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세월의 자락

2023.08.20

1

끝없이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아루잔은 죽음 인근에 이르렀다.

 

정확히 어떻게 그리되었는지 아루잔은 알지 못한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으며 거친 눈발이 쏟아졌다. 시야가 지독히도 희뿌옜으며 한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렸고 고통스러울 만큼 추웠다. 동서남북 중 어느 쪽에 자신의 유르트가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고자 디딘 걸음은 아루잔을 눈 속에 더 고립시킬 뿐이었다.

 

아루잔은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눈이 그치고 시야가 확보될 때까지 이 자리에서 견뎌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버틴다? 아루잔은 그의 말, 세릭을 끌어안았다. 세릭은 털은 차가웠으나 아루잔은 그 안에 있을 온기를 찾아 애썼다. 충실한 그의 말은 다리를 접고 바닥에 엎드렸다. 배가 땅에 깔린 눈에 닿아 차가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세릭이 최대한 웅크려 바람을 피하는 것이 나은지 시린 눈에 닿지 않는 것이 최선일지 아루잔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겨우 제 능력에 생각이 미쳐 끔찍하게 떨리는 손으로 끄집어낸 천은 제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그것은 단단하지만 따뜻하거나 포근하지는 않다. 그래도 바람은 막아주었으므로, 아루잔은 세릭과 자신 위에 천을 덮었다.

 

“세릭, 우리가 죽을까?”

 

고작 이 말을 하기 위해 들이킨 숨은 목구멍을 차갑게 찔러댔다. 세릭은 아루잔의 털 가죽 옷에 고개를 파묻고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설마 벌써 죽은거니? 얼어붙은 머리와 마음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을 내린다. 아루잔은 이상하게도 전혀 슬프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루잔도 곧 그리될 테니까.

 

천 위에 눈이 차츰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솜털 같은 눈이 유르트를 무너뜨릴 무게로 쌓일 수 있다는 것을 아루잔은 안다. 사람 하나와 말 하나가 깔려 죽기는 충분할 테다.

 

그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거센 바람이 갑자기 딱 끊기고 주위가 먹먹하게 고요해졌다. 아루잔은 천을 걷어보았다. 사방은 여전히 온통 희지만 잠잠하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독수리가 선회한다. 아루잔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눈보라에 정신을 잃고 꿈을 꾸는 모양이다. 그러나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뇌리를 꿰뚫는 순간 아루잔은 그것이 꿈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저항은 끝났느냐?]

 

신이다. 저것은 신의 음성이고 이 상황은 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래, 올 것이 왔다. 지금까지는 재해를 잘 피해왔으나 영원히 피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언젠가 그의 덫에 치명적으로 걸려 꿰뚫릴 날이 오리란 걸 알았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당신이 이겼어, 텡그리. 나를 몰아넣는 데 성공했네. 이번에는 내가 피하거나 견뎌내지 못했어.”

 

아루잔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이십여 년에 걸친 술래잡기가 끝났다. 아루잔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고 생존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배웠으며, 책임을 졌다. 그것으로 족하다.

 

[네 패배를 인정하느냐?]

“그래.”

[남길 말은?]

“없어.”

 

아루잔은 눈밭에 털썩 드러누웠다. 곧장 쌓인 눈이 아루잔을 감쌌다. 이 서늘함이 죽음의 감각일테다. 하늘에서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루잔은 멍하니 눈발을 보았다. 이 한기가 아루잔을 온전히 죽이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그 사이 독수리가 아주 가까이 날아왔다. 아루잔의 머리 근처에 앉았다.

 

[내 너에게 딱 한 번 기회를 주겠다.]

 

아루잔은 그저 가만히 독수리를 보았다.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슬슬 흐려지는 정신은 신이 어떤 의도를 품고 있을지 생각하는 행위를 힘겨워했다.

 

[내 계약자가 되거라. 그러면 죽음에서 널 꺼내주겠다.]

“계약자…….”

 

아루잔은 문득, 신이 과거에 같은 제안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아루잔은 거절했고 텡그리가 분노했으며 그 이후 신의 재해가 더 과격해진 것도 기억났다.

 

그래서 아루잔이 오늘에 이르렀다.

 

아루잔은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다시 천을 덮어썼다. 명백한 거절의 태도에 독수리가 거세게 날아올랐다. 눈보라가 다시 세게 휘몰아치고 바람이 천 사이로 파고들며 아루잔을 고통스럽게 얼렸다. 그리고 눈의 무게가 다시 그들을 짓눌렀다.

