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져릭] Bouvardia 번외.

  • 포타에 업로드한 연성 재업 입니다.

  • 약간 수정 작업을 진행 하였습니다.(스토리 수정x)



고풍스러운 벽난로 안에서 타들어 가는 나무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부드러운 카펫 위에 앉은 나는 제 코끝으로 퍼져나가는 달콤한 코코아의 향기에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워 한 모금 마셨다. 몸 속 구석구석 따뜻해짐에 오늘의 피로가 녹아내려 무척 행복했다. 이 넓은 방 안을 둘러보다 문득 오늘도 먼저 자야 하나 싶었던 찰라, 순간적으로 외롭단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이 생각을 떨치고자 다시금 코코아를 힘껏 마셨다.

"역시 달콤함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군."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커다란 방을 괜스레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이곳은 미국이 아닌, 오스트리아의 어느 곳에 있는 홀든의 저택이었다. 벨져와 함께 미국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이후로 오랜만에 방문한 저택의 연말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언제나 책에서만 보았던 귀족의 사교 문화인 연회, 참으로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래, 딱 삼일까지만, 나는 달력을 확인해보았다. 이곳에 온 지도 어느새 열흘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새 12월... 분명 한 해의 마무리가 되는 연말과 새로운 해가 뜨는 연초의 기나긴 휴일을 맛보기 전의 나날들은 언제나 회사 일로 바빠 일터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고 있었겠지만, 올해는 특별해졌다. 12월이 되기 며칠 전, 벨져는 홀든에서 보낸 편지를 난로에 태우더니 입을 열었다. 올해는 연회에 참석 해야겠다고. 작년도 재작년에도 늘 거부하던 그였기에 무슨 바람이 분 까닭일까? 궁금하였지만, 뭐 중요한 인사라도 오는 걸까? 싶어 나는 잘 다녀오라며 말해주었지만, 너도 따라오란 말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귀족들의 연회는 몹시 궁금해 나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지만, 애석하게도 망할 회사는 11월 중후반부터 바빠지기 시작해, 당연 연차를 쓸 수 없다고 말하였지만, 벨져에게서 돌아온 말은 가관이었다.

"이 벨져 홀든에게 불가능은 없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이젠 푹 쉬라는 상사에 말에 깜짝 놀랐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당연히 내가 직장에서 잘린 건가? 싶어 심장이 저 바닥 끝까지 내려앉았지만, 모두가 한 달 동안 기나긴 휴가라며 다들 기뻐하고 있었다.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어느 제약회사와의 거래가 성사되었고 동시에 현 사장이 또 다른 특별한 거래조건으로 모든 직원들의 한 달간의 휴식이었다. 물론, 한 달의 휴식은 연말과 연초의 휴일을 모두 합쳐서였지만, 그리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와 거래 중이던 곳은 제약 회사, 그리고 현 사장. 아련히 떠오르는 인물이 한명 있었다. 그러나, 이게 가능해?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싶었지만, 높은 신분의 사람들의 세상을 나 같은 작고 작은 평범한 회사원이 그 크기를 알면 복잡해지리라 생각한 나는 그냥 즐기기로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벨져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물어보니, 벨져는 단지 은혜를 갚으란 말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와 벨져는 홀든 저택을 찾아갔다.

[벨져릭] Bouvardia 번외.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벨져는 고용인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 나 또한 어디론가 끌려갔다. 당분간 머물 곳으로 안내 받은 나는 가져온 작은 짐을 풀었고, 곧이어 노련한 집사와 여러 고용인들과 동행하여, 어느 고급스러운 옷 가게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이리저리 몸 치수를 재었고, 디자이너가 택한 여러 의상과 잘 어울리는 여러 가지 장신구를 선택하였다. 반짝이는 브로치, 고급스러운 스카프. 아니 스카프는 분명 아니다. 프릴이었나? 기억이 도통 나지 않아 그냥 벨져가 늘 착용하던 그거. 궁금증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아, 잠들기 전 조심스럽게 벨져에게 물어보니 크라바트라는 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어느 날, 벨져는 선물이라며 한가득 들고 온 고급스러운 상자를 내게 가져다주었다. 수많은 상자 중에서 유독 좋은 향기가 퍼지고 있는 상자부터 열어보니, 무척 아름다운 작은 병이 보였다. 향수인가? 나는 괜스레 허공에다 뿌려보았다. 상큼하면서 달콤한 향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또 다른 상자를 열어보니, 딱 보아도 고급스러운 가죽 구두는 내 발에 딱 맞았으며, 또 다른 상자 안에서는 화려한 옷과 장신구들이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늘 회사의 연례행사 때만 입는 비싸게 맞춘 것과 달리 비싼 것들로 치장된 연마 복은 난생처음 입어보는 것이라 무척 어색했지만, 화려함을 두른 내 모습이 마치 귀족이 된 기분에 조금은 우쭐댔지만, 역시 너무나도 어색했다.

"벨져, 내게 옷들은 아무리 봐도 안 어울리오."
 "네 몸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는 중요하지 않다."
 "흐음- 역시 품위가 중요한 것이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답변을 내놓는 군."

