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보다 빠를 수 있다면
벨져 홀든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레오노르 드렉슬러는 두려우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지 못했던 건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을까.
*
헬리오스 본사에 발을 들이는 건 몇 년 만이었다. 그간 방문하지 않았던 게 빚이라도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문턱을 넘어 다녀야 했고, 종종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와 한 테이블에 앉기도 했다. 질릴 만큼 편지를 보내오던 게 무색하도록 다이무스는 벨져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헤나투 교수를 거쳐 대화했고, 그마저도 작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가끔 눈을 마주치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의 속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벨져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의 바람과 달리 어떤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벨져 홀든만이 해결해야 했다. 다이무스도 이젠 그 사실을 안다.
벨져는 근래 반나절 넘게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건 가야 하는 방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벨져는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 끝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끝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벨져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쓸데없는 사유는 봄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잠깐이면 족했다.
벨져!
늘 그렇듯 다음 목적지로 향하려는 길이었다. 무례하게도 소리쳐 부르는 이름에 벨져는 몸을 돌렸다.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건 자네트의 얼굴이었다. 회사에서부터 여태 뛰어온 건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짧은 머리카락이 흩날려 붙어 있었다. 벨져는 자네트… 크리스티네를 예나 지금이나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은 어렴풋한 부러움을 느꼈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이의 삶의 목표. 제레온이 모든 걸 잊어도 기억할 단 한 사람. 그러니 실은 그조차도 자네트를 향한 감정이 아니라 제레온을 향한 감정이다.
그래서 자네트를 지금처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강하다. 하지만 지금 벨져의 앞에 서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이는 부모의 아픔을 대면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였다.
…벨져 홀든.
어렵사리 운을 뗀 크리스티네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크리스티네의 신세를 생각해 보면 그녀는 누군가에게 제레온의 안부를 물어 듣는 것조차 요원할 테니까. 다만 그녀의 울렁거리는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줄 시간이 벨져에게는 없었다. 벨져는 잠시 크리스티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들은,
…….
사실은 말로 할 필요 없는 것들이지.
그러자 크리스티네가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궜다. 누구도 말을 잇지 않았다. 벨져는 그녀가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몸을 돌릴 때 등 뒤에서는 채 가라앉히지 못한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고, 그 찰나에 전해져오는 절박함에 벨져는 잠깐이나마 무척 감화되었다.
*
지난날의 일이었다. 릭과 벨져는 열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벨져는 릭의 능력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 못 미더웠다. 그러나 릭은 이 상황이 싫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나이에 맞지 않게 들떠 있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해가 진 지 오래라 창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는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열차 여행은 오랜만인 것 같아. 그렇지 않나?
여행이 아니다, 톰슨. 들뜨지 마.
물론 나도 알지. 그렇지만 나는, 뭐… 그대도 알다시피 일부러 타는 게 아니면 열차를 탈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 즐거움을 잊고 살았군.
벨져는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벨져도 여행을 목적으로 열차를 탄 건 어릴 적이 마지막이었다. 뭐라도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 기대했는지 눈치를 살피던 릭은 곧 멋쩍은 기색으로 턱을 괴며 발음을 뭉개 중얼거렸다.
참,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대는 입이 무겁고 가볍기가 순 제멋대로…….
일부러 열차를 타면 그 시간이 아깝지 않나?
그가 들으란 듯 한창 투덜거리던 차에 벨져는 말꼬리를 자르듯 불쑥 물었다. 릭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어 벨져를 바라보던 릭이 곧 어깨를 으쓱였다.
음, 여행할 때는 일분일초가 아까우니 그냥 인적이 드문 곳으로 몰래 움직이곤 했소. 그렇지만 일단 여행지에 도착하면 기차나 택시를 타는 것도 여행의 묘미지.
흐음.
…뭐, 생각해보니 그대가 내 능력을 갖고 있었다면 그대는 그럴 때도 능력을 썼을 것 같군.
아마 그랬겠지.
그러자 릭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기해하는 것도 같았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고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 서로의 차분한 숨소리가 그사이를 채웠다. 곧 그가 헛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그렇게 조바심을 내지? 그대는 지금도 충분히 빠르잖아.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섬광이라 부르는데.
갈 길이 머니까 그만큼 서두르는 거다. 마음 같아선 지금보다도 빨리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군.
그렇지만 그대가 지금보다도 빨라져서, 누구도 그대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너무 외롭지 않겠어?
벨져는 문득 깨달았다. 두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릭은 그의 능력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릭은 마지막 한 마디를 마치 연극 배우의 독백처럼 흘리며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벨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창에는 빛을 받는 제 얼굴이 반투명하게 비쳐 보였고, 릭이 비쳐야 할 부분은 그 자신이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얼굴 대신 그 너머 밤 풍경이 보였다. 그가 경유하는 공간처럼 하염없이 어두운 그림자 안에 교외의 조명만이 별처럼 점점이 찍혀서 하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벨져는 그 광경을 응시하다 읊조렸다.
누구도 날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빨라진다면, 그래서 목적지에 나 홀로 도착한다면…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 마지않는 일이지.
그러자 릭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잊고 있었군. 그대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 목소리에는 탄식이 배어 있다. 그의 말대로 벨져 홀든은 정말이지 그런 사람이었다. 벨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릭 또한 이제는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자세를 고쳐 팔짱을 끼고는 창가에 살짝 고개를 기댔다. 어쨌든 열차는 순간이동 같은 건 못 하니까. 난 열차가 달리는 동안 잠깐 눈 좀 붙여야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라디오 속 앵커의 음성처럼, 먼 타인의 목소리처럼 차츰 잦아들었다. 그렇지만 벨져는 어쩐지 눈을 감아도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릭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열차는 덜컹거리며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좌우의 모든 풍경이 직선적 흔적을 남기며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역에는 해가 뜰 때쯤에야 도착할 것이다. 두 사람은 수많은 사람과 함께 내리면서 종적을 감추고 사라질 것이다.
벨져는 생각한다. 만약 열차의 종점에서 혼자 내린다면 외로울까. 아니, 애초에 혼자 내려야만 한다면 외로움을 느낀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그건 지금 생각해 봐야 의미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여행자가 아니었다. 만일 여행의 종착지에 단숨에 도착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빛보다 빨라서 그의 길에 더 이상 빛이 쫓아오지 못한다 해도, 어떠한 망설임 없이…….
그리고 열차 안의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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