 

[너는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가!]

“......나는 졌고, 패배의 대가는 내 목숨이야. 그 이상은 없어. 그러니,,,,,, .”

 

이 대적자의 생명을 어서 가져가고 이만 끝내, 텡그리.

 

그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하고 싶었으나, 목이 갈라지고 쇠맛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다. 분노나 의문은 산 자의 것이다. 당신만의 것이다. 죽을 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극도의 추위는 몸에서 감각을 완전히 앗아갔다. 아루잔에게 묘한 졸음이 찾아왔다. 이는 좋은 신호였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끝을 맺는다.

 

.

.

.

 

그리고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아루잔은 살아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2

아루잔은 종종 그 때를 떠올린다. 당신은 왜 나를 죽이지 않았나?

 

아루잔은 개에게 밥을 주고 세릭의 콧잔등을 두들겼다. 함께 살아남은 세릭에게서는 따스한 숨이 뿜어져 나왔다. 아루잔은 미소를 짓곤 단맛이 나는 풀을 뽑아서 세릭에게 물려주었다. 세릭이 우물거리며 씹는 동안 나귀 두 마리가 아루잔을 재촉하듯 울었다. 아루잔은 그들에게 작은 당근을 물려주었다.

 

이제 모든 동물들이 제 먹이를 찾아서 먹느라 조용해졌다. 그러나 아직 한 마리가 남아서 울어댔다. 아루잔은 그것을 보고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그건 독수리였다.

 

매어놓는 끈도 없고 눈가리개도 없는 그 검독수리는 아루잔을 떠나지 않는다. 매여있지 않은 독수리가 아루잔을 따르는 것을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아루잔이 독수리에게 매여있는 것이다. 저 독수리는 텡그리가 보낸 것이므로. 독수리의 끝에는 신이 계시므로.

 

독수리는 잘못이 없다. 아루잔도 안다. 그러나 아루잔은 매몰차게 말했다.

 

“오늘은 줄 것이 없어.”

 

독수리가 활갯짓을 하며 불만을 표했다. 아루잔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이야. 나라고 매번 육류를 먹지는 않아. 오늘은 콩과 염소의 젖이 전부야. 아니면 쟤네들이 먹는 것이라도 줄까?”

 

아루잔이 풀을 뜯는 짐승들을 가리켰다. 독수리는 아루잔을 맹렬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휙 날아올랐다. 제 배를 채우기 위한 사냥을 나서러 간 것이다. 그것이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루잔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신의 눈을 잠시 보냈다. 그날은 요리할 마음이 나지 않았고, 아루잔은 볶은 콩을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눈 속에서 깨어났을 때 저 독수리가 있었다. 독수리는 쌓이는 눈을 날개로 털어냈으며 아루잔이 죽지 않도록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아루잔이 깨어난 다음에는 하늘을 크게 돌며 도울 다른 사람을 불렀고. 누군가가 아루잔을 발견하여 구해주려고 달려오자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떠났다.

 

저 독수리가, 아니, 그 뒤의 텡그리가 자신을 구했다. 왜?

 

아루잔은 예나 지금이나 텡그리의 관심이 그다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적자일 시절부터 그러했다. 아무리 대적자라고 한들 자신은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아주 작고 때가 되면 자연히 죽어버릴 존재이다. 흩어진 구름 중에서 한 조각, 초원이 풀 중에 한 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신은 그런 자신을 집요하게도 죽이려 들었다.

 

아루잔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의 기준에서 있어서 대적자의 존재가 죽이고 싶을 만큼 성가셨다고 치자. 그럼 왜 그때, 텡그리는 곧 죽을 상황에서 자신을 살렸는가? 아루잔은 자신을 살린 행위가 죽이려 드는 행위보다 더 이해되질 않았다.