현재 입고 있는 옷 말고도 여러 벌의 옷들이 상자에서 꺼내지며, 차곡차곡 벨져를 따라 들어온 고용인들의 손에서 잘 정돈 되어가고 있었다. 딱 봐도 저 옷들은 내 한 달 월급 아니 두 달 치 일까? 아니, 아니 어쩌면… 석 달 치의 월급의 가격일지도 모른단 무서운 생각에 나는 자꾸만 이상한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감정을 버리고자 짧게 내쉰 한숨에 벨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 나는 피곤을 핑계 삼아 낮잠을 자겠다며, 침대 위에 올랐다. 혀끝을 차는 벨져를 애써 무시한 채,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기적같이 나는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부터 끊임없이 여러 지역의 귀족이 하나둘 방문하였다. 연회장에 몰려오는 많은 귀족으로 저택은 안과 밖은 화려함에 무척 반짝거렸다. 또 다른 우주를 찾은 것 같아 보는 눈이 참 즐거웠다. 또한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이것저것 먹으니 입도 즐거웠으며, 귀족들의 여러 이야기를 듣는 귀 또한 즐거웠다. 그래, 모든 것이 즐거운 첫날이었다. 물론 그다음 날도 그다음의 다음날까지는 그래 참으로 버틸 만 했다. 그러나 버틸만한 그다음 날엔 아침부터 지겨워지기 시작해 나는 벨져에게 부탁해 그냥 방안에서 보내겠다며, 홀로 방안에 남았다. 뭐, 중간중간에 트와일라잇에 들리기도 하였지만, 요 며칠간은 밖이 무척 추웠기에 나는 방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공간 이동자에게 바깥의 추위는 별거 아니지만, 그래도 왜 외출하기 싫은 그런 날이 내게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의 나는 딱 그 상태인 것 같다.

"달콤한 걸 마셨더니, 이젠 달콤한 걸 먹고 싶소. 수플레, 크렘 브륄레, 밀푀유, 추로스. 오랑제뜨, 와플에 생크림과 초콜릿 시럽 한가득. 벨져도 함께 먹으면 좋겠지만, 분명 한두 개만 어울려 먹겠지? 하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보고 싶군."

짐작하고 있었지만, 역시 지금의 나는 벨져가 무척 보고 싶은 병에 걸렸다. 동거를 시작한 이후로 회사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항상 붙어있다 보니, 잊고 있던 나의 고질병이 생각났다. 벨져를 오래 못 보면 보고 싶어 앓는 병. 이건 오래전 배신으로 끝난 내 사랑에 나는 그 누가 찾아오더라도 다시는 사랑 따윈 하지 않을 거라고 달에게 맹세했던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찾아온 사랑이니. 어쩔 수 없는 걸까? 이 병에 대해 누군가 듣게 된다면, 누구는 박수를 크게 치며 박수 소리 못지않게 웃을 것이며, 또 누구는 미련하다며 혀를 크게 차겠지, 또 누구는 애꿎은 벨져를 나무라 하겠고. 역시 상상만 해도 그려지는 삼 형제의 모습은 언제나 즐거웠다. 하지만 각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가깝게 있다면 가깝지만, 역시 난 이 저택에 오면 그들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 한 두 시간 잠깐 머물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 머물다 보면 늘 그랬다. 평범한 회사원과 어느 한 가문의 도련님은 시작부터 다르니-

"먼저 미국에 가 있을까? 벨져는 뭐, 또 찾아오라고 하지."

게이트를 열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 하나에 손을 거두었다. 분명 벨져는 또 그 노랑머리 헌터와 동행하겠지? 난 이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적어도 먼저 돌아갈 테니, 연회가 끝나면 전화로 알려달라고 말을 하고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나는 벨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벨져는 삼 일 동안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종종 복도와 계단에서 마주쳤지만, 가볍게 인사를 나눈 이후 곧장 떠나갔다. 딱 보아도 일정이 꽤 바쁜 모양이라 난 어쩔 수 없이 벨져를 보내주어야만 했다.

"으으- 그냥 쪽지를 두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소."

나는 서랍 안에 놓인 펜과 종이를 꺼내었다. 인사말을 시작으로 작은 펜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오타라니, 조금 창피한 나는 적은 쪽지를 뭉쳐 쓰레기통 안으로 단숨에 집어 넣었다. 새 종이를 꺼내 다시 글을 적어 내려갔다. 마지막 마무리 인사까지 적은 나는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되겠지? 란 생각해 그래도 예의를 중요시 여기던 벨져니까, 간단히 이니셜만 적었다.

'오늘 저녁도 혼자 보내게 되면 떠나야겠어.'

쪽지를 곱게 접은 나는 이걸 어디에 두면 벨져가 찾아볼 수 있을 까? 하고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가구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어디에 두어도 잘 찾을 거라 생각했고, 또 쪽지를 어딘가에 꼭꼭 숨겨놓고 찾아보라는 말을 다른 종이에 남겨놓고 떠나볼까? 이런 유치한 생각도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일을 했다간 나중 일이 두려워진 나는 평범하게 침대 근처 협탁 위에 올려놓은 책 밑에 넣어두었다.

"음. 분명 내가 읽고서 제자리에 두지 않은 책을 치우다가 발견하겠지?"

결국 해가 지고 또 다시 밤의 연회가 시작되었지만, 벨져는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바쁜 건가? 오늘도 예상대로라면 연회장은 사람들로 북적북적 하겠지. 생각해보니, 벨져는 연회 따위 북적여서 싫다는 말을 내게 해주었다. 우리가 함께 생활한 이후로 종종 홀든가에서 벨져의 앞으론 편지 한 통이 나에게는 고급스러운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 보내졌었다. 혀를 짧게 찬 벨져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북북 찢어버리거나, 난로에 불태워버리곤 하였다. 나에게 보내진 초대장을 보면, 편지의 내용은 연회의 참석 하라고 적혀 있었겠지? 내심 나는 어릴 적부터 읽었던 많은 동화와 소설 속의 귀족들의 연회가 무척 궁금하여 초대에 응하고 싶었지만, 벨져 없이 가는 건 어색하다 느껴진 나는 빙빙 둘러 말을 조심이 건네보았지만, 이를 눈치챈 벨져는 몹시 차갑게 가지 않을 거란 확답만을 내놓았다. 그래서 올해도 찾아온 편지와 초대장에 나는 당연히 거부 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올해만의 작은 파티를 구상 중에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어째서 일까? 벨져가 연회에 참석을 하겠다 하지 않나, 평소에 안 쓰던 인맥을 쓰지 않나? 몹시 의문 투성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제 즐길 만큼 즐겼으니, 떠나고 싶었지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이트만 열면 단숨에 집까지 곧 장이지만, 나는 나의 손과 발을 붙잡은 생각 하나가 문득 스쳐 지나갔다. 벨져에게 연말은 언제나 늘 이랬을 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사람들과 만나며, 여유라곤 하나도 없이... 나는 이 생각 하나에 남겨둔 쪽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지금 곧 40세를 앞두고 있으면서, 왜 이렇게 아이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글을 읽고 나니 내 행동이 무척 부끄러워졌다. 분명 벨져가 이번 연회에 참석한 건, 내가 그토록 바라였기 때문이겠지? 연회에 무슨 목적이 있다면, 내게 게이트만 부탁하고도 남을 자였다.

