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져릭] 할로윈?

스터디 4회차 주제 :: 할로윈.

커피콩곳간 by 컾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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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다보니까, 장문입니다.

  • 전쟁과 관련된 민감한 소재가 섞여 있습니다.

  • 2024년 10월22일 까지 풀린 사이퍼즈 세계관과 스토리를 가지고 작성하였습니다.


“아- 젠장! 오늘도 이러는 법이 어디 있소!!”

오늘도 늦은 퇴근으로 지칠 대로 지친 릭은 게이트를 잘못 열어 현재 살고 있는 거주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공원에 불 착시해 괜히 화를 내어보았다. 다시 게이트를 열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밥 먹는 것처럼 쉬웠던 제 능력이 쉽게 펼쳐지지 않았다. 릭은 요즘 들어, 이렇게 피로가 쌓이면 능력이 말을 듣지 않음을 깨달았다. 현재보다 더 짜증이 밀려 나오는 걸 릭은 괜히 화만 낼 수록 힘들어지는 건, 자신이라며, 숨을 크게 마신 후, 내뱉고서 게이트 열기를 포기한 채, 집까지 걸어가면 30분 정도니, 기분 전환 겸 산책이나 하자며, 릭은 오랜만에 집을 향해 걸어갔다. 넓은 공원을 빠져나오니, 낮에도 인적이 드문 한가한 거리에 도착했을 무렵, 릭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스산한 분위기에 이제 곧 할로윈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할로윈이라- 올해부터는 준비를 해볼까?”

곧 다가올 할로윈을 위해 마당에 무엇을 장식할지 고민하던 릭은 문득 벨져와 함께 고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만일 벨져도 긍정적이라면, 이번 주말에 함께 마트에 가거나 혹은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할로윈을 준비할 계획으로 주말 일정으로 머릿속을 채우기에 바빴다. 호박 장식은 기본이고, 작은 꼬마 유령도 나무에 걸어두면 아이들이 좋아할까? 간식은 어떤 걸로 준비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릭은 연달아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할로윈 분위기로 다양하게 꾸며진 집을 돌아다니며, 얻어낸 달콤함으로 가득 채운 바구니를 보며 무척 행복했었다. 그리고 릭은 어른이 된 이후 또한 할로윈은 늘 준비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라 생각되는 첫 능력자로서 전투에 투입된 이후부터는 집으로 돌아간 적이 없어 실로 오랜만의 할로윈 준비로 마음이 들뜬 모양이었다. 누군가 제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단 사실도 모른 채. 아니, 모르는 척하며…

“릭 톰슨-”

“흐음? 이거 이상한데? 벨져 생각하니까. 목소리가 들려.”

“릭,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아- 이거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군. 환청이 너무 잘 들려서 큰일이야.”

“…….”

모르는 척일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일까 긴가민가했던 벨져는 다가가 보니, 두 눈을 감은 채 귓가로 살며시 뻗어있는 릭의 양 입꼬리를 보며 확신했다. 역시 장난이었군. 릭의 얄미움에 벨져는 힘을 풀어 릭의 다리를 차버렸다. 단번에 제 의사와 상관없이 무릎을 꿇게 된 상황에 릭은 당황스러워하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벨져를 바라보며, 장난이 들켰음에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서 가볍게 사과했다.

“하하- 미안하오. 산책하고 있었소?”

“게으른 건, 딱 질색이니.”

벨져는 아무런 말 없이 넘어져 있는 릭에게 손을 뻗었다. 릭은 벨져의 손을 잡고, 지탱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심코 다시금 장난이 피어오른 릭은 그가 손을 뺄까 봐 벨져의 손을 더욱 꼭 잡고선, 앞장서 집을 향해 걸어갔다. 한숨이라던가, 무어라 말할 것이라 예상과 달리 이젠 익숙한 것인지, 벨져의 반응이 예전과 달리 무덤덤해짐에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든 릭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는 벨져의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한 따뜻한 손이 여전히 마음에 들어 서운했던 마음이 사그라졌다.

“벨져, 미국의 할로윈이 궁금하지 않소?”

“네가 제대로 챙긴 걸 본 적이 전혀 없으니. 딱히.”

“하하- 그동안 이상하게도 이맘때면 일이 터졌잖소. 작년엔 겨우 그곳에 정착하나 싶었는데, 그대가 너무…”

