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기반

[라이재뉴] 비와 고동

6260자. 마음이 싹트기 시작 한 라이재뉴(CP).

그먼쌒 by 랒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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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yndy Sims

1929년 어느 여름.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이었다.

11시 27분, 천둥번개를 동반한 세찬 비

우르릉 쾅쾅-! 하늘을 가르는 듯한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소년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아무도 없기에 망정이지. 죄라도 지은 듯이 조심스럽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곳저곳을 확인한 보람을 느끼며, 라이언 하트가 큰 한숨 한 번으로 민망한 기색을 가라앉혔다.

라이언이 더 호라이즌에 합류한 후 첫 번째로 방문한 아지트에는 이미 웬만한 가재도구가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곳을 허전한 공간이라 느꼈는데, 필시 가구들에 사용감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새것같이 멀끔한 모양새의 소파에 엉덩이만 어색하게 겨우 걸친 채 라이언이 아지트를 둘러봤다. 천천히 움직이던 시선은 곧 한 곳에서 이동을 멈췄다. 어째서인지 혼자서만 낡아빠진 현관문은 여닫을 때 듣기 싫은 큰 소음을 냈었다. 끼이익-, 하고는.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를 떠올린 라이언이 문에게 싸움이라도 거는 듯이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끄러운 문짝을 어떻게 해버릴 생각을 하는 건지, 누군가 그 소음을 내며 문을 열고 들어오길 바라는 건지.

‘…습해서 그런가.’

생각 없이 달려온 주제에 막상 상황에 직면하려니 가슴이 갑갑해져, 비에 푹 젖은 몸을 소파에 누였다. 벽난로와의 거리 탓에 온기가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비를 피하고 몸을 말리기 위함이었다면 바로 옆에 있던 공중전화 부스로 향해 집에 전화를 했을 것이다. 정수리가 따가울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는 비 사이를 달려 아지트로 온 것은 라이언의 선택이었다.

'이 시간이면, …보통은 학교에 있겠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다녔던 학교인데, 새삼스레 떠올리니 자신과는 처음부터 상관없는 장소였던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불편한 괴리감을 떨쳐낼 방법을 몰랐던 라이언이 그저 힘껏 눈을 감았고, 이내 비를 머금어 무거워진 공기가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세찬 빗줄기 소리가 잠든 라이언이 내는 숨소리를 묻었다.

라이언은 능력이 발현된 후 몇 달이 지난 오늘까지, 제대로 잠을 이룬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12시 07분, 세찬 비

끼이익-.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시끄러운 소음이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알려줬다. 더 호라이즌의 아지트인 이곳에 찾아올만한 사람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니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라이언이 잠에서 깨어난 티를 내지 않은 채 멤버들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을 떠올렸다. 지향점이 흥미로운 시간 능력자와 멍청한 천재, 랬던가.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었지만, 자신의 합류로 네 명이 되었다던 빈약한 구성이니 굳이 더 물어보진 않았다. 나는 뭐라고 소개되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지금의 라이언에게 그 아이의 사고를 따라가기란 힘에 부치는 일이었기에 상상은 짧게 끝났다. 아니, 나중이라고 따라갈 수 있을까?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라이언은 이것만큼은 확신했다. 그 아이는, 재뉴어리 칸트는 너무나도 남달랐다. 머릿 속에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라이언의 감고 있던 눈이 절로 떠졌다. 가슴이 갑갑해져 눈이라도 떠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자는 줄 알았는데, 내가 깨웠니?"

천장이 있어야 할 시야에 들어와 있는 희멀끔한 얼굴에 놀란 라이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등받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인기척의 정체를 확인 하던 재뉴어리는 그 모습을 보고 웃지도 놀리지도 않았다. 쪽팔려…. 그 담담한 태도가 라이언의 얼굴에 되려 열기를 더했다.

"비 맞았나 본데 왜 그러고 있어? 머리라도 좀 닦지."

"아니, 여기 닦을만한 게 없………!"