"좋아, 역시 말은 직접하고 와야겠어."

나는 옷장 속에 곱게 넣어둔 새하얀 연회복을 꺼내입었다. 물론 연회장에 찾아가 우연히 벨져에게 닿기도, 또 말을 건네기도 무척 어렵겠지만,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면 필히 오늘은 방으로 돌아오겠다고 제 멋대로 단정 지은 나는 고용인들 없이 나름의 연회 준비를 시작하였다. 어설프지만 머리 손질도 하였고, 입가에 뭐가 묻어있지 않은지 확인하고 또 확인을 했다. 편하게 신고 있던 실내용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곱게 쌓인 가죽 구두를 꺼내 신었고, 마무리로 향수를 뿌리던 찰라. 내 등 뒤로 큰소리를 내며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벨져 홀든이 나를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나는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벨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벨져는 내 손목을 잡았다.

"이제 한계다. 릭, 게이트를 열어라."
 "뭐? 그… 그게 무슨 소리오?"
 "좌표는 어디든 상관없어. 최대한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상황 파악이 아직 안 되었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다급한 여러 발걸음 소리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 좌표나 찍어 공간을 연결하였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를 끌고 게이트를 넘어가는 벨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잘 연결했을까? 혹시 바다 위로 연결 했다면 어쩌지? 아님 절벽? 조금 무서운 생각을 하였지만, 다행히도 평지 위에 우리의 발이 닿았고, 여러 사람들의 소리를 뒤로 한 채, 게이트가 닫혔다.

"여긴 어디지?"
 "나도 모르오. 그대가 갑자기 아무 데나 열라 해서- 그냥 좌표를 대충 생각했소."
 "이제 집으로 돌아가지."
 "흐음- 홀든가로?"

장난스레 건넨 말이 짜증이 난 모양인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던 벨져는 미국의 집. 이라 짧게 말을 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화가 난 고양이같아 괜스레 웃음이 났지만, 나는 불호령이 떨어질까 애써 웃음을 참은 채, 공간을 이어보았지만, 어째서인지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이런. 지금은 힘들 거 같소."
 "그런가."

손 끝을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점점 내 능력이 옅어지고 있다고 오래전부터 생각을 해왔지만, 요즘 들어 부쩍 눈에 띄게 옅어짐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도 능력 소멸이 찾아온 것 일까? 또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벨져의 뒤를 따라갔다. 이곳이라면 하루 정도는 안전할 것이라며 말한 벨져는 폐허가 된 낡은 교회로 들어갔다.

"벨져… 있잖소. 왜 갑자기 도망친 것이오?"
 "네가 하도 답답하게 굴어서."
 "아, 음- 눈치채고 있었소?"
 "홀든에서 자란 평범한 아이도 벌써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폐허가 된 건물도 오랜만이지만, 낡은 교회에 오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 고개를 들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지가 잔뜩 쌓인 기다란 나무 의자와 커다란 십자가 앞에 놓인 강대상은 형태만 겨우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거의 무너져 있었다. 이젠 들어오지도 않은 전등은 위태롭게 달려있었으며, 금이 간 벽과 기둥, 그리고 본 형태로 고스란히 간직했다면 무척 아름다웠을 것 같은 스테인드글라스의 깨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만이 이곳을 유일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유독 밝은 것을 보아하니, 보름달이 찾아온 모양이다. 이렇게 커다란 달도 구름에 제 몸을 잘 숨기는데, 역시 벨져 홀든 앞에선 감정을 숨기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용기는 있었나 보군. 옷까지 갖춰 입은 걸 보아하니."
 "아, 그게- 연회장에 이렇게 안 입고 간다면, 그대가 또 잔소리를 할까 봐."

벨져는 그저 말없이 제 옆에 주저앉아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역시 예상대로의 행동. 저 변함 없는 모습은 때때로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내겐 무엇보다 든든했다. 나보다 먼저 능력을 잃어버린 벨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 였다. 능력은 그저 좋았던 하나의 소모품. 사실 나는 그런 벨져를 바라보며, 문득 나도 언젠간 능력을 잃어버리는 날이 온다면, 그날에 나는 어떨까? 벨져처럼 아무렇지도 않을까? 그러나 나는 역시 내 능력이 사라지는 일은 썩 좋지 않을 것 같다. 비록 이 능력으로 많은 이들을 다치게도 하였고, 또…

"또 넌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지?"
 "능력 말이오. 완전히 사라진 거면 어쩌지?"
 "한심한 생각을 하는 군. 딱 보아도 피로로 인한 것 같으니, 이만 자도록."
 "아니. 이제 나도 생각 할 때가 왔소. 벨져- 역시, 내 능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어."

또 다시 이어진 정적, 이제 더 이상 시계는 착용하지 않아 옛날과 달리 시계 소리 마저 울리지 않은 이 정적이 나는 무척 어색하였다. 그저 바람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벨져의 말대로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래 능력을 다시 쓸 수 있을 지도 모를거란 생각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나는 불안함에 휩쓸리고 말았다. 눈을 감자마자 내게 보이던 풍경은 아직 벨져를 데리고 가보지 못한 여러 여행지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벨져에게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모닥불을 피워, 마시멜로를 굽고 또 스모어도 먹으며 별을 바라보고 싶었다. 이렇게 가고 싶은 곳은 아직 많이 남았고 또 생길 터인데, 그런데 능력이 사라진다면 나는…….