“스토킹을 한 그놈이 잘못이다.”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릭은 작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작년까지는 현재 살고 있는 곳보다 조금 더 큰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차로 40분 정도 타고 가면 도시가 나오는 곳으로 이웃 모두가 친절은 아니어도 분명, 좋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노란색 지붕 아래 살던 어느 남성이 어느 날부터 벨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릭은 걱정이 되었다. 벨져도 걱정이었지만, 그 남자가 벨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를 바라며 겨우겨우 1년을 살아가나 싶었던 찰나에 일이 생겼다. 이웃끼리 모인 작은 파티장에서 모두가 보는 그 눈앞에서 벨져가 그 남자를 보자마자 뺨을 치고 말았다. 그래, 누구도 벨져를 처음 본다면, 딱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움에 혹 할 수는 있겠다 싶지만, 역시 저 성격에도 문제가 많이 있었다. 릭은 백번을 생각해 보아도 그 남자의 잘못이 맞았지만, 더 이상 복잡해지기 싫었던 까닭에 어수선한 파티장을 떠난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친하게 지냈던 몇 이웃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 뒤에 모든 짐을 조용히 챙겨, 게이트 넘어 홀든 저택에 머물며, 다른 거주지를 찾기 바빴다. 벨져의 형이자, 현 홀든가의 가주인 다이무스는 함께 이곳에 살기를 원하는 것 같았지만, 벨져가 극도로 싫어하는 바람에 릭은 한시라도 빨리 괜찮은 지역을 찾아 떠돌던 지난 나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꽤 괜찮은 지역을 찾아 떠난 이후로 어느덧 1년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뭐…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약속도 했으니, 약속을 어길 그대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시오.”

“이 동네엔 그럴만한 인물이 없단 걸 알았다. 진작 이런 동네를 찾았어야지.”

벨져의 말에 릭은 그가 이곳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안심되었다.

‘지난날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어.’

릭은 직장에 있는 동안에 혼자 있을 벨져를 위해서라도 되도록 소음이 적은 동네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릭은 그렇다고 사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 적당히 있는 동네를 원하였다. 또한 적어도 차를 타고 왕복 2시간 이내에 원하는 물건을 사 올 수 있는 대형 마트가 있어야 했으니, 조건을 갖춘 적당한 거주지를 찾기란 절대 쉽지 않았다. 조건 중에서 마트야 멀어도 릭의 능력이 있어 괜찮았기에 타협은 가능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벨져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도 상관없다 했지만, 릭은 그렇지 않았다. 릭은 조용함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약간의 다른 사람의 온기 또한 필요로 한 사람이었기에… 다행히 이곳은 20채의 집들이 있는 적당한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은퇴한 어르신들로서 언제나 조용하였고, 또 이제 막 결혼을 한 젊은 신혼부부 혹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는 가정집이 전부였기에 낮에도 조용하여 딱이였다. 물론, 눈에 띄는 벨져의 외모 덕분에 이사를 오게 된 날로부터 일주일 동안은 질문이 끊임없어 지쳤기도 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정착도 되었으니, 올해부터는 다시 챙기려고 하오.”

“흠. 그렇군…”

“우선 마당을 꾸며야겠지? 그리고 또 어린아이들을 위해 간식도 사 와야 하고- 아! 우리 집에서 남동쪽에 있는 버드나무 숲 근처에 상아색의 이층집 알지? 그곳의 막내 아들 존은 동전모양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하오. 요즘 볼 때마다 말하고 다니니까, 잊을 수가 없소.”

주말에 할 것을 줄줄이 이야기하며, 온 동네의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하나하나 즐겁게 말하는 릭의 모습을 바라보며, 벨져는 어쩐지 다른 것보다 젤리, 사탕, 초콜릿 같은 달콤한 입가심 거리를 더 많이 이야기하는 릭이 어이없어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벨져는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무척 마음에 들어,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또- 언덕 위에 있는 벽돌집에 사는 미샤는 과일 맛이 나는 곰 모양 젤리를 좋아하고, 그 옆집에 노부부와 함께 사는 수지와 수는 캐러멜과 마시멜로를 좋아한다고 하오. 생각보다 아이들이 많은 거 같소. 좋아 이렇게 된 거, 전부 다 준비하는 것이오!”

“흠… 그냥 네가 먹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가?”

“아, 역시 그대 눈은 못 속이나? 할로윈이되면 간식들이 무척 싸게 판매되고 있어서 좋거든-”

그 뒤로부터 릭은 자신이 먹고 싶은 달콤한 주전부리를 생각하기에 바빴다. 할로윈이라면 당연히 사탕이지만, 초콜릿도 나쁘지 않고, 마시멜로도 잔뜩 구매해 유리병 가득 담아놓고, 겨울 내내 따뜻한 코코아에 한두 알씩 넣어 먹으면, 그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을 것이라며 말하는 릭의 모습은 마치, 봄날의 해처럼 따뜻하게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든 벨져는 아무 말 없이 릭을 지켜보았다. 그의 입장에선 릭의 고민은 어이가 없었지만, 저렇게 행복하게 털어놓은 릭의 모습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단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지속적으로 잔잔히 미소 짓는 벨져의 모습에 릭은 오랜 사회생활로 인해 생긴 습관으로, 상대방이 알게 모르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였기에 벨져의 미소는 오래전 여행길에서 보았던 수많은 별똥별과 함께 내려오는 영롱했던 달빛보다 더 아름다워, 릭의 얼굴이 붉어졌다.

“크흠… 아무튼, 이번 주말에는 같이 쇼핑하자.”

벨져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릭의 행동을 느꼈다. 조금은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지우고서 자유로운 손을 들어 릭의 뺨에 올려보았다. 역시 무척 따뜻한 온기… 벨져는 몹시 당황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릭을 무시한 채, 입을 맞춰보았다. 릭은 역시 온몸 구석구석이 따뜻한 사람인 걸까? 벨져는 입을 떼어 내었고, 릭을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릭은 이 미소를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밤도 일찍 잠들기는 글러 먹었군.’

