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즈

아빠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https://youtu.be/aa46lhokWLU?si=APnfRwwPCB_7sfJx


사실 완벽한 비밀은 없지만 샬럿의 과거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기로 했어. 

그 애가 상처 받는 걸 원하지 않아. 우리 모두. 

-브뤼노-

회사에 들어오고 단 한 번도 쉰 적 없이 인식의 문을 조사하고 다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회사의 모든 인원들이 그랬다. 항상 긴장한 상태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위기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받고, 생사를 오가는 힘겨운 임무를 수행하며 맡은 바에 충실하게 일하는 나날의 반복되다가 갑작스럽게 브뤼노와 윌라드가 강제로 휴가를 주었다. 뜬금없는 휴가에 어리둥절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인원이 그 휴가를 받아들였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의 몇 층 전체를 빌려두었으니 몇 일간은 아무런 생각 없이 다녀오라며 등 떠밀려 회사의 모든 인원들이 예약된 호텔에 머물렀다. 이럴 때 생각해보면 회사는 자금이 부족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텔은 호화스러웠다. 엘리베이터와 각 층마다 휴게 공간이 마련되어있었고 각자 배정받은 방 안에서도 충분히 지겹지 않을 생활을 할 수 있을 것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샬럿과 마를렌이라는 아이들이 머무르는 층에 나 또한 머무르고 있었다. 마를렌은 활동적인 편으로 산책을 나가거나 근처의 가게들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샬럿은 마를렌이 아니면 호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소녀를 그대로 둘 수 없었기에 로비에 가만히 앉아 하늘을 구경하던 샬럿의 곁에 앉았다. 

샬럿은 내가 앉는 것을 보고는 조금 더 옆으로 내게서 멀리 떨어지듯 옆으로 고쳐 앉았다. 하지만 거리를 좁히지는 않았다. 나 같은 어른이 곁에 앉아 있으니 부담스러울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여기서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이 다행인 것이 아닐까.

“샬럿, 바다를 보러가고 싶지 않니?”

“잘···, 잘 모르겠어요.”

말을 더듬으며 대답한 샬럿은 정말로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몰라 곤란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여태 옆에서 무언가를 함께 하자고 지시해주던 마를렌이 있었지만 지금은 마를렌도 쉬어야 할 때, 분명 어른스러운 마를렌도 생각이 있기에 샬럿을 혼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어쩐지 사고를 치고 난 후, 위축되었던 나의 어릴 적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더 많은 말을 걸어가며 대화를 이끌었다. 이 대화가 싫지 않았던 것인지, 그저 거부하기 어려웠던 것인지 샬럿은 나와의 대화에 생각보다 순조롭게 협조해 주었다.

“밖이 맑지? 오늘은 밖에 산책을 하기도 좋은 날씨야.”

“아, 네에···.”

“한동안 여기서 책만 읽어서 그런지 밖에 나가고 싶은데 샬럿은 어떻니? 서로 적적하지 않게 이렇게 대화하면서 산책하는 건··· 부담스러울까?”

“아, 아니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동그랗게 뜬 눈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 표정에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샬럿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샬럿은 어떡해야 할지 우물쭈물거리다가 손을 뻗어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 작은 인류의 손은 어찌나 따뜻한지, 딸이 있었다면 분명 이런 기분이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든다.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대화는 지속되었다. 마를렌과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마를렌과 먹었던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가장 달콤했던 사탕의 맛에 대해서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팔을 살짝 뒤로 옮겨 샬럿을 나의 뒤로 서게 하고 문리는 것을 기다렸다. 덜컹-, 문이 열리자 문에서 다리오와 로라스가 튀어나왔다. 샬럿을 뒤로 서게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로라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리오, 여긴 아직 1층이 아니야. 그리고 자넨 앞 좀 보고 다녀야겠어.”

“아! 이거 교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샬럿!”

