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지 않는 소년

2021

eclipse by 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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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과 물로는 부족하다. 손에 쥔 것은 모조리 삼키고 녹여야 힘을 얻을 수 있다. 꽃을 피울 시간은 없다.

플로리안의 줄기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

 

 

거목을 집어삼킨 그 날 플로리안은 꿈을 꾸었다. 넓은 들판에는 작고 수수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잔뜩 피어있고, 그 끝없는 들판에서 자신은 누군가의 손을 잡은 채 달리고 있었다. 눈 앞을 가득 채운 수천 송이의 꽃을 피운 게 누구인지는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해낸 것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뺨을 간지럽혔다.

그런데 손을 맞잡은 채 쫓아오는 이의 걸음이 자꾸만 거추장스럽게 늘어졌다. 방금 전까지 그와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하며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을 텐데, 플로리안은 그만 그 손을 떨쳐내고 홀로 달려나가고 싶었다. 행복한 순간을 누군가에게 뺏기는 것은 이제 지겨웠다. 영원히 예쁨받아야 할 자신이 누군가를 챙겨야 한다는 사실도 싫었다. 플로리안은 달리던 속도를 조금 늦춰 뒤를 돌아보았다. 반짝거리는 오후의 노란 햇살 그 아래 그의 여동생이 있었다. 아니, 이제는 우리의 여동생이다. 그 소년이 그러했던 만큼은 아니어도 플로리안도 미아만큼은 퍽 귀엽게 느꼈다. 어머니의 애정을 나눠 갖는다는 사실에서는 역겹고 병약한 첫 동생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안겨줄 생명력을 생각하노라면 선심을 베풀어 동생이라 불러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플로리안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플로리안은 미아를 원했으나 미아는 플로리안을 생각하지조차 않았다. 오빠를 돌려줘. 그 애의 동공이 섬뜩하게 조여들더니, 수천 갈래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바닥을 적셨다. 그가 발을 딛고 있던 꽃밭은 언제부턴가 끈적끈적한 늪이 되어있었다. 플로리안은 썩은 흙의 비린내 사이에서 독초의 냄새를 맡았다.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뇌리에 깊게 쑤셔박혔다. 다 가져가. 다 가져가! 그래도 좋으니까 오빠를, 오빠만큼은…….

어머니가 뜯어헤치고 재조립한 능력일 텐데, 그녀의 손으로는 꽃 한 송이 피워낼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맹렬할 수가. 그의 빈약한 덩쿨로는 불길과도 같은 그녀의 원망에게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살갗은 가시덩쿨에 너무나 쉽게 찢기고 잡아먹혔다. 몸을 불사르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플로리안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내 생에는 나를 저토록 원하는 이가 있었던가? 나를 사랑하는 이는 있었던가? 나는 누구의 소유인가…….

 

그리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어머니, 어디 가시나요?"

규칙적으로 복도를 울리던 구둣굽소리가 멈췄다. 플로리안은 바로 그 소리를 듣고 실험실에서 막무가내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기를 고민하는 사람처럼 잠시 그 자리에 서있던 옥사나가 고개를 돌렸다. 바쁜 길에 잡은 모양이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플로리안은 순종적으로 눈썹을 늘어뜨린 채 재차 물었다.

"그 아이를 보러 가시는 건가요?"

"그래. 늦게 올 거야."

옥사나는 플로리안이 하루종일 그녀를 기다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선심쓰듯 덧붙이는 목소리가 송구한 나머지 플로리안은 귀끝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때 옥사나가 자신과 닮은 남자아이를 데려와 연구원들에게 살려내기를 명령했을 때 플로리안은 그녀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애정을 빼앗겼다는 질투심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불안정한 정신이 그로 하여금 옥사나의 눈을 피해 첫 과실을 저지르도록 했다. 연구원을 조르는 목소리에는 철이 없었으나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그들의 불안감을 정확히 자극했다. 넘어선 안 될 선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플로리안은 절박했고, 그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결론적으로 플로리안은 옳았다. 과실의 결과는 달았고 옥사나는 그에게 화를 내지도 나무라지도 않았으므로 그는 조금 건방져졌다. 그리고 좀 더 어려졌다.