릭의 생각은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맞았다. 다음 날 릭은 아픈 허리를 붙잡고서 하루를 시작하였다. 점심을 먹고 난 이후, 피곤함과 통증으로 인해 조퇴할까 싶었지만, 일이 밀리면 주말까지 일을 해야 할 자신의 미래가 선명히 보였다. 이번 주말이 아니면, 할로윈 준비는 늦을 것이 분명했기에 릭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남은 일을 마저 끝을 냈다. 그리고, 오늘은 집에 가자마자 뻗어 잘 것이라 다짐한 릭이었다.

남은 평일에도 연속으로 진행된 연장 근무로 지칠 대로 지친 릭은 토요일 점심을 먹기 전까지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꿈에서라도 벗어났으면 좋으련만… 꿈속에서조차 남은 일을 마저 하고 있었다. 괴로운 꿈에서 벗어나, 힘겹게 눈을 뜬 릭은 한숨부터 길게 내쉬었다. 내일은 오후부터 비 소식이 있어 될 수 있으면, 오늘 나가는 것이 좋겠지? 릭은 크게 기지개를 킨 후,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아직도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멍하니 침대의 끝에 앉아 있던 릭은 제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맛있는 냄새를 따라 내려갔다.

“오, 맛있겠소.”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에 깊은 냄비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건 단호박 수프였다. 릭은 이내 배고프단 사실을 깨닫고 얼른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 한 국자 크게 떠서 식탁으로 가져왔다. 식탁 위에는 준비된 디너 롤을 꺼내 수프에 듬뿍 찍어 한입 먹어보았다. 촉촉한 빵과 함께 퍼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단호박 수프의 맛은 어느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로 선보여도 지지 않을 만큼 무척 맛있었다. 맛에 대한 평가를 짧게 했더니, 벨져는 당연한 소리를 뭐 하려 하냐는 듯이 대답하였다. 릭은 조용한 식사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에 벨져는 릭의 연이은 질문을 받아들였다. 분명 점심 메뉴는 아닐 터, 혹시나 해 벨져도 늦잠을 잤나 싶었지만, 벨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아침에는 샐러드를 먹었다며 대답을 해주었고, 그저 남은 단호박 처리로 수프를 만들어봤다고 하였다.

“그런데, 단호박? 내가 단호박을 사 온 기억은 없는데…”

“며칠 전 운전 연습 겸, 네가 말한 야채가 신선하다던 가게에 다녀왔다. 할로윈 때문인지 호박이 많이 있더군.”

릭은 벨져의 말에 공감해야 하며, 이맘때쯤엔 호박이 확실히 많은 곳에 쓰이긴 하였다. 할로윈 다음엔 추수감사절이니…

“역시 늙은 호박을 사와서 직접 파내어 장식도 해야겠군-”

“어린이인가?”

“하하- 그렇지만 귀엽잖소? 아이들도 분명 좋아할 것이오.”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텅 빈 그릇에 아쉬움이 남아 한 그릇 더 뜰까 싶었던 릭이었지만, 시간을 보니 이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먹은 자리를 치웠다. 부엌에 놓인 작은 거울을 바라보던 릭은 이런 부스스한 얼굴로 나가자고 말하면, 벨져가 싫어할 것이 뻔하였기에 설거지를 마치고, 수건과 함께 면도기와 입을 옷을 가지고 욕실로 향하였다.

“그럼, 운전하는 것이오? 내가 능력을 사용하면 금방일 텐데…”

“넌 능력을 써서 오던지- 난 차로 이동하겠다.”

“아- 좀 생각할 기회는 주지 않은 것이오? 내가 싫다고는 하지 않았잖소-”

곧 출발이라도 하려는 벨져의 행동에 릭은 재빠르게 벨져의 옆 좌석에 앉았다. 릭은 사실 궁금했다. 항상 능력으로 이동하였기에 자동차를 탈 이유는 없었지만, 벨져가 드물게 부탁하여 자동차를 마련했을 때부터 줄곧 열심히 연습한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은 릭은 안전벨트를 착용한 순간에도 즐거운 마음을 품은 채 탑승하였지만, 차가 출발한 그 순간부터 안전벨트를 꼭 부여잡고서 믿지도 않은 신에게 기도하기에 바빴다.

“도착했군.”

“그… 베…벨져.”

“안색이 별로군. 몸이 안 좋은가?”

“으… 미안한데, 이 쪽지에 적힌 물품을 사 와주겠소? 아무래도 난 속을 비우고 좀 쉬어야 할 것 같소.”

벨져는 릭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본 이 후, 말없이 릭이 들고 있는 쪽지를 받아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트 안으로 들어가는 벨져의 뒷모습을 간신히 바라보던 릭은 화장실로 향해 갔다. 전날에 술을 잔뜩 마신 것도 아니었으며, 오늘 먹은 음식 또한 상한 것도 아닌데도 멀미 하나에 이렇게 속이 안 좋아 진다는 것을 릭은 이제서야 깨달았다. 하긴, 어릴때 부모님의 차를 타거나 혹은 여행 도중 배가 타고 싶어져 배를 탈때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 그래 벨져의 운전이 어마무시했지. 앞에 차가 없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하아- 이제야 살거 같군.”