로라스가 그의 등을 붙잡아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다리오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 샬럿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샬럿은 그게 익숙한 것인지 다리오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그의 손이 떠난 후에서야 엉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샬럿과 산책을 하기로 했거든, 자네들은?”

“비슷합니다, 다리오가 방에서 나오질 않아서 제가 끌고나온 참이었죠.”

“누가 하도 밖 풍경이 좋다, 연구는 돌아가서 해라, 휴가는 이러라고 준게 아니다, 라고 아우성이라서.”

그가 로라스를 보며 귀찮은 것처럼 이야기하며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그 뒤를 이어 들어갔고 서로 목적이 맞으니 함께 하자는 말에 나는 고개를 숙여 샬럿을 보았다. 샬럿도 나의 시선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많은 것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1층에 내려오자 밖으로 바다의 지평선이 보인다. 귀를 기울이면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도 나고, 크게 숨을 쉬면 조금 짭조름하면서 비린 바다내음이 났다. 샬럿은 이 모든 것을 담듯 한참을 거기에 멍하니 서있다가 호텔 로비로 들어오는 앨리셔와 루시, 그리고 호타루를 보고서야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걸었다. 나와 일행들도 거기에 맞춰 조금씩 걸으며 밖을 나서려는데 앨리셔 일행이 말을 걸어왔다.

“교수님과 다리오 씨, 로라스 씨, 그리고 샬럿까지. 함께 산책 가시는 건가요?”

“그렇지, 뭐.”

다리오가 제빠르게 대답했고 샬럿은 고개를 끄덕이며 앨리셔의 물음에 답했다. 그러자 앨리셔가 샬럿에게 시선을 맞추며 앉아서는 자신의 쥐고 있던 손을 펼쳐 조개 껍데기들을 보여주었다.

“저기, 예쁜 조개 껍데기가 많아요. 샬럿도 꼭 봤으면 좋겠어요.”

“맞아! 삭막한 풍경만 보다가 뻥~ 뚫린 바다를 보니까 좋기도 하고. 그러니까 꼭 봐야 해?”

앨리셔의 말에 루시도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말을 덧붙여 바다에 갈 필요가 있다는 어필을 했다. 샬럿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온 것처럼 몇 가지 이유를 더 붙여 말을 하자 호타루도 그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샬럿은 어리둥절했지만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알겠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대화를 마치고 ‘잘 다녀오세요.’라는 앨리셔 양의 말과 함께 그들을 뒤로하고 호텔의 밖으로 나와서 샬럿에 발걸음에 맞춰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샬럿은 바닥을 보며 걸으며 사그락거리는 모래를 보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서로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대화를 시작했다. 

해변가를 걸을 생각은 아니었기에 구두를 신고 왔던 것을 후회하고 있을 즈음, 다리오와 로라스가 어떤 대화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멈춰 서서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것에 맞춰 멈춰 서서 손을 잠시 넣고 구두와 양말을 벗고 구두 안으로 구겨 넣었다. 샬럿은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에 잠기는 가 싶었지만 그대로 자신의 장화를 벗고 맨발이 되었다.

“아···! 제, 제가 들 수 있어요···.” 

“숙녀는 이럴 때, 가끔 의지하는 게 좋지.” 

샬럿의 벗은 작은 장화를 들자, 당황스러워했지만 나는 마를렌이 할 법한 말투로 그것을 괜찮다고 말했다. 다리오와 로라스도 그것을 훈훈하게 바라보고 우리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안쪽으로 걸으며 옅게 스치는 파도를 느끼며 걸었다. 

앨리셔가 말해준 것처럼, 바닥에 보이는 예쁜 조개껍데기를 주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첨벙이는 바다를 성큼성큼 들어가 샬럿이 무릎까지 잠길 정도로 바다를 느껴보기도 하고 비록 샬럿에게 맞춘 어른들의 유치한 장난이 가미되어있었지만 샬럿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걷고 다시 호텔의 앞에 섰을 때, 맨발이 된 우리의 발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참 고민했다.

“모래 때문에 맨발로 들어가야겠네요.”

