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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클] 로맨스의 결여

a poached egg by 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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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클리브 스테플은 자신이 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잭은, 엄밀히 말해 새로이 육체를 얻어 독립한 잭은, 클리브의 좋은 파트너였다. 잭은 일머리가 좋아서 사실상 재사회화에 가까운 자질구레한 과정들도 무사히 해냈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클리브의 건강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또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었지만, 밤일도 잘했다.


그렇게 잭과 클리브의 연애는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잭은 충분히 신사적이었고 클리브 역시 그것을 잘 알았다. 다만, 마치 생선 가시가 목구멍 한가운데에 딱 걸린 것처럼, 클리브는 잭이 자신을 원하듯이 자신이 잭을 원하는 그런 동치의 관계는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었다.


클리브는 이 일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가장 고르기 쉬운 선택지를 택했다.


-


클리브, 난 정신과 의사이지 상담사가 아니야. 툴툴대는 대니를 앞에 두고 그래서 손수 점심도 내가 사주는 거 아니겠느냐고 달래는 클리브의 태도는 여느 때처럼 가벼워 보였다. 하여간 웃기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대니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서, 파트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문제인 거 같으시다?


…그렇게 말하니 내가 엄청 나쁜 사람이 된 거 같지만, 뭐, 그래.


그렇지만 너희 두 사람은 사이가 좋잖아.


바로 그게 문제야. 우리는 분명 사이가 좋지만, 뭔가, 뭔가 잭이 나에게 해주는 것만큼 내가 잭에게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특히나 정서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 직접 대화해볼 생각은 안 해봤어?


못해봤지. 상상할 수 있어? 갑자기 저녁에 중대한 일이 있다며 상대방이 나를 불러내더니 ‘사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가 널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아’라고 말하면, 그 상대방은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렇다고 이 모든 걸 나한테 이야기한다고 상황이 갑자기 해결되진 않아, 클리브.


알지, 나도 안다고! 그래도, 넌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날 비웃거나 내 고민을 웃어넘기지 않을 사실상 유일한 사람이잖아.


대니는 클리브의 방어기제를 한창 꿰뚫어 보고도 남을 정도로 그와 친한 사이였다. 클리브의 청산유수와도 같은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이 모든 게 한없이 진지해지려는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가장의 일환이기도 하다는 걸 대니는 이제 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대니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말해봐.


음?


무엇이 너로 하여금 네가 네 파트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하는지, 어디 한 번 전부 다 말해보라고.


대니는 여전히 잭의 호칭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좀 난감해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번엔 클리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흠, 흠. 우선, 그, 아, 오해하지 말라고 일단 쐐기부터 박는 건데, 섹스가 무턱대고 싫은 건 아냐. 이, 이건 중요한 문제지, 내가 섹스를 강요받고 있는 건 아닌 거니까! 다만 특종이 눈앞에 있다면, 당연히 욕구를 제쳐두고 그 특종을 잡으러 가야지. 안 그래?


공감의 여부와는 별개로, 대니가 진지하게 경청하며 더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손짓을 보내자, 클리브는 순순히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과한 일 욕심이 사적인 인간관계를 망가뜨린 경우는 워낙 허다했지만, 이게 반복되다 보니 자기 자신이 뭔가 하자가 있는 인간인 건 아닌지 스스로 곱씹게 되었다는 점, 그런데 지금 잭과의 연애는 다르다는 점, 이전과는 달리 자신이 이 관계에 온전히 신경을 쏟으며 매여 있지 않아도 잘 유지되고 있는 이 관계의 모든 요소가 문득 참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는 점 등등.


본래 한 시간만 만나고 말 예정이었던 점심 식사는 어느새 만난 지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대니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 봐야 했기에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대니가 일찍이 말했듯이, 이것은 누가 어떻게 해결책을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민을 토로한 클리브도, 그리고 그것을 들어준 대니도 최선을 다했다. 자, 이제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다행히도 클리브 스테플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


클리브는 그날 퇴근해 귀가하자마자 저녁을 미처 먹기도 전에, 잭을 불러다 소파에 앉혔다. 기껏 퇴근 시간에 맞춰서 끓인 수프가 식어버리겠다고 잭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클리브가 선수 치듯이 속사포처럼 말했다.


나 사실, 널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근데, 넌 날 사랑하는 거 같아. 그래서 이 감정의 차이가 난 무서워! 네가 이 모든 걸 감내해가며 나에게 맞춰주고 있는 거면, 난 어떻게 해? 그렇지만 난 내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너와 맞춰주며 살 수는 없어! 그런데도 난 네가 내 곁에 계속 있어 줬으면 좋겠어. 근데 그러기엔 이제 내가 너무 나쁜 놈 같아! 어떻게 해야 해?


폭탄 선언과도 같은 말을 들은 잭은 화가 나 보이지도, 그렇다고 해서 크게 실망한 듯 보이지도 않았다. 클리브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은 거야?


뭐가 말이지?


애인이 널 사랑하지 않는다잖아, 근데 기분이 괜찮느냐고.


이제는 클리브가 아닌 잭이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할 차례가 온 것 같았다. 약간의 침묵 끝에 잭이 말했다.


난 잠시 너와 ‘함께’ 있었으니까, 어떤 의미론 누구보다도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클리브는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잭이 말을 이었다.


바보같은 클리브. 네가 날 선택했듯, 내가 널 선택한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여전히 이 기묘하게 순탄한 상황이 낯선 클리브에게 잭이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오히려 네가 우리 관계를 이렇게 진지하게 여기고 있을 줄은 몰랐어. 감동적이군.


잭은 그렇게 말하고는, 수프가 많이 식었는지 확인하러 가겠다며 클리브를 남겨두고 부엌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클리브는 그제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면서 그렇게 울다가는 수프가 짜지겠다고 잭이 마음에도 없는 잔소리를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클리브는 이 상황이 몹시 후련했다.


애초에 등가교환처럼 동량의 사랑을 반드시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리고 서로 삶의 방식을 선택해 존중할 수 있다. 그런 사랑도 세상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모든 걸 깨달은 지금 이 순간이, 클리브로서는 후련하고 또 행복했다.


-


어느 날 클리브 스테플은 자신이 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잭 역시 그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그저 자신으로서 있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클리브는 이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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