속을 게워 낸 릭은 조금 출출해져 마트 안에 있는 도넛 가게에서 도넛과 커피를 사와 창문을 살짝 내린 채,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겼다. 주말임에도 사람이 그리 북적하지 않아 신기하였지만, 생각해 보니 조금 더 가면 새로 생긴 쇼핑몰이 있단 사실이 떠올랐다. 릭은 문득 궁금했다. 마트처럼 한곳에 모든 것을 모아 파는 곳이 아닌, 여러 지점이 모여있는 커다란 쇼핑몰. 하지만, 릭은 오늘이 아닌 다음을 기약했다. 남은 도넛은 다시 잘 포장해 담은 릭은 아이들의 흥이 담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길을 돌려보았다. 자기 몸보다 큰 커다란 호박 모양 바구니를 가득 끌어안고서 자신보다 조금 더 큰 아이의 뒤를 따라가는 아이들이 무척 귀여웠다. 아이들의 뒤에선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의 눈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정말 화목한 가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분명 행복해 보이는 이들을 보고 있는데, 속이 다시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속을 다 게워 낸 것이 아닌가?’ 릭은 점점 생각에 빠져들어 가려던 찰라, 제 귀로 작게 들리는 통통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여유롭군. 이제 몸은 괜찮나?”

“하하- 미안하오. 무겁지 않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두 손 가득 짐을 들고서도 창문을 두드리는 행동을 보면, 역시 능력을 잃었어도 그가 검사로서 살아온 삶이 있었기에 아직 건강함에 릭은 조금 부러웠다. 그리고 그 모습이 무척 좋았다. 릭은 트렁크를 열어주고서 차에서 내려, 짐을 싣고 있는 벨져를 도와주었다. 벨져는 혼자서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릭은 도와주고 싶었다. 그렇게 두사람은 차곡차곡 짐을 쌓고서, 아직 들려야 할 곳이 남아 있었기에 트렁크에 여유 공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다음은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인테리어 샵에 가면 된다오. 전에 가본 적 있지? 그곳에서 간식을 담아둘 바구니를 사야 하거든-”

릭은 다시 운전대를 잡으려는 벨져를 말렸다. 이번엔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어째서지?”

“그야… 나도 언제 능력이 사라질지 모르니까, 나도 운전 연습 겸이오.”

그의 말에 벨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제 제법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나며 벨져 나름의 칭찬을 해주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거슬리는 말투였지만, 이것이 절대 나쁜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릭은 웃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어 나오는 길을 따라가면, 목재로 만든 가구와 다양한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가게가 나왔다. 골동품도 취급하는 곳이라 릭에겐 이곳을 들리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오, 이 바구니가 꽤 좋아 보이는 군. 디자인도 무난하고 귀여우니, 평소에도 쓸 수 있겠어-”

벨져는 릭의 뒤에 가만히 서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역시나 새 상품이 놓인 곳이 아닌 골동품을 파는 코너에서 떠나지 않은 릭은 마트 안에서 보았던 장난감 판매대에서 신이 난 아이의 눈처럼 반짝였다. 나이를 먹어도 언제나 한결같이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벨져 이거 해보시오~ 잭 오 랜턴 머리띠!”

물론 갑자기 예쁜 머리 장신구를 가져다가 제 머리에 올리는 행위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즐거워하는 릭의 모습이 볼만하였기에 벨져는 릭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작은 호박 장식이 달린 머리띠를 시작으로 고양이 귀 모양 머리띠, 작은 뿔이 달린 머리띠, 새하얀 날개가 달린 머리띠까지… 릭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역시 이게 좋겠다며, 하얀색의 고양이 귀 모양 머리띠를 손에 들고 장바구니 속에 넣었다.

“대체 이건 왜 사는 거지?”

“당일날에 우리도 분장할 것이오. 놀러 오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소~”

“제정신인가?”

“물론! 내 정신은 온전하오.”

오늘 거절한다 해도 릭은 언젠간 또 이곳에 몰래 와서 구매하고 갈 인물이란 걸 아는 벨져이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말을 한 뒤에 가게를 빠져나왔다. 가게를 나서는 벨져를 보자마자 릭은 다시 골동품을 바라보며, 쇼핑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가게를 빠져나온 벨져는 산새 소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제 머리를 얌전히 흩날리는 것이 거슬리지 않고 딱 좋았다. 또한 따라 흔들리는 사그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벨져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분명 릭이 본다면 솜사탕 같다며 웃으면서 말하겠지. 릭이 골동품 쇼핑에 빠져있으니, 최소 30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생각해, 벨져는 이 산책길을 따라 산책하기로 했다. 지금 시간이라면 분명 티타임을 즐겨야 했지만, 제멋대로인 릭과 함께 오래 생활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한 듯 제멋대로 변경되는 시간마저도 거슬리지 않게 되었다.

“날이 좀 쌀쌀해졌군.”