"잠이 안 오는 모양이군."
 "음. 눈을 감아도 계속 생각이 나. 이대로 능력이 사라지면 어쩌지? 벨져."
 "사라지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왜 그렇게 안일한 것이오. 그대도 나도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잖소."
 "사람을 발견하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내가 무작정 뛰쳐나왔을 거란 생각은 접어라."

벨져는 이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내게 주었다. 꽤 묵직한 주머니는 마치 선물처럼 입구가 리본으로 예쁘게 묶여있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당일, 트리 밑에 놓인 선물을 풀며 기뻐했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조금 신이 났다. 이제 곧 내 나이가 사십이라지만, 설레는 감정은 오십. 아니 육십이 되어도 나는 감출 수 없겠지? 감싸고 있던 리본을 풀어보니, 그 안에는 여러 장신구가 담겨있었다.

"이거 설마, 훔쳤소?"
 "무례하군."
 "하하~ 장난이오."
 "릭, 이제부터라도 능력에 의존하지 마라."
 "하지만 벨져. 나는 내 능력이 사라지는 상상은 하기도 싫소."
 "그래, 네 능력은 참 편리하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

갑자기 불어온 찬 바람이 얼음이 되어 내 마음을 뚫고 간 것처럼 마음이 무척 아팠다. 벨져가 내게 건네준 말의 뜻을 나는 분명 이해했다. 훗날 있을 그날을 준비를 하란 뜻이겠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벨져의 올바른 말에 크게 반항하였다. 함께 오랜 시간을 동행하며, 벨져가 나에게 명령한 그 말이 정확히 맞는 걸까? 아닐까? 하는 마음에 반항했던 때와 달리 명백히 올바른 말을 한 벨져의 말에 반항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나는 능력을 잃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더 방문 하고 싶은 곳도, 그동안 가고 싶어도 가보지 못한 곳도 아직 많이 남아있으며, 절경의 때가 아직이라, 벨져에게 보여주고 싶어도 아직 이른 그 곳도 남아있었다. 또 퇴근이 늦어져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신나게 먼 거리로 외출했다가 문득 문단속을 하지 않은 것이 떠올라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도 크게 지장이 없으며, 방 안에서 꼼짝 안 하고 싶은 날에는 집안을 걷지 않아도 언제든지 이용한다든지, 필요한 물건을 쉽게 쉽게 꺼낸다든지. 이렇게 나는 미련이 한가득 남아 어린아이처럼 트집을 피우는 꼴이 되어, 내가 보아도 내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내 입은 내 마음을 모조리 털어 놓기를 바라던 걸까? 멈출 줄 모르고 마음을 모두 쏟아내 버렸다. 울컥한 마음에 눈앞이 순간적으로 얼룩졌다. 창피해, 이제 곧 앞자리가 바뀔 텐데- 우선 사과부터하자, 내가 너무 어른답지 못했으니. 하지만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벨져는 어느새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흥분에 어지러움으로 가득 찼던 머리는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벨져의 심장 소리에 제자리를 찾았으며, 얼음처럼 차가웠던 마음마저 녹아내릴 만큼 벨져의 품은 무척 따뜻했다.

"정말, 애가 따로 없군."
 "하아- 미안하오. 나도 이제 나잇값을 해야 하는데…"
 "네가 나잇값을? 그래봤자 또 며칠 안에 되돌아오겠지."
 "으- 정말 얄밉소. 놀리던가 위로를 하던가 둘 중 하나만 하시오."

평소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되돌아왔다. 마음도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어느새 구름에 가려진 달이 모습을 드러내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너머 낡은 교회 안을 비추었다. 그리고, 천장이 무척 높군. 또 달빛이 유독 반짝이다 싶었는데, 내 바로 앞에서 떨어지고 있는 이 은빛 머리카락 때문일 테고- 대체 언제부터 날 바닥에 눕힌 거람? 이내 제 입술 위로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질척이는 소리가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또 숨이 가쁘기 시작하였다. 입술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고, 이내 부어버린 입술이 부끄러웠지만, 싫지 않았다. 오랜 키스 이후의 더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쉬울 건 전혀 없었다. 맨바닥에서 하는 건 나도 벨져도 싫었으니.

"능력이 돌아오지 않아도 이곳이 대충 어디인지는 알 수 있어."
 "그렇소?"
 "집과는 꽤 멀지만, 그래도 같은 나라이니."
 "앗, 그럼 여긴 미국이란 말이오?"
 "안타리우스 뒤를 따랐던 때를 벌써 잊은 모양이군. 그래 너답다면 너다운 행동이겠지."
 "하도 그대를 여기저기 이동시키느라 까먹을 수도 있지."

먼저 일어난 벨져는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나는 벨져의 손을 잡았고, 몸을 일으켰다. 맨바닥보단 낡은 의자가 낫겠다고 판단한 걸까? 벨져는 의자의 먼지를 조심히 털어내고서 자리에 앉았다. 나 또한 그의 옆에 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먼지가 소복이 쌓인 커다란 십자가였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자연스럽게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특별했다.

"난 그래서 그대가 무척 대단해 보였어. 물론, 대단한 건 맞지."
 "그놈의 다 지난 전쟁 이야기. 정말 지긋지긋하군. 다른 이야기 없나."
 "아, 뭐... 근데 우리가 함께한 추억은 대부분 전쟁 때 이야기 잖소."
 "넌 대체 언제까지 숨길 건가."
 "무슨소리오?"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네 녀석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군."
 "그대의 어린 시절은?"
 "내 어린 시절은 유모를 통해 듣고도 남았을 텐데… 또 네녀석이 조금은 보기도 하지 않았나?"
 "하- 역시, 그대에게 연말은 늘 이랬던 것이오?"
 "뭐, 올해는 뭔가 더 크게 열린 거 같지만."

아무런 표정 변함 없이 말하는 벨져였지만, 어쩐지 지쳐 보이는 것이 여간 힘들었던 모양이다. 마치 집 나가서 고생하고 돌아온 고양이 같은 모습 같아 무척 귀여웠다. 고양이라, 문득 아주 오래전 키우던 고양이가 생각났다. 이걸 말해도 괜찮을 까? 하지만 궁금하다고 말했으니, 이것도 나의 어린 시절 일부니까 나는 말하기로 결심했다.

