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어.
#Cyphers #잭클
클리브 스테플은 정말 오랜만에 완전한 이방인이 된 기분을 듬뿍 느끼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기획된 특집 기사의 취재에 스스로 자원한 것은 반쯤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건 잠깐의 충동에 대한 대가로 얻기에는 지나치게 과분한 분량의 외로움이었고. 요컨대 이번 특집 기사의 주제는 북적한 런던 시내를 떠나 한적한 교외의 삶을 체험해 보는 것으로, 갑자기 왜 이런 기사를 낼 생각을 했는가는 둘째치고 그렇게 교외의 삶을 동경한다면 스스로 떠났어도 되었을 일을 굳이 남을 시켜 보내려는 편집장의 유별난 행동 양식은 이미 이곳에서 지낸 지 닷새가 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중 하나였다. 그는 잔뜩 숱이 올라 새끼 햄스터처럼 통통해진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내게 말했다. ‘분명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런던은 지나치게 사람이 넘쳐나지 않나, 이렇게 북적북적한 곳에서 너무 오래 지내다간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되고 만다니까, ….’ 였던가. 분명 스스로 자원한 일이기는 해도, 그 말을 하며 짐짓 지어 보이던 사람 좋은 웃음을 떠올리면 괜히 억울해지고 말았다. 제 안에 있는 반골 기질이 발동하는 것인지, 뭔지.
그리하여 현재 묵고 있는 집은 편집장의 사촌이 가지고 있는 작은 저택이었다. 정확히는, 저택과 주택의 미묘한 간극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저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그런 건물. 순전히 묵을 곳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 이 시골 마을은 마을이라고 불리기에도 민망할 만큼 집과 집의 사이가 무척이나 듬성듬성했다. 겨우 구색을 갖춘 광장마저 그나마 날씨가 좋았던 첫날에나 몇 명의 아낙들과 소나 양을 끌고 분주히 움직이는 남자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을 뿐 하필 제가 도착한 다음부터 줄곧 쏟아진 을씨년스러운 빗줄기엔 그것도 완전히 뚝 끊겼다. 그 비는 사흘을 내리 쉬지도 않고 쏟아부었다.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취재 따위야 걷어치우고 변변한 책 한 권 찾아보기 어려운 낯선 저택에 붙박여 있기를 기꺼이 택했을 것이다. 온몸을 두드리는 거센 빗줄기를 뚫고 외출을 강행하는 대신 말이다. 그뿐일까, 그런 와중에 저택에 단 한 필 뿐인 말은 불행히도 젖은 땅을 달리는 것을 몹시 불쾌해하는 녀석이었다. 평범한 보통의 말이었다면 고작 30분 남짓 걸릴 길을 녀석과 함께 50여 분간의 불유쾌한 실랑이를 거쳐 가며 일부러 찾은 구멍가게에서는 어땠던가. 그 구멍가게란 광장이 바로 내다보이는 위치에 자리한 나이 지긋한 부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을 겸한 식당으로, 그녀는 기꺼이 창가의 테이블 하나를 내주고 얼마든 앉아 있어도 좋다고 허락했으나 문제는 그렇게 시간을 죽여봤자 얻어지는 것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심지어 가게에는 이틀 동안 손님이 단 한 명도 들지 않았다! 그래, 이걸 세 번째 불행이라고 부르면 딱 맞겠군.