곧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니, 가을도 끝날 시기라 당연하겠다 싶었던 벨져는 아래서 들려오는 사각사각 소리에 시선을 내려보았다. 낙엽이 쌓인 길 위로 다람쥐 한 마리가 재빠르게 도토리를 입안 한가득 담은 채,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부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것일까? 다람쥐는 나무 위에 사람들이 준비해 둔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홀쭉해진 볼로 다시 집을 나와 어디론가 떠났다. 집 안에서 잔잔히 작게 들려오는 다람쥐의 울음소리에 떠나간 다람쥐에게 가족이 있음을 깨달았다. 잠시 옛 생각에 빠지려던 벨져를 잡아주는 목소리에 벨져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벨져!! 벨져!!! 어딧소!!”

이상했다. 오랜 세월의 가치가 묻어나 있는 수많은 골동품 앞에서 생각보다 일찍 쇼핑을 마친 릭은… 무척 드문 그의 행동에 벨져는 산책을 그만두고, 릭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릭은 저 멀리서 벨져의 얼굴이 보이자,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봉투의 입구를 열어 벨져에게 보여줬다. 따끈할 때 먹어야 맛있는 것이라며, 웃으며 말하는 릭은 봉투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벨져에게 주었다.

“이건 추로스가 아닌가?”

“글쎄 들어보시오. 장바구니가 꽉 차서 계산하고, 짐을 차에 싣고, 또다시 들어가려 했는데, 추로스를 팔고 있는 걸 봐버려서 말이야… 생각해 보니, 티타임 때가 아니오? 그래서 나름 비슷한 느낌으로 추로스와 카페라떼를 사 왔소.”

추로스와 카페라떼라… 평소 벨져가 즐겼던 티타임에 준비된 것과 거리가 먼 조합이지만, 벨져는 릭이 예전에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벨져- 나에게 있어, 티타임이란 따뜻한 티와 달콤한 디저트,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느 자리든 그곳이 티타임이라 생각하오’ 그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벨져는 릭에게 조금만 걸어가면, 앉아서 먹을 만한 장소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오, 이곳에 이렇게 좋은 산책길이 있는지 몰랐소.”

“이곳에는 항상 쇼핑만 하러 왔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

“하하- 그런가?”

“여긴, 정말 사람이 적은 마을인 거 같더군.”

“그렇소. 가게 주인장 말로는 마을의 집은 이제 겨우 열 채를 넘겼다고 하더군. 그리고 각 집은 소소하게 무언가 다양하게 팔고 있어서 수집가들이 자주 찾아온다고 하나, 요즘엔 그마저도 줄어들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오.”

말을 끝낸 릭은 추로스를 한입 크게 깨물어 먹었다. 맛있게 먹는 릭을 바라보던 벨져는 추로스를 뜯어 입안에 넣어 먹었다. 혀끝으로 설탕의 달콤함과 갓 구워 바삭한 식감이 잘 어울려져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추로스를 반쯤 먹은 벨져는 나머지 반쪽을 릭에게 주었다. 더 먹고 싶었지만, 한번은 거절하는 릭을 잘 알기에 벨져는 오늘은 단 걸 더 먹고 싶지 않다고 하니, 마지못해 받아 가는 릭은 다시 행복하게 추로스를 먹기 시작했다. 벨져는 입가심으로 따뜻한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평소 즐겼던 밀크티와 다른 맛이 나지만,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같았기에 이번 티타임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해가 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는 다행히 릭의 바람대로 그가 잡고서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벨져는 느리다고 불평하였지만, 이게 올바른 속도라고 받아치니, 벨져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만 빠르게 달리라고 재촉하였지만, 릭은 한 번도 속도를 올리지 않았다. 도착을 하니, 어느덧 해는 사라지고 달이 떠 있는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저녁 시간을 조금 지나쳤지만, 언제나 쇼핑하고 온 날은 이러했기에 두 사람은 하나둘 짐을 옮겼다. 그리고, 생각보다 정리할 것이 많아 보였기에 두 사람은 각자의 짐을 챙겨 정리를 했다. 냉장고를 필요로한 물품은 평소 요리를 자주 하는 벨져의 몫이었고, 냉장고가 필요 없이 실온에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간식 및 건조식품 정리는 릭의 몫이었다. 벨져는 부엌에서 릭은 부엌과 조금 떨어진 팬트리 안에서 정리를 비슷하게 마친 두 사람은 간편하게 냉동 피자 하나를 꺼내와 먹었다. 평소에 자는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잠자리에 든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서로를 바라보며, 잠들기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 릭은 마당에 꾸밀 용품을 가지고 나왔다. 새벽부터 낙엽을 치운 벨져는 뒷 마당 창고 안에 빗자루를 집어넣고서 릭에게 다가왔다. 커다란 상자 안에 지난날에 구매한 용품들을 담아온 릭은 하나둘 꺼내어 벨져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무 위에 걸어두는 꼬마유령 장식과 박쥐 모양 장식, 크고 작은 크기의 잭 오 랜턴, 마녀의 솥과 버섯 모양의 의자, 주황색과 보라색이 차례대로 나열된 가랜드와 앙상한 나뭇가지와 할로윈과 잘 어울리는 작은 장식으로 만든 리스까지 꺼내놓으니 어느새 박스 안은 텅 비었다. 우선, 마당 한 가운데에 심어둔 살구나무 위에 꼬마 유령과 박쥐 장식을 달고서 대문에서 바로 보이게 마녀의 솥을 두었다. 버섯 모양의 의자와 잭 오 랜턴은 마당 여기저기에 심어 두었고, 가랜드와 리스는 문과 창문에 걸어두니, 제법 할로윈 분위기에 릭은 당일의 계획까지 말해주었다. 집 안의 현관 근처에 간식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올려 둘 것이며, 퇴근 후에 같이 분장하며, 집으로 찾아올 아이들을 기다리자며 들떠있는 릭을 보며, 벨져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싫다고 해도 밀고 나서겠지.’

