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

2021 다이무스 생일 글

eclipse by 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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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전후로 우체통에 꽂혀있는 안부편지들이 꾸준히 상기시켜주는 그 날짜를 다이무스는 매번 잊었다. 지난한 전쟁의 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선물들을 보고서야 어제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하루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다이무스의 생일에 시큰둥한 것은 실상 그 자신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경쓸 여유가 없었던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조차도 안쓰러운 사연이 되어 오며가며 축하를 많이 들었다. 무뚝뚝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든 묘하게 인기를 끌어온 그라 영국에 와서도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 좀체 없었다. 점심시간에는 마를렌이 찾아와 과시하듯 르블랑 부띠끄의 넥타이를 내밀기도 했다. 다이무스는 답례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이는 똑같이 예를 차려 의연하게 인사를 받았지만 내심 어깨가 추켜 올라가 기뻐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타지에서 생일을 맞이한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갔다. 선물은 한결같이 과분하고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했으나 오늘 진정으로 다이무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일찍 퇴근해도 좋다는 한 마디였다. 짐짓 점잖게 사양하던 그는 오후 6시경 선물을 한 상자 가득 챙겨들고 회사에서 쫓겨나듯 나오게 됐다. 타라는 유머감각이 있는 상사였으나 쓸데없는 일로 실랑이를 하느라 자신의 업무가 방해받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동료들, 아니 드렉슬러는 그 대접이 부러운 듯했으나 평소에 뼈빠지게 구르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호사라는 걸 알아 불만을 갖진 않았다. 사무실에 가볍게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순간까지 뒤통수에 축하한다, 지나가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무슨 날이든 다이무스는 성실히 업무에 임했고, 그러면 하루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금방 저물었다. 생일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명 한 명의 생일이 대단한 경사가 되지 못하는 시대였다. 가문의 사정이 좋지 않다고는 해도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한다면 본가에서 매년 샴페인 타워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이무스는 호화로운 생일은 원치 않았다. 그런 건 능력자도 쾌검사도 아닌 전쟁과는 하등 거리가 먼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날이 추워지자 하루가 다르게 낮이 짧아졌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뒷덜미를 찌르는 따가운 노을빛에 어렴풋이 노곤함을 느끼며 주머니를 더듬던 다이무스는 문득 멈춰섰다. 못 보던 종잇장들이 우편함에 마구잡이로 꽂혀있던 까닭이다. 봉투에조차 넣지 않은 게 성의는 둘째치고 아무래도 누가 직접 넣고 간 것 같았다. 비라도 내렸더라면 분명 못 쓰게 되었을 것이다. 다이무스는 종잇장의 정체가 무엇인지, 쓰레기는 아닌지 고민하다 가까이 다가가 한 손으로 상자를 받친 채 그것들을 간신히 찢지 않고 꺼냈다.

 

피아노 독주곡 악보였다.

닫힌 현관문 너머에서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고생해가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안 전화는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악을 쓰듯 울려왔다. 덕분에 다이무스는 불을 켜거나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선물이 든 상자를 발치에 내려놓기만 하고 수화기를 집어들어야 했다. 다이무스 홀든입니다. 형식적인 인삿말을 내뱉는 목소리에 일면 피곤함이 묻어났다.

“내 선물 봤어?”

이글은 인사 한 마디 없이 대뜸 그런 말을 했다.

“네가 넣은 것인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으나 자체로도 충분한 대답이 된 모양이었다. 아아, 하는 짧은 음성을 끝으로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으면 머지 않아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노어가 피아노를 꼭 배워보고 싶다고 징징대서 악보가 몇 장 생겼거든. 근데 형 피아노 치는 거 좋아하잖아. ”

“…….”

“아, 요즘은 안 치나?”