 

자신은 아주 작은 존재였으나 그 커다란 신에게는 아루잔만 찔러낼 바늘이 없었는지 참 다양한 방법을 써댔다. 아루잔 인근을 통째로 말리고 얼리고 비와 벼락을 퍼붓고 병이 돌게 하고 아주 난리였다. 그것이 바로 재해였다. 그런데 그렇게 죽이려고 들다가 마지막 순간에 죽이길 포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애써 그리고 애써 살려낸 이유는 무엇인가? 더군다나. 마지막 순간 아루잔이 텡그리를 분노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때 천막 밖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루잔은 나가보았다. 웬 토끼가 한 마리 엎어져있었다. 발톱에 찍힌 상처가 나 있었는데, 움직이지 않고 피가 빠르게 흐르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죽은 모양이었다. 손질하면 먹을 만한 상태였고, 그게 아니더라도 가죽이 괜찮았다. 아루잔은 고개를 들었다. 독수리는 막대에 앉아 모른 척 깃을 고르고 있었다.

 

아루잔은 고개를 내려 서늘하게 토끼 시체를 내려보았다. 신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왜 마음을 바꾸었어? 왜 나를 계약자로 택하고 받아들인 거야? 왜 이제 와서 호의를 보여?

 

아루잔은 그대로 문을 닫았다.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마치 비명 같이 울렸으나 아루잔은 끝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3

노인의 혼이 물었다.

 

[왜 샤먼이 되겠다고 하였느나?]

 

아루잔이 찾아간 천막은 이미 오래전에 허물어졌다. 그곳에는 유골과 영혼만 남아 있었다. 그 혼은 땅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고 아루잔은 그곳의 땅을 팠다. 그러자 과거의 샤먼이 묻어둔 무복과 무구가 나왔다. 그리고 그 아루잔에게 혼백이 물었다. 아루잔은 그것을 두팔로 감싸안고 답했다.

 

“제가 그분을 모시기로 했으니까요.”

[네가 위대하신 푸른 하늘, 텡그리의 계약자임은 내 눈에도 훤하게 보인다. 그러나 샤먼이 계약자가 아니고 계약자가 샤먼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내가 알기로는 샤먼 중에서 계약자를 택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계약자이면서 샤먼이고자 하느냐? 그분이 그리하라고 명하셨느냐?]

“아니요. 내가 하고자 했습니다.”

 

늙은 노인의 혼은 주름이 깊어졌다. 육신이 없는데도 그리 될 수 있었다.

 

[샤먼이 되는 건 쉬운 길이 아니다, 젊은 계약자야. 내 자식들도 하지 않겠다고 내뺐어. 나는 그 녀석들이 떠나게 내버려두었지. 이 일을 잇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서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은 버려진 천막을 한번 훑었다. 삭은 집기들이 나뒹굴었고, 버리진 유골에 얽힌 천이 흔들렸다.

 

[그런데 너는 정녕 이 길을 걷고 싶으냐? 무슨 연유로 그러하느냐?]

 

아루잔은 잠시 망설였다. 별로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특히 텡그리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하지만 누군가 이 자리를 찾을 때까지 오랜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다가, 방금 자신에게 무구를 물려준 이에게 최소한의 보답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갈등하던 아루잔은 혼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아루잔은 그의 눈에 맻힌 노인의 삶을 보았다. 붉은 깃발 아래 유목민이 해체되고 그들의 뿌리는 사라진다. 종교를 금지하는 정책에 샤먼은 제일 먼저 공격받는다.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한다. 그들에게 샤먼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러한 세월이 노인의 눈가를 타고 눈물로 모여 바닥에 떨어진다. 아루잔은 그 모든 것을 보았고, 결국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루잔이 입을 열었다.

 

“텡그리께서는 내가 카간이 되길 원합니다.”

 

노인은 아루잔을 보았다. 본디 대적자로 태어난 이는 저물어가는 신화의 시대에서 자라난다.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재해가 그를 덮친다. 주트가 일고 많은 가축들이 쓰러진다. 그 가운데 아루잔은 홀로 서 있다. 구름 아래에서, 천막 아래에 가려졌던 이는 하늘을 노려본다. 그리고 신을 그를 계약자로 만든다. 그러한 세월이 아루잔의 눈에서 불처럼 피어올라 인광이 된다. 노인은 그 모든 것을 보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하, 하, 하하! 카간이라! 그렇군. 그렇게 된 것이군!]

 

노인은 한참을 시원하게 웃어댔다. 아루잔은 하늘을 힐끗 보았다. 하늘은 딱히 변동이 없었으며 독수리는 보이지 않았다. 텡그리가 지금 이곳을 주시하고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대신 샤먼이 되려는게냐?]

“맞습니다.”

[좋다, 좋아! 네가 아주 높은 샤먼이 되도록 내가 도와주마.]