벨져는 하는 수 없이 이번만큼은 릭을 따르기로 했다.

“흐음- 이 계획은 괜찮은데, 시원치가 않소.”

“너의 계획치고는 완벽한 것 같다만?”

“아니, 아니 계획 말고, 그게 분장 말이오.”

“어제 구매한 걸로 보아선 고양이와 강아지 아닌가?”

“흠- 나는 강아지가 맞지만, 그대는 고양이가 아니오. 들어봤소 벨져? 구미호라고!”

“구미호?”

“동양의 괴물이라고 하오. 전에 조선인 아이에게 들었소.”

“동양이라… 그러고 보니, 넌 동양 사람들과도 인연이 있었지.”

“응, 첨 만났을때에 이들도 짧은 인연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이 아직 재단에 남아있으니, 어찌저찌 인연이 지속되고 있소.”

문득 벨져는 동양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지식으로만 알았던 동양 사람들을 만나보았을 땐, 신기했다. 물론 그들 또한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쟁 속에 만남이었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나눌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여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 조만간 릭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을 하니, 릭은 환영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재단도 이제 연말이다. 뭐다 바빠질 테니, 추수감사절의 긴 연휴에 약속을 잡아보자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이라도 편지를 보내자며, 정말 이럴 때만큼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편지를 굳이 보낼 필요가 있나?”

“음? 하지만…”

“네가 복장에 대해 잘 떠오르지 않다고 하니,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는 것도…”

“오랜만에 일이 없는 여유로운 주말이잖소. 함께 있지 않아도 괜찮아?”

“나도 오늘은 따로 생각할 것이 있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으니, 다녀오도록.”

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게이트를 열었다. 다행히 고개를 먼저 내밀어보니, 그랑플람 본사의 뒷골목으로 제대로 이어진 것을 확인한 릭은 다시 돌아와, 벨져에게 짧은 인사를 나눈 후에 게이트를 넘어갔다. 닫히는 게이트를 바라보던 벨져는 릭이 쓰려고 꺼낸 편지지와 봉투를 집어 현관 근처의 작은 서재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방문한 터라, 재단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 소리와 함께 안부를 주고받다 보니 정신이 없었지만, 이것이 재단의 매력이라 생각한 릭은 모두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동양. 정확히는 조선에서 온 소년. 아니 이 하랑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미성년자였던 시절부터 그랑플람에 일원으로서 활동하던 그는 개인 집무실이 없었지만, 어느덧 어엿한 성인이 된 이후로 그의 사부와 재단의 임원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이렇게 개인 집무실이 생겼다고, 자랑스러워하던 때가 바로 어제 일 같은 데, 그것도 벌써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오랜만에 본 하랑은 제법 어른스러웠다. 키도 훌쩍 컸으며, 수련의 성과일까? 전보다 몸도 꽤나 다부져 있었다. 그러나, 영을 보는 건 여전하였기에 요즘 따라 컨디션이 별로라며 툴툴거리는 모습이 옛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하랑은 릭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며, 종이에 그림까지 쓱쓱 그려주었다. 건네받은 그림을 보아하니, 새하얀 긴 옷을 입은 머리가 긴 사람의 머리 위에는 뾰족한 귀와 등 뒤로는 폭신해 보이는 꼬리가 아홉 개였다. 대충 추가로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파악한 릭은 하랑에게 고맙다며, 선물로 가져온 할로윈 기념 젤리 한 박스를 주었다.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며, 툴툴거렸지만,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기에 마음이 따뜻해진 릭은 감사 인사를 다시 하고서 자리를 떠났다. 목적은 달성하였지만, 아직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릭은 내부의 구경을 해보았다. 역시 이곳 또한 할로윈 준비로 바빠 보였다. 분명, 현재 재단에선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지? 재단 덕분에 능력자들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던 이들이 많이 사그라졌었다. 오랜만에 왔으니, 릭은 브루스씨를 찾아가 보았지만, 현재 다른 곳으로 출장을 떠나신 듯, 집무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는 건, 챌피도 자리에 없는 건가?”