평소보다 다정한 목소리에 잠시 잊고 있었던 그녀의 목적을 떠올렸다. 그 아이란 플로리안이 차고 있는 팔찌의 두 번째 주인을 가리켰다. 옥사나는 플로리안의 부상이 회복되고 능력이 새롭게 개화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옥사나의 눈길을 온전히 옭아매지 못했다는 사실이 플로리안은 한없이 아쉽기만 했다. 그래서 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자기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미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속으로만 하던 생각이었다.

"어머니, 그 아이는 언제 이곳으로 데려오실 생각이신가요? 제가 그 아이까지 흡수하게 되면 보다 완벽한 능력을 갖게 될 텐데요. 분명 만족스러우실 거예요."

그리고 힘이 부족해 온전히 삼키지 못한 채 내버려두었던 그 소년까지 통째로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플로리안이 말을 맺자 그녀가 가늘고 차분한 눈썹을 추켜올렸다. 너무 건방졌던 게 아닐까 하는 걱정과 달리, 그의 말이 자못 기껍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플로리안은 반사적으로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자신은 분명 사랑스러운 모습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기대감에 달아오른 두 뺨과 초조해져 동그랗게 모인 도톰한 입술, 올려다보는 두 눈과 그 위에 드리운 길고 풍성한 속눈썹. 온몸으로 자신을 경애하는 아이를 내려다보던 옥사나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그러니?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의 주변에서 걷는 연구원들에게 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지령을 내리며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이윽고 그녀의 뒷모습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목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기 전에 플로리안은 황급히 덧붙였다.

"다녀오세요."

이내 천천히 숨을 고르며 팔랑거리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기대감이 꼭 거짓이었던 것처럼 고동이 잦아들었다. 곧 누구라도 노려보고 싶은 기분이 되었으나 플로리안은 감히 그녀의 그림자 끝조차 원망할 수 없었다.

고로 플로리안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자신의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옥사나가 복도 끝 모퉁이로 사라졌을 때쯤에야 홱 몸을 돌렸다. 어수선하게 서 있던 연구원들이 그의 맹렬한 눈빛에 경계하며 멈춰서는 것이 느껴졌다. 흉측한 화상을 뒤집어쓴 채 초라한 덩굴을 뽑아낼 때와는 달랐다. 하긴, 이제 나는 옥사나의 아이니까—사정이 어찌되었든 플로리안이 옥사나에게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플로리안의 시선을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는 그들의 태도가 그의 저열한 자존감을 채워주었다. 플로리안은 쿵쿵 발소리를 내며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의 것이라기에는 음습하고 표독스럽고, 어른의 것이라기에는 심술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

 

 

그 날 플로리안은 뿌리를 보러 갔다.

그를 보호하던 거목은 산산이 쪼개졌고, 거대한 능력마저 플로리안이 몇 할을 빼앗았으므로 시험관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실상 작은 몸뚱이 하나에 불과했다. 이렇게 불안정하고 나약한 몸을 오로지 능력의 근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어삼키지 못하고 내버려두어야 하는 게 내심 억울했다. 플로리안이 검지의 관절을 세워 벽을 툭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연구원들은 그를 만류했다. 그가 시험관을 얇은 유리잔처럼 박살내는 일이 없게끔 벽의 두께를 보강한 게 다름 아닌 자신들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플로리안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이 시험관을 한 번 더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었다. 바로 시험관 안의 소년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소년이 깨어나리라 예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손목에 꽂아넣은 관으로 영양분을 밀어넣고 시험관 안에 산소를 공급해 소년이 죽지 않게끔 했다. 옥사나가 그러길 바라기 때문에. 저 소년 또한 옥사나의 사랑을 받는 한 영원히 어릴 것이다. 플로리안은 자신의 절반 이상을 이루고 있는 그 소년의 몸을 바라보았다.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하얗고 투명한 팔다리를 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왜 병약하고 흉측한 것들을 사랑해주는 걸까? 눈조차 뜨지 못하는 저 남자애 대신, 어머니의 사랑을 거부하는 그 여자애 대신, 그냥…… 이렇게 사랑스럽고, 강하고, 순종적인 나를 사랑해주면 안 되는 걸까?

두꺼운 유리벽에 손을 얹은 채 플로리안은 상냥하게 속삭였다.

"네가 동생을 불러주면 안 될까? 그 애는 네 말은 잘 들을 것 같아."

 

그리고 나한테 줘.

그러면 너희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줄게.

 

사면이 막힌 격리실에 일순 바람이 분 것 같았다.

 

말없는 소년의 발 아래서 꽃잎이 부드럽게 나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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