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즈] [릭잭릭/잭릭잭] A Midnight illusion

[사이퍼즈] [릭잭릭/잭릭잭] A Midnight illusion - 1화

모든 이야기에서, 자정은 마법이 풀리는 시간이다.

A Midnight illusion

두 남자의 생각은 과거에서 부유하는 유령 같았다. 특히 릭 톰슨의 경우가 그러했다. 자업자득이란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지, 그때 그냥 지나칠걸, 그런 사념에 사로잡힌 릭의 머릿속은 천천히 기억의 이미지를 뒤로 돌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릭 톰슨은 일렁이는 공간의 틈 사이로 발을 욱여넣었다. 푸른 빛의, 보랏빛을 띠는, 그 어떠한 색도 아닌 벌어진 틈새가 그를 반겼다. 이렇게 된 이유가 뭐지- 도망치듯 거처를 떠난 이유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틀어본 라디오에서는 그리운 음악이 흘러나왔고 빌어먹게도 그가 머물던 거처의 시간은 새벽이었다. 몇 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음악은 마르기 직전의 감수성을 끌어올렸다. 말라가는 우물에 펌프를 설치한 것처럼 말이다. 펌프가 음악이었고, 새벽이라는 시간은 우물물을 끌어 올리려 애쓰는 누군가였다.

음- 그녀의 흑발은 아름다웠지, 낮았던 목소리도 듣기 좋았고, 생각해보니 그때 집에 지갑을 두고 갔었는데- 오, 맞아 집. 릭 톰슨은 아찔하게도 전쟁에 참여한 뒤로 방치되어버린 집을 떠올렸다. 그건 정말이지 의식의 흐름적인 사고였다. 사고, 사고, 사고, 생각할 때의 그 사고도 맞고 교통사고의 그 사고도 맞았다. 끔찍하군, 릭이 중얼거렸다.

릭 톰슨은 새벽을 떠나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릭 톰슨이 오후 10시 30분 언저리 템스강변에 서 있는 이유였다.

아무리 그의 코드네임이 타키온-그러니까 빛보다 빠른 입자-라도 그는 시간을 돌리는 능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침이 오는 것이 싫었고 장담하건대 새벽은 아침으로 변할 것이었다. 결국 릭은 팔목에 찬 시계 중 적당히 밤 시간대의 것을 골라서 공간을 열었다. 일렁이는 공간 너머 안개 낀 런던이 아른거렸다. 릭 톰슨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다른 하늘이 보이는 땅을 디뎠다. 고요하고 샛노란 불빛이 그를 덮쳤다. 시대에 맞지 않는 가스등 빛은 옛 시절의 잔재였다.

반면 잭은 어떠했는가? 물론 릭은 알 수 없겠지만, 당신들을 위해 이 살인마의 생각을 살짝 들여다보자. 잭은 런던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밤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제발, 빌어먹을, 어서 닉스의 장막을 거둬가. 그는 새벽에게 빌었다. 요즘 들어 밤만 되면 뭐든 간에 '쓱싹'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가 미쳐가나? 아니 사실 미쳤지, 아주 잘 돌아버려서 감옥에서 죽었지. 생각해보니 그 녀석들(MI7? 확실히, MI7이-) 나를⋯ 나라고 해야 하나? 그래, 선량한 청년이라고 하자. 선량한 청년을 이쪽 어디쯤에서 질질 끌고 가지 않았나?

잭은 머리의 지끈거림을 느끼며 어둠 속에 웅크려 앉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왜, 요즘 괜찮았잖아. 잭은 이 문제가 자신이 클리브의 자아를 좀먹는 사태와 관련이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난 원하지 않았어, 젠장.

결론적으로 도망은 실패했다. 잭은 언젠가 클리브의 뇌 속에서 보았던 여행자를 떠올렸다. 당장 아침인 나라로 떠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빌어먹게도- 빌어먹게도- 난 변신 능력자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에 열이 몰렸다. 뇌가 뜨끈뜨끈해지는 느낌이었다.

잭이 자신을 떠올리든 말든 알 길이 없는 릭 톰슨은 그저 노란 불빛 아래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또한 다행스럽게도, 어둠 속에 웅크린 사람을 발견했다. 어쩐지 윈저성에서의 기억이 스쳐 갔다. 음, 번거로워질 것 같은 느낌이군- 릭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미국인으로서 모르는 사람 근처에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이렇게 안개 낀 밤에는 더욱이 말이다. 그럼에도 걸음을 옮기며 말을 붙인 건 친절이었고, 동시에 적절한 거리를 둔 것은 지혜로움이었다.

"괜찮소?"

잭은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떨어져 있는 노란 불빛이 눈앞의 얼굴에 역광을 비췄다. 이목구비도 머리카락 색도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이 목소리 어디서- 익숙한데, 누구지. 붉은 눈이 순간적인 안광을 빛냈다. 잭은 자신의 손을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듣기 좋은 저음이 울렸다.

"아니, 괜찮지 않아."

오, 그 반응에 잠시 탄성을 뱉은 릭은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었다. 혹시라도 일어나라며 손을 내미는 멍청한 짓을 할까 봐 내린 조치였다. 적절한 거리는 언제나- 지혜로움이었다. 릭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약간은 곤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려나?"

잭은 눈앞 남자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걱정한다고 느꼈다. 곤란해하고 있다고도. 그건 좀 생소한 느낌이었다. 잭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릭은 가스등 불빛을 오묘하게 맞고 있는 얼굴을 마주했다. 자신이 빛을 가리고 서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잠시만, 그대 혹시⋯ 클리브 스테플?"

"안타깝게도- 아니야."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떤 의미로는 인상적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한없이 모자랐다. 다른 의미로, 이는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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