"음- 하나 말해 줄 수 있지. 나 어릴 때 고양이를 키웠소. 어린 시절부터 쭉 함께 자라온 내 친구이자, 동생이었지. 이름은 오렌지였어. 물론 오렌지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지. 하지만, 내가 지은 이름은 아니오. 오렌지는 흰색 고양이었는 데, 이마 부분에 오렌지색의 원형 무늬가 있어, 그렇게 오렌지란 이름이 탄생했다 들었소."

나는 분명 벨져가 고양이. 정확히는 복슬복슬 털이 잔뜩 있는 동물에 취약한 걸 알고 있음에도 끝까지 말하였다. 뭐, 이야기 정도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나와 벨져는 이 부분에서도 다른 듯하다. 나는 싫어하는 것은 듣기만 해도 싫었다. 하지만 벨져는 멈추라는 말도 없는 걸로 보아선 괜찮은 모양이었다.

"꽤 오래 함께한 모양이군."
 "놀라지 마시오. 오렌지는 그대보다 5년 먼저 태어났단 말씀!"
 "그게 놀랄 일인가."

오래전의 헤어진 내 동생 오렌지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무척 즐거웠다. 아직 내가 아기였던 시절에 마당에서 태어난 오렌지. 어미가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나, 부모님은 오렌지를 거두었고, 그렇게 나와 오렌지는 함께 성장하였다. 비록 나는 먼저 내 동생의 이별을 경험 하였지만, 이제는 정말 좋은 추억으로 마음 한 쪽에 남아있기에 회상을 해도 오렌지를 잃었던 그날처럼 그때처럼 엉엉 목놓아 울지 않고, 그저 보고 싶다는 마음만 들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난 연말이 무척 좋았지."
 "선물 때문인가?"
 "아, 물론 그것도 좋지. 하지만 난 역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참 즐거웠소."
 "교회? 종교가 있던 건가?"

어라? 내가 종교를 가졌던 것이 벨져의 흥미를 돋게 만들었나? 벨져는 평소에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반박할 것이 생길 때나 혹은 흥미로운 주제가 생기면 되물어보기 마련이었다.


 "응, 뭐- 부모님처럼 신실하게 다닌 것도 아니고, 아주 잠깐 다녔소. 학교를 다니고 난 이후론 친구들이랑 노는 것이 더 즐겁다고 느껴져, 더는 안 다녔지만-"
 "흠. 그렇군."
 "그러고보니, 벨져도 종교가 있었나?"
 "신은 믿지는 않았지만, 종교계를 섭렵하기 위해서 교회정도는 다녔다."
 "흐음… 귀족은 그런 것도 신경 쓰는 것이오?"
 "그래도 교회에 가 있을 동안에는 집사랑만 동행 하였기에 자유로웠으니… 내겐 그리 싫은 시간은 아니였지."
 "정말이오? 나는 오히려 반대였소. 교회에 가면, 몇 시간을 제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니까."
 "넌 참을성이 눈곱만큼도 없는 건가. 그 정도도 못 참아서야..."

나는 고개를 살며시 돌려 벨져를 살짝 노려보았지만, 아무런 미동 없이 그저 앞만 바라보는 벨져의 모습만 담길 뿐이었다.

"어린시절에만 교회를 다닌 건 알겠다. 어째서 연말에 교회를 즐겁게 다닌 거지?"
 "아, 그야 당연히 12월엔 크리스마스가 있잖소. 참 즐거웠지- 언제나 늘 같은 모습의 교회도 알록달록 꾸며져 있고, 또 조금 부끄러웠지만, 또래 아이들과 다 같은 옷을 입고, 입을 합하여 성가도 부르기도 했고, 그 뒤론 선물로 작은 주머니를 받았지. 그 안에는 여러 달콤한 간식이 담겨있었소. 그렇게 크리스마스 예배가 끝이나, 잠시 교회 마당에서 친구들과 뛰어논 이후에 집에 돌아가는 길, 나는 나만의 작은 행동으로 주머니 안에서 간식 하나를 꺼내 먹었지. 어떤 해에는 초콜릿과 마시멜로를 먼저 집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캐러멜이었소.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과 달콤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순간적으로 나는 영화 속에 있을 법한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 부모님과 함께 벽난로 근처에서 수다를 나눴던 시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었다. 친구들을 불러 놀기도 하였고 또 눈이 내린 크리스마스에는 마당에서 눈을 가지고 놀기도 하였다. 그렇게 저녁이 되면, 탁자 위에는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했고, 나는 배가 터지도록 먹고 또 먹었다. 그 이후에 소화를 시킬 겸, 구역을 나눠 집 안 청소를 하였고, 끝난 이후엔 모두 벽난로 근처에 앉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올해 중 가장 행복했던 이야기 또는 하고 싶었던 말 등등. 이야기를 마치면 항상 달콤한 코코아를 마셨다.

"아, 코코아를 마시고 싶소. 마시멜로를 잔뜩 올려서... 아님 커다란 거 한 알 넣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군. 이게 너답다면 너답겠지."
 "홀든에서 준 코코아 무척 맛있었소. 어떤 제품을 쓰는 것이오?"
 "그걸 내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마, 선물 받은 것이나 아님 직접 만드는 것이겠지."

도련님. 진짜 너무나도 도련님 그 자체의 말이었다. 그래 도련님이라… 나는 어릴 적부터 동화와 소설을 좋아하였다. 특히 좋아하는 건 귀족들이 나오는 내용들이었고,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귀족을 동경하고 또 부러웠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저택과 생일 파티 때가 아니어도 늘 반짝이는 것으로 한껏 멋을 내는 것도 무척 좋아 보였고, 언제든지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으며, 또 커다란 마당에서 승마 또는 아름다운 온실에서의 티타임에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는 생활과 날 위해 열심히 해주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하지만, 막상 실제로 귀족을 만나고, 몇 번을 저택에서 생활도 해보니 어릴 적 가졌던 환상이 산산조각이 되어 사그라졌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귀족을 좋아하게 되었다. 뭐, 정확히는 귀족이 아니라 벨져 홀든을 좋아하게 된 것이 맞겠지?

