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다이무스 홀든과 형제들

eclipse by 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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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장례식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부모의 떠나는 길을 배웅하는 게 자식의 의무라지만 ‘힘’을 얻게 된 이후로는 그게 적어도 홀든의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으로 옳은 일을 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귀족의 의무는 나이가 들며 차츰 보편 의무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홀든의 형제들은 어쩌면 부모보다 먼저 명을 달리할 거라고.

그건 비극이 아니라 마땅한 도의이자 의무이기도 하다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다이무스는 볼프강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휘청였다.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생소한 감각이 전신을 내달려 지나가고 나면 눈앞에 남은 것은 끔찍한 현실이다.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이미 끝나버린 일들.

신원 미상의 괴한들이 잘츠부르크를 습격하였고, 홀든가는 거의 괴멸하였다… 홀든의 비극은 호외로 팔려나갔다. 전보를 부칠 사람이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신문 파는 아이를 붙잡고 물어보는 게 빠를 지경이었다. 다이무스는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연락이 오지 않는 겁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어리던 문하생들, ‘훈련’을 앞두고 있던 홀든의 청년들, 그들을 가르치던 어른들은 전부 죽었습니까? 그러나 이 타지 한가운데서 어느 한낮 홀든의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온 참혹한 운명에 대해 소상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에는 산 채로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그 다음에는 제 모든 감정이 연소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곧 머리가 차게 식고 이성이 돌아왔다.

이건 몇 년 전 노인을 벤 것에 대한 보복인가? 아니다, 그들은 보복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길에 우리가 있었을 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우리가 필요했고, 습격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혼자만의 치열한 분투 끝에 그 사실을 수긍하게 된 순간에는 별로 슬프지 않았다. 원래 하루아침에 세상이 무너진 사람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무너진 잔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

벨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겠다 했다. 세상의 존망과 아버지의 장례 중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하는가. 두 사람 모두 그 답을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건 다른 문제였다. 벨져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는 것으로 다이무스는 대답을 대신하였다.

송수신기를 통해 몇 차례나 정제되어 감정이 벗겨진 단조로운 음성이 이어졌다.

“소식은 전해 들었어. 형이 수고를 좀 해줘야겠군.”

“그래.”

“…한나는?”

“아직 모른다. 자세한 사항은 직접 가서 파악해 봐야 할 듯하다.”

“알겠어.”

“새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연락하지.”

“그럴 필요 없어. 제때 확인하지도 못할 테니까… 알아서 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 치고 지나치게 건조한 대화가 오가고, 이내 조용해진다. 수화기 너머는 고요하지만 다이무스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기다렸다. 그의 차분한 숨소리가 평정을 잃고 조금 흐트러지는 것을 모른 체 하면서. 어쩌면 이 끔찍하게 무거운 정적 끝에 그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상과는 달리 벨져는 한참 뒤에 들릴 듯 말듯 씹어뱉었다.

“…분하군.”

그 한마디가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분하다. 실로 그랬다. 그들은 눈이 멀었고,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다. 한 번의 실수였으나 그 대가는 너무나 커서 돌이킬 기회조차 없다. 이를 악물고 속삭이는 벨져의 목소리가 얕게 떨렸다. 순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크고 난 이후로는 좀처럼 보지 못한, 제 성에 못 이겨 금세 얼룩덜룩해지던 그 얼굴. 그의 감정에 공연히 불을 지피고 싶지 않아서 다이무스는 침묵했다. 그러나 입을 연다고 해서 나올 말도 달리 없다. 지키지 못한 이가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가봐야 해.”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을 갈무리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혹여나 전화가 끊어질까 다이무스는 자기도 모르게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벨져.”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단어를 고를 새도 없이 가장 나약한 본심이 얼굴을 비춘다.

“몸조심하고.”

“…그래.”

매몰차게 끊어질 것 같던 전화는 잠깐의 틈을 두고 끊어졌다.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규칙적인 신호음을 한참이나 듣고 있던 다이무스는 붙잡고 있던 수화기를 떨어뜨리듯 내려놓았다.

작전이 끝나자마자 오스트리아로 출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회사는 일단 대기하라는 답을 보내왔다. 개인의 비극보다야 안타리우스의 행적을 파악하는 게 우선일 테다. 그 개인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사정을 들은 이글은 먼저 본가로 갈 수도 있었지만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피차 목적지는 같고, 가문의 결정권자가 하루아침에 뒤바뀐 지금 다이무스가 본가에 도착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을 테니까. 다만 독일에 발이 묶여있는 동안 두 사람은 전에 없이 예민하고 날카로워졌다.

회사가 양해를 구한 건 고작 이틀이었다. 그 시간동안 해소할 길 없는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서 곪아가고 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뭘 어떻게 해, 하던 대로 해야지. 나는 연합에서, 형은 회사에서.”

“네가 지금이라도 회사로 들어온다면…….”

“형도 이젠 알잖아. 거기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거.”