그런 식으로 아무 소득 없는 이틀을 보내면 굳이 흙탕물과 진흙이 점령한 험한 길을 밟아 구두를 닦는 것에 취미를 들이지 않는 한은 누구라도 외출에 이골이 나고 말 것이다. 그맘때엔 안 그래도 사흘째 이어진 빗줄기가 하늘의 물을 모두 말려버릴 기세로 거세져 있기도 했다. 지붕에 닿을 것처럼 낮게 깔린 먹구름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빗물을 보고서도 ‘좋아, 가볼까!’ 따위 소리를 하기에는 이미 며칠에 걸친 실패로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 있던 탓에 그렇게 무기력한 닷새째 하루가 또 지나갔다. 날이 밝고, 사흘을 내리 쏟아낸 뒤 높게 뜬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쳤다. 다만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이번에는 말이 사라졌으니까. 그 녀석은 분명 진흙이 발굽을 적시는 것을 싫어했을 텐데, 생각했지만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땅거미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에서야 석양을 등지며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짐승은 황당하게 선 저를 지나쳐 뻔뻔스럽게 목을 축이며 무슨 문제가 있었냐는 듯한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저벅저벅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정말로 무슨, 이런 동네가 다 있나 싶은 생각이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이 마을에 도착한 이후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난 것은 도착한 첫날이 전부였다. 하필이면 한가롭게 새로 마을에 들어온 이방인을 살펴줄 만큼 관대한 주민이 아무도 없었기도 했거니와 시기가 나쁜 것도 겹친 탓이었다. 억센 빗줄기가 아니더라도 긴 겨울을 앞둔 사람들은 이미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다. 얼뜨기처럼 펜과 수첩을 든 채로 한가롭게 서성거리는 이방인에게 관심을 둘만한 짬이 있을 리가. 그렇게 이 아무런 소득도 없는 엿새를 보내게 된 것이다. 아니지,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에 걸린 시간을 더하면 일주일을 꼬박 그렇게 보낸 거라고 봐야 했다. 문득 아주 오래도록 쓰지 않은 목이 까끌하게 느껴졌다. 잭과 함께 동거하게 된 이후로, 이렇게 오랜 시간 고독을 씹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일주일이 지났군. 이마를 조급하게 긁어대던 펜대가 우뚝 멈추었다. 사실 이 충동적인 결정의 기저에는 그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잭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놀랍게도 평범한 생활에 제법 잘 녹아들었다. 처음에는 그를 집에 들이는 것에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는 백년 전의 살인마치고도 몹시 예의 바른 하우스메이트였다. 조용하고, 정중하고. 때로 이유 없이 우울해할 때면 눈에 띄게 그의 불안정한 부분이 도드라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단지 몇 시간 정도를 할애해 그를 거실의 소파로 데려다 놓고는 벽난로에 장작을 조금 더 보태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밀크티를 앞에 가져다 놓은 채로 곁에 있어주면 금세 가라앉았다. 그는 불길이 사그라든 뒤 남은 희게 탄 마른 장작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내면을 불사르던 분노는 분리와 동시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듯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게 그에게 그리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분노였음을 그가 완전히 분리되고 난 이후에 알게 되었다. 겨우 몸을 다시 얻었음에도 그는 무엇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다시 얻은 몸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그가 가장 처음 언어의 형태로 내게 털어놓은 회의감의 근원은 대강 '어째서 잠에 들면 다시 일어나게 되어있는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새로 얻은 삶에 대한 어떤 종류의 애착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 그래서였을까. 그와 함께 지내온 그 몇 달간의 노력들은. 나는 조금이라도 관심을 거두면 잔바람에도 그대로 무너져 재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남자를 두고 무관심해질 방법을 몰랐다. 아침이 되면 곧장 일어나 아침 인사를 건네러 갔고 혼자 살 적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침 메뉴를 고민하게 되었다. 구운 빵, 얇게 저민 햄, 치즈와 잼, 크래커, 커피, 사흘 연속 같은 것을 준비하는 것은 스스로 정해둔 금기였던지라 이따금 전혀 새로운 메뉴를 준비하기 위해 식료품점에서 머리를 싸매는 일도 잦아졌다. 놀랍게도 그것 역시 익숙해졌다. 잠에서 깨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가 자신과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어쨌건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서툰 솜씨로 준비한 음식을 먹어주는 것을 보면 내심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그와의 일상은 오래지 않아 일정한 궤도에 접어들었다. 아침 식사, 짧은 인사 후 출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아침과 그리 다를 것 없는 소박한 저녁 식사를 함께한다. 저녁 식사 후엔 짧은 대화를 가지고 거기엔 이유 없이 루틴에 추가되어 버린 밀크티 한 잔이 곁들여진다. 어째서였더라, 별생각 없이 끓인 밀크티를 그가 지나가는 말로 맛있다고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중첩되는 일상에 그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이제는 내가 먼저 부산스럽게 아침을 준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있거나, 아침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빵을 자르고 있거나 하는 식으로. ……예상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 이제야 그런 그를 의식하게 되었는가다.