릭은 재단 건물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어보았다. 이곳저곳이 할로윈 시즌 맞이로 바빠 보였다. 자주 들렸던 카페 또한 입구에서부터 작은 호박 장식이 있었고, 내부 또한 호박으로 가득했다. 언제나 한결같은 메뉴 사이에는 할로윈 한정 메뉴 또한 선보이고 있었다. 릭은 늘 시켜 먹었던 커피와 함께 선물용으로 할로윈 쿠키와 도넛 주문하였고, 음식을 받아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즐겼다. 창밖으로는 행복한 표정으로 걷는 가족과 연인, 친구 또는 혼자서 이제는 관광지가 된 이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릭은 그들처럼 행복했으나, 동시에 불안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행복해 보이는 저 사람들이 갑자기 피를 뿜으며 재가 되어 사라지면 어쩌지? 웃고 있는 천사 같은 아이가 나를 향해 칼을 겨눈다면? 폭발이라도 일어나면 어쩌지? 이러한 생각이 점점 릭의 머릿속으로 가득 차오르니, 숨이 가쁘고 식은땀이 비가 오듯 흘러내렸다. ‘위험해.’ 릭은 떨리는 몸을 이끌고 힘겹게 카페를 떠났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골목에 도착한 릭은 게이트를 열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릭?”

거세지는 빗소리에 열어둔 창문을 닫던 벨져는 갑자기 자신의 등 뒤로 열린 게이트에 당황스러웠지만, 곧이어 나타난 릭의 상태에 놀랐다.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휘청이며 다가오던 릭은 금세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더니, 몸을 둥글게 말고서 떨기 시작했다. 벨져는 릭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전쟁을 겪은 이들에게 생기는 병이라고 했나?’

벨져가 지난 기사단을 이끌면서 수 없이 많이 보았던 증상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그저 적이라는 이유로 싸우는 것만큼 끔찍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두려운 감정을 숨긴 채 도망치지 않고 오랫동안 전장속에 있다보면, 어릴 적부터 칼을 잡아가며 단련된 이들조차 생기는 병이니, 평범했던 이가 이 병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벨져는 그저 그가 진정될 때까지 곁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그래도 이것이 최선이라 생각한 그는 조심스럽게 릭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창문을 닫았음에도 들려오는 빗소리와 천둥소리, 더욱 그를 힘들게 할까. 벨져는 걸치고 있던 얇은 겉옷을 릭에게 덮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진정이 되는 것일까? 떨고 있던 릭의 몸은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들었다.

“미안, 미안하오. 조금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

어느덧 웅크렸던 몸을 푼 릭은 벨져와 눈을 맞추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사과부터 하였다. 벨져는 손을 올려 헝클어진 릭의 앞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솔직한 게 뭐가 부끄럽지?”

“그래서 부끄러운 것이오. 내 나이가 이제 몇인데…”

“릭, 네가 나이가 몇 살이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은 절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난, 오히려 그 반대가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해.”

“그런가… 그렇다면, 벨져는 어느 쪽이오?”

벨져는 릭의 질문에 손을 멈추고 릭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글쎄? 이 말만 꺼내면 그만이었는데, 어째서일까? 벨져는 너는 내가 어떤 사람 같지? 라며 오히려 릭에게 질문했다. 되려 질문을 받아버린 릭은 또 그런식으로 받아치는 것이냐며,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생각이라도 하는 듯이 두 눈을 감았다. 인상을 찌푸렸다가도 편하게 웃더니 또 인상을 찌푸렸다.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더니, 릭은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잘 모르겠소. 하지만, 내가 아는 그대는 절대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오.”

“…….”

“그렇지만, 내가 모르는 건 당연하지. 그대가 내게 직접 그대 일을 전혀 말해주지 않았잖소.”

“…….”

“으음- 왜 자꾸 쳐다만 보는 것이오? 화난 것이오?”

“아니, 그냥… 네가 좋아서.”

사과처럼 빨개지는 릭의 모습에 벨져는 재미있어, 웃음이 났다. 장난치지 말라며 툴툴거리는 릭이었지만, 아마 벨져가 뱉은 말은 진심이란걸 잘 알기에 붉어진 얼굴을 숨길 방법으로 릭은 자신을 바라볼 수 없도록 벨져를 껴안아 주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릭을 알까? 벨져에게 릭의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심장 소리가 닿고 있단 사실을…

“거참… 그대는 어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는 말을 이리 잘하는 것이오? 집에서 교육이라도 받았소?”

“글쎄,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검술을 익히는 것뿐이라…”

“거… 실례가 안 된다면, 그대의 옛이야기를 내게 해 줄 수 있소?”

이제 괜찮아진 걸까? 릭은 평소와 다름없는 릭의 모습에 벨져는 안심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옛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에 잘 굴러가던 톱니바퀴가 고장 난 듯, 말문이 막혀버렸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행자-

“해주면, 내가 얻는 건 무엇이지?”

“나도 나의 옛날이야기를 해주겠소!”

“어릴 때부터 할로윈과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10월이 되면 항상 들떠있었고, 사탕보다 초콜릿을 선호해서 늘 사탕만 주던 가정집에 다음 해에 이 바구니 안에 들어가는 것이 사탕이 아닌 초콜릿이면 좋겠다고 말한 네 어린 시절?”