아무도 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아서 두 사람이 묵는 숙소는 어두컴컴했다. 달빛에 비친 이글의 반쪽짜리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이글은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그가 형편 좋은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탐탁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말을 꺼내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곧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오늘 한발짝도 이동하지 못하고 몇 차례의 전보와 전화만 주고받았기 때문에 그는 이미 지칠 만큼 지쳐 있었다. 다이무스의 반응이 신경을 건드렸는지 이글이 비꼬듯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까지 와서도 회사 이야기가 나오나 보네? 명왕 그 늙은이의 결정으로 우리 가족이 지금 어떻게 됐는데?”

“회사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내가 네게 회사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는 건 어디까지나 너를 걱정해서…….”

“걱정? 하하하!”

이글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말꼬리를 끊었다. 오랜만에 듣는 웃음이 반갑기는커녕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리고.

“그래, 퍽이나 걱정되시겠어. 그냥 자기 눈에 안 보이니까 초조한 거지. 형은 그럴 때면 아버지랑 판박이란 말이야. 형은…….”

“이글!!”

아버지, 그 단어가 입에 오르는 순간 다이무스는 자기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 고함을 쳤다. 이글은 눈을 부릅떴다가, 곧 얼굴을 구긴 채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옆모습이 꼭 울음을 참는 아이 같아 화가 치민 와중에도 가슴 한켠이 조여왔다. 그러나 이글은 짧은 침묵 끝에 공연히 머리를 헤집고선 억누른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회사엔 안 가.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거든. 우리끼리여도 어떻게든 되겠지. 적어도 세 명은 살았잖아.”

“…….”

“너무 걱정 마셔, 난 누구처럼 다른 사람 뒤 봐주느라 자기 사정 못 챙기는 사람은 아니니까.”

신랄한 빈정거림에 말문이 막혔다. 다이무스가 바로 입을 열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는 동안 이글은 온갖 감정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 시선을 마주하다 휙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그가 다이무스를 지나쳐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다이무스는 언성을 높이며 이글의 뒤를 쫓았다.

“멋대로 또 어딜 가는 거냐!”

“씨발, 보면 몰라! 그 궁상맞은 얼굴 보기 싫어서 나가잖아!”

그리고 방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질 듯 쾅 닫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 안에서는 멀어지는 발소리와 함께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다이무스는 단전에서부터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꾹 삼키고 마른 얼굴을 연신 문질렀다. 궁상맞은 얼굴이라.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면 어두운 유리창에 얼굴이 어렴풋하게 비쳐 보였다. 제가 알던 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지치고 좌절한 남자 하나가 그곳에 서 있었다.

*

눈물이 나지 않는다. 아마 셋 중 누구도 울지 않겠지. 우리는 더 이상 가문의 그늘에서 자라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가문의 수족이었고 검이었다. 이번에도 그래야만 했을 텐데.

이글은 자정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고, 다이무스는 불 꺼진 방에서 술잔을 쥔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 영국에서부터 전보가 도달해야 오스트리아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글의 말이 옳다. 나는 빠르지 않고, 자유롭지 않고, 가볍지 않다. 그래서 아버지가 명을 달리하신 지금에도 이곳에 발이 묶여 있다. 누굴 원망해야 하는가. 비합리적인 분노 위로 여느 때보다 선명하게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함정 속으로 등을 떠밀었던 브뤼노 올랑, 그 발걸음을 이끌던 앤지 헌트, 베어 넘겼던 독일군들의 마지막 얼굴, 그리고 최후의 종을 울리기 위해 당도한 어린 심판관… 그러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거칠게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지운다.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고작 이런 연민에 빠지기 위해 술을 꺼낸 게 아니었다. 술은 오로지 불면을 지우고 고통을 잊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며칠 째 잠을 설치고 있었다. 오늘은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빨리 잠들어야겠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이글도 말만 저렇게 할 뿐인지 꽤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테다. 연합에서의 일을 해결하고 나면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겠지. 벨져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있으니 이글에게처럼 대단한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그도 이제는 가문의 부름에 무시로 일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벨져와 이글을 좀 더 가까이 묶어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걱정하는 척을 한다니. 진실로 걱정하고 있는데. 더 잃기라도 할까봐 진실로 두려워하고 있는데.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떠올린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 위해선 그것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곱씹는 것이 불가피하다.

다이무스는 어느샌가 비어있는 잔에 시끄럽게 술을 따랐다. 취하지 않았는데도 온갖 소음과 음성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재차 술잔을 기울이면 독한 알코올에 목이 타는 듯하지만 정작 취기는 조금도 돌지 않았다. 턱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다이무스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다. 비극적이게도 여전히 또렷한 정신으로 그는 자문한다.

하지만… 왜?

도대체 왜 그래야 했단 말인가?

지키고 싶었던 모든 것들은 전부 시대의 광풍에 휩쓸려 스러져간다.

그렇게나 큰 욕심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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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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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경받는 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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