"벨져, 그대는 정말 어릴 때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소?"
 "딱히 힘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난 어릴 때 귀족들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소. 근데 지금 아닌 거 같아. 매일같이 스케줄이 있고 또 예의에 어긋나면 안되고. 또 그대는 검사로서 자라서 훈련도 더 힘들게 받았겠지? 대체 자유가 어디 있는 것이오?"
 "네 말처럼 자유를 깨달은 자제들과 종종 만남을 가지면, 남몰래 쓴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참으로 웃기더군. 자유를 그리워 하면서 왜 나가지 못하는 것이지? 나가기만 하면 자유를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난 귀족으로서 살아가는 것 나쁘지 않았다. 내가 할 만큼만 하면, 다들 내 아래 있으니까."

진심으로 그 삶이 좋았던 것인지, 실소를 작게 지으며 벨져의 말에 나는 내 상사가 벨져가 아님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즉, 벨져는 귀족으로서 살았던 자신의 삶 또한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저런 사상의 사람 아래에서 일하면, 필히 능력은 향상되겠지만, 삶은 무척 지루해지겠군. 난 어쨌든 내 능력보다 삶을 즐겁게 보내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니까.

"하아- 이거 참…"
 "무슨 문제라도?"
 "응, 아니 괜찮소. 이제야 마음이 안심 된 거 같소."
 "넌 역시 느려터졌군. 한심하긴."
 

저 입은 여전히 얄밉지만, 나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문제가 생기거나 아님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못할 고민이 생길 땐 자연스럽게 벨져를 찾아갔다. 묵묵히 제 말을 들어주는 벨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 될 때도 많고 또, 가끔은 방향도 날카롭지만, 내가 갈 곳을 잘 알려주기에 마음 정리도 의외로 빠르게 될 때가 많았다. 나보다 어리지만 역시 사교 활동을 통해 많은 이들을 만난 까닭일까? 벨져는 역시 나의 최고의 버팀목이란 사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벨져에게 나는 대체 무엇일까? 당연히 과거에는 내 능력이 필요해서 데리고 다녔을 테니.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저기, 벨져. 난 벨져에게 있어 어떠한 존재이오?"
 "사랑하는 사람."
 "뭐?"
 "사랑하는 사ㄹ…"

나는 순간적으로 열기가 훅하고 차올랐다. 그리고 다시금 말을 꺼내려는 벨져의 입을 두 손으로 꼭 막았다. 또다시 그 말은 들었다간 나는 아마 체온이 급 상승하겠지? 하지만, 나는 금세 손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차가운 공기만큼 날카롭게 벨져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 아니, 아니. 그… 미안하오. 갑자기 입을 막아서. 그러니까… 조… 조금 부끄럽소."
 "나도 안다. 내가 그 수많은 영애들을 다 쫓아내 버리고, 너같이 평범하고 별 볼품 없는 사내를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너에겐 내가 너무나도 과분하겠지."
 "하아- 좋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오? 정말 얄밉다. 벨져 홀든-"

두근거렸던 마음을 다시 진정시킨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며시 벨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었다. 생각보다 많이 불편해 나는 자세를 다시 고쳤다. 어깨를 나란히 붙였고, 조심히 벨져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었다. 손끝으로 작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지만, 무척 따뜻했다. 물론, 여기에 두터운 담요와 코코아도 함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 이대로 벨져의 말대로 피로를 풀고자 잠깐이라도 잠이 들면 참 좋았겠지만, 어째서인지 이대로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이내 벨져는 내게 말을 해주었다. 말보다는 계획에 가까운 말. 아침이 되어서도 게이트가 열리지 않다면, 근처의 마을을 찾아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자고… 뭐, 능력이 사라져도 이제 괜찮겠지. 내 곁엔 벨져가 있으니까. 그 보답으로 나는 다시 벨져에게 나의 옛이야기를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자연스럽게 샛길로 빠졌고, 또 색다른 벨져의 옛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뭐? 그렇다면 벨져는 완전 숨겨지냈던 것이오? 아, 그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어떠한 귀족들과의 접촉도 없었소?"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프리츠를 제외한 어떠한 귀족과의 만남도 허락되지 않았지."
 "그렇다면, 아까 자유를 이야기할 때 만났던 자제분들은?"
 "그저 이글에게 들었을 뿐이다."
 "거짓말쟁이… 벨져는 거짓말투성이 귀족이오."
 "내가 직접 만났다고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 잠시 나는 잊고 있었다. 벨져는 홀든가의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역시 너무 오래 붙어있다 보니 사소한 것들은 기억 저 구석에 담겨 꺼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벨져는 심심하고도 남았으려나? 아니, 일하는 고용인들을 부려 먹었을까? 이런, 역시 벨져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감사히 여겨야겠다고 나는 신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우리는 또다시 한참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해가 뜨기 시작했다. 나는 벨져의 말에 게이트를 열어보았다. 크기는 조금 작았지만, 다행히 게이트는 집과 연결이 되었다. 우리는 게이트를 넘어와 집에 도착하였고, 장기간 비워둔 터라 온기가 없는 집안은 사늘하였다. 물론 밖보다는 나았지만, 집에 돌아와 안심이 된 나는 피로가 빠르게 밀려왔고, 그대로 주저앉아 눈을 감아버렸다.

