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벨져]Über-Ich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하늘에서 피부를 찌를 듯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그 빛이 어찌나 강렬하고 또 밝은지, 바로 눈앞에 있는 이의 얼굴마저 역광으로 드리운 어둠에 삼켜질 수준이었다. 그 풍경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묘하게 끝이 올라간 입술뿐. 벨져는 제 앞에 서서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눈을 깜빡이는 동안 벨져는 어쩌다 자신이 이 남자와 함께 이곳에 서 있는지 이유를 떠올리려 했다. 멀지 않은 곳에 도시가 있고 그곳으로 향해야 하는 이유가 수 가지가 넘는데, 왜 이 남자를 따라왔었나. 그는 의미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곧바로 산을 내려가지 않고 야트막한 동산을 굳이 끝까지 따라 오른 것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상황이 그러하니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차갑게 날 선 경계가 서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것을 남자도 알아챈 듯했다.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을 것처럼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살짝 무너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 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변화이기도 했다. 그가 말을 건네려는 듯 누르면 말랑할 것 같은 입술을 움직이려 해서, 벨져는 그 의도를 끊고자 본인이 입을 열었다.

"시간 낭비야."

벨져의 목소리는 본인의 것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평이했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정체도 모르는 자에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어야 한다. 벨져는 몹시 바쁜 사람이고, 이런 것에 한량하게 어울려 줄 여유는커녕 평상시의 이동시간조차 최소로 줄이기 위해 가장 빠른 교통편을 고집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심지어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스런 말투라니? 벨져는 인생에서 누군가를 살갑게 대해 본 적이 손에 꼽았다. 그게 의도적인 게 아니라면 그 수는 극히 줄어들어 단 한 명밖에 남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한 탓에 벨져는 질문의 방향을 아예 돌려 버렸다. 자신의 정신에는 이상이 없나? 기억해야 할 것 모두가 완벽하게 온전한가? 단편이라도 맥락에 이상한 시간이나 말이 들어 있지는 않은가? 촉각, 청각 등 육감에 위화감이 있지는 않나? 벨져는 수많은 자문자답 이후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꿈이다.

그것도 꿈을 통한 회상이다. 벨져, 자신이 온당히 지녔어야 하는 것을 망각해 버렸다는 이유로 이게 꿈, 기억이라는 것을 늦게 알아차렸다.

깨닫고 나자 벨져는 이와 동일한 꿈을 여러 번 꾼 적이 있다는 것까지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깨고 나면 매번 제대로 붙잡지 못 한다는 것 역시도. 이번만은 다를 거라 되뇌인 것은 몇 번인지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게 그만큼 중요한 추억이란 뜻이지. 벨져는 남자가 대답을 내놓기 전,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는 시간 동안 모든 파악을 마쳤다.

또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일단 저 쓸데없이 장면을 가리려 드는 태양부터 차단해 그의 얼굴을 봐야겠다고.

3초 정도. 그 정도 시간이 있었다면 벨져는 마음을 정하고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단지 타키온이라 불리우는 그가 섬광이라는 이명보다 앞서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사실처럼 먼저 벨져의 생각을 흩어버리지 않았다면.

'…타키온?'

"쉬어갈 시간이오, 벨져."

빛을 탁월하게 차단하는 커튼을 쳐 두지 않아도 해가 느지막히 올라 눈이 아플 일 없는 어느 계절, 낯설지도 낯익지도 않은 방에서 벌써 차가워져 버린 공기를 느끼며 현실에서 눈을 뜬 벨져는 평소처럼 곧바로 일어나는 대신 머리에 남은 두 단어를 나지막하게 읖조렸다. …쉴 시간. 그런 뒤 자신이 왜 이걸 생각했는지, 원인일 꿈 내용을 천천히 상기해 본다. 하지만 절벽에서 남김 없이 온몸을 부딪히고 산산히 부서져 내리는 파도처럼, 드넓게 펼쳐져 흔적을 남겨도 금세 밀려들어온 바닷물이 모든 흔적을 앗아가는 해변처럼, 그저 아스라한 감상만이 남아 버렸다.

회상을 포기하는 것과 동시에 포근한 이불을 걷어내려 끄트머리를 쥐었던 벨져는 자신이 중얼거렸으나 바로 망각의 영역으로 넘어간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잠시 곱씹었다. 그러나 그 또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져버려 벨져는 필요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길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쩐지. 목표한 곳으로 출발하는 기차 표를 사기 전에. 이른 시간이라도 어디 연 카페를 찾아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빛과 어둠의 절묘한 그림자에 묻힌 은빛 머리카락과 어깨에 따라붙었다.

*

벨져 대신 릭이 죽었고, 그 사실이 치명적이고 뼈저리게 고통스러워 잠시라도 제 발걸음이 느려지는 일이 없도록 모든 일이 끝나기 전까지 스스로 기억을 봉인하기로 한 벨져 - 라는 설정.

*

글쓰기 재활. 가장 최초의 원시적이었던 형태로 손으로 적고 타자 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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