져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곧바로 티엔에게 말을 건넸다.
"미식도 아나? 형은 돌 같은 혀를 가졌으면서 어떻게 이런 친구를 사귄 거지?"
"티엔은 사업으로 만난 관계다."
"비슷한 시선으로 같은 답을 내는 사람은 귀하지. 그런데 여기에 그런 사람이 또 있군."
다이무스가 한숨과 같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티엔에게 말했다.
"티엔, 너무 받아주지 말게."
티엔은 가느스름히 눈가를 좁혔다.
"딱히 그런 것은 아니네만."
잔을 내려놓고 대답하면서 티엔은 조금 전 느낀 묘한 감각을 되짚었다. 식사 내내 아주 조금씩 느꼈던 부조화의 윤곽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느낌이었다.
"형의 입술은 잔소리를 위해 존재하지. 숨 쉬는 것과 같으니까 무시해도 돼."
"벨져, 그런 말은 티엔이 없을 때에나 해라."
"그에게 말하는 건데 당사자가 없으면 말이 무슨 의미가 있지?"
하지만 너무 찰나였던 탓에 티엔은 두 사람이 대화하게 두고 그 윤곽의 형태를 뚜렷하게 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말소리가 순식간에 작아졌다.
받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럴 만한 말이 오간 게 없다. 벨져는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대화하는 순간마다 빛을 발하는 외양 덕에 매 순간 집중하게 됐다. 심지어 본인도 티엔에게 관심이 있음을 은은히 드러내고 있었고 같은 종류의 관심을 가진 그로서는 모든 맥락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반면 다이무스는 원래 그렇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말수가 적었다. 게다가 답지 않게 가족에게 계속해서 주의를 주고, 티엔에게도 거리를 두게 하려 한다. 마치… 둘이 대화하는 게 못마땅한 것처럼.
"설교는 그쯤 하지 그래?"
"또 그러는군. 공격적인 언사는 되도록 고치는 게 좋다고 몇 번 말하지 않았나. 말의 겉만 보고 너를 받아들이는 자가 생길 거다. 그렇게 되면 너를 이해하려 하는 자도 사라지겠지."
날카로운 단어 선정에 이끌려 정신을 차렸더니 평이한 목소리로 그렇지 못 한 언쟁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이런. 티엔은 짐짓 혀를 찼다. 잠시 생각에 빠진 동안 분위기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는데 끼어들어 멈추게 하자니 둘은 대단히 진지했다.
물론 끼어들지 못 할 만한 이유가 이것뿐이었다면 티엔은 당장이라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두 사람을 더 알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심각해지기 전에 흐름을 끊겠다는 핑계로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다행일지 불행일지, 언쟁은 길지 않았다.
"오히려 묻고 싶군. 형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결국 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떠나지. 그렇다면 굳이 고려할 필요가 있나? 만약 남더라도 평생 가면을 쓴 채 대하는데, 그게 더 나은 방법인가?"
"모두가 네 방식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벨져. 이런 태도는 필요도 없이 적을 늘리는 것과 마찬가지야. 너는 그걸 감당하겠다 하지만 그걸 곁에서 함께 바라보는 네 가족들도 고려해야 해."
"형이야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내가 내놓는 결과는 누구보다 나았다는 걸 잊지 마. 증명된 방식을 굳이 바꿀 이유가 없다는 것도."
다이무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어떻게 하든 강제할 수는 없지. 그래서도 안 되고. 하지만 내가 말한 것도 염두에 뒀으면 한다."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식사 즐거웠어. 먼저 일어나지."
거칠어진 분위기 속에서 벨져가 소리 없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나가는 동안 한 번이라도 눈을 맞출까 해서 쭉 지켜봤지만 벨져는 그대로 주변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문만 보이는 것처럼 나가버렸다. 티엔은 벨져가 나선 뒤 하인들이 문을 닫아 시야가 가려지고서야 다이무스를 돌아봤다. 그가 본인의 친동생을 두고 자유로운 성정이라고 표현했던 게 무슨 말이었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지만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본 적은 없다. 티엔은 조심히 물었다.
"형제끼리 대화가 좀 격하던데, 내가 시기를 잘못 맞춰 왔나?"
"그런 것 아니야. 걱정 말게. 못 볼 꼴을 보여 미안하군."
"내 쪽은 신경 안 써도 돼. 다만… 나중에 자네 동생을 달래긴 해야겠더군."
다이무스가 다시금 한숨을 길게 흘렸다.
"벨져가 돌발행동을 할 수도 있는데… 무시하게."
'할 수도 있다.'가 아니라 '할 거다.'라는 투였다. 하지만 그걸 묻기엔 다이무스가 상당히 심란하고 지쳐 보여서 티엔은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참고하지."
…그게 한밤중에 찾아올 거라는 뜻이라고 부연이라도 해 줬다면, 아마 다른 대답을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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