아루잔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나는 그리 뛰어난 샤먼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그저 그분의 약소한 심부름꾼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아루잔은 생각한다. 글쎄, 나는 아주 낮고 작은 샤먼이 될 거야. 작으면 작을수록 좋지.

 

 

4

[무엇을 하는 게지?]

아루잔은 무복을 차려입고 다소곳하게 앉았다. 여러 혼의 도움으로 그의 성취는 빨랐지만, 온전한 샤먼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아루잔이 접신을 하기 전에 독수리가 아루잔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먼저였다. 아루잔은 좀 더 극적인 순간에 꺼내서 놀래키고 싶었던 작은 소망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신의 엄한 물음에 아루잔은 여상하게 답했다.

 

“당신께서 명하신 대로, 계약자의 의무를 행하고 있습니다.”

 

화로의 연기가 피어올라 샤니라크로 빠져나간다. 신께서는 드물게도 말문이 막히셨다.

 

[내가 너에게 샤먼이 되라고 명하지는 않았을 텐데.]

“예, 제가 자발적으로 나선 일입니다.”

 

텡그리는 아루잔을 알았다. 이 계약자는 결코 신에게 칭찬받을 일을 할 자가 아니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이다. 신의 사랑을 애걸하지 않으며 두려움에 기지 않는다. 그런 이가 어째서 신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샤먼이 되고자 했겠는가? 신은 이유를 알았고, 텡그리의 전언에 노기가 낮게 깔렸다.

 

[내 너에게 카간이 되라고 말했다.]

 

아루잔의 머리 장식이 작게 흔들렸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샤먼이면서 카간이겠습니까?”

 

아루잔은 텡그리를 알았다. 이제 곧 그는 분노하리라.

 

[이 오만방자한 녀석 같으니라고! 너는 신의 명을 무엇으로 아느냐!]

“왜 그리나 불만이신지요. 저는 당신으로부터 계약이라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와 책임을 어찌 방기하겠습니까. 따라서 당신의 심부름꾼이, 당신의 미천한 종이 되고자 자청하는데 어찌 그리 분노하시는지 저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겸양에 가득 찬 발언이다. 그러나 그곳의 한 인간과 한 신은 이 말이 고도의 기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안다.

 

신은 인간에게 카간이 되라고 명했다. 유목 제국의 최고 지도자를 가리키는 칭호를 얻으라 했다. 인간은 터무니없어 했다. 그 일의 험난함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유목 제국이 깃발을 날린 것이 몇백 년 전의 일이다. 이제 유목민은 그만큼 강대하지 않다. 그들의 초원이 속한 나라는 대통령제이다. 이 21세기에서 군주제라니.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소리인가? 인간은 그 신의 명을 절대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과거의 강대국을 기억하는 신에게 설득은 먹히지 않았다. 반박은 절대적인 힘으로 눌렸다. 그저 못한다고 하자 신은 계약자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래서 아루잔은 선수를 쳤다. 계약자로서의 책임이라?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신에게 완전히 바치는 일보다 더 신실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텡그리는 아루잔이 그러한다고 감동을 받거나 기뻐할 이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신을 따르는 종이 아니라 신화의 시대를 재현할 지도자였다.

 

[이런 얕은 수로 내 명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느냐?]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하냐고? 가능성을 따져서 고른 선택지가 아니다. 아루잔은 해낼 것이다.

 

[애초에, 이런 마음으로, 그리 가벼운 수단으로 나를 모시겠다고 말하느냐!]

 

갑자기 커다란 압력이 느껴졌다. 하늘에서 거대한 손가락이 아루잔을 꾹 누르는 감각이었다. 아루잔은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고, 팔로 바닥을 짚고 버텼다. 무거웠다. 공기가 무거웠고 압력이 무거웠다.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턱을 따라 흐르다가 뚝 떨어졌고, 아루잔은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손대고 말 것도 아닙니다. 저는.....”

 

세상이 한번 뒤섞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루잔은 모른다. 그저 자신이 어느샌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는 것만을 알아차렸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루잔은 제 몸을 감싸 쥐고 웅크렸다.

 

[어디 감당해 보거라!]

