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엔벨져다무]환換 1

3편 빌드업

* 능력 없는 세계관



생각의 흐름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색다름을 즐길 수 있는 타지의 것이 마음에 드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 티엔은 향긋한 홍차를 충분히 즐기고 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어제 보니 저택이 조금 소란스럽더군."


고향의 차 한 잔은 마음을 조용하게 적셔 준다. 익숙한 만큼 더 좋은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눈길이 가는 건 사업가라면 숙명 같은 것이고, 문제라면 그게 생각보다 깊숙하게 들어와 버렸다는 점.


"동생이 오랜만에 돌아왔다. 사용인들이 맞이할 준비를 한다고 요란했나보군. 주의 시키겠네.


다이무스가 서류에 사인을 남기며 한 답에 그런가, 하고 간단히 마무리했다. 그리고 잠시 읽는 걸 멈췄던 서류를 다시 손에 들었지만 생각을 잠식한 것은 단 하나의 흐릿한 상이다. 어깨를 넘은 굽이치는 은발, 자신만만한 얼굴. 그 인영을 지우기 위해 차를 들었는데도 상념이 여전한 걸 보니 어지간히도 깊은 곳에 박힌 듯하다. 사업 파트너를 맞은편에 두고도 이런 여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나이도 동일하고 성격으로도 제법 잘 맞아 두 사람의 위치에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보다 보다 더 깊은 교류를 하게 된 덕이지만.


"내 탓에 그들이 곤란해지는 건가?"
"당연한 걸 다시 말하는 것뿐이지."
"엄격하군."
"자네만 할까."


티엔은 전혀 읽히지 않은 서류를 다시 한 번 훑어보다 태연한 척 한 장 넘겼다. 주의를 환기시키려 해도 질 좋은 종이의 감촉이 어젯밤 본 인물을 연상시켰다. 희다 못해 푸르른 달빛까지 투명하게 내비치는 듯한 살갗은 만지면 무슨 느낌이 들까. 본국에서 최상으로 치는 비단만큼 부드러울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종이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살며시 긁은 그는 눈을 감았다 뜨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 기쳑을 읽은 다이무스가 집중해 보던 서류를 같이 내려놓으며 눈가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 때가 가까워졌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줄 몰랐다는 말은 그의 배려다. 집무실에 모인 게 8시였고 충분히 오랜 시간이기도 하지만, 영 집중하지 못 한 건 이미 그때부터였으니. 그를 대신해 핑계를 대 주는 다이무스에게 티엔은 미안한 마음으로 조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했네."
"아닐세. 먼 이국까지 온 귀한 손님을 제대로 챙기는 것도 초대한 자의 의무지. 식사를 조금 이르게 준비하라 하겠다."


다이무스는 즉시 하인을 불렀다. 짧은 종소리를 뒤따라 하인이 방문했다. 식사는 어디에서 하겠나? 식당으로 가지. 그들의 대화를 들은 하인이 메뉴를 물어 오기에 티엔은 면구스럽지만 부탁하네 하며 다이무스에게 답을 미루고 그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히 머리카락 색과 차림새였다. 달빛이 반사되어 빛나던 은발과 단출하면서도 정갈한 옷차림. 평범하고 디자인이지만 고급스러운 면을 썼다는 게 보이는 은은한 광택이 처음 보는 인물임에도 더없이 어울렸다. 그리고 머리카락 조금 아래로 푸르면서 생기 가득한 눈, 푸른 두 눈. 적어도 직책이 낮은 인사는 아닐 거란 생각이 절로 드는 분위기였다.
창틀에 손을 얹고 느긋이 걸으며 유리 너머 어두운 풍경화를 감상하던 그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티엔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인 건 미약한 경계심이었다. 그 뒤를 이은 건 그를 넘어서는 호기심이었다. 평온히 유지되던 눈꼬리가 티엔을 발견하는 즉시 살짝 치켜올라가고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아, 객이 있다더니. 다이무스 쪽이신가?'


부드러운 말씨, 격 있는 표현을 담은 목소리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소개도 없이 질문부터 하나?'


첫인상을 좋게 남겨야 한다는 생각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대답에 앞서 무례를 지적하자 엷은 입술이 더욱 휘어져 보기 좋게 곡선을 그렸다. 치켜 올라갔던 눈꼬리까지 웃음을 그리자 그 위에 달빛이 깃드니 투명하고 맑았다.


'날개가 같은 새들끼리 떼를 짓는다더니 저 같은 이들만 들이는군.'


그 자는 혼자 납득한 것처럼 들으란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티엔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달이 기울고 있으니 인사는 내일 하러 찾아가지. 수상쩍은 이로 오인받으면 다이무스도 깨야 할 테니 이만 들어가도록. 제 할 말만 하고 가 버리는 그를 붙잡지는 않았지만 티엔은 정체가 상당히 궁금해졌다. 아무리 초대된 이라 하나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보면 길을 잃었든 뭐든 방에 되돌려 놓으려 하지 않나. 그리고 현재 가주 대리로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의 이를 함부로 불러도 되는 건가.
그가 회상하는 동안 대화가 끝났는지 다이무스가 다시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넌지시 티엔을 불렀다.


"피곤해 보이진 않았다만."