언제 잠이 든 것일까? 살며시 눈을 떠보니, 익숙한 천장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포근한 이불과 푹신한 침대, 이 안락함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피곤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건 행복한 일 중 하나였다. 이윽고 제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코끝으로 좋은 냄새가 자극하기 시작했다. 벨져가 뭔가 만들고 있나? 도와줘야 하나? 그러나, 생각과 달리 나는 눈꺼풀과 몸이 무겁다는 핑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도마를 치는 소리와 보글보글 끓은 소리… 그리고 이 냄새로 보아선 비트 스튜를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빵과 함께 먹으면 맛있겠군. 가만, 집에 빵이 없을 텐데? 어쩔 수 없군. 빵이라도 사 와야겠어. 나는 기지개를 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운 곳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하군. 감기에 안 걸린 거로 만족해야 하나?"

거울을 보며 대충 삐죽 튀어나온 머리를 정돈하고 보니, 나는 어느새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몸을 하나둘 풀고서 나는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부엌으로 향한 나는 밝게 벨져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바게트가 놓여있었다.

"어- 빵이 있었나?"
 "있을 리가."
 "그럼 사 온 것이오? 미안하오. 혼자서 다 준비하다니."
 "빵은 경호원이 사 온 것이다."
 "경호원? …아, 또 그 놈이 찾아온 것이오?"

괜히 짜증이 밀려왔지만, 내가 화를 내는 것 그것이 그자가 원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상대하기 싫은 사람. 대체 이사를 가도 또 우리의 위치를 알아내서 찾아오는 것인지.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벨져처럼 그를 철저히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면 흥미를 잃어 떨어지겠거니 했지만, 벨져는 그를 상대하는 것이 안일하다고 여기는 걸까? 요즘엔 도통 돌아가라, 가라, 사라져라 소리를 하지 않은 다. 그래 나라도 정신 차리고 있어야지.

"그자는 돌아갔소?"
 "루드비히?"
 "으- 그래 그 놈. 대체 왜 또 온 것이지? 무슨 일 없었소?"
 "넌 아직도 내가 그 녀석에게 당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불안하잖소."
 "걱정은 마라. 앞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계약은 오늘로 끝이 났으니."
 "계약? 그런걸 했소?"
 "형이 너무 철저해서 말이지. 계약 기간 동안에는 몇 달에 한 번씩 보고하는 형식이었지."

그런 건 미리 말해주면 좋았을 것이라며 말하고 싶었던 것을 꾹 눌렀다. 더 이상 벨져와 함께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비록 빵을 사 오는 일은 하지 못하였지만, 나는 대신 벨져의 곁으로 가 이것저것 도와주었다. 물론, 거의 마무리가 되어 있던 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음식을 그릇에 옮겨 담아 식탁으로 가져가는 일 뿐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튜는 보이는 것처럼 맛 또한 끝내주었다. 시판에서 사 온 듯한 빵은 늘 먹었던 맛의 빵이었지만, 고기와 야채와 함께하니, 무척 잘 어울렸다. 든든히 배를 채운 후, 진작에 샤워를 끝낸 벨져는 서재로 들어갔으며, 나는 포근한 수건과 함께 욕실로 향하였다. 간단히 샤워를 끝낸 나는 따뜻한 물로 가득 채운 욕조 안에 입욕제 하나를 집어 넣었다. 오묘한 보랏빛의 입욕제는 금세 녹아내려 거품과 함께 라일락 향기를 남겼고, 나는 그 유혹을 참기 어려워 곧장 발끝을 시작으로 몸을 푹 맡겼다. 알맞은 온도에 몸과 마음이 노곤해져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이제 능력 따위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아."

이 말은 진심이었다. 평범한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 맞다고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세상을 잘 알지 못한 저 도련님을 위해서 평범한 삶이 무엇인지 알려줘야겠지... 그렇다면, 능력은 이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어야 한다. 그래,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벨져와 잘 지낼 수 있을까? 이 걱정을 한 적도 수없이 많이 있었지만, 의외로 벨져가 발을 잘 맞춰 걸어주었다. 비록 뼛속까지 도련님이라 타인과 종종 트러블이 소소하게 발생하곤 하였지만, 몇번의 이사를 한 끝에 그 수가 확 줄었다. 지금이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벨져와 함께 먼 미래를 생각할 때가 온 것 같다.

"벨져, 나 내년에 퇴사를 하겠어."

목욕을 끝낸 나는 곧장 서재로 달려갔다. 그리고 벨져에게 퇴사를 하겠다고 선언하였지만, 벨져는 놀란 표정 하나 없이. 그래? 그러던가 라며,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려버렸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그래도 뭐라도 대답해주면 안되오?"
 "퇴사 축하한다. 릭 톰슨."
 "아니 그게 아니라- 보통 이럴 땐 이유를 물어보잖소."
 "그런가? 난 보통 사람과 달라서 말이지."
 "그래, 잘 알겠소. 벨져 홀든- 뭐, 그대가 궁금해하지 않아도 다 말할 것이오. 아무래도 능력이 퇴화하는 건 사실이니 잃어버리기 전에 여행을 떠나야겠어. 내가 퇴사하면, 함께 여기저기 여행 가자 벨져."

나는 전에 가봤던 여행지 중에서 또 가고 싶은 곳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최근 잡지에서 보았던 추천 여행지를 줄줄이 말하였고, 먹고 싶은 것과 또 사고 싶은 것도 말하고 나니, 나는 무척 즐거웠다. 드디어 마음속에만 간직했던 사표를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임은 틀림 없겠지?

"뭐, 좋다. 그만한 돈이 네게 있나?"
 "당연하오. 홀든에서 내게 보내준 돈이 있거든! 아껴놓기 잘했지."

분명 홀든에서 돈을 받고 있었다. 이 말을 하면, 잔소리부터 나오겠다 싶었지만, 의외로 벨져는 받을 건 잘 받고 다니는 군. 이라며 말을 한 뒤 서재를 빠져나왔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취침 시간이군. 나는 종종걸음으로 벨져의 뒤를 따랐다. 홀든에 손길을 닿은 것이라면 싫은 거 아니었나? 궁금하기도 했지만, 받을 건 잘 받고 다닌다라... 그래 이렇게 힘든 도련님 데리고 사는 건데, 받을 건 제대로 싹 다 받아야지.