 

신의 진노 어린 외침은 메아리쳤다. 마치 실체를 가지고 요동치듯 울려서 귀가 아팠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루잔은 머리를 잡고 그것이 되풀이 되는 엉겁의 시간을 견뎠다. 결국 모든 것에 끝은 찾아오고 메아리도 잠잠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아루잔은 비틀거리며 몸을 세웠다. 뭔가 이상했다. 신이 고작 이 정도로 끝낼 리 없다. 자신이 끈질기듯 텡그리 또한 집요하다. 이 정도로 물러나실 리가 없다.

 

아루잔이 완전히 일어나려는 순간 머리가 빙글 돌았다. 아루잔은 다시 엎어졌다. 세상이 추웠고, 동시에 더웠다. 시야가 흐려졌다. 손등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지독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루잔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단순한 앓이가 아니다. 신벌이다. 텡그리나 자신 둘 중 하나가 포기할 때까지 꺾이지 않는 무병이다. 약으로 몰아낼 수 없으며 자신이 모시는 신이 주었으니 굿으로도 몰아낼 수 없다.

 

샤먼이 되는 건 쉬운 길이 아니다, 젊은 계약자야. 그 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노인은 다른 의미로 이야기 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과 꽤 잘 들어맞았다. 아루잔은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 텡그리는 자신을 살렸다. 기이한 호의를 보였다. 지금, 아루잔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계약을 해지하거나 곧장 죽일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어쨌거나, 신은 아루잔이 필요한 모양이다. 대체하기보다는 공을 들여 의지를 꺾어내기를 택한다.

 

아루잔은 간신히 깔개를 깔아둔 곳까지 기어갔고 그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좋다. 누가 이길지 한번 해보자. 저번에는 자신이 졌지만, 결코 영원히 지지는 않을테다.

 

 

 


5

16살 언저리의 아루잔은 대로를 따라 걸어 내려왔다. 길의 교차로는 모두 수직이고, 네모난 블록으로 나눠지는 이 미국의 계획도시는 보기에는 깔끔했지만, 차들은 수없이 많은 신호에 걸려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러시아워에 이르면 아주 끔찍한 교통체증이 일어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루잔은 그들과는 상관없이 인도를 걸었고, 카페 앞에 멈추어 섰다. 카페의 이름은 ‘moment’. 아루잔은 카페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고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창 쪽에 자리를 잡고 옆자리에 가방을 놓은 아루잔은 다가온 직원에게 레몬에이드 한 잔을 주문했다. 이곳에서는 콜라나 사이다도 팔았지만 그것들은 학교 인근의 자판기에서도 뽑아먹을 수 있다. 직원이 다시 음료를 내오는 동안 아루잔은 턱을 괴고 탁자를 톡톡 치며 기다렸다. 턱을 세 번쯤 고쳐 괴었을 즈음에 주문한 레몬에이드가 나왔다. 레몬에이드는 약간의 노란색을 제외하면 무색에 가까웠다. 아루잔은 빨대로 레몬에이드를 휘저었다. 이곳의 레몬에이드는 생강을 넣거나 다른 과일의 시럽을 넣지 않는다. 맛이 다소 심심해서 약간 아쉬웠다.

 

조금 더 기다리자, 문에 달린 종이 딸랑하며 울렸고 알록달록한 천 가방을 든 청소년이 들어왔다. 그는 카페 안을 들러보다가 아루잔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곧장 다가왔다.

 

“안녕, 아루잔? 먼저 왔네? 오래 기다렸어?”

“난 금방 왔어. 너는 뭐 마실래?”

“나는 마실 것도 마실 것이지만 뭘 좀 먹을래! 아침을 걸러서 너무 배고프다.”

“그래, 여기 먹을 것도 팔더라.”

 

직원이 다가오자 그는 한참을 고민하고 고르다가 참치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아루잔은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찬찬히 기다렸다. 직원이 가자 그는 아루잔을 보고 미소 지으며 손가락 여섯 개를 접었다. 아루잔은 유의깊게 보다가 약간의 탄성과 함께 말했다.

 

“여섯 개나 팔린 거야?”

“멋지지? 덕분에 저번에 매대 한쪽이 비었어. 아루잔 너 빨리 더 만들어야 해.”

 

그가 재촉했고 아루잔은 느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수제 제작이라서 하나 만드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는 것 알잖아? 그래도 노력해보기는 할게. 그동안은 네 물건으로 채워.”

“그렇지만 네가 만든 것이 흔하지 않아서 사람들 시선 끌기가 좋다고.”

 

그는 투덜거리며 장부를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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