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즈

[드렉슬러] Fetal Position

a poached egg by 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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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렉슬러의 자부심은 일종의 투구와도 같다. 그렇기에 가끔은 벗겨줄 필요가 있다. 잠시 한숨 돌리고 쉬었다 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든, 혹은 쓰던 투구가 다 닳아 새 투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투구를 벗었을 때 그의 마음이 평소보다 훨씬 연약해지는 것 또한 감수해야 했는데, 본인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투구가 벗겨지는 그 순간을 드렉슬러는 보통 슬럼프라고 불렀다.


드렉슬러는 자존감을 잠시 내려놓았다고 해서 사소한 것에 전부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그런 유형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렇지만 드렉슬러는 최소한의 사회성만 유지하면서 직장에서 시간을 보낸 후 집에 와서는 최대한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더러운 집도, 계속되는 불규칙한 생활에 건강이 망가지는 것도(능력자라서 그런지 사실 그렇게 많이 망가지지도 않았다) 다시 새살이 오르고 있는 자존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빨래해야 할 옷가지가 발가락에 닿아오는 것을 걷어차 버리고는, 드렉슬러는 다시 왼쪽으로 돌아 모로 누웠다. 계속 누워 있으려니 목이 아파 바닥에 널브러진 잡지를 베개 삼아 누웠더니 한결 낫다.


마지막으로 청소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카펫은 지저분했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갑자기 카펫에 드러누운 건 평소에 앉아서 여가를 보내는 1인용 소파가 역시 빨지 않은 옷들과 온갖 고지서들로 뒤덮여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늘 높은 곳에 서서 고고하게 인생을 만끽해왔으니 가끔은 이런 지저분한 밑바닥에서 움츠러들 시간도 필요하다. 소파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드렉슬러는 문득 자기가 아직도 집세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는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웅크려 누워 있었다. 안 그래도 얼마 없는 사회성을 회사에서 다 소진하고 나면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히터를 틀지 않아 냉기가 살짝 도는 집 안에서, 드렉슬러는 가볍게 재채기를 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지는 순간은 몇 번을 겪어도 늘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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