"만일, 퇴사 전에 네 능력이 사라지면, 어쩔 셈이지?"
 "능력을 잃어버려 못 갈 여행은 없다고 생각하오. 단지 시간만 길어질 뿐 아니겠소?"
 "금세 마음가짐이 올바르게 바뀌었군."
 "하하- 지난날 그대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능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구나를 깨달았어. 그리고 능력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되돌아보니까, 그때의 나도 즐거웠던 순간이 참 많았다는 걸 깨달았으니... 미래의 내가 능력이 없어져도 괜찮겠다 싶었소."
 "그럼, 이제 세일 기간 때의 장바구니도 절반으로 줄이는 건 어떤가."
 "앗, 그건 안되오. 세일할 때 왕창 사둔다. 그게 내 인생 룰이거든! 아, 말 나온 김에 내일 쇼핑하러 가야 하오. 아까 팬트리를 보니 먹을 게 별로 없어."
 "먹을 것이 아니라 네 간식이 없다는 게 맞지 않나?"

마음을 콕 찌르는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애써 무시한 채 내일 사 올 목록을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오랜만에 마당에서 캠핑 분위기를 내볼까? 코코아랑 마시멜로는 있으니까, 크래커와 초콜릿을 사 와야겠군. 그리고 땔감이 남아있었나? 없다면 땔감도 사 와야겠어.

"벨져, 내일 마당에서 캠핑 비슷한 거 할 것인데,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소?"
 "에클레르."
 "음? 갑자기 디저트?"
 "가끔이지만, 생각나곤 하지."

가끔 벨져는 예상 밖의 대답도 하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작지만 소소하게 선호하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기도 하였다. 에클레르라, 분명 마트에서 파는 건, 거의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이 전부라, 벨져의 까다로운 입 맛에 전혀 맞지 않아 쓴소리가 분명 나올 것이 뻔하였다.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긴 한데, 맛없는 걸 먹일 순 없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던 중, 오래전 어느 여행지에서 만난 카페의 에클레르가 떠올랐다.

"그럼, 내일 캠핑은 취소하고, 여행이나 가자. 맛있는 곳을 내가 잘 알고 있거든~"
 "참 재미있군. 네 계획은 1초마다 바뀌는 건가?"
 "하루하루가 똑같으면 어디 지루해서 살 수 있겠소? 1초마다 생각이 바뀌는 인생도 나름 재미있소."

이왕 가는 것, 제대로 즐기고 오고 싶어진 나는 지하로 내려가 작은 여행 가방을 챙겨왔다. 여벌의 옷과 지도를 담았다. 마치 어린 시절 가족과 캠핑을 떠나기 전 날 밤처럼 무척 신이 났다. 그 여행지에 호수가 무척 아름다웠지. 뭐 볼만 한 것이 호수밖에 없지만, 딱 하루 여행하기엔 좋기에 나는 카메라도 챙겼다. 이걸로 벨져 사진을 왕창 찍어야지.

"놀러 갈 생각이면 일찍 자라."
 "아, 음- 피곤하면 먼저 자시오. 난 좀 더 챙기고서 잘 테니까."

벨져는 별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인 후 침실로 들어갔다. 많이 피곤했던 걸까? 하긴 돌아온 이후로 나는 기절하듯 잠을 잤지만, 벨져는 아닌 모양이었으니. 그 예로 벨져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 제가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끝까지 다 읽었을 텐데, 오늘은 반쯤 읽고 나왔으니... 몰래 읽은 페이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까? 이런 얄미운 장난도 생각났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나잇값 하자 릭 톰슨.

"새해 다짐의 첫 번째가 정해졌군. 나잇값 하자."

딱히 잘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상관 없겠구나 싶어졌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벨져가 이런 나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일까? 뭐... 벨져가 좋아하든 말든 어차피 나에게 큰 상관은 없겠지만, 역시 벨져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든든하다. 애써 나를 바꾸지 않아도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 주고 있는 벨져가 언제나 곁에 있단 것이 조금은 부끄러워 도망도 치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내 마음은 행복감이 가득했다. 그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제서야 제 능력을 놓아주자고 다짐했다. 오랜 시간 함께해온 능력이 사라지면, 많이 아쉽기도 하고, 또 하나의 나를 부르는 칭호인 능력자. 능력자로서의 나의 삶이 끝나겠지만, 여행자로서의 삶은 나 스스로가 끝내지 않은 이상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나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회사원도, 능력자도 아닐 수 있는 나의 미래에 대해 불안함 조금, 그리고 큰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미래의 나는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 까? 옆에 있는 도련님이 온갖 짜증은 내지 않을까? 아님 무척 로맨틱해서 내 마음이 다 녹아 남아나지 않을까? 나는 또 미래의 생각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워버렸다. 이런, 여행 준비.

"어라? 여행용 칫솔 세트 어디에 두었더라? 뭐 그럼 예비용 칫솔이라도- 이런! 하필 예비용 칫솔도 다 떨어졌군. 맙소사. 신은 역시 없어."

아직 여행 갈 준비가 덜 끝난 상태의 산만한 집안 꼴에 일어난 벨져의 눈이 날카롭게 떠지는 건 당연했다. 아직도 준비가 덜 된 거냐며 잔소리를 들었지만, 뭐 이제는 잔소리는 지나가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만큼 익숙하다. 앞으로도 종종. 아니 꽤 많이 이런 상황이 펼쳐지겠지? 그래, 미래의 나는 분명 회사원은 아닐 것이다. 이 연휴가 끝나면 퇴사 할 것이라고 말할 테니까. 그럼 나는 미래에서도 과연 능력자일까? 아님 비 능력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나는 능력을 잃어도 계속 이렇게 불리고 싶다. 여행자 릭 톰슨. 그리고 벨져 홀든의 연인. 아, 마지막은 조금 부끄럽군… 그럼, 조금 수정을 해보자.

벨져 홀든과 함께 생활하는 여행자 릭 톰슨.

그래, 이게 가장 마음에 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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