그 말로 금세 현실에 불려온 티엔이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다른 곳을 거쳐 왔더니 시차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것 같다."
"며칠 머물 계획이라 했으니 다행이군. 느긋하게 처리해도 되겠어."
"그게 폐가 아니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어제 돌아왔다는 동생에게는 내가 불청객이지 않겠나."
"흠…."


티엔이 가볍게 물은 말에 다이무스가 잠시 입을 닫았다. 그 반응에 오히려 당황스러워진 티엔은 곧 그가 들려줄 답을 기다리며 남은 차로 마저 입을 축이고 생각했다. 이렇게 고민까지 할 정도라면 동생이라는 자가 성격이 좀 있나 보군. 그 뒤를 이어 어젯밤의 남자가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혹시?


"벨져는 그런 걸 신경 쓸 녀석이 아니다. 오히려 자네 쪽에서 녀석이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걱정 말게. 크게 거슬리게 하지는 않을 거야."


벨져. 티엔이 입 안에서 이름을 한 번 되뇌이고 물었다.


"동생 이름이 벨져인가? 실수하지 않게 그에 대해서 좀 알려줬으면 하네."


그가 질문하자 다이무스가 조금 전보다 더 깊게 고민하는 게 보여 티엔은 무심코 찻잔의 손잡이를 한 번 쥐었다.


"막내는 본 적 있었지. 그 녀석, 이글만큼 자유로운 성정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혹은 그보다 더. 동생이라 해도 남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알려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라고 해야겠군."


친애하는 벗이 고심해서 내놓은 대답 중 자유로운 성정이라는 말이 귀로 날아와 꽂혔다. 어제 마주했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표현이어서 티엔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 맞는지 다시 고려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첫인상이 좋아서 나쁜 건 없지. 선물로 반길 만한 건 없나?"


다이무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선물로 마음을 살 수 있으면 편했겠지. 제대로 듣지 못 한 티엔이 뭐라고 했는지 되묻자 그는 혼잣말이라고 얼버무렸다.


"유모가 만든 무화과 파이 정도가 아니면 뭘 주든 별 소용은 없을 거다."
"단 걸 좋아하는군?"
"좋아한다 해야 하나…."


다이무스가 명확하게 말을 못 하는 걸 보며 티엔은 그의 동생 되는 이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까다롭군. 티엔이나 다이무스나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종류는 대부분 불쾌하게 여기거나 즐거워하는 지점이 크게 다르면 섞이기가 어려운 법이다. 티엔은 제 말만 하고 사라져 버리던 어젯밤의 그 남자를 다시 떠올렸다. 음.


"그럼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묻지."


진지하게 고민에 빠져들어 양손을 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괸 채 이마에 세 줄기 흔적까지 남기는 다이무스에게 넌지시 물어보자 이마에 난 계곡이 조금 더 깊이 파였다. 티엔은 그 모습을 보며 찬을 입가에 댔다가 기울여도 잘 흐르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아무리 집중이 안 됐다지만 일을 할 때보다 지금이 더 목이 마르다니. 평소 지나다니다 누가 이러고 있는 것을 보면 한 번 비웃었을 행동을 본인이 하고 있으니 약간 쓴웃음이 입가에 올라왔다.


"거의 모든 걸 싫어하는 것 같네."
"뭐?"


다이무스가 한참 동안 말 없이 빠져 든 동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티엔이 제대로 듣지 못하고 되묻자 다이무스가 깍지 낀 손에 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며 다시 말했다.


"솔직히 말해 싫어하는 걸 모르겠어. 근 평생을 같이 산 형제로서 모른다는 게 흠이 된다는 것은 알지만 벨져는 좋아하다가도 금세 질려 해서 말일세. 관심사가 변한 걸 눈치 못 채고 선물이라고 가져다 주면 싸늘한 눈초리만 받게 되지."


티엔은 그 남자의 말투를 떠올리고, 외형을 생각했다. 벨져라 부르는 이름이 정말로 그가 맞다면, 그런 성정이라 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소지가 있는 것 같다. 당장 티엔의 주변만 해도 그런 인물이 있지 않은가. 그다지 섬세한 성정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원하는 걸 해 주지 않으면 미묘하게 불량해지는….


'혹시 그건가?'


불현든 듯 생각에 티엔이 다이무스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 보자 심기가 불편해진 듯한 모습을 보이며 차를 홀짝이던 그가 잔을 입가에서 떼고 되물었다.


"더 궁금한 게 있나?"


티엔은 느릿하게 고개를 젓고 시선을 뗐다.


"아니."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둘의 관계가 상당히 돈독해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티엔은 다른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자의 이름이 벨져가 맞다면, 다이무스의 친동생이 된다는 말인데 그러고도 그를 자신이 탐낼 수 있나? 몇 번을 고려해도 단호하게 아니라는 답변이 나온다. 쯧. 티엔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까지 깊게 빠져 버렸는데 상대가 안 좋다니. 또 언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애가 망가지는 것보다 나으니 이제는 친구가 말하는 동생이 그 자가 아니길 바라는 것밖에 수가 없다.
티엔도 다이무스도 각자 생각에 잠겨 말이 사라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노크했다. 다이무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한 들어오라는 말에 문이 열리고 얼굴을 내민 하인이 조심히 물었다.


"둘째 도련님께서 식사에 합석하겠다 하시는데 자리를 준비할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서로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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