그 뒤로 이글이 몇 마디 더 떠들었으나 한 귀로 흘려 들었다. 다이무스는 수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끼운 채 악보를 뒤적거렸다. 그 나이대 아이들은 몸을 움직이거나 소리가 나는 걸 배우고 싶어한다. 그걸 뒷받침해줄 보호자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글이 겸사겸사 챙겼다는, 다이무스의 손에 들린 악보는 7살짜리 아이가 칠 만한 악보가 아니었다. 가슴 한 켠이 조금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다이무스가 피아노를 치지 않은지는 꽤 됐다. 곧잘 쳤다고는 하지만 검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로 제대로 된 연주를 해본 적 없으니 그의 실력은 사실 뛰어나다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일 것이다. 그가 더는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이글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가던 청소년 시절의 다이무스를 붙잡고 피아노를 쳐달라 조르던 어린 이글을 기억했다. 놀라울 정도로 새파랗던 눈동자와 특유의 말썽꾸러기 기질이 심술로 변모하여 삐죽 튀어나와 있던 입술, 그 앙증맞은 얼굴로 입을 열어 이해할 수 없는 감상에 젖은 형제에게 비수를 꽂던…….

다이무스는 그에게 뭐라 말해주어야 할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 돌연 악보를 구해다 준 것일까. 그렇게 하면 마음이 가라앉기라도 하듯 악보를 쥔 손으로 미간을 힘주어 누르자 구겨진 미색지가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는 제대로 전해졌는지 이글이 더는 기다리지 않고 크게 목소리를 냈다.

“아무튼~ 칠 거면 쳐 봐.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이글.”

“응?”

이건 엘리노어의 악보가 아니지 않느냐, 이제는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다.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다만 거짓말에는 능통한 이글이 제게도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치는 이유를 모르겠다. 입 안에 맴도는 수많은 서두 중 결국 어떤 것도 내뱉지 못하고 공연히 모난 말을 뱉었다.

“……좀 더 자주 연락해라. 종이를 우편함에 넣으려면 봉투에 먼저 넣고,”

고맙다는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들어차는데, 늘 그랬듯 다이무스의 화법에 싫증을 낼 거라고 생각했던 이글이 돌연 말을 끊고 웃었다. 대단히 고통스러운 대화를 하듯 얼굴을 찌푸린 채로 다이무스는 그의 웃음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어 웃기보다도, 이글은 짓궂은 장난을 치기 전에는 늘 저렇게 웃었다.

이윽고 숨을 길게 내쉰 이글이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뭐야, 여기서 더 자주 연락을 하라고?”

나이 드니까 새삼스럽게 보고 싶기라도 해? 다이무스는 테이블을 짚은 자신의 손끝에 차츰 힘이 실려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지켜보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거치대에 수화기가 덜컥 걸리는 소리를 끝으로 집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그냥 평소처럼 실없는 농담이라 질책하고 넘기면 될 것을. 꼭 지금만이 아니어도 다이무스는 가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에 꼬리를 밟혔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는 늘 이글에게 약했고, 이번에도 그랬을 뿐이었다.

 

*

 

다이무스 홀든은 이제 연주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피아노의 먼지를 털고 정기적으로 조율사를 불러 느슨해진 현을 조였다. 나이 든 조율사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 건반을 눌러가며 반주를 하듯 중얼거렸다. 잘 관리된 악기는 사람의 손을 타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때는 할 말이 없어 그렇습니까, 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보면대 위에 악보를 늘어놓으니 피아노가 한결 생기 넘쳐 보였다. 왠지 연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끝으로 하얀 건반들을 쓸어보며 다이무스는 악보의 첫 마디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3번. 그는 슈베르트의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괴테의 시에 붙인 가곡들은 지금도 그의 취향에 얼추 들어맞는 편이었다. 막 성인이 되었을 적에는 그들을 동경하며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시를 쓴 적도 있었다. 오늘도 나의 의식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예술적 고뇌와 번민과 함께, 도나우 강변의 하얀 종이배 위에 있다…….

관리가 잘 된 하얀 건반은 익히 알고 있는 감각과 함께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조율을 하듯 첫 음을 울린 투박한 손가락이 한참의 침묵 끝에 다음 음계로 넘어갔다. 선율은 어설프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 날 다이무스는 비스듬히 선 채로,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건반을 띄엄띄엄 누르며 그 악보를 끝까지 연주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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