굴러떨어진 몸을 재빠르게 일으켜 앉은 라이언이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쓰며 시선을 창문 밖으로 돌렸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보고 싶어지기라도 한 건, 아니다. 걸음마를 뗀 이후로 비 오는 날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보다 비를 더 심하게 맞은 것처럼 보이는 재뉴어리를 마주 보는 것보단 이 편이 옳은 것이라는 무의식적 판단의 실행이었다. 난롯불에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이라고 그가 착각하길 바라며 벽난로 쪽으로 조금씩 자리를 고쳐 앉았다. 손을 갖다 대지 않아도 느껴지는 얼굴의 열기가 원망스러웠다.

"없기는, 자."

시야 안으로 들어온 하얀 손이 건네는 보송한 수건을 받아들었다. 재뉴어리가 들어간 방문을 닫아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전신에 감돌던 뻣뻣한 기운이 가셨다.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라이언이 미끄러지듯 소파에 몸을 누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잠든 상태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드는 자극이었다. 풍성한 셔츠 소매가 빗물을 잔뜩 머금어 드러난 가느다란 팔선이 떠올랐다. 아니, 시각적인 자극 말고, 그 아이의 존재가. 잡생각을 수건으로 날려버릴 요량인지 라이언이 아직도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비벼 닦았다. 크게 심호흡을 해도, 시야에 어둠이 잡히지 않게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심장에 감긴듯한 갑갑함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그칠 줄 모르는 비가 형성한 습도는 불편한 감각을 배가시켰다.

라이언은 재뉴어리를 대할 때, 남들에게선 생전 겪은 적이 없던 어려움을 겪었다.

12시 19분, 여전히 세찬 비

“다른 애들은 가끔씩 와도 오래 안 머물고, 나는 주로 안쪽 방을 써. 뭐, 아직 제대로 된 활동이랄 건 없으니까.”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재뉴어리의 대답을 들은 라이언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라 소개한 재뉴어리가 라이언과 다른 소파에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신문을 집으며 나직하게 감탄사를 뱉었다. 현관 바닥에 있던 것을 라이언이 주워 올려둔 것이었다.

“현관에 없길래 나는 헨리가 왔나 싶었거든? 멜빈은 이런 거 봐도 절대 안 건드린단 말이야. 못 본 거면 말도 안 해, 뻔히 봐 놓고는. 그런 주제에 누구더러 사회적 지능이 떨어지니 뭐니…. 그에 비해, 넌 이런 센스가 있구나? 다시 봤어.”

“어…, 고마…워?”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줘.”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끝낸 재뉴어리가 신문을 크게 펼쳐 들더니 조용히 정독하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 맞는 상황인가? 상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덤덤하게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라이언은 이것이 남다른 사람의 냉대 방식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고야 말았다. 라이언의 논리에 따르면, 재뉴어리는 라이언을 좋게 봐줄 수가 없을 터였다. 능력으로 사고를 내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라이언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고, 그런 자신을 찾아온 재뉴어리를 향하는 말들도 결코 곱지 못했다.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장점을 여태껏 발휘하지 못 한 라이언은 재뉴어리의 죄인이었다.

"………저기, 있잖아."

"…왜?"

끊어진 말이 한참을 이어지지 않자 신문을 향해 내리 깔려있던 붉은 눈동자가 라이언을 향했다. 아, 또다. 저 눈만 마주하면 말이 안 나와. 라이언은 재뉴어리와의 첫 만남 이후, 그의 능력이 정신적인 압박을 줘 기선을 제압하는 능력일 거라 확신했었다. 그런 능력이 아니라니 이것도 제 발 저린 사람의 핑계에 불과함을 이제는 안다. 피하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 뜬 눈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일상이 된 심호흡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본다. 몸속에 있는 숨을 모두 뱉어낼 기세로. 그리고,

"…미안해."

"그래, 용서할게."

"………무슨 얘긴 줄 알고?"

“읽을 것도 없이 뻔하지. …아, 혹시 잘못을 직접 고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 들어줄게.”

들고 있던 신문을 접어 테이블에 내려두며 재뉴어리가 라이언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혹시 화가 났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 편인가? 머리가 지끈거려오기 시작한 라이언이 곧 할 수도 없는 속마음 읽기를 관두고 해야만 하는 사과에 집중했다.

"그, 처음에 너한테 못되게 말했던 것도, 이제서야 사과하는 것도…. 내가 힘들다고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어. 정말 미안해."