“어디 생수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다리오와 로라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샬럿은 손가락을 휙-, 공중에 저어 보이더니 발 밑으로 깨끗한 물을 흘려주었다. 그리 세지 않고 그리 많지 않은 수돗물 정도의 물이 흐르자 발에 묻은 모래들이 쓸려나갔다. 그 뒤로는 손수건으로 샬럿의 발과 각자의 손수건으로 정돈하고 나서야 맨발이 아닌, 구두를 신은 발로 다시 호텔로 들어설 수 있었다.

“고마워, 덕분에 구두로 돌아올 수 있었네.”

“어? 아, 네에···.”

맞잡은 작은 손이 부끄러웠는지 조금 힘이 들어가있었다. 손을 뻗어 살살 샬럿의 머리 위를 쓰담고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샬럿과 나는 꽤나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일부러 로비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샬럿은 그 옆에 앉아 동화책이나 학습지 같은 것들을 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모르는 것을 묻기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에는 잠이 오지 않아 밤 하늘을 넓게 구경할까 싶어 방 밖으로 나왔는데 어린 아이의 훌쩍임이 들렸다. 샬럿의 울음 소리인 것같아 서둘러 시선을 굴려 샬럿을 찾았다. 샬럿은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속상한 일이 있나? 악몽이라도 꾸었던걸까? 가만히 옆에 앉아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샬럿의 머리를 쓰담아주며 품에 안아 도닥이고 있었다.

히끅거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나는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던 샬럿의 뺨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샬럿, 무슨 일 있니?”

“··· ··· 나쁜 꿈을 꿨어요.”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엄청난 악몽에 시달린 모양이었다. 앞머리가 땀에 스며있을 정도로 괴로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움에 계속 등을 토닥였다. 샬럿은 조용히 그 토닥임을 받으며 품에 안겨있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안고 있으니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안심이 되었는지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샬럿의 방은 알았지만 들어가는 것은 실례일까 싶어 나의 방으로 그대로 데려와 침대에 눕혔다. 목끝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누워 몇번 더 토닥인 후, 나 또한 잠에 들었다. 그날 꿈에는 샬럿이 나왔다. 샬럿은 나를 보며 무어라고 외쳤지만 나는 그것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들으려고 애썼지만 보글보글, 물소리들이 방해해서 결국에는 듣지 못하고 꿈에서 깼다.

본능인지 습관인지 알 수 없는 감각으로 눈을 뜨니 아침이 되어있었다. 나의 옆에서는 여전히 샬럿이 자고 있었다. 조식을 먹기 위해, 머리를 정리하고 양치를 하고 준비를 하고 나서 보니 샬럿은 깨어나서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죄, 죄송···.”

“잘 잤니?”

나의 말에 샬럿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웃음과 함께 아침을 먹으러 가자고 샬럿을 방으로 보내고 꿈에 대해서 생각했다. 샬럿이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뭔가 내가 꼭 들어야했던 이야기라면 들어야했다며 생각하고 있을 때, 문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샬럿이 서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샬럿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가, 서로 마주보며 조식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잠깐의 티타임을 가질 때, 샬럿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빠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나는 그 말을 무시해야 할지, 대답해주어야 할지 고민했지만 끝내 대답을 선택했다. 오늘의 꿈이 자꾸만 생각나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꿈에서도 샬럿은 내게 아빠라고 불러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 딸, 그런 걸 말하고 싶었구나?”

“··· ···!”

크게 놀라 동그랗게 뜨인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나이인데 샬럿을 딸이라고 해도 샬럿이 불편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불러도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 꾸었던 꿈에 대해서도 샬럿에게 들려주었다. 샬럿에게 진정한 아빠가 될 수 없지만, 위안이 될 수 있는, 의지가 될 수 있는 어른의 의미로 아빠라고 부르는 거라면 그렇게 해도 좋다는 말을 덧붙여 전하니 샬럿은 그 말에 내게 처음으로 행복한 미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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