거기에서부터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서로의 존재가 당연해지고, 일상에 포근한 권태가 감돌고 가벼운 몇 번의 접촉에 알 수 없는 잔여물이 남아 둘 사이에 퇴적되면서. 떠나기 전날 밤, 그렇게 되었노라 짧은 격리를 고하는 이쪽을 향해 그가 지어 보이던 표정은 어땠었나. 이쯤 되면 자신이 없어도 그 스스로 그럴듯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고까지 생각했던 남자가 짓던 표정이 어떤 식으로 굳어 있었던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단편적으로 조각난 굳은 입매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과,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그대로 멈추어 있던 손가락의 모양 같은 것들은 떠오르는데도 그 모든 조각이 하나로 뭉쳐지지 않고 제각각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기에 오히려 더 답답했다. 당장 그를 보고 확인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 싶을 만큼. 성마른 손길로 종이를 아무렇게나 한 장 끄집어내 펜촉에 잉크를 듬뿍 묻힌다. 조금 이르기는 했지만 돌아갈 때가 되었단 직감이 들었다. 편지의 내용은 귀가를 알리는 문장 몇 줄이 전부였으나 그에게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리라.
달리는 기차 안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가 마찬가지로 사그라들었다. 깊은 생각에 빠지기란 불가능했다. 창 한 칸을 가득 채우며 펼쳐진 녹회색 평야는 겨우 한 가닥 붙잡은 생각도 이윽고 멀어지도록 만들었으므로.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 그 지평선, 야트막한 언덕과 듬성듬성한 숲, 마른 풀숲 ……. 마침내 매캐한 안개를 맡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각성 상태에 접어든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몽땅 몰아넣은 짐가방을 들고 역사 밖으로 달리듯 뛰쳐나간다. 그렇게 거리로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마부를 불러 마차 안으로 급히 몸을 싣다 보면 마음이 무언가에 쫓기듯 조급했다. 느리고 지루한 기차 여행 동안 억지로 눌러 두고 있던 감정이 이제야 벅차오르고 있었다. 가방끈을 쥔 손에 눅눅하게 습기가 배었다. 지금 하는 이 생각은 어쩌면 내가 완전히 미쳤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불안한 목소리가 귓바퀴에 달라붙어 속삭였지만 태연하게 그럴지도 모르지, 속으로 대답하며 눈을 내리감는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봤자 뭐가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적어도 식도 중간쯤에서 내내 숨을 메이게 하던 거북감은 이제 완전히 사그라들어 있었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창문 너머로 눈에 익은 거리가 스쳐 가는 풍경이 그려졌다. 그리고 완전히 덜컹거림이 멈추었을 때, 이제껏 요란스레 뛰던 심장은 기묘하게 잠잠하다. 불길한 징조일까? 마차 삯을 지불하고 등 뒤로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불이 켜진 집을 바라보고 섰다.
그래,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불빛이 일정하지 않게 일렁이는 것을 보면 벽난로를 지펴둔 것일 테다. 그가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장작을 쌓고 불쏘시개로 불을 뒤적이는 모습이 굳이 보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제야 다음 걸음이 떨어졌다. 맴돌기만 하던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이제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잠겨 있지 않은 문과 희미하게 들려오는 낡은 축음기의 지직거림, 그게 제가 좋아한다고 일전에 일러두었던 오래된 왈츠곡이라는 것은 거실로 향하는 도중에 눈치챘다. 걸을 때마다 낡은 마룻바닥이 끼익거렸고 그 소리를 들었는지 거실 안을 서성이던 그림자는 서성거리기를 멈추었다. 걸음은 그대로 더 빨라지지도 더 느려지지도 않고 도착 지점을 향해 나아가 원하던 데에 닿아서야 멎는다. 낮은 커피 테이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접힌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완전히 편평하게 펼쳐진 종이 한 장과 두 개의 머그잔이 놓여있다. 아마도 방금 내려놓은 것이 분명한 잔에서는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익숙한 밀크티 향기와 함께. 그제야 방황에 가까운 여행이 끝났다. 어두운 거실의 불빛 속 우두커니 선 남자에게 다가가며, 문득 인사를 끝내고 나면 차갑게 식은 밀크티를 마시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사소한 걱정이 치밀었다가 가까워진 몸을 마주 당겨오는 팔에 이내 잊히고 말았다. 어쨌거나 식은 밀크티 따위는 지난 며칠 간의 고민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웠으므로.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