“그래, 용서할게. 이제 됐지?”

물이 흐르다 못해 튀는 것 같은 전개를 따라가지 못 한 라이언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재뉴어리가 다시 신문을 펴들었다. 애초에 제정신도 아니었던 애가 하는 말에 상처를 받은 일이 없었다는 신랄한 첨언에 라이언은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 일로 사과를 듣자니 웃긴다. 내가 너한테 한 말도 못됐었는데. 피장파장 아니니?"

난 사과 안 할 거야. 재뉴어리가 우습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같이 웃을만한 상황인지 긴가민가해 하면서도, 라이언이 처음 본 그의 웃음에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못됐다는 자각은 있었구나. 재뉴어리가 라이언을 찾아와 갖게 된 둘의 첫 만남은 고작 몇 주 전의 일이었기에 라이언은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몇 년이 지나도, 그만큼 살 수만 있다면 몇 십 년이 지나고서도 잊지 못할 충격일 거라 확신했다.

라이언은 몇 달 전, 능력이 발현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에게 큰 상해를 입혔다. 그저 운 나쁜 사고였을 뿐이란다. 그 친구에 대한 보상은 어른들이 할 테니 너는 네 생각만 하렴. 모두가 라이언에게 '널 위해서' 살라고 말했다. 남을 피떡으로 만든 내가 뭐가 예쁘다고? 자신이 해를 가한 상대가 불구가 되어버린 상황에 라이언은 큰 공포를 느꼈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웠고, 그에겐 죄스러웠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감정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고, 어른들의 부드러운 위로는 단단한 돌로 뒤덮인 피부에 전혀 닿지 못 했다.

"난 어른들처럼 '널 위해서' 같은 말은 안 해. 네가 아닌 애덤이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

그런 와중에 들은 한 가혹한 직언이 몇 달을 울어 메마른 줄 알았던 라이언의 눈물샘을 다시금 터뜨렸다. 미안해서? 서러워서? 정신없이 울었던 탓인지 라이언은 통곡의 이유를 아직까지도 알지 못했으나, 한순간 심장이 저릿해왔던 감각만큼은 기억했다. 아팠다. 재뉴어리의 말은 돌 마저도 꿰뚫는 날카로운 비수였다. 그제야 라이언은 공포와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가졌다.

자신에의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애덤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죄책감에 도망치고 싶어질 때마다 떠오르는 재뉴어리의 목소리가 라이언의 퇴로를 틀어막았다. 그러기를 몇 주, 병실 문밖에서 숨죽여 울던 라이언은 오늘 애덤으로부터 티슈를 건네받았다. 그의 인사를 받고서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라이언의 발길은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아지트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목구멍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던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그저 빗속을 내달렸다.

"사과하기로 잘 결심했어. 네가 앞으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그게 마음에 걸려서 못 나오면 안 되지."

라이언은 재뉴어리가 말하는 "앞으로"가 다른 사람들의 것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성장기가 채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받은 시한부 선고를 아직까지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굳어가는 공포를 모르는 사람들이 위로랍시고 자신의 미래를 말하는 것 자체가 기만 같았고, 들으면 화가 났다. 그걸 모르기는 이 아이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상했다.

"…혹시 네 능력으로, 네가 하는 모든 말을 긍정하게 만들 수도 있어?"

"아니."

"그렇구나."

재뉴어리는 라이언이 처한 상황을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았다. 그저 똑바로 바라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했다. 그가 말하는 미래는 당장에라도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라이언은 재뉴어리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고마워.”

“별말씀을.”

무슨 얘긴 줄 알고? 맥락도 없이 무심코 튀어나온 라이언의 감사 인사를 재뉴어리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이 아이의 전개는 따라가기에 벅차다. 생각을 따라가기 힘들어도 숨이 차오르는 게 맞는 건가? 어느 틈엔가 사라졌던 갑갑함이 심장을 다시금 은은하게 감싸오기 시작했다. 콩닥. 콩닥. 그러면서도 심장은 여전히, 아니, 평소보다도 잘 뛰어서 자신의 고동을 라이언의 전신으로 퍼뜨렸다.