“아아, 그거 기억하고 있소? 그 이야기는 재작년에 해준 거잖소! 듣는 둥 마는 둥 해서 모를 거로 생각했는데…”

“즐거워서 기억하고 있지. 하지만, 네 인생만큼 내 어린 시절은 즐겁지 않아서 말이야…”

“괜찮소! 지금의 나는 앞으로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의 옛이야기를 반드시 들어야겠거든!”

평생이라… 벨져는 잠시 고민하더니, 우선 이야기가 길어질 분위기에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가져와 릭에게 건네주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릭에게 자신이 어린 시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날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사람에게 칼날을 겨누었던 그 날, 처음으로 칼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그 날… 자신이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을 칼로 베어내었을 때, 느꼈던 첫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지푸라기로 단단히 묶어 만든 더미를 베어 냈을 때와 전혀 다른 감각에 벨져는 자리에 주저앉아 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떨고 있다면, 벨져에게 남아 있는 건, 죽음뿐이었기에- 벨져는 제 앞에서 큰 상처 입은 채, 휘청이던 그 사람에게 칼을 더 겨누었다. 이건 단순한 대결이었다. 목숨을 걸어가며 대결하기 좋아하는 가문끼리의 대결. 그때 당시 벨져의 나이는 고작 열 살도 안 되었고, 상대는 성인이었다. 예정대로였다면, 벨져의 형인 다이무스가 이 대결에 참전할 예정이었지만, 그는 축제를 위해 가문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약속된 대결은 차남인 벨져에게로 돌아갔으며, 무사히 승리를 얻어 낸 그날 이후로 벨져는 가문 사람들의 큰 기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벨져의 이름이 귀족들 사이에서 점점 입소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해, 그 뒤로부터 검사로서 키워졌다.

“흠… 그날 이후로 그대는 검을 잡게 된 것이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오랜 부탁이었지. 나는 다른 귀족의 아이처럼 키워달라고, 하지만 우리 가문은 쭉 검사로서 키움 받아 자라왔기에 난 프리츠를 제외한 다른 가문에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숨겨져 살았던 것이고…”

“그렇군…”

“그래도 아버지께서, 어머니 몰래 호신술이라도 배워두라며, 검을 잡는 법은 어릴 때부터 배웠다.”

평생 지워지지 않은 크고 작은 흉터로 가득한 손을 펼쳐보던 벨져를 지켜보던 릭은 벨져의 손을 꼭 잡아보았다. 흉터와 굳은살로 가득해 거칠거칠한 손. 릭은 처음 벨져의 손을 본 날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도련님인 벨져의 고운 얼굴과 달리 손은 벨져가 결코 평범한 도련님이 아닌, 어엿한 기사단의 단장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릭은 그러한 벨져의 손을 참 좋아했다. 펜이 닿는 곳에만 굳은살이 박여있는 자기 손과 달리 나와 정말 다른 삶을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언제나 릭은 누군가 벨져의 어디가 제일 좋아라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손이라고 대답할 만큼 무척 좋아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소. 벨져-”

“당연히 내가 해야 했을 일이었다.”

“음. 난 그냥 그대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었소.”

“넌, 정말 재밌군… 네가 아닌 먼 떠나간 이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다니…”

“하하- 그대도 참 재미있소. 어느새 투정도 뱉는 것이오?”

“너랑 함께하니 물들인 모양이군.”

릭은 짧게 그런가?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하자며, 발아래에 둔 먹기 좋게 식은 코코아든 머그컵을 손에 들고서 한 모금 마셔보았다. 달콤함이 어쩐지 부드러워 마시멜로를 넣은 듯한 코코아에 다정함이 감돌아 릭은 마음이 행복해졌다. 덕분에 다시금 붉게 열이 올른 릭은 창가로 걸어갔다. 어느덧 먹구름이 사라진 하늘엔 별이 반짝여 창문을 활짝 열어보니, 비가 내려 차가워진 밤바람이 반겨주었다. 할로윈… 그렇다는 건, 먼저 간 이들이 어쩌면 찾아오지 않을까? 릭은 고개를 돌려 벨져를 바라보았다.

“벨져, 곧 떠나간 그들이 그대 곁을 찾아올지도 모르오.”

“할로윈이라서?”

“응! 반드시 올 것이오.”

동화 같은 할로윈의 유례에 관심이 없었던 벨져는 릭에게 쓴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아아- 얼른 할로윈이 왔으면 좋겠소!”

“할로윈 다음날에 남은 간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놀리는 벨져의 말에 릭은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할로윈이 지나면, 추수감사절이 찾아오니 긴 연휴가 시작된다고 그리고 또 마트에 가서 맛있는 것을 잔뜩 사와야 한다며 연휴 계획을 줄줄이 이야기하던 릭은 계획을 전부 털어놓고선, 기지개를 크게 한번 키고서 하늘을 다시 올려다 보았다. 높이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할로윈 당일에도 오늘처럼 비가 내려도 부디 밤에는 맑은 날이 되어, 떠나간 이들이 이곳까지 잘 찾아오기를 바라였다.


할로윈 당일의 일까지 쓰면 종잡을 수 없이 길어질 거 같아서 끊어내기 성공.

뒷이야기는 할로윈 당일에 올리는 걸 목표로… 터벅터벅…터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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