머릿속까지 울려오는 고동에 집중하니, 빗소리는 라이언에게서 자연히 멀어졌다.

16시 07분, 서서히 잦아드는 비

다소 잔잔해진 빗소리가 귀에, 낯선 천장이 라이언의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어디인지, 몽롱한 정신으로는 한순간에 파악할 수 없어 그저 천천히 눈만 깜빡였다. 잠에서 채 깨어나지 못 한 라이언의 몸을 단숨에 일으킨 건 이번에도 그 아이의 목소리였다.

"푹 잤니? 피곤해 보여서 안 깨웠어."

"…계속 여기 있었어?"

"너 잠들곤 방에 들어갔다가, 방금 다시 나온 참이야."

언제 누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기절하듯 잠든 저를 쭉 지켜보고 있었던 건 아니라니, 애써 태연한 척 말하던 라이언의 민망한 기색이 절반이나마 가라앉았다. 종일 비를 쏟아내고도 아직 부족한 건지 하늘에는 여전히 회색빛 비구름이 가득했다. 창밖을 보고 시간을 가늠하기를 포기한 라이언이 시계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재뉴어리가 라이언의 사고보다 몇 걸음 앞선 대답을 해 주었다.

"집에서 걱정 안 하시게 전화는 해뒀어. 넌 4시간 정도 잤고."

맞다, 집. 그저 시간을 알고자 했던 라이언이 자신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뒤늦게 떠올리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재뉴어리는 라이언이 문제를 눈치채기도 전에 상황을 정리해버렸고, 멋쩍음에 둘 곳을 몰라 뒷머리만 긁적이던 그의 손에 갓 태운 코코아 잔을 쥐어주기까지 했다.

“타이밍 좋게 일어났네. 커피 안 마시지?”

“…그것도 능력으로 알아낸 거야?”

“아니? 그냥 그렇게 생겼어, 너.”

깔끔하게 받아낸 용서가 무색하게도 라이언은 사무치는 어색함을 아직껏 떨쳐내지 못했다. 미처 못 했던 사과도 감사도 다 했는데, 잘 지낼 일만 남았는데. 입에게 입이 있다면 왜 떨어지지를 않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힘겹게 입을 연 쪽은 라이언이었는데, 재뉴어리가 한 공간에 있는 라이언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뭘 보고 있냐는 라이언의 질문에 창밖을 응시하던 재뉴어리가 비를 보고 있다고 대답했다.

"빗줄기의 모양새를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아, 냄새도 좋아해. 시원하거든."

생각해 본 적 없는 신기한 관점이었지만 지금의 라이언에게는 재뉴어리를 따라서 비 감상을 시도해 볼 여력이 없었다.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자니 시야에 같이 들어오는 새하얀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겼다가도, 언제고 눈을 마주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절로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빗소리는 스스로의 심장 소리에 묻혔고, 비 냄새는 달콤한 코코아 향에 묻혔다. 온 감각이 지배를 당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더 이상 헛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는 것이 고작이었다.

"네 침대를 하나 들여놓는 게 어때? 계속 소파에서 잘 순 없잖아."

"오, 오늘은 잠깐 졸았던 거야."

"집에서 잘 못 자지?"

침까지 흘리며 자는 걸 보니 안 봐도 뻔하다며 재뉴어리가 짧게 키득거렸다. 두 번째로 본 그의 웃음에선 짓궂음이 배어 나왔다.

라이언은 재뉴어리를 대할 때, 남들에게선 생전 겪은 적이 없던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는 무얼까. 잘못을 해놓고도 사과를 제때 못 해서 미안한 마음에? 무엇이 고마운지 제대로 전하지 못했는데도 이해를 받아 겸연쩍은 마음에? 계속해서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 민망한 마음에? 이것들은 재뉴어리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발생한 적이 있는, 혹은 그럴 가능성이 다분한 일이었고 라이언은 이 정도 일로 사람을 대하는 걸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재뉴어리는, 이 아이의 경우는, 이상했다.

"코코아는 입에 맞니? 내가 안 마셔서,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

심장을 감싼 갑갑한 감각은 지금도 여전했다. 벌써 적응을 한 건지 약해진 건지, 견디지 못할 정도의 불편함은 아니었다. 다만 그 갑갑함은 라이언의 심장 고동 소리를 배가시켰고, 그 소리가 옆 사람에게까지 들리는 건 아닐지 걱정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전하고 싶은 말들을 전하지 못 한 탓이라 생각했는데, 이 갑갑함에 다른 원인이 있는 걸까? 아니면, 재뉴어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달리 또 있는 걸까?

"………달아."

"우유 있으니까 섞어 먹든가."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재뉴어리가 내어준 코코아는 마시기 힘들 정도로 달았다. 라이언이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며칠 뒤에 가문의 사용인이 심혈을 기울인 레시피대로 타 준 코코아를 마신 후였다.

"달아서………좋아."

"그럼 다행이고."

혀를 녹일 듯한 단 맛은 복잡한 생각들까지도 녹여버렸다. 여전히 느껴지는 갑갑한 고동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던 라이언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제야 어느샌가 비가 그친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각조각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포근한 오후의 햇살이 온 거실을 비추었고, 그 빛을 받은 재뉴어리의 새하얀 머리카락은 눈이 시릴 정도로 밝게 빛났다. 일순 라이언의 머릿속에는 새하얀 태양이 떠올랐다. 눈이 마주칠지 모른다는 걱정도 눈이 부시다는 감각도 잊은 채, 그저 가만히 바라봤다.

라이언은 오늘, 이 다디단 코코아를 끝까지 맛있게 마셨다.


사담

220919에 포타에 올렸던 글 수정재업 했습니다

재뉴어리 출시 전에 썼던 글이라서,,,캐해도 바뀌고 뇌피셜 잔설정도 바뀌고 해서 도저히 그냥 복붙 해올수가 없겠더라구요

1년도 더 된 글이다보니 맘에 안 드는 부분도 많고,,,깎고 다듬고 하다보니 1/3은 고친것같네요

쫌 더 맘에 들게 나와서 해피합니다

(당시 후기) 때는 라재에 한창 미쳐살던 20년도(지금도 안 미친건 아님

1번짤의 썰이 너무 맘에 들었고 언젠간 풀어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둘이 저렇게 같은 침대에 눕게 된다는 상황이,,,너무 어거지인거임,,,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개연성이 안 떠올라

글고 저건 재뉴어리에 대한 뇌피셜날조위주인데다가 재뉴어리 시점?으로 생각했던 썰이라서 글로 옮기려니 쫌 어렵기도 하고 그래서,,,결국 폐기했다네요

대신 일부 살리고 싶었던 포인트만 뽑았습니다

1 재뉴어리 땜에 긴장해서 머릿속은 난리난와중에 몸은 굳어있는 라이언

2 재뉴어리 덕에 긴장 풀려서 곤히 잠든 라이언

이 두 포인트를 올해 풀었던 다른 썰(23번짤)에 합쳤어요 결과물이 생각보다 맘에 들게 나온것같아 스스로 만족스럽습니다 ㅎ

이거 살리고 이거랑 합치자! 까지만 생각하고 의욕만 앞서 체계없이 써내려가느라,,,(4번짤은 심지어 쓰다가 막판에 생각난거라 중간에 끼워넣음

체감상 3주정도는 하루에 한줄 쓸까말까 했던것같아요

붙잡은지 1달이 넘어가니까 너무 지겨워져서,,,그렇다고 드랍하자니 아까워서,,,마지막 1500자 정도는 하루이틀정도? 빡쎄게 썼네요

그래서 어제 일단 포스트 발행해버리고(일단 끝냈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음) 이 후기 쓰기 직전까지도 두세번정도 수정했어요 하하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서 오래 걸리냐고 자괴감도 느꼈는데 다 쓰고보니 실제로 지금껏 써본 글중에 두번째로 많은 분량이더라구요 오래 걸릴만했죠 라재에 대해 풀고싶은 말이 많았나봅니다

어제 얼레벌레 발행하고는 생각도 못한 과분한 관심을 받아버려서 ㅠㅠ 오늘 하루종일 행복했어요

저 좋자고 쓴 글인데 함께 즐겨주시고 좋아해주시니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저 평생 라재하려구요

그때까지 함께 해주시